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
정지아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빨치산이었던, 즉 자기 삶의 단 4년 동안에만 빨치산의 실천활동을 했던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소설에서 저자는 이미 우리에겐 낡은 역사의 유물 또는 이미 죽어 생명력을 읽은 낡은 개념들의 집합체로 치부되는 '사회주의'[나는 더 급진적으로 공산주의라고 말하고 싶지만], '유물론', '빨치산'[파르티잔]과 같은 것들을 부활시킨다.
그런데 그 부활은 한 유령적 실존의 형태를 띄고 있는데, 그것은 촘촘한 듯하면서도 성기며, 질펀하면서도 담백한 그물망[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그물망에 <해방>이라는 어쩌면 (탈)존재론적 존재가 걸려든다.
그렇다, 이 모든 게 다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 때문이다. 그 사건은 한편에서는 매우 진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잔뜩 부풀어오른 풍선에서 공기가 빠져나가듯,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실없지만은 않은 가벼움으로 충만하다. 또한 그 사건은 눈물나면서도 웃음을 자아내고,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눈물짓게 한다.
왜? 그 사건은 한편에서 개인의 사회/역사적 삶/생명의 마디들에 새겨진 마디들에 새겨진 무의식의 단편들을 해체, 선별, 재조립, 그리고 회귀하게 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 그 모든 것들이 의식 안에 머무르지 못하도록 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죽었는데,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같은 책, 7쪽)
민중에겐 각자의 오죽함이 있다
그렇게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사건의 처음은,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하고도 [묘한] 인연 둘과 함께 끝을 맺는다. "아버지 유골을 손에 쥔 채 나는 울었다. 어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한 인연 둘이 말없이 내 곁을 지켰다.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나를 감쌌다. 오랜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265쪽).
우리는 그 사건을 간접적으로 목도하면서 처음과 끝 또는 입구와 출구라고 명명하고 싶은 욕망에 포획되어 있지만, 사실 그게 쉬운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소박한] 일상의/삶의 사회주의를 실천하는 아버지의 삶/생명에 그만의 오죽함이, 그와 잇대어 있는 딸과 어머니는 그들만의 삶/생명에 오죽함이,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관계[들]의 잉여에 그러모여든 수많은 반내골 사람들의 삶/생명엔 그들만의 삶/생명의 오죽함이 있다.
그렇다, 민중의 삶/생명엔 그들만의 오죽함이 있는 것이다. 거기엔 시간이 자연스레 흘러가고, 공간이 살아숨쉰다. 거기엔 그 어느 것도 막힌 것도 인위적인 것도 없다.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뿐.
그렇기에 아버지의 <해방>이 딸의 <해방>이 될 수 있을 잠재성, 그리고 우리의 <해방>이 될 수 있을 잠재성은 우리, 민중 각자의 그 오죽함의 정서를 감각하고 식별하는 역량 안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먼저 빨치산이자 일상의/삶의 사회주의를 실천하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아버지와 잇대어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 각자의 오죽함으로써 감각하고 식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저 때론 키득거리며, 때론 목놓아 울면서 들을 뿐이다.
그리고 그 끝엔 우리의 오죽함에 대한 풀어헤침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오죽함은 그 오죽함이 민중의 현실적 삶안에서 현행화될 때 진정한 유물론적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유물론의 그 모든 거창함, 추상성, 그리고 활기없음의 가면을 벗겨버린다. 그것은 산뜻하면서도 슬픈, 하지만 기꺼이 민중의 활력 그 자체를 잃지 않은 아버지의 유물론의 흔적들 그 자체다. 우리는 아버지의 그 유물론을 <소박함/소박한 유물론>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소박한 유물론, 그 끊어짐과 이어짐
중요한 것은 그 <소박함/소박한 유물론>은 아버지 혼자의 발명품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씌어지는 것, 그리고 그 해방일지가 만들어낸 <소박함/소박한 유물론>은 아버지의 삶/생명 전체 역사의 마디들, 흔적들에 아로새겨진 그 어떤 단독적이면서도 집단적인 사건 그 자체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딸, 어머니, 그리고 반내골 사람들이 함께 씌는 해방일지엔 좌우가 없다. 그리고 그렇게 씌어진 해방일지[들] 덕에 구축되는 유물론에는 그 어떤 경계도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해방일지와 유물론이 구축되는 과정에서 어떤 인연因緣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는가?"를 묻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실이 만들어지고, 끊어지고, 이어지는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히 변화하고 생성하는 과정 그 자체가 만들어내는 사건들의 마디에서 해방일지들과 유물론이 구축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해방일지가 씌어지는 것과 유물론이 구축되는 과정에서 민중의 의지, 욕망을 억지로 막거나 포획하는 또다른 부정적 힘의 존재를 식별하는 것이다. 그 부정적 힘은 민중의 해방일지와 유물론이 씌어지는 것과 구축되는 것을 억지로 막았기 때문이다.
반내골 사람들은 자신만의 해방일지를 쓰고, 자신만의 유물론을 구축한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자신들만의 오죽함의 관점으로써 감각하고 식별해낸다.
소박한 유물론, 나라는 존재의 바깥엔 누가 존재하고 있는가
소설 속에서 가장 눈에 띈 인물들 셋이 있다. 한 명은 베트남 어머니를 둔 고등학교를 중퇴한 노랑머리 소녀이고, 다른 한 명은 윤학수, 그리고 다른 한명은 자신의 형과 함께 빨치산이 되었지만 혼자 살아돌아온 아버지를 평생 원망하면서 살아온 월남 상이용사.
빨치산이자 소박한 사회주의 유물론자인 아버지와 이들 간의 만남은 철저히 우발적이었다. 하지만 그 우발이 만들어낸 그들 간의 관계는 그 어떤 장애와 허물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이 애정이든 증오든 간에...
그리고 그 소박함은 나의 내밀함에 머물지 않고 바깥에 존재하는 누군가에게로 충분히 열려 있다. 우발이 사건이 되고, 사건이 사건으로서 규정될 수 있는 것은 <바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바깥은 나를 더이상 나로 머물게 하지 않고, 너를 더이상 너로 머물게 하지 않는다. 바깥 덕분에 그 점이 지대에서 그 어떤 비익명적 존재로 되어가게 만든다.
일상의 사회주의자가 손주뻘 여고딩과 함께 맞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실 수 있었고, 윤학수와 자신의 딸보다 더 친자식 같으면서도 혈연의 관계를 뛰어넘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아버지의 그 소박함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소박함이, 그 소박함의 유물론은 모든 장애물을 벗겨낸다. 딸의 고백처럼 아버지는 가부장제를 극복하고자 했고, 소시민성을 극복하고자 했고, 세대간 차이를 극복하고자 했고, 그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차별을 극복하고자 했다.
여기, 바깥으로 질주하는 아버지, 천 개의 얼굴을 한 아버지,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단지 <빨치산>이라는 '빨간딱지' 안에 머무를 수 없는 그 비익명적 존재로서의 아버지가 있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삶/생명의 역사[들]에 아로새겨진 마디들이 써내려가는 해방일지는 하나의 단면일 수만은 없다. 다 각자의 사정이 있기에.
그렇기에 아버지는 정지아 작가의 말처럼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를 18번처럼 되뇌었고, 노랑머리의 베트남 어머니는 “누구한테나 어쩔 수 없는 사정이란 게 있는 거야. 아빠 너무 미워하지 마.”라고했으며, 그에 노랑머리 고딩 딸은 “할배[고인이 된 주인공의 빨치산 아머지]나 엄마나 입만 열면 그놈의 사정! 에에에!”라고 푸념했다.
바깥은 직선이 아니다. 그것은 필경 순환의 고리를 만들어낸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아버지 혼자만의 것이 아니듯, 반내골 사람들의 해방일지는 아버지의 삶/생명을 위해 씌어지는 것이자, 곧 자기자신의 삶/생명을 위해 씌어지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그렇기에, 우리 반내골 사람들은 민중으로서 자신들만의 해방일지와 자신들만의 유물론을 구축한다. 거기엔 그 어떤 이념적 편견과 아집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살과 살, 뼈와 뼈가 부딪히면서 만들어내는 삐그덕거림만이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그것마져도 살갑고도 애닯은 민중의 삶 그 자체가 아닐까?
가령 읽고 있노라면 단장의 아픔이 느껴지는 월남 상이용사의 해방일지를 읽어보자.
“아직 사회주의를 모를 때의 아버지, 열댓의 아버지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질곡의 인생을 알지 못한 채 해맑게 웃고 있었다. 사진 속 소년 둘은 입산해 빨치산이 되었고, 그중 한 사람은 산에서 목숨을 읽었다. 형들을 쫓아다니던 동생은 형을 잃고 남의 나라에서 제 다리도 잃었다. 사진과 오늘 사이에 놓인 시간이 무겁게 압축되어 가슴을 짓눌렀다.”(195쪽)
“자네 줄라고. 인자 우리 성 얼굴도 잊어불라고. · · ·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한번만 와도 되는데. 한번으로는 끝내지지 않는 마음이겠지.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 술이 불콰한 상태로도 지팡이를 다리처럼 자유롭게 쓰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미련 없이 잘 가라는 듯 오늘도 날은 화창했고, 도로변에는 핏빛 연산홍이 불타오르고 있었고, 허벅지 아래로 끊어진 그의 다리에서 새살이 돋아 쑥쑥 자라더니 어느 순간 그는 사진 속 그의 형보다 어린 소년이 되어 달음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196~7쪽)”
빨치산의 딸의 해방일지, 결국 무엇이 민중의 삶의 끈을 끊어지게 만드는가
앞서 말했듯이 이 소설은 아버지의 해방일지이자, 평생을 빨치산의 딸이라는 사회와 역사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딸] 나의 해방일지이기도 하다.
소설 속에서 딸인 나의 아버지의 삶에 대한 관점은 3일 동안의 장례에 모여든 수많은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씌어지는 것이 가능하도록 돕는 사람들에 감각에 의해서 다른 방향으로 변화하게 되고, 종국엔 자신만의 해방일지가 씌어지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종국에 그것은 아버지-나 사이 중간에서 씌어지는 해방일지이다. 아버지 자신의 해방일지는 어찌보면 삶 자체가 고통이었을 것이기에 죽음으로써 해방을 맞이하면서 씌어진다. “… 세상사의 고통이 근육의 긴장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죽음이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아버지는 보통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 해방의 기쁨 또한 그만큼 크지 않을까, 다시는 눈 뜰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198쪽)
한때 자신의 전부이자, 우주였던 아버지가 감옥에 가 있던 6년 동안의 세월은 딸인 자신으로부터 아버지를 누군가가 빼앗아가버린 세월 그 자체였다. 그 사이 딸은 5살 어린이가 사춘기 소녀가 되었다. 변한 것은 시간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딸인 나 사이의 관계였다. 아버지-딸 사이에 형성된 우주는 균열하였고 파편화 되었다.
“아버지에게 있는 것이 나에게는 없다! 네 살 때의 아버지는 나에게 나와 같은 존재였다. 일심동체. 아버지의 알몸을 봄 섬진강에서 나는 이미 아버지와 분리되었다. 그러니까 내게서 아버지를 빼앗아간 것은 이데올로기나 국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다. 아버지와 다름을 깨닫고 아버지를 닮고자 서서 오줌을 눌 만큼 아버지는 나의 전부였다. 그 아버지를 이데올로기가, 국가가 빼앗아간 것이다.”(200~1쪽)
“어느 쪽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차가운 철제 침대에 누워 수의에 싸이고 있는 저 시신과 내가 적어도 한때는 한 몸이나 같았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나의 우주였다. 그런 존재를, 저 육신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하게 시간과 공간의 한 지점을 점령하고 있는 저 육신이 내일이면 몇 줌의 먼지로 화할 것이다.”(201쪽)
아버지를 우주로서 인식한 딸의 존재론적 시공간을 빨치산의 딸이라는 존재론적 시공간으로 재배치한 것은 이데올로기이자 국가였다.
“어떤 딸인지, 어떤 딸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누구의 딸인지가 중요했을 뿐이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는 데 나는 평생을 바쳤다. 아직도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말에는 ‘빨치산’이 부모라는 전제가 존재한다. 그 부모에게도 마땅히, 자식이 부모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듯 자신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보지도 못했을 만큼 빨치산의 딸이라는 굴레가 무거웠다고, 나는 변명이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변명을 들을 아버지는 이미 갔고 나에게는 변명의 기회조차 사라졌다. 그 사실이 뼈아파 나는 처음으로 소리 내 울었다. 아버지를 위한 울음이 아니라 나를 위한 울음이었다. 아버지 가는 길까지 나는 고작 그 정도의 딸인 것이다. 그런 나를, 생판 남인 주제에 친자식보다 더 자식 같았던 학수가 아버지처럼 무심한 눈으로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224~5쪽)
아버지를 빨치산으로 낙인 찍고, 그의 딸을 빨치산의 딸이라고 낙인 찍음으로써, 아버지의 삶과 우주, 그리고 그의 딸의 삶과 우주사이에 형성된 끈은 끊어진다.
우주-자연-나-사회-국가 사이에 이어진 끈은 한번 그렇게 끊어짐으로 인해서 사회적 삶 그 자체에 새겨진 모든 것들 사이의 관계를 틀어지게 만들어버린다. 너무나 무섭지 않은가? 권력의 잔인무도함이? 고작 4년동안의 빨치산의 삶이 그 이전의 삶과 그 이후의 삶을 완전히 하나의 동일성의 괴물이 만들어낸 총체성의 그늘 안에서 포획된다는 사실이.
“아버지는 백운산에 가장 오래 있긴 했지만 이산 저산 떠돌며 48년 겨울부터 52년 봄까지 빨치산으로 살았다. 아버지의 평생을 지배했지만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던건 고작 사년뿐이었다. 고작 사년이 아버지의 평생을 옭조니 건 아버지의 신념이 대단해서라기보다 남한이 사회주의를 금기하고 한번 사회주의자였던 사람은 다시는 세상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막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작 사년의 세월에 박제된 채 살았던 것. 아버지는 더 오랜 세월을 구례에서 구례 사람으로, 구례사람의 이웃으로 살았다. … 아버지의 뿌리는 산이 아니다. 아버지의 신념은 그 뿌리에서 뻗어나간 기둥이었을 뿐. 기둥이 잘려도 나무는 산다. 다른 가지가 뻗어 나와 새순이 돋고 새 기둥이 된다.”(253쪽)
우리는 때로 우발이 만들어내는 절대적 힘에 휘말려들어갈 때가 있다. 아버지가 철도원이 되어 노조에 가입하고 사회주의자가 도어 빨치산으로서 백운산에 들어가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으리라. 아버지는 평등한 세상 만들기 위해 사회주의자가 되고자 했고,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그 어떤 것이든 자신을 맹신한 나머지 최악의 선택지로써 절대적 폭력을 민중에게 가한다. 좌파가 우파에게 가한 폭력, 우파가 좌파에게 가한 폭력은 평등한 지렛대 위에서 그렇게 평가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 역사를 힘겹게 살아간 민중의 우발의 삶은 그것이 절대 그렇지 않았음을 자신들의 몸과 영혼으로써 증명했다. 남는 것은 국가와 이데올로기의 폭력이라는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힘겨워하는 민중의 찢겨나간 삶 그 자체뿐이다.
그렇기에 빨치산의 딸은 훈장이 아니라 낙인이며 그의 삶은 곧 낙인자, 즉 노예의 삶이다. 중세 노예에게 낙인의 삶은 몸의 구속과 피 지배의 삶 그 자체였다면, 현대의 노예에게 그것은 사회적 삶 그 자체의 모든 흔적을 그 근원에서부터 부정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무치게, 라는 표현은 내게는 과하다. 감옥에 갇힌 아버지야말로 긴긴밤마다 그런 시간들이 사무치게 그리웠으리라. 그 당연한 사실을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야 겨우 깨닫는 못난 딸인 것이다. 아빠, 나는 들을리 없는, 유물론자답게 마음 한줌 남기지 않고 사라져, 그저 빛의 장난에 불과한 영정을 향해 소리 내 불렀다. 그런데 이상도하지. 영정 속 아버지가, 이틀 내 봤던, 아까도 봤던 영정 속 아버지가 전과 달리 그립던 어떤 날들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231쪽)
한때 자신의 우주이자 전부이며 한몸이었던 아버지를 잃어버린 딸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인간 유한성의 의미를 재확인하는 사건이 자신 앞에 도래해서야, 그것도 그 시간들의 끝의 끝에서야 다시 되찾을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죽음이라는 사건 자체가 끝이 아니라 또다른 시이라는 것이다.
먼지의 유물론, 아버지 그 자체에 대한 해방일지는 어떻게 우리의 해방일지가 될 수 있을까?
아버지에게 또 그런만큼 어머니에게 사회주의는 무엇이었으며, 유물론은 무엇이었을까?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사회주의의 기본은 유물론이었다. 특히 아버지에겐 <먼지>가 중요했다. 그게 사물의 궁극 원인으로서의 시원이자, 그것의 현실 삶에서의 물화된 존재자 그 자체일테니 말이다.
"사회주의의 기본은 뭐여?" 속도 없는 어머니, 아는 것 나왔다고 냉큼 알은 척을 하 고 나섰다. "그야 유물론이제라." "글제! 글먼, 머리는 다 뭣혀! 생각혀봐. 사람은 하나 님이 여개 사람이 있어라, 고런 시답잖은 말 한마디 했다고 하늘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먼지로부터 시작됐다 이 말이여. 긍게 자네가 시방 쓸고 담고 악다구니를 허는 것이 다 우리 인간의 시원 아니겄어? 사회주의자는 일상에서부텀 유물론자로 살아야 하는 법이여." 시원())이라니. 국줄 아버지 입에서 방언처럼 터져 나온 고급 어휘에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먼지에서 유 물론으로의 비약은 좀 심했다 싶었는지 어머니도 이번에 는 그냥 국으로 엎드려 있지는 않았다."(15~6쪽)
그렇다면, 어머니는?
"사회주의자 자답지 않게 어머니는 낯선 사람, 낯선 것에 대해 경제가 심하다. 어머니에게는 익숙한 것 오래된 것이 좋은 것이 다. 그중 가장 익숙하고 좋은 것이 사회주의이고 동지들일 뿐이다. 어머니는 몇시간 전 세상 떠난 아버지가 북한을 비판하면 파르르 날을 세우던, 누가 보면 천생 사회주의자였다. 그런데 기실 어머니의 사회주의란 첫사랑, 좀 더 풀어쓰자면 여자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세상, 가난한 자도 인간 대접받는 세상에 불과했다. 신자유주의 대한민국도 그 정도는 해준다. 그러니까 어머니에게 사회주의란 그저 지나간 첫 남자가, 지나갔음으로 가장 그리운, 뭐 그 런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21쪽)
시원에 뿌리를 두든, 현실적 삶에 녹아내리든 우리 민중에겐 아버지의 먼지의 존재론과 어머니의 차별, 배제 없이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대접받는 세상-존재론이 중요하다.
아버지의 먼지의 존재론과 어머니의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대접받는 세상-존재론에는 인간과 비인간을 각자 홀로 내버려두지 않고 이어주는 끈이기 때문이다.
민중이 자신의 힘대로 일어설 수 있고, 무언가를 의지할 수 있고, 작은 걸음이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아버지의 먼지의 존재론과 어머니의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대접받는 세상-존재론 덕분이다.
그리고 그것을 초월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민중을 자연, 공동체, 사회, 국가로부터 끊어내는 폭력적 힘일테니까 말이다. 거기서 민중의 <공동적인 것The Common>에 대한 의지는 좌절된다.
뿐만 아니라 거기서부터 국가와 이데올기의 민중에 대한 절대적 폭력은 시작되고, 그 어떤 종류의 낙인 붙이기 장치는 작동한다. 민중은 아버지처 그런 권력의 압제와 폭력을 잘 참지 못한다. 물론 아버지처럼 자신 앞에 닥친 모순 앞에 좌절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고통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잘 참는 사람은 싸우지 않고 그저 견딘다.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들고일어나 누군 가는 쌈꾼이 되고 누군가는 혁명가가 된다. 아버지는 잘 못 참는 사람이다.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가 득세하는 것도 참지 못했고,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하라는 봉건잔재도 참지 못했으며, 가진 자들의 횡포도 참지 못 했다. 물론 두시간의 노동도 참지 못했다. 그런데 얼어 죽 을 것 같은 고통은, 굶어 죽을 뻔한 고통은, 생사의 고비를 함께 넘은 동료들이 바로 곁에서 죽어가는 고통은 어떻게 견뎠을까? 신념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내려와봤자 기 다리고 있는 건 죽음뿐이라는 지극히 절망적인 현실 인식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68쪽)
자신 앞에 닥친 모순 앞에의 좌절은 아버지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 가령 아버지의 동생인 작은 아버지와 상이용사가 겪여야만 했던 질곡들까지를 포함한다. 하지만 그 질곳이 빚어진 책임의 모든 원인이 민중에게 돌려져야 옳은 것인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것을 순순히 인정해버렀기 때문에 우리는 식민지를 경험했고, 친일파가 득세하는 것도 보았고, 군부독재세력이 우리, 민중을 짓밟는 것을 두눈으로 보았다.
자, 이제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우리의 해방일지가 되었다. 아버지의 사회주의, 아버지의 해방, 아버지의 유물론은 소박한 것이었다. 민중의 일상적 삶 그 자체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버지가 사회주의, 해방, 유물론을 몰랐을리는 없다. 아버지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그것들을 실천적으로 구축해냈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렇게나 좁고 돌고 돌아 만난다. 학수는 아이 얼굴을 보고서도 자기가 도움을 준 할머니 핏줄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이 작은 세상에 만들어놓은 촘촘한 그물망이 실재하는 양 눈앞에 생상하게 살아났다.”(238~9쪽)
아버지는 민중이 민중의 삶을 서로 잇대어 있는 삶을 <공동적인 것The Common>으로 구축해내는 그런 삶을 살아내었다. 국가와 이념은 민중의 삶을 구획하고, 구별하여 총체적인 점으로써 만들어낸다.
하지만 반내골 사람들처럼 민중의 삶은 서로가 서로에게 잇대어 있는 삶을 <공동적인 것The Common>으로 구축해내고자 하는 삶 그 자체다.
그런 삶을 구축하기 위해서 아버지는 기꺼이 먼지로 태어났기에 먼지로 되돌아가고자 한 것이다.
“아버지는 생각했겠지. 우리가 싸워야 할곳은 산이 아니라고. 사람들이 불빛 아래 옹기종기 모여 밥 먹고 공부하고 사랑하고 싸우기도 하는 저 세상이라고. 아버지라면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아는 아버지였다.”(255쪽)
그리고 그 먼지는 황톳물로써 형질변환 한다. “시상 더러븐 것을 깨끔허니 치우는 것이 황톳물이여 황톳물이 휩쓸고 지나가야 새 질이 열린당게.”(259쪽)
여기에, 소박하지만 위대한 아버지의 사회주의, 아버지의 해방, 아버지의 유물론의 참된 비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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