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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북에 나타난 음악에서의 차이나는 반복의 양태

Ritournelle 2024. 1. 20. 16:47

영화 <양철북The Tin Drum, 1979>(감독 폴커 슐뢴도르프 출연 마리오 아도프, 데이빗 베넨트, 카타리나 살바흐, 안젤라 뷩클러 )은 권터 그라스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이 신(scene)의 첫 부분에서 오스카는 라디오라는 장치를 통해서 유년 시절의 회상으로 자신을 이끌어간다. 여기서 청각적 장치로서의 라디오는 시각적 장치로서의 라디오로 작동하기도 하는데, 비스듬히 누워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하는 오스카의 몸짓과 그와 동시에 배치되는 시선들, 그리고 동시에 생성되는 의미들의 조합들이 이를 방증한다. 그러나 오스카가 아직 유년 시절의 회상으로 되돌아간 것은 아니다. 차라리 그는 절름발이가 된 자신의 성장의 선분들을 한번 주름을 접음으로써 현재의 순간의 이면으로서의 과거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처음 등장하는 흑백으로 처리된 나치의 열병식은 아직 그의 접힘이 완전한 이면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차라리 그것은 그 다음 순간에서 일어난다. 흑백 화면이 칼라로 바뀌는 그 순간은 파시즘(유비적 의미가 아니라 실사의 수준에서)이 실사의 수준으로 현시되는 것 그 자체이다. 여기서 오스카는 유년 시절의 기억이 아니라 정확히 그 블럭을 만들어낸다. 그는 그럼으로써 바로 이 순간에 오이디푸스로 퇴행하지도 않을 뿐더러 파시즘의 죽음의 선분으로도 빠져들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다음의 장면에서 펼쳐진다. 나치의 열병식이 있기 직전 대대장은 노골적인 프로파간다가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오스카는 열병대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게 은밀히 숨어든다. 양철북을 가지고서 말이다. 그리고 작은 틈 사이로 열병대를 살피지만, 그들은 오스카를 볼 수 없다. 이윽고 트럼펫으로 시작하는 열병대의 열병식이 시작된다. 어느 행진곡이 다 그렇듯 행진곡은 정확한 박자로 이루어져 있어, 열병식에 참가한 사람들의 통일성(조직화)를 높은 수준으로 이끌어간다.

여기서 통일성이 극대화된 박자 중심의 행진곡은 음악이 어떻게 파시즘을 정당화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아래 동영상 7:04초 이하를 참조]. 정치의 예술화와 예술의 정치화. 그런데 열병대에서 북을 치는 소년들이 오스카의 박자보다 긴 박으로 행진곡을 연주할 때, 오스카는 그것을 분절시키면서 작은 박자로 쪼갠다. 그러면서 열병대의 행진곡의 음악적 배치에 살며시 끼어든다. 그러자 갑자기 기존의 음악적 배치가 흐트러지면서 불협화음이 생기기 시작한다. 탈영토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미세한 떨림과 혼돈에도 열병대의 지휘자는 허둥지둥, 우왕좌왕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열병대의 연주자들은 갑자기 왈츠곡(아마도 모차르트의 왈츠곡 가운데 하나인 것 같은데) 을 연주하기 시작하고, 열병대의 열병식의 배치는 순식간에 무도회장의 배치로 전환된다. 이 차이 나는 반복이 만들어낸 음악에서의 배치의 새로움은 오스카의 작은 몸짓(차이 나는 반복)에서 시작한 것이다.

 

이는 적어도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아주 작은 요소가 기존의 배치에 삽입해 들어감으로써도 그것을 완전히 새로운 배치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것. 즉 요소들 간의 이웃관계에 따라 전혀 다른 배치의 양상이 전개된다는 것.

둘째, 음악은 혁명적인 리토르넬로를 생산할 수 있으며, 동시에 파시즘의 죽음의 구멍에 빠져들게도 할 수 있는 이중적인 특성을 지녔다는 것. 그리고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리듬과 박자의 차이로 환원된다는 것.

이러니 음악을 어찌 삶과, 심지어 정치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