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ucault, Michel, La pensée du dehors(1966), Dits et éctis Ⅰ, 1954~1975, Paris, Gallimard, 2001, 546~67.
나는 거짓말한다, 나는 말한다JE MENS, JE PARLE
옛날에jadis, 단 하나의 확언affirmation이 그리스의 진실을 동요하게했다tremblé : <나는 거짓말한다.> <나는 말한다>는 모든 현대적 픽션을 시험에 빠뜨린다met à l'épreuve. [...]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라고 내가 말할 때quand 내가 말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진실이며, 물릴칠 수 없을 만큼/저항할 수 없을 만큼invinciblement 진실이다(Foucault, 546~7).
하지만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말한다>의 형태적 위치는, 그 자신의 특수한 문제를 제기하지soulève는 않지만, 그것의 의미는, 그 자신의 뚜렷한apparent 명확성clarté에도 불구하고malgré, 아마도peut-être 무한정한illimité 물음의 영역을 열어놓는다. 사실, <나는 말한다>는 자신에게 하나의 대상objet을 제공하여, 자신의 지주로 섬기는lui servirait de support 담론들에 호소한다référer. 그런데 이런 담론들은 결여défaut되어 있다 ; <나는 말한다>는 모든 다른 언어의 부재 속에서 주권souveraineté을 획득한다 ; 내가 말하는 담론들은 <나는 말한다>라고 내가 말하는 순간에 언표되는 꾸밈없음nudité에 앞서 존재하지préexiste 않는다 ; 그리고 그것은 내가 침묵하는 동안l'instant même 사라진다disparaît. 언어의 모든 가능성은 그것이 실행하는accomplit 타동성transitivité에 의해 말라붙는다desséchée. 사막이 [언어의 모든 가능성을] 둘러싸고 있다entoure. 어떤 극단적 섬세함finesse에 의해, 어떤 특이하고 미세한ténu 송곳pointe에 의해, <나는 말한다>의 헐벗은dépouillée 형태 속에서 다시 사로잡히고자 하는 하나의 언어가 모아질recueillirait 수 있는가? 주체 ― 말하는 <나>je ― 가 분할되고morceler, 분산되고, 흩어져égailler 이 헐벗은 공간으로 사라져버리는 동안에tandis, 정확히justement <나는 말한다>의 내용 없는sans contenu 얄팍함minceur을 현시하는manifeste 공백vide이 무한으로infini 발산되는répandre 언어에 의한 하나의 절대적 출구ouverture가 아니라면. [..] 요컨대, 그것은 더 이상 담론이나 의미의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가공되지 않은brut 언어의 펼쳐짐, 전개된/펼쳐진 순수 외부성extériorité이다 ; 그리고 발화 주체는 담론들의 책임자(그것을 발하며, 그것에 기대어 확언하고 판단하며, 이러한 실효를 위해 배치된 하나의 언어적 형태에 가끔parfois 나타나는)가 아니라, 언어의 무한정한 표출/유출épanchement이 끊임 없이sans trêve 추구하는poursuit 공백 속에서의 비실존/비존재이다.
우리는 그-자신elle-même을 스스로 가리키는se désigner 것을 허용하는 하나의 되풀이redoublement에 의해 현대 문학이 특징지어진다는 것을 확신하는 버릇habitude이 있다 ; 이 자기지시성autoréférencé을 통해, 현대 문학은 극단적으로 내면화하는 것과 동시에à la fois 그리고 자신의 먼lointaine 실존/존재의 반짝이는scintillant 기호signe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다. 사실En fait, 엄밀한 의미에서 <문학>에 의해 의미되는entendre 바를 탄생시키는 사건은 표면의 시선regard de surface에 의해서만 내부화/내면화intériorisation의 질서에 속해 있다 ; 오히려 <바깥>으로의 이행이 중요하다être beaucoup pour qn : [...] 문학은, 불타는brûlant 현시의 지점까지 자기의 스스로[의] 접근rapprochat하는 언어가 아니고, 그 자신의 가장 먼 곳까지 투신하는se mettant au plus loin[각주:1] 언어이다. <자기의 바깥>hors de soi에 배치되어en cette mise,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드러낸다dévoile고 할지라도, 이 돌연한 빛clarté soudaine은 주름repli보다는 차이écart를, 기호들의 자기-자신에게로 되돌아가는 것보다는 하나의 분산을 드러낸다. 문학의 <주체>는, 자신의 실증성positivité의 언어가 아니라, <나는 말한다>의 꾸밈없음nudité 속에서 언표될 때, 그 자신의 공간을 발견하는 공백이다.
이 중립적인 공간은 우리 시대nos jour 서구의 픽션을 특징짓는다. [...] 사유의 사유 [...] 말의 말La parole de parole은 문학에 의해, 하지만 어쩌면 또한 다른 길들chemins에 의해서도, 발화주체가 사라지는 바깥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확실히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서구적 성찰/반성이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언어의 존재에 대해 사유하는 것을 주저했을 것이다 : 마치 언어의/에 대한 헐벗은 경험이 <나는 존재한다>의 자명성évidence에 위험을 겪을 것을la danger que ferait courir 예감한pressenti 듯이 말이다(Foucault, 548).
바깥의 경험
주어가 배제된 언어를 향한vers 통로/돌파percée, 자신의 존재로서의 언어의 출현apparition과 자신의 정체성으로서의 자기 의식conscinece de soi 사이의 아마도 절망적인sans recours 하나의 양립불가능성incompatibilité의 드러남mise au jour, 이것은 오늘날 문화의 매우 상이한bien differents 점들에서 전조되는annonce 경험expérience이다. [...]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에게 비가시적으로 존재해온demeurée 하나의 개방상태béance를 발견한다 : 언어의 본질은 주어/주체의 종말disparition 속에서 그 자신을 위해 나타난다. 어떻게 이러한 기묘한étrange 관계에 접근할 수 있을까? 아마도 서구 문화가 그 자신의 여백들 속에서 모호한 가능성incertain possibilité을 소묘했던esquissé 사유의 한 형식에 의해서. 주체성의 한계들을 외부화하는 것으로서 솟아오르기surgir 위해, 주체성의 종말을 표명하기 위해, 분산을 반짝이게 하고 저항할 수 없는 부재를 받아들이기 위해 모든 주체성의 바깥에 자리를 차지한tient 이 사유, 그리고 동시에en même temps 토대 혹은 정당화justification를 획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전개될 장소, 자신의 장소로 준비된sert 공백, 자신을 위해 만들며se constituer 그리고 시선을 기울이자porte le regard 자신의 즉각적인 확신들certitudes이 교묘히 피하는esquiver 거리를 되찾기 위해, 모든 실증성의 문턱에 자리를 차지한 이 사유, 이 사유는, 우리의 철학적 성찰/반성의 내부성 과 관련하여par rapport à, 우리의 지식의 실증성과의 관계 과 관련하여par rapport à, 우리가 한 마디로 <바깥의 사유>라고 명명할 수 있을 만한 것을 구성한다.
언젠가 이 <바깥의 사유>의 근본적 형태들과 범주들을 정의하는 정의하려고/규정하려고 시도해야 할 것이다. [...] 어쩌면, 그것은 거의 천 년 동안이나, 하나의 부정 신학의 형태들 아래에서 유지된 것일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없다Encor n'y a-t-il rien de moins sûr : 왜냐하면 그와 같은 경험 속에서 <자아의 바깥>으로 잘 이행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를 갖는de plein droit 존재와 말로 존재하는 하나의 사유의 눈부신/현혹하는éblouissant 내부성intériorité 속에서 궁극적으로finalement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을 감싸고envelopper 자신을 집중시키기recueillir 위함이다. 따라서 담론, 그것이 모든 언어 너머의 침묵일지라도, 모든 존재 너머의 무néant일지라도.
우리에게 바깥의 사유를 빛보게 해준fait jour 최초의 틈새déchirure [...] 동일한 시기에, 한 사람[사드]은 담론들의 무한정한 중얼거림murmure 속에서 욕망을 발가벗김mettre à nu으로써, 다른 사람[횔덜린]은 상실되어가고 있는en voie de[~하고 있는 중인] perdre 언어의 틈/균열faille 속에서 신들dieux의 길잃음을 발견함으로써, 사드와 횔덜린은, 다가올 세기를 위해, 하지만, 바깥의 경험을 암호화된chiffré 종류로 우리의 사유 속에 남겨놓았다고 과장 없이sans abus 말할 수 있을까? 경험은 완전히exactement 묻혀 있지는 않았을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의 문화의 두께épaisseur 속에 침투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내부화, 소외들의 삭제, 포기/단념Entäußerung[불어 원본엔Entäusserung으로 되어 있다.]의 헛된fallacieux 순간들을 극복하려는surmonter, 자연을 인간화하고, 인간을 자연화하고 그리고 하늘들cieux에 사용되었던avaient été dépensés 보배들trésor을 지상에서 회수하려는récupérer 요청exigence이 가장 명령적인/강압적인impérieuse 방식으로, 표현되던formulée 모든 시대들 동안 우리의 내부성을 외부화하는 것으로서 부유하고flottante, 낯설게되었étrangère기 때문이다.
그런데 19세기의 후반부second moitié에서 그리고 언어의 심장부에cœur서, 이러한 경험은 마치 언어가 자신의 내부성의 비밀을 보유하고détenir 있는 듯이, 우리의 문화가 항상 자신을 언어에réfléchir 비추려고réfléchir 추구함에도cherche 불구하고, 바깥의 번쩍꺼림étincellement 그 자체로 다시 나타난다. [...]
이 사유에 대해, 블랑쇼는 틀림없이peut-être 단지 하나의 증인/목격자témoin이 아니다. [...] 그는 오히려 우리에게 이 사유 그 자체 ― 실재적 현존, 절대적으로 먼absolument lointain, 반짝거리는scintillante, 보이지 않는 현존, 필요성, 필수불가결한 법칙, 고요한 원기vigueur calme, 무한정한, 계측된mesurée 이러한 사유 그 자체.
반성/성찰Réflexion, 픽션
이 사유에 충실한fidèle 언어를 부여하기는 매우 어렵다. 사실 순수히 반성적인/성찰적인 담론들은 바깥의 경험을 내부성의 차원으로 쫓아낼reconduire 위험이 있다 ;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invinciblement, 반성은 바깥의 경험을 의식의 측면côté으로 되돌려보내려고 하며, <바깥>을 신체들의, 공간의, 의지의 한계들의, 타인autrui의 지울 수 없는ineffaçable 현존의 경험으로서 묘사하려는/소묘하려는 하나의 경험된vécu 기술 속에서 발전시키려한다. 픽션의 어휘도 또한 위험하다périlleux : 이미지들의 두께 속에서, 단지 가장 중립적 혹은 가장 조숙한hâtives 형태들의 투명성 속에서 조차도, 그것들은 상상된 바깥의 형태 속에 아래에서 내부성의 낡은vieille 짜임trame을 새롭게nouveau 짜는tissent 모든 만들어진 의미들을 퇴적시킬déposer 위험이 있다.
그에 따라de là, 반성적 언어를 변화시켜야convertir 할 필요성이 있다. 그것은 하나의 내부적인 것의 확언/확인을 향해서 ―더 이상은 내몰릴délogé 수 없는 중심적인 확신의 종류를 향해서 ― 돌아설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항상 스스로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contester 하나의 극단성을 향해 돌아서야 한다. [...] 이것은 블랑쇼의 언어가 부정négation의 변증법적 사용이 아닌 이유이다. 변증법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우리가 부정하는 것을 정신의 불안정한inquiète 내부성으로 진입하게 하는 것이다. 블랑쇼처럼 자신의 고유한 담론들을 부정하는 것은, 쉼없이 그 자신의 바깥으로 이행하는 것이며, 각각의 순간마다 단지 그 담론이 말하고자 하는 것뿐만 아니라, 언표하는 능력까지 박탈하는 것이다. [...] 반성이 아니라, 망각 ; 모순contradiction이 아니라, 삭제하는 논쟁contestation ; 화해réconciliation가 아니라 반복/되풀이ressassement ; 그 자신의 통일성을 힘들게laborieux 쟁취하려는conquête 정신이 아니라 외부의 무한한 침식érosion ; 끝내 밝혀지는illuminant 진리가 아니라 언제나 이미 시작된 언어의 넘쳐흐름ruissellement과 궁핍détresse. <하나의 말이 아니라 거의 하나의 중얼거림, [...] 뚜렷한, 정확한, 내 사정권 안에 있는 그 무엇.>[각주:2]
하나의 대칭적symétrique 변환conversion이 픽션의 언어에 요구된다. [...] 블랑쇼의 픽션들은 이미지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이미지의 변형이고, 자리옮김, 중립적 매개물, 이미지들의 틈새이다. 그것들은 명확하며, 일상과quotidien 익명의 무미건조함grisaille 속에서 이루어지는dessinées 형상들이다 ; 그리고 이미지들이 경탄으로 대체될 경우faire place à émerveillement, 이것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둘러싸는entouré 공백 속에서, 뿌리도 없고 기반도 없이sans socle 놓인 공간 속에서인 것이다. 픽션적인 것은 사물들 속에서도 인간들 속에서도 아니라, 그것들eux 사이에서 존재하는 불가능한 있음직함vraisemblance 속에 있다 : 우연한 마주침rencontres, 가장du plus 먼lointain 근접성proximité, 우리들 자신의 절대적 은폐dissimulation. 픽션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으로/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시적인 비가시성invisibilité은 비가시적이라는 것을 얼마만큼combien 보여주는가 하는 것이다(Foucault, 552).
그러므로 언제나 그 자신의 바깥을 향해 있는tournée 반성적 인내심과 자신의 형태를 풀어놓는dénoué 공백 속에서 무화되는 픽션은 하나의 담론들을 만들어내기former 위해 엮이는데/교차하는데s'entrecroiser, 이 담론은 견론도 없이, 이미지도 없이, 진리도 꾸며냄도 없이, 증거도 없이, 가장도 없이, 확언/확인도 없이 나타나며, 모든 중심으로부터 해방되며, 조국으로부터 해방되며affranchi de partie, 그리고 하나의 담론은 그 자신의 공간을 구성하는데, 그 공간은 담론이 그것을 향해, 그리고 그것 바깥에서 그것이 말하는 외부로서 구성한다. 외부들의 말로서, 자신이 말을 건내는s'adresser 외부들을 자신의 말들 속에서 맞이함으로써accueillir, 이 담론들은 주석의 개방ouverture을 획득한다 : 바깥에서 쉼없이 중얼거리던 것의 반복/되풀이. 하지만, 항상 픽션이 말하는 바깥들에 머물러 있는 말로서, 이 담론들은 절대적으로 섬세한 빛조차도, 언어를 획득하는 것을 허락받지reçu 못한 것을 향한 끊임없는avancée 하나의 돌출/전진incessante이 될 것이다. 이 담론들의 특이한singulier 존재 양태 ―종말dénouement과 기원의 애매한 공허creux équivoque ―는 확실히 블랑쇼의 <장편소설들> 혹은 <소설들> 그리고 그 자신의 <비평>과의 공통의 장소를 규정하고/정의하고 있다. 사실, 담론이 내면화되어가는 하나의 사유의 비탈길pente을 쫒아가는suivre 것을 중단하고, 언어의 본질에 말을 건네어adressant, 사유를 바깥으로 전환시키는 순간에서부터, 그것은 단지 하나의 사실로 귀결된다 : 경험들, 우연한 마주침들, 일어날 법하지 않은improbable 기호들에 대한 세심한 이야기récit méticuleux ― 모든 언어의 바깥에 대한/위에서의 언어, 단어들의 비가시적 측면versant에 대한/위에서의 말들 ; 그리고 언어로 이미 존재하는, 이미 말해진, 인쇄된imprimé, 표현된 것에 대한 관심 ― 그 담론에 표현된 것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단어들 사이에서 순환하는 공백에, 그것을 끊임없이 해체하는 중얼거림에, 모든 언어의 비-담론들에 대한/위에서의 담론들, 그 담론이 나타나는 비가시적 공간에 귀를 기울인다(Foucault, 552~3).
이끎être attiré과 무심négligent
블랑쇼에게 이끎attirance은 확실히 [...] 순수한 바깥의 경험이자, 가장 적나라한 바깥의 경험이다. 이끌린다는 것은, 외부적인 것의 끌림attrait에 의해 초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이것은 오히려, 공백과 궁핍dénuement 속에서 외부의 현존을 겪는éprouver 것이며, 그리고 이 현존에 연결되어, 우리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irrémédiablement 외부의 현존 외부의 바깥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겪는 것이다. 하나의 내부성을 다른 하나의 내부성에 접근하라고rapprocher 불러일으키는appeler 대신 이끎은 절대적으로/강압적으로impérieusement, 외부가 열린 채로, 내부/면성intimité 없이, 보호 없이, 압류retenue도 없이(어떻게 내부성 없이, 모든 잠금 장치fermeture의 바깥에서 무한히 펼쳐지는 외부가 이런것들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외부가 거기 있다는 것을 표명한다 ; 하지만 이러한 이끎은 이러한 개방/열 그 자체엔 접근할 수 없음을 표명하는데, 왜냐하면 외부는 그 자신의 본질을 양도하livre지 않기 때문이다 ; 그것은 하나의 실증적 현존 ― 그 자신의 고유한 존재의 확신에 의해서 내부로부터 밝혀지는 것 ―으로서 제공되지offrir 않는데, 하지만 단지 자기자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서, 그리고 마치 다시 만나는 일이 가능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누군가가 그것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기호 속에 함몰하는creuse 부재로 나타날 수 있을 뿐이다(Foucault, 553~4).
이끎의 필수적 상관물은 무심이다. 하나의 다른 하나에 대한, 관계는 복합적이다. 이끌릴 수 있기 위해서, 인간은 무심해야 한다(Focault, 554).
법은 어디에, 법은 무엇을 하는가?
무심해진다는 것, 이끌린다는 것은, 법을 드러내고 은폐시키는 하나의 방법/방식이다.
[....] 명백해졌을 때evidente, 법은 더이상 법이 아니라, 의식의 온화한doux 내부/면성일 뿐이다. 반면에en revanche, 그것이 하나의 텍스 속에서 드러난다면, 어떤 책의 행간들lemfignes 속에서 그것을 해독할déchiffrer 가능성이 있다면, 레지스트리를 참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외부적인 것의 견고함을 갖게 될 것이다 ; 우리는 그 법에 순종하거나suivre 복종하지 않을 수 있다 : 그것의 권력은 어디에 있으며, 어떤 힘 혹은 어떤 위엄prestige이 그것을 존경할 만한vénérable 것으로 만드는가? 사실, 법의 현존은, [법의] 은폐이다. [...] 그리고, 그렇지만cependant, 이 영속적인 현시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나 혹은 법이 바라는 바를 환하게 비추지 못한다illumine : 오히려 행동/이끎conduites의 내적 원칙 혹은 규정prescription이기보다는 그것은 우리의 행동들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들이고 그리고 모든 내부성으로부터 벗어나는échapper 것에 의한 외부이다 ; 그것들의 특이성을 보편성의 회색빛의gris단조로움으로 몰래insu 뒤집어놓고retourner, 그리고 그 주위에autour 불안/불편, 불만족insatisfaction, 되풀이된multiplié 열정zèle의 공간을 열어줌으로써 그것은 그것들을 경계짓는borne 밤, 그것들을 에워싸는cerne공백이다.
위반도, 마찬가지이다. [...] 이것이 자기에게로 법을 끌어들이고자 애씀으로써 위반이 금기interdit를 뛰어넘는 것을 훌륭하게 시도할 수 있는entreprendre 이유이다 ; 사실 그것[위반]은 항상 법의 본질적 물러남/철회retrait에 의해 이끌림을 당한다. 그것은 자신이 극복하지triomphe 못하는 하나의 비가시성의 개방 속으로 집요하게obstinément 나아간다. [...] 법은 그것이 나아가는 제스처의 그림자 그 자체인 수단 속에서 각각의 제스쳐가 필수적으로 나아가게 되는 그림자이다.
유리디체와 사이렌
사람들의 시선들[이 머무는 순간], 법의 얼굴은 그림자 속으로 우회하고 되돌아 간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사람들은 미래의 노래의 치명적인mortelle 약속에 지나지 않은n'est rien de plus 노래chant를 들을 수 있을 뿐이다(Foucault, 560).
동반자
이끎의 최초의 기호들[이 나타날 때부터], 욕망의 얼굴이 디자인한 것을 철회할 때, 은둔자solitaire의 목소리의 견고함fermeté이 중얼거림의 포개짐chevauchement 속에서 자신을 위장할 때, 부드럽고 폭력적인 운동이 내부성 속에서 침식하고, [내면성/내부성을] 자기의 바깥으로 뒤집어놓으며 그리고 그 자신의 측면/편으로 솟아오르게 하며surgir ―혹은 오히려 이쪽에en deça― 항상 은닉되어 있지만, 항상 결코 동요하지 않는jamais inquiéter 하나의 확신을 강요한다 ; 거리를 유지한 복사본double, 맞서는 유사성ressemblance. 자기의 바깥으로 읶는 내부성의 순간, 하나의 외부는 내부성이 자신의 주름repli을, 그리고 자신의 주름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버릇habitude을 가진/지니는 그곳을 함몰시킨다 : 주체로부터 자신의 단순한 동일성을 빼앗아버리고, 도려내어évidé 쌍둥이jumelles이지만 겹치지 않는superposables 두 가지 형상들로 나누어버리며, 그로부터 나JE라고 말할 직접적인 권리를 박탈해버리며, 그의 담론들에 맞서서 메아리이자 부정인 부정할 수 없는indissociablement 말을 내세우는 하나의 형태 ― 하나의 형태 이하의, 하나의 일종의 무형의 익명성 그리고 완고한têtu 익명성 ― 가 솟아오른다. 사이렌들의 은빛argenté 목소리에 대해 귀oreille를 기울이는 것, 이미 은닉된dérobé 금지된 얼굴을 향해서 돌아서는 것은 단지 죽음에 맞서기affronter 위해 법을 뛰어넘는franchir 것이 아니고, 단지 세계와 외관의 소일거리distraction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며, 할당할 수 있는 주어/주체가 없는 하나의 언어, 하나의 신 없는 법, 등장인물personnage 없는 하나의 대명사, 표현도 눈도 없는 하나의 얼굴, 자기자신으로서의 타자가 번쩍거리는miroite 다른 쪽 끝bout(하지만 측정할 수 없는 이 거리는 또한 하나의 행간mince처럼 얇다.)에 이르기까지 자기 안에서 사막이 커가는croître 것을 갑자기soudain 느끼는 것이다. [...] 이끎의 텅 빈 외부는 복사본double의 지극히 가까운 이끎과 동일하다. 동반자는 은닉dissimulation의 절정comble으로 이끎이다 : 근접한, 완고한obstinée, 잉여적인redondant 순수한 현존으로서, 하나의 잉여en trop의 형상으로서 주어진다는 것으로 그것은 은폐적이다. [...] 동반자는 사람들이 언제나 동일하게 갖고 있지 않은 하나의 요구와 동시에 사람들이 해방되고자 하는 중력pesanteur이라는 가치를 지닌다 ; 사람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친밀함/친밀성에 따라 저항할 수 없게 되고invinciblement,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부재의 얼굴 없는 형태에 따라 묶인attaché 관계/끈의 이 부재가 아닌 하나의 관계를 찾는 것에 근접해야approcher만 한다(Foucault, 562~3).
확실히 언어를 방향전환pivote 하는 이 운동 속에서 완고한 동반자의 본질이 가장 정확하게 현시된다. 그는 사실 어떤 특권적인 교섭상대/대화자interlocuteur, 다른 발화 주체가 아니라, 언어가 부딪히게buter 되는 이름 없는 한계이다. 게다가 이 한계에는 실증적인 것이라고는 거의 없다 ; 그것은 차라리 언어에 대해서 지나치게 큰démesuré 토대인데, 이 언어는 중단 없이/쉼없이 상실되지만 그것은 동일한/같은 것[사물]을 말하는 하나의 다른 담론들, 다른 것[사물]을 말하는 하나의 동일한 담론들로서의 자기에게로 마찬가지로/동일하게identique 되돌아오기 위함이다. 『나와 동행하지 않았던 자』는 이름이 없다(그리고 그는 본질적인 익명성을 유지하maintenu고자 한다) ; 그는 얼굴도 시선도 없는 그Il 이다. 그는 고유한 밤nuit의 질서로 옮기는 타자의 언어에 의해서 볼 수 있다 ; 그리고 그가 무한한illimité 공백 속에서 단어들과 문장들을 되풀이하는 최초의 자아personne에게 말하는 나에게 가장 정확하게au plus près 접근한다 ; 그럼에도, 그는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하나의 정상을 벗어난démesuré 거리가 양자를 분리시킨다sépare. 이것이 나JE라고 말하는 자가 쉼없이 동반자의 목적에 우연히 마주치기 위해서 접근하는 이유인데, 그 동반자는 그를 동반되지 않거나 혹은 매듭 풀린dénouant 것에 현시될 수 있는 실증적인 것에 충분히 연결되지 않는 형태를 취한다. 그 어떤aucun계약pacte도 하나를 다른 하나에로 묶을 수 없고, 그리고 그들은 하나의 항상적인 의문interrogation(당신이 보는 것을 묘사하십시오 ; 지금 쓰고 있습니까?)에 의해서 그리고 응답의 불가능성에 의해서 현시되는 부단한ininterrompu 담론들에 의해서 강력하게puissamment 묶여 있다. 마치 어쩌면 말하는 등장인물의 물리칠 수 없는invincible 침식에 불과한 이 물러남retrait, 이 함몰을 통해서 어떤 중립적 언어의 공간이 해방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 화자와 화자를 동행하지 않는 분리할 수 없는indissociable 동반자 사이에서, 말하는 나와 그를 분리시키듯이 그 둘을 분리시키는 이 좁은étroit 선을 따라서, 모든 이야기들이 돌진해나가는데, 모든 말과 모든 글쓰기의 외부인, 그리고 그들을 나타나게 하는, 그들의 권리를 박탈해버리는, 그들에게 자신의 법을 강요하는, 그들의 순간적인 번쩍거림miroitement, 그들의 번쩍이는etincelante 사라짐disparition을 자신의 무한한 전개déroulement 속에서 현시하면서 말이다(Foucault, 564~5).
동일자도 아니고 타자도 아닌
[...] 하지만 바깥의 경험 속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점이 아니다. 이끎의 운동, 동반자의 물러남은 모든 말들에 앞서 있는 것, 모든 침묵mutisme의 아래에au-dessous 존재하는 것이다 : 언어의 연속적인continu 번쩍임ruissellement . 사람/자아personne에 의해서 말해지지 않은 언어 : 모든 주체는 하나의 문법학적 주름을 소묘한다. 언어는 그 어떤 침묵 속에서도 용해되지résoud 않는다 : 모든 중단interruption은 이러한 봉합 없는sans couture 식탁보nappe 위에서의 하나의 흰 얼룩tache를 만들어낼 뿐이다. 그 운동은 그 어떤 존재도 뿌리를 내릴 수enraciner 없는 중립적 공간을 열어준다. 말라르메 이후로 단어는 그것이 지칭하는 바의 명백한inexistence 비존재inexistence이다 ; 우리는 이제 언어의 존재는 말하는 존재의 가시적 지워짐임을 알고 있다 : <이 말들을 내가 듣고 있다고 말하는 것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언제나 말해졌다.> 블랑쇼에 의해서 서술된 경험들이 이끌어가는 것은 자신의 고유한 한계의 부재 위에서 해방되고 개방되는 언어의 이러한 익명성이다 ; 그것은 이 웅얼거리는 장소에서 그 자신의 종말terme을 맞이하기trouver 보다는 자신의 가능한 재시작의 비지정학적 장소를 찾아낸다(Foucault, 565~6).
그때 언어는 단어들과 담론들, 문학에 대한 우리들의 의식을 형성시켜준 모든 낡은vieux 신화들로부터 해방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오랜시간동안, 사람들은 언어가 시간들을 지배한다고, [...] 사람들은 그것의 본체가 단어들의 형태나 그 단어들을 진동시키는 숨결souffle 속에 있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언어는 형태없는 웅성거림rumeur과 번쩍임ruissellemen일 뿐, 그것의 힘은 은폐 속에 있다 ; 이는 언어가 시간의 침식과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것을 만드는 이유이다 ; 그것은 깊이 없는 망각oubli이자, 기다림attente의 투명한 공백이다.
각각의 단어들을 통해서, 언어는 자신보다 앞서는préalable 내용들contenus을 향해 향한다/나아간다diriger ; 하지만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통해서는 그리고 가장 정확하게au plus près 자신의 존재를 붙잡으면, 그것은 기다림attente의 순수성pureté 속에서 전개된 것이다. 기다림, 그것은, 무를 향해서 나아가지 않는다 : 왜냐하면 그것이 충족시켜combler야 할 대상이 오직 그것을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그 자리에서sur place 체념한résigné 부동성immobilité이 아니다 ; 그것은 종말이 없는 그리고 결코 휴식repos 없는 보답/보상récompense을 예상하promettre지 않는 운동의 인내력/지구력endurance을 갖고 있다 그것은 어떤 내부성 속으로 에워쌓이enveloppe지도 않는다 ; 그것은 그것의 가장 작은moindre 부분들 각각도 돌이킬 수 없는irrémédiable 외부들 속으로 떨어진다tomber. 기다림은 자신의 고유한 과거의 종말을 기대할 수도, [...] 그것을 거두는 것recueille은 기억이 아니라, 망각이다. 그렇지만cependant, 이 망각을, 부주의/방심distraction의 흩어짐éparpillement과도 혼동해서는 안 되며, 주의력vigilance을 잠재우는endormirait 잠sommeil과도 혼동해서는 안 된다. [...] 이런 의미에서, 망각은 극단적인/극도의 집중/주의attention이다. ― 망각은 너무나도 극단적인 집중이어서 자신에게 제공될 수 있는 독특한 각각의 얼굴들을 지워버린다. [...] 기다림이 하나의 기다림으로서 유지될 수 있는 것은 망각 속에서이다(Foucault, 566~7).
기다리면서attendant[원형은 attendre이며, 이는 현재분사 형태] 망각하는oublieux 자신에 본질에 의해, 모든 결정된 의미화와 말하는 자의 존재 그 자체를 지워버리는 은폐의 능력에 의해, 모든 존재의 본질적 은신처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 이미지의 공간을 해방시키는 이 흐릿한/회색빛의 중립성에 의해, 언어는 진리도, 시간들도, 영원도, 인간도 아니며, 오히려 항상 외부들의 해체된défait 형태이다 ; 그것들은 그것들의 무한한indéfini 진동의 섬광éclair 속에서 기원과 죽음― 정상을 벗어난/한계없는démesuré 공간 속에서 유지되는 하나의 순간instant의 그 자신의 접촉인 기원과 죽음을 소통시키거나 혹은 오히려 보여준다. 기원의/이라는 순수한 바깥은, 언어가 맞이하려는accueillir 것에 신중하며attentif, 결코 하나의 부동의, 침투할 수 있는pénétrable 하나의 실증성 속에서 고정되지 않는다 ; 그리고 죽음이라는 항상 다시 시작하는 바깥/외부는 언어의 본질적 망각에 의해 빛으로 이끌릴 때에도, 결코, 진실의 모습을 드러내는dessinerait 경계/한계를 설정해주지는 않는다. 그들은 하나의 다른 하나 속에서 즉각aussitôt 동요한다/기울어진다basculer ; 기원은 목적 없는 [존재의] 투명성을 지니고 있으며, 죽음은 시작의 반복 위에서 무한정으로indéfiniment 개방되어 있다. 그리고 언어(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나, 그것이 그 내용을 말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형식이 아니라), 그의 존재인 언어는, 그토록 섬세한fine 목소리, 그토록 지각되지 않은imperceptible 뒷걸음recul, 모든 사물들과 모든 얼굴들의 중심cœur과 주변alentour에서 하나의 동일한 중립적 밝음으로― 낮과 동시에 밤으로―에워싸이는baigne 이 취약함faiblesse, 기원의 굼뜬tardif 노력, 죽음의 이른matinale 침식.
언어가 진리의 장소와 시간의 장소로 정의되고 있을 때, 모든 크래타 사람은 거짓말장이라는 에피메니데스의 단언은 언어로서는 절대적위기périlleux였다 : 언어와 담론간의 관계가 모든 가능한 진리로부터 언어를 매듭을 푼dénouait 것이었다. 하지만 언어가 기원과 죽음 사이의 상호적 투명성으로 드러날dévoile 경우 <나는 말한다>라는 유일한 확언 속에서는 그것 자체의 사라짐에 대한, 그것의 미래의 나타남apparition에 대한 위협적인menaçant 약속을 받아들이reçoive지 않는 어떤 존재도 없다(Foucault, 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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