Ⅰ.
『論語』, <爲政>편에서 공자는 자신이 아꼈던 제자 자로子路에게 <아는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子曰. 由,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由야! 내 너에게 아는 것을 가르쳐 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 아는 것이다."[공자, 성백효 역, 『論語』, 전통문화연구회, 1990/2004, 43쪽.]
한편 이수태는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유[자로]야, 너에게 아는 것을 가르쳐 주랴? 아는 것을 아는 것으로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공자, 이수태 역, 『새번역 論語』, 생각의 나무, 1999, 48쪽.]
주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由는 孔子弟子니 姓衆이요. 字子路라. 子路好勇하니 蓋有强其所不知以爲知者라. 故로 夫子告之曰 我敎女以知之之道乎인저. 但所知者則以爲知요. 所不知者則以爲不知니 如此則雖或不能盡知라도 而無自欺之蔽요 亦不害其爲知矣라. 況由此而求之면 又有可知之理乎아.
"由는 孔子의 제자弟子니 姓은 衆이고, 字는 子路이다. 자로는 용맹을 좋아했기에, 아마도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을 [자기] 맘대로 우겨서 안다고 여기는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신 것이다. "내가 너에게 아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 다만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라." 이와 같이 하면 비록 다 알지는 못하더라도 스스로 속이는 가리움이 없을 것이요. 또한 그 앎에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알기를 구하면 또한 알 수 있는 이치가 있을 것이다."[공자, 성백효 역, 『論語』, 전통문화연구회, 1990/2004, 43~4쪽. 번역은 다소 수정.]
Ⅱ.
익히 잘 알려진 바대로 공자는 '맞춤식 교육법의 대가'다. 그런 공자가 이 텍스트에서 자신이 특히 아꼈던 제자 자로에게 <아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이수태는 공자가 자로에 대해서 다른 제자들에 대한 호칭과 달리 '也'를 붙이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자로의 나이가 다른 제자들보다 많은 것, 孔門 내에서 그의 위상이 남달리 높았음을 의식했다고 강조한다. 이수태, 같은 책, 48쪽.] 그런데 그 본질을 가르치는 것을 관념적 차원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차원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러므로 <아는 것>의 본질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해 배우고 깨닫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한정된다. 첫째, <아는 것>의 본질적 내용을 가르치는 자가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둘째, 그 가르침을 제자에게 건네는 것. 셋째, 제자가 가르침을 받고 깨달음을 얻어 <아는 것>의 본질에 이르는 것.
그렇다면 이 텍스트에서 제시되고 있는 <아는 것>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특정 대상/사물에 대한 자신의 앎의 역량이 미치는 영역/한계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인식의 역량에 따라서 내가 아는 것에 대해서는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 아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한다면 특정 대상/사물에 대한 자신의 앎의 역량이 미치는 영역/한계를 진정성 있게 드러내라는 것이다. 이건 앎에 대해서 자신이 발딛고 서 있는 위치가 합당한 것인지에 대한 자기성찰적 물음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자신이 서 있는 특정한 앎에 대한 영역이 오백 미터에 머무르는 사람이 천 미터의 앎에 대해서 "나는 그것에 대해서 안다고" 말하지 않고, 그것을 정직하게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그는 또다른 앎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깨달음을 선물해줄 스승들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
Ⅲ.
공자의 위 텍스트를 다음과 같이 변용해보자.
治之爲治之 不治爲不治 是治也.
"다스릴 수 있는 것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하고, 다스릴 수 없는 것을 다스릴 수 없다고 하는 것, 이것이 다스리는 것이다."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교육과 관련된 공자의 위 텍스트를 다스림과 다스림을 받음이라는 통치 또는 정치의 텍스트로 변용했다. 이 변용의 과정에서 가르치는 공자의 형상은 사라진다. 다만 무인격적인 어떤 가르침만이 남았다. 하지만 작동방식은 비슷하다. 이 변용된 텍스트는 정치가의 본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묻고 있다. 그것은 "다스릴 수 있는 것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하고, 다스릴 수 없는 것을 다스릴 수 없다고 하는 것, 이것이 다스리는 것이다." 이 말인 즉슨 자신의 통치 또는 정치 행위 역량이 미치는 영역/한계를 진정성 있게 드러내라는 것이다. 자신이 발딛고 서 있는 정치적 위치/자리가 합당한 것인지, 즉 자신이 지닌 통치 또는 정치 행위 역량에 그 자리가 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자기성찰적 물음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시위원 정도 할 정치적 역량을 지닌 A라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자신의 통치 또는 정치 행위 역량이 시위원에 머무름에도 불구하고 몇 십년의 세월 동안 운 좋게도 구청장, 시장, 국회의원 초선, 재선까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거짓 선전, 이미지 정치, 그리고 더 나아가 공작 정치의 스펙터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제 그는 대통령의 자리까지 꿈꾼다. 그는 이제 "'자신이 다스릴 수 있는 영역 밖의 것', 즉 '다스릴 수 없는 것'을 다스릴 수 있다."고 말한다. 거기엔 자신이 발딛고 서 있는 정치적 위치/자리에 대한 자기성찰도 없다. 뿐만 아니라 합리적 비판자들의 비판도 수용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런 자들은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라는 유교의 통치 원리에서 수신修身도 제대로 되지 않는 자들이다. 자신의 몸에 대한 성찰도 되지 않는 자들이 어떻게 한 가정, 한 국가, 더 나아가 전 세계를 통치할 수 있겠는가? 수신도 이미 하나의 정치 또는 통치 행위다. 제가도 마찬가지다. 정치 또는 통치 행위에 위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평평하고 내재적인 수준에서 펼쳐지는 일원적인 원리에 기반한다. 그런 자들은 치국에 대한 정치적 욕망으로 가득차 있어 자신이 발딛고 서 있는 정치적 위치/자리에 대한 성찰을 전혀 하지 않는다. "나는 과연 한 국가를 운영할 깜냥이 되는가?" 이에 대한 답은 자기성찰과 더불어 타자들의 비판을 통해 구성된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발딛고 서 있는 정치 또는 통치의 영역에서 자신의 역량을 넘어서는 통치 또는 정치 영역에 대해 탐하는 정치가들은 언젠가는 탈이 나게 되어 있다. 그 탈을 없애는 것은 현재의 자리에 만족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물러나는 것이다. 즉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타자들의 비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정치 역량 너머의 것을 탐하는 자들의 눈은 이미 멀어있기 때문이다. 그 눈먼 봉사의 주위에 수없이 많은 이리떼가 달려든다. 이리떼는 봉사를 흡혈귀로 만든다. 흡혈귀는 선한 어린양들의 피뿐만 아니라 피가 모자르는 순간이 되면 끝내 자신의 피까지 빨아먹을 것이다.
이 얼마나 쓸모없는 정치적 존재인가?
자신이 흡혈귀가 되고자 하지 않는다면 선한 어린양들의 정치적 목소리를 들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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