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과 대표성
출처: http://raeilog.tistory.com/entry/한병철-김태환-역-『투명사회』-문학과지성사-2014?category=5249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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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투명사회』에서 기자(언론)의 역할 중 <대표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대표는 종종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낳는 필터의 기능을 담당한다. 대표는 선별 작업을 통해 정선된 것을 내놓는다. [...] 기자들은 최고의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때로 생명의 위험을 마다하지 않는다."[한병철, 김태환 역, 『투명사회』, 문학과지성사, 2014, 139쪽.]
한병철은 이 책 전체에서 현대사회를 고도로 발달된 디지털 미디어 매체가 지배하는 사회로 규정합니다. 그 사회는 모든 것들이 투명하게 되는 그런 사회, 즉 투명성의 독재가 만연되는 사회로 규정됩니다. 어떠한 매개도, 부정적인 것도, 대표되는 것도, 불투명한 것도 요구하지 않은 그런 사회 말입니다. 그는 이런 사회를 완전한 탈매개화, 긍정성, 대표되는 것/대표되는 것을 부정하는 것, 투명한 것에의 요구가 극한에 달한 사회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현재 "디지털 심리정치의 시대"[한병철, 같은 책, 212쪽.]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Ⅱ.
한병철의 철학은 소위 <부정성의 철학>을 옹호하는 철학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그의 또다른 저작 『피로사회』를 참조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의 글들은 현대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고 있어 여러번 곱씹어 읽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글에는 <부정성의 철학>이 내재한 검은 그림자 또는 검은 구멍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는 이 책 『투명사회』에 곳곳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가령 위에서 언급된 문장의 내용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 문장에서 한병철은 <대표성>이 지닌 가치를 긍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대표성>을 특정 주체가 다른 주체의 욕망을 포획해서 다시 한 번 드러내는 것으로 규정하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정치가나 정당은 대중의 정치적 욕망을 포획해서 그것을 다시 한 번 드러냅니다. 물론 그들이 그것을 다시 한 번 드러낼 때, 그것은 대중이 원래 지녔던 것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언론도 마찬가지 입니다. 특정 언론은 대중의 여론을 <대표한다> 또는 <대표할 수 있다>라는 명목아래 그것을 <선별하고>, <포획하고>, <제거>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한 번 드러냅니다. 물론 그들이 그것을 다시 한 번 드러낼 때, 그것은 대중이 원래 지녔던 것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한병철은 여기서 특정 언론에 의해 <대표성> 또는 <대리되는 것>, <재현되는 것>, <매개되는 것>의 가치를 긍정합니다. 하지만 제가 볼때 그것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작금의 상황에서 한국이 처한 언론 상황에서는 더더욱 말입니다.
Ⅲ.
이땅의 대중은 더이상 여론 형성, 유통, 소비의 전 과정에 대한 수동적 주체가 아닙니다. 즉 그들은 "이땅의 여론은 우리의 욕망에 따라 대표되어야만 한다."라는 언론의 강압적인 명령을 수동적으로 따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그들은 대중의 여론과 정치적 욕망을 그들이 절대적으로 대리할 수 있고, 대표할 수 있고, 재현할 수 있고, 매개할 수 있다고 자만합니다.
한병철의 지적과는 정반대로 이땅의 대부분의 언론들은 최고의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생명의 위협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최악의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어떠한 움직임도 하지 않죠.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자신이 대중의 여론과 정치적 욕망을 그들이 절대적으로 대리할 수 있고, 대표할 수 있고, 재현할 수 있고, 매개할 수 있다고 자만합니다.
오늘날 한국과 같은 디지털 사회에서 스마트해진 대중은 자신의 정치적 욕망과 여론을 어떠한 대리자, 매개자, 재현자도 거치지 않고 그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언론이라는 매개체, 대리자, 재현자를 거치게 되면 필연적으로 진실의[=본질의] 왜곡 현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도 이땅의 언론들은 아직도 자신들을 여론의 판관들, 여론의 사제들, 여론의 선민으로 자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자신들은 어떠한 대상들에 대해 어떠한 비판도 서슴치 않으면서,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티끌과도 같은 비판도 수용하지 못하는 선민들의 노예 의식이라고 지칭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