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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글쓰기들/글쓰기들 잉여

거리를 가늠하기란 무엇인가?

 1.

『論語』의 <述而>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子曰 三人行에 必有我師焉이니 擇其善者而從之요 其不善者而改之니라." 본문을 해석하면 이렇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세 사람이 길을 감에(가는데, 갈 적에,갈 때에, 간다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으니, 그중에 선한 것을 가려(택해) 좇고, 선하지 않은 것을 고칠지니라."(혹은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세 사람이 길을 간다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으니, 그중에 선한 것이 있다면 가려(택해) 좇고, 선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고칠지니라."

이에 대해 주자는 이렇게 주석하고 있다. "三人同行에 其一은 我也니 彼二人者一善一惡이어든 則我從其善而改其惡焉이면 是二人者皆我師也라." 주자의 주를 해석하면 이렇다.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간다면, 그 중 하나는 나이니 다른 두 사람 중 하나는 선하고, 다른 하나는 악하다면, 즉 나는 그 (선한 사람의) 선함을 좇을 것이고, 그 (악한 사람의) 악함을 고칠 것이니, 이것은(이로써) 두 사람은(두 사람 모두는, 이 두 사람이) 모두 나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볼 때 이 구절의 핵심은 바로 <거리>에 있다. 세 사람이 길을 걸어간다. 그중 한 사람은 다른 두 사람과의 관계를 형성한다. 여기서 한 사람이 다른 두 사람과 관계를 형성함에 있어 중요한 것이 바로 <거리>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물리적인 척도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인식의 척도일 수도 있다. 즉 <인식의 거리>의 거리가 이 구절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세 사람이 거리를 함께 감에 있어 <인식의 거리를 가늠함>이 중요하다. 이것은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있어 <거리를 가늠함>이 중요한 것의 다른 이름이다.

공자의 말씀은 중심을 <나>로 설정하고 있지만 우리가 거기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나는 단지 이 세 사람 중의 하나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관계 속에서 <나>가 형성된다는 사실에 있다. 두 사람이 각각 선함과 악함을 가졌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둘 사이에 내가 있다는 것이고, 그를 통해서 그들의 선함을 좇고, 그들의 악함을 고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두 나의 스승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선하고, 악해서가 아니다. 차라리 그들은 나와의 관계 맺음에 존재해 있기 때문에, 그를 통해서 그들의 선을 좇고, 악함을 고쳐줄 수 있기 때문에 스승인 것이다. 그래서 <거리>에 있어서의 더/덜은 좋음/나쁨의 관계로 환원되지 않는다. 심지어 선/악의 문제까지도 말이다.

문제는 서로의 <거리>에서 어떻게 힘들의 영향관계를 통해서 그것들이 서로가 서로의 관계를 다르게 배치시키는가 하는 것에 있다.

2.

우리들은 다른 사람과 사이에 있음을 통해서 <거리>를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중심이 되어 다른 사람과의 <거리>를 가늠한다. 그건 <나>가 척도가 되어 다른 사람을 가늠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우월의식, 열등감, 원한감정, 양심의 가책, 지식, 권력 등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가늠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때문에 나보다 우월한 존재가 있으면 비난하고, 나보다 열등한 존재가 있으면 깔아뭉갠다. 자기중심의 사고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럴 경우는 위의 구절에서 제시된 긍정적인 결과를 볼 수는 없다.

<나>가 척도가 되어 세상의 모든 것들을 가늠하고, 재단하고, 평가하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관계 속에서 <나>와 타자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는 것이다. 그게 타자에 대한 환대까지 나아가면 더 좋겠지만 말이다. 나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나>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중심에 놓고 다른 사람 사이의 관계를 형성한 것은 아닌지 반문하고 성찰해본다. 그건 내가 가진 원한감정, 우월의식, 열등감, 비난, 양심의 가책, 지식, 권력 등을 드러내기 위한 비열한 전략은 아니었는지를 다시 한 번 반문해본다.

그렇기에 <비판>은 나 자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해본다. 언제나 <나> 중심의 비판은 아무리 철저해도 부족한 것이기에 말이다. 그래서 무릇 비판은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 속에서 다시 그 위치가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