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진경, 『자본을 넘어선 자본』, 그린비, 2004
서문
제1장 칼 맑스, 『자본』의 저자
제2장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제3장 가치와 화폐
1. 가치 개념의 발생
모든 상품이, 혹은 모든 재화가 가치를 갖는다는 주장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재화가 상품이 되는 것도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지만, 상품이 노동시간이라는 하나의 단일한 척도에 의해 측정되는 가치를 갖는다는 것 역시 매우 제한된 어떤 조건 아래에서뿐이다 [...] 요컨대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가치는 특정한 사회에서만 발견된다. 그것은 어떠한 조건에서 존재하고 작동하게 되는가? 즉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가치란 어떻게 해서 탄생했을까? 맑스의 『자본』은 그것을 이론적으로 해명하고자 한다. [...] '가치형태론’의 네 가지 유형은 상품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네 가지 형식/형태(Form)인데, 이를 통해서, 통상 화폐가 수행하게 되는 단일한 가치척도의 수립과정을 볼 수 있다(65쪽).
2. 표현적인 가치관계
1) 단순한 가치형태
x × A[상대적 가치형태=표현하는 것] = y × B[등가형태=표현되는 것]
x량의 상품 A[책상]는 y량의 상품 B[바지]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1)-1. 여기서 책상은 바지를 통해서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단순한 가치형태의 도식을 맑스는 '가치'의 표현적 관계를 표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아마포는 자기의 가치를 저고리로 표현하며, 저고리는 이러한 가치표현의 재료가 된다. 제1상품은 능동적 역할을 하며, 제2상품은 수동적 역할을 한다. 제1상품은 자기의 가치를 상대적 가치로 표현한다. 바꾸어 말해, 그상품은 상대적 가치형태로 있다. 제2상품은 등가물로서 기능한다.다시 말해, 그 상품은 등가형태로 있다."[김수행 역, 『자본론 Ⅰ-1』, 61쪽.]
1)-2. 책상의 '가치'는 아직 어떤 척도로 비교할 수 있는 양이 아니다. 가치라는 통상적 단어를 사용하지만, 이 경우 그 의미는 사실상 질로서의 '가치'를 뜻한다. [...] 이를 '어떤 척도에 의해 비교할 수 잇는 객관적 '양'으로 사용되는 경제학적 의미의 가치value와 구분하기 위해서 우리는 '강ㅄ어치'the valuable이라는 말을 사용할 것이다. 가치란 질적인 값어치가 비교가능한 객관적 양으로 환원되는 경우를 지칭한다고 저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값어치가 사용가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사용가치는 차라리 그 값어치를 표현하기 위해 선택된 물건과 관련되어 있다. 즉 책상은 자신의 '가치'를 바지의 사용가치를 통해서 표현한다. 책상의 값어치는 바지 2개의 유용성만큼 '크다'는 것이다.
1)-3. 단순한 가치형태 도식에서 자기의 '가치'를 표현하는 좌변(x × A)을 맑스는 '상대적 가치형태'라고 부르고 우변(y × B)에 오는 것(의사용가치)를 통해 자신의 값어치를 상대적으로 표현하는 항이라는 뜻에서 이다. 반면 책상이나 A의 값어치의 표현물인 우변은 '등가형태'라고 부른다. 좌변의 '가치'(값어치)를 표현하는 '등가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등가'라는 말에 현혹되어는 안 되는데 여기서 우변이 등가물로 기능하는 것은 그것의 양이 아닌 질, 즉 사용가치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좌변의 '가치'와 우변의 사용가치가 양적인 '같음을 뜻하는 '등가'가 될 수는 없다. 또한 그것은 척도가 없는 상태에서, 좌변의 '주어'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객관적이지 않으며, 불변적이지 않다. 때에 따라서는 바지 3개를 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여기서 양적인 동질화나 양적 등가성은 교환의 조건이 아니다.
1)-4. 두 항을 연결하는 등호는 두 개의 동일한 양을 등치시키는 수학적 등호가 아니다. 앞의 도식에서 좌변은 '가치'를 표현하는 주어 내지 주체이고, 우변은 그것의 '가치'를 표현하는 술어이다. 즉 등호는 마치 영어의 be 동사나 독일어 sein 동사처럼 주어와 술어를 연결하는 계사의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그것은 양적 동일함(등가성)을 표시한 수학적 기호가 아니기에, 수학적 습관에 따라서 양변을 바꾸어 놓으면 안 되는 것이다. 좌변의 주어(상대적 가치형태, x × A)는 우변(등가형태, y × B)의 자리에 오는 항을 이용해서 '자기를 표현하고', 우변은 그것의 '표현물'이 된다. 두 항의 이러한 곤계를 통해서, 이 관계의 본질이 표현된다. 들뢰즈는 이를 (스피노자를 따라서) '표현적 관계'라고 말한다[들뢰즈,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21]. 이 관계를 '가치관계'라고 한다면, 그러한 가치를 창조한 활동'이 그 관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가치있는 것'='값어치'(the valuable)을 생산하는 활동이지만, 아직 (근대) 경제학적 의미를 갖는 가치란 개념은 성립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런 가치 개념과 결부된 활동인 노동Arbeit/labour이란 말을 사용할 수는 없다.
1)-5. 여기서 말하는 활동은 그보다는 차라리 만드는 활동이나 그 생산물의 질적 측면을 강조하는 단어인 ‘작업’(Werk/work)에 더 가깝다. 예술가나 장인의 작업이 그 생산물/작품(work)의 질적인 값어치와 직접 결부되어 있다는 의미와도 통한다. 그런데 이러한 작업이 질적인 활동이어야 하지만, 단지 자기만족적인 활동이 아니라 등호로 표시되는 관계 속에 틀어갈 수 있는 활동이어야 하며, ‘등가’물을 통해 자신의 값어치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그것이 타자에 대해 유의미한 활동이어야 한다. 단순한 교환의 형태를 취하는 이러한 도식을 통해 또 하나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작업이나 활동의 ‘가치’(값어치)는 타자와의 만남에 의해,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표현된다는 것이다. 즉 '가치'란 타자와의 관계 이전에 따로 존재하는 어떤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유의미하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69쪽)
1)-6. 단순한 가치형태에 고유한 이러한 관계를 좀더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스미스가 말했던 것과 비교해 보자. [...] 스미스느 바로 여기서 '기회비용'의 동등성을 찾아내고, 거기서 곧장 가치라는 양적 관계의 등가성을 끄집어낸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이 도식이 양적 등가성을 표시하는 수학적 등식이 아니라, 우변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문장의 축약임을 보았다. 맑스는 이 관계에서 양적 등가관계를 끄집어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하여 스미스의 주장은 틀렸다. "상이한 물건들의 크기는 동일한 단위로 환원된 되어야 비로소 양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김수행 역, 『자본론 Ⅰ-1』, 63쪽] 반대로 이 단순한 가치형태에서 출발하는 것은 '양적 측면으로부터 완전히 떠나서 고찰"하기 위함이다. 경제학에서 '양적 측면'이란 가치관계나 가치 개념을 의미하기에, 거기서 완전히 떠난 지점에서 시작해야만 가치 개념을 증명하기 위해 가치 개념을 사용하는 순환논법을 피할 수 있다. 단순한 가치형태는 맑스 말대로 양적 비교를 위한 동일한 단위(척도)가 없으며, 따라서 양적 관계로서 가치를 정의할 수 없는 그런 관계임을 명심하자. 즉 단순한 가치형태는 양적 관계를 표시하는 수학적 도식이 아니라 질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논리적 도식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사용하는 '가치'라는 말에 따옴표를 치거나 '값어치'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양적 측면이 배제된 의미에서 생산물의 '가치'를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2) 확대된 가치형태
x × A = y × B
= u × C
= v × D
= w × E
2)-1. 이 가치형태에서 상대적 가치형태인 좌변의 주어 A는 자신의 '가치'를 표현할 표현물을 다양하게 확장하고 있다. 여기서 타자와의 만남은 다양하게 확대되고, 등가물로 표현되는 관계의 양상 또한 다양화되지만 등가물 내지 표현물로 기능하는 우변의 입장에서 이 확대된 가치형태는 단순 가치형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는 않다. 어느 경우든 A의 값어치를 표현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2)-2. 여기서도 등가형태로 기능하는 우변의 항들은 결코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이며, 각각의 사용가치들로 A의 값어치를 표현한다. 따라서 우변에 오는 어떤 것도 동일하지 않으며, 동질적이지도 않다. [...] 그것은 오직 A하고만의 관계를 표현할 뿐이기에 첫째 줄의 등식과 둘째 줄의 등식은 같다고 할 수 없으며, 다른 줄의 등식 또한 마찬가지다. 이는 반대로 A의 '가치'를 표현하는 다른 방법이고, 다른 등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는 단순한 가치형태의 질적인 확장이자 다양화된다. 확대된 이 등식을 통해서 '가치'가 특정 표현물로부터, 가령 B라는 표현물로부터 탈영토화된다. 이것이 단순한 가치형태와 다른 이 도식의 특징으로써 '가치'란 어느 하나의 타자에게만 유의미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타자들과 유의미하게 만날 수 있는 어떤 능력임이 드러난다. '가치'란 어떤 생산 활동이 타자에게 유의미한 관계를 형성하는 내재적 장의 이름이다.
2)-3. 어떤 작업이나 활동의 ‘가치’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혹은 ‘가치’가 좌변에 오는 어떤 생산물/작품에 속하는 성질/소유물처럼 보이는 것은, ‘가치’의 이러한 탈영토성 때문이다. 만약 단순한 가치형태에서처럼 오직 하나의 등가물로서만 자신의 ‘가치’를 표현할 수 있다면, 그 ‘가치’는 등호로 표시되는 관계에 속하는 것이지, 좌변의 생산물인 A에 속하는 것으로 드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다양한 표현물로 자신의 가치를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변의 등가물과는 무관하게 A에 속하는 실체적 성질인 것처럼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사로잡히면 사실은 다양한 표현적 관계에 속하는 것을 하나의 사물에 속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가치’가 타자와의 만남 없이, 타자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관념에 대해서 경계해야 하며, 가치란 도식의 우변에 오는 등가물로부터 독립된 자립성을 갖는다는 관념에 대해 충분히 거리를 두어야 한다(72~3쪽).
3. 가치와 상품세계1) 일반화된 가치형태
1)-1. 일반화된 가치형태의 도식은 전도딘 확대된 가치형태 도식이 아니다. 이 도식에서 사용되는 등호는 양적 동일성을 표현하는 등호가 아니라 좌변이 우변의 등가물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관계의 표시이기에 수학 방정식처럼 가치형태 도식에서 좌우변을 바꾸어서는 안 되는데 등호의 양변은 서로 비대칭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도식[일반화된 가치형태의 도식과 전도딘 확대된 가치형태 도식] 사이에는 근본적인 심연 내지 비약[논리적이며 현실적(=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것]이 있으며, 그 심연 속에 경제학적 가치 개념과 연관된 중요한 비밀이 숨어 있다.
1)-2. 확대된 가치형태는 어떤 하나의 생산물이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반화된 가치형태에서는 모든 생산물이 오직 하나의 등가물을 통해서만 자신의 ‘가치’를 표시한다. 여기서도 도식의 좌변은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주어이고, 우변은 그것의 등가물로 기능하는 서술어이다. 여기서 주어는 만들어진 모든 생산물들이다. 그것이 오직 하나의 등가물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도식에서는 모든 생산물이 오직 하나의 등가물로만 자신의 ‘가치’를 표현한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근본적인 변화가 야기된다. 이제 우변에 오는 단 하나의 등가물은 모든 것의 ‘가치’를 통일적으로 표시하는 척도(measure) 내지 단위(unit)가 된다. 등가물이 단 하나이기 때문에, 모든 생산물이 가치를 표현하는 방식도 단 하나이고, 따라서 그것을 통해서 생산물들의 ‘가치’를 서로 비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우변에 오는 것들 사이에 비교가 불가능했던 확대된 가치형태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한편 여러 생산물들이 단 하나의 등가물을 통해 비교된다고 할 때, 비교하는 방법은 그 등가물의 양을 비교하는 것이다. 이제는 등가물의 질이 무엇이든, 그것은 하나이기 때문에, 질의 차이를 통해 가치를 표현하고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등가물의 양이 얼마인가에 따라 다른 생산물과 자신의 ‘가치’를 비교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전에는 등가물의 사용가치(질)를 통해 좌변의 ‘가치’를 표현했지만, 이제 그것은 단일화됨에 따라 질적 다양성은 무의미해지고 다만 그것의 양을 통해서만 좌변에 오는 것들의 가치를 ‘표현’하게 된다.
1)-3. 따라서 이전의 도식은 상이한 질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질적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양변 모두 양적인 것으로 환원됨으로써 순수하게 양적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좌변의 모든 항들은 우변의 단일한 척도에 의해 객관적으로 비교가능한 양으로 동질화된다. 달리 말하면, 우변의 이 등가물을 통해 단일한 척도에 의해 비교가능한 비교공간이 만들어진다. 좌변의 생산물들을 하나의 괄호로 묶은 것은 바로 이런 사태를 표시한다. 그 비교공간이 바로 생산물의 가치를 양적 척도로 비교하고 계산하는 상품세계를 이룬다. 뒤집어 말하여 그 비교공간 안에 들어가는 생산물은 가치를 갖는 ‘상품’이 된다. "모든 상품들은 질적으로 동등한 것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양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가치량으로 나타난다."[맑스, 김수행 역, 『자본론』Ⅰ-상, 85쪽]. 이렇게 비교되는 가치는 하나의 척도에 의해 양적으로 비교되는 점에서 값어치가 아닌 양적인 가치가 된다. ‘가치’라는 말에서 따옴표는 떨어지고 질적인 것으로서의 ‘가치’라는 순수하게 양적인 관계로서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가치 일반 혹은 가치로 대체된다. 표현적인 관계를 표시하던 등호는 이제는 그냥 객관적인 양적 등가관계를 뜻하는 것이 된다. [...] 그런데 여기서 우변의 등가물은 다른 생산물이 자신의 자리에 오는 것을 거부하고 배제한다. "상품세계에 속하는 모든 상품[단 하나의 상품을 제외하고]이 등가형태로부터 배제"(맑스, 김수행 역, 『자본론』Ⅰ-상, 85쪽)된다. 등가물의 선택은 주체의 자리에 있는 좌변의 선택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표시하고자 인정받는 모든 생산물, 그 모든 ‘주체’들에게 강요되는 어떤 초월적(transcendent) 조건이 된다. [...] 그리고 이 도식에서는 우변의 등가물과 교환될 수 있는 한에서만 좌변의 상품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상품들이 오직 하나의 등가물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할 때, 그리고 그러한 가치가 양적 가치로 환원될 때, 이전에 존재하던 표현적 관계가 양적인 등가관계로 대체되는 것이다. 표현적 관계의 다양성도 가치관계의 단일성으로 대체된다. 그 단일한 등가물은 상품 가치를 재현/표상하는 것, 가치의 유일한 대표자가 된다. 그것만이 유일한 척도이다. 가치의 표현적 관계는 이제 가치의 재현적 관계로 대체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가 일단 성립되고 나면 이제 '주어'의 자리에 있는 상품 내지 상품소유자의 유일 관심은,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자신이 그 등가물의 양으로 표시되는 가치를 제대로 재현하고 있음을 인정받는 문제일 뿐이다. 역으로 척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등가물의 유일 관심은, 자신이 상품들의 가치를 정확하게 재현한다는 것을 믿게 하고, 그러한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다(76~8쪽).
2) 화폐형태
화폐형태는 일반적 가치형태에서 일반적 등가물의 자리를 화폐(M/G)가 차지한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폐형태의 도식이 앞의 것들과 비교되는 것은, 이 도식에서 화폐라는 동질적인 어떤 재화의 양이 가치를 표시하는 단일한 척도가 되었음을 명시한다. 즉 가치를 재는 비교의 척도로 기능하는 것은 등가물의 ‘질’과는 무관한 ‘양’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모든 상품들이 공통적으로 화폐로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이 가치라는 상품의 성격을 확정시킨 것이다."(맑스, 김수행 역,『자본론』Ⅰ-상, 97쪽). [...] 좌변의 주어 자리에 있는 생산물의 가치를 그 등가물인 화폐가 표현한다기보다는 역으로 그 생산물(얼마짜리 상품)이 화폐의 가치를 재현하는 것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얼마짜리라는 화폐의 가치를 제대로 표상하지 못하면, 그 어떤 것도 상품이 되지 못하며, 가치를 갖기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하여 맑스는 "화폐가 상품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이 화폐를 대표한다."(맑스,『요강』Ⅰ, 187쪽)이라고 했다. 화폐는 모든 상품들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상품으로서의 생명을 부여하는 존재, 즉 상품세계의 신이다(이진경,『자본을 넘어선 자본』, 그린비, 2004, 78~80쪽).
4. 화폐와 물신주의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를 표현하는 표현적 능력이 타인에 대해 유의미한 활동이, 나아가 그 능력과 활동의 사회적 성격이, 가치라고 불리는 <노동생산물 자체의 물적 성격으로 보이게>(맑스, 김수행 역, 『자본론』Ⅰ-상, 93쪽)되는 것을 지칭한다. [...] 이런 사태는 화폐가 생산물을 상품세계 안으로 통합하는 초월적 중심이라는 사실의 다른 표현이다. [...] 물신주의란 초월자로서의 화폐에 의해서 상품의 가치가 결정되는 현실적인 메커니즘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 화폐와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는 이처럼 화폐화될 수 없는 모든 것을 점차 제거하고 축소하며 ‘부정’한다. 화폐는 이질적인 것을 동질화하고 다양한 것을 획일화하는 초월적인 가치인 것이다. [...] 그래서 맑스는 『요강』에서 <화폐가 단순한 유통수단으로 나타나는 하인의 형태에서 갑자기 상품 세계의 지배자이자 신이 된다. 상품들은 화폐의 지상의 존재인 반면, 화폐는 상품들의 천상의 존재를 표상한다.>(1, p, 212)라고 말한 것이다(81~4쪽).
5. 화폐의 기능과 발생
1) 화폐의 기능
1)-1. 단순한 가치형태나 확대된 가치형태는 생산물의 가치를 표현하는 자연발생적 형태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화된 가치형태나 화폐형태는 결코 그렇지 않다. 확대된 가치형태가 진화해서 일반화된 가치형태나 화폐형태가 되는 것이 아니며, 그 사이에는 거대한 심연이, 근본적인 비약이 존재한다고 했다. 일반화된 가치형태나 화폐형태는 어떻게 성립하게 되는 것일까? 그 비약은 대체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이에 대해 말하기 전에 우선 화폐의 기능에 대해 간단히 말하고 시작하자. 맑스는 이를 '화폐 또는 상품유통'이라는 제목 아래 『자본』Ⅰ권의 3장에서 소개하고 있다. 거기서 맑스는 화폐의 기능을 가치착도, 유통수단, 축장수단, 지불수단, 세계화폐 등의 순서로 소개한다(85~6).
1)-2. 여기서 가치척도의 기능을 가장 먼저 언급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물건이 화폐가 되기 위한 논리적 전제이기 때문이다. 이는 가치형태론에서 화폐가 성립되는 과정을 통해 살펴본 것이기도 하다. [...] 여기서 화폐의 기능은 '화폐 또는 상품유통'이라는 제목 아래서 기술되고 있는데, 이는 『자본』에서 화폐에 대한 관심이 벌금이나 수전노 식의 축재가 아니라 상품의 교환과 유통이라는 경제 기능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즉 교환의 수단이나 투자되어 증식되는 수단으로서 화폐를 다루려는 관심이 '상품유통'이라는 제목 아래 화폐를 다루게 한다는 것이다. 채권/채무와 지불수단의 기능 또한 지불이 연기된 상품유통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제한해서 다루는 것도 동일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1-3) 그렇지만 근대 이전의 세계에서 지불수단은 상품유통에서 발생한 채무보다는 경제적이지 않은 이유에서 발생한 채무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벌금, 증여금, 지참금, 조공 등이 그것이다. 이는 상품의 교환이나 상품유통과 무관하게 발생한다. 따라서 지불수단의 기능이 유통수단의 기능에서 발생한다고 본다면, 논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맑스가 앞서 말한 관심 속에서 화폐를 다루면서도, '화폐 또는 상품유통'이라고 명명된 장을 '가치척도', '유통수단', '화폐'라는 제목의 절로 나누고, 지불수단을 유통수단과 구별되는 세번째 절에서 다루는 것을 어쩌면 이러한 차이를 가시화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건 중요한 것은 유통수단의 기능을 화폐의 일차적이고 본질적인 기능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화폐를 교환수단 내지 유통수단으로서 간주하고 거기서 다른 기능을 추론하는 경우, 화폐의 전혀 다른 기능이 작동하고 사용되는 양상을 놓치게 된다. 이는 특히 근대 이전의 사회를 이해하면서 상품유통이 일반화된 근대세계의 이미지를 그 이전의 사회에 투사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래서 폴라니는 "화폐를 교환수단[유통수단]으로 정의하는 숙명적 과오는 인류학자들에 의해 부여되어 무문자사회에까지도 적용되었다. [...] 화폐에 대한 이러한 좁은 정의는 화폐의 본질에 관한 왜곡된 이미지를 낳았으며, 결국 비시장사회의 경제분석에서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이 되었다."[폴라니, 『사람의 살림살이』 1권, 206~7].
2) 화폐형태의 발생
2)-1. 화폐는 시장에서 상품교환이 확대되고 발전하여 나타나는 게 아니라, 다시 말해 상품교환의 발전을 통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화폐가 있음으로 인해서 비로소 생산물들이 상품으로 교환될 수 있음을 뜻한다. 여기서는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와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를 확실하게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화폐가 유통의 발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면, 다른 이유로, 즉 지불수단으로서 사용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베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화폐는 國定的 지불수단과 일반적 교환수단의 역할을 해왔다. 역사적으로 이 두 가지 중, 즉 국정적 지불수단의 기능이 더 오래된 것이었다. 이 단계에서 화폐는 교환되지 않는 화폐였다. 교환이 없는 경제에서도 화폐는 하나의 경제로부터 다른 경제로, 교환에 기초를 두지 않고 지급될 수 있는 지급수단으로 필요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조공이나 수장에게 보내는 증여물, 결혼십의 납폐, 신부 지참금, 살인 벌금, 속죄금, 벌금 등이 그 전형적인 경우로, 지불수단으로 납입되는 것이다[베버, 『사회 경제사』, 253].
2)-2. 폴라니는 채권-채무관계를 시장에 선행하는 원시적인 현상이라고 말한다[폴라니, 『사람의 살림살이』, 1권, 39쪽].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를 이러한 채권-채무관계로, 혹은 형법적인 범죄로 소급해서 설명한다. 지불이란 채무자나 범죄자, 부정한 자, 신분이 낮은 자 등에게 주어진 책무였다는 것이다. "채무를 진 사람이 결제에 사용한 단위가 물리적 존재일 때 화폐의 완전한 지불수단적 용법이 나타난다."(폴라니, 앞의 책, 210쪽_. 교환스단으로서의 화폐의 용법은 원시사횡서는 거의 아무런 중요성을 지니지 않는다(폴라니, 같은 책, 232~3쪽). 반면 근대사회처럼 "화폐가 사회 속에서 교환수단으로서 확립되면 [...] 화폐는 그것이 교환수단이기 때문에 지불수단이 된다."[폴라니, 같은 책, 211쪽] 화폐는 상품의 유통과 무관하게 지불수단으로서 국가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것이 유통에 투입되고 사용되면서 상품들의 가치를 재고 비교하게 하는 가치척도가 된 것이다. 화폐는 확대된 가치형태 내부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 바깥에서, 즉 경제의 바깥에서 국가에 의해 만들어져 경제적 교환 내부로 끌어들여진 것이라고. 하지만 화폐의 역사는 이러한 추론조차도 성급한 것이라고 말한다. 지불수단으로의 화폐가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와 동일한 것이라는 잘못된 가정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 교환수단으로서의 화폐는 어디에서 발생하였는가? 베버는 "일반적 교환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은 대외 교역에서 시작된 것이다."[베버, 같은 책, 255쪽] 즉 "두 나라 사이의 평화상태는 양국의 지배자 간에 항상 증여가 행해지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곧 상업적 성질을 가진 추장교역이며, 추장상업은 이로부터 발달했다. 증여가 단절된다는 것은 전쟁을 의미했다."(베버, 같은 책, 같은 쪽).여기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교환수단으로서의 화폐가발생하는 지점 역시 내부적인 교환, 혹은 경제적 교환관계의 내부가 아니라, 국가가 관여된 대외교역이었다는 사실이다. 폴리니도 교역의 기원이 경제 내부가 아니라 외부영역에서였다고 지적한다. "시장은 주로 경제의 내부에서 기능하는 제도가 아니고, 제도 밖에서 기능하는 제도였다. 시장은 원격지 교역의 회동장소였다. 본래의 [내배부의] 국지적 시장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폴라니, 『거대한 변환』, 79]
2)-3. 교환수단으로 화폐가 발행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일반적 등가물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내적인 교역이 발전한 곳에서도 여러 종류의 등가물이 사용되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국가 발행 화폐의 경우에도 유일한 등가물의 지위를 차지할 수 없었다. 화폐가 그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교역과 별개의 과정인 조세를 통해서였다. 에두아르 빌은 그리스의 도시 코린트의 전제정과 관련해서 화폐가 교환, 상품, 혹은 상업의 요구로부터 파생된 것이 아니라 조세로부터 파생된 것이라고 주장한다[들뢰즈/가타리, 『천 개의 고원』, 2권, 231쪽].
제4장. 자본과 잉여가치
1. 가치론의 공리계
2. 노동가치론의 이율배반
1) 자본의 일반적 공식
1)-1. 『자본』 1권의 4장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에서 맑스는 '화폐로서의 화폐'와 '자본으로서의 화폐'를 구별한다. 전자는 유통수단으로서 기능하는 화폐인 반면 후자는 그 자체의 양적 증식을 자신의 목적으로 하는 화폐다. 전자는 쌀을 팔아 옷을 사는 농부의 화폐가 그것이며 후자는 고리대금없자의 화폐가 그것이다(109쪽).
1)-2. 화폐가 단순히 상품의 유통수단으로 되는 경우를 보자. 판매는 상품(쌀)을 화폐로 바꾸는 것이니 C―M으로 표시할 수 있는 반면 구매는 그 화폐로 다시 옷이나 농기구를 사는 것으로 M―C'으로 표시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표시하면 C―M―C'이 된다. 이와는 달리 자본가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는 화폐를 갖고 시작하는데 상품을 그것으로 구입한다. M―C. 그러나 그 상품은 사용하려고 사는 게 아니라 다시 팔려고 사는 것으로 그것을 다시 팔아서 화페로 바꾼다. C―M'. 이를 합치면 M―C―M'이 된다. 여기서 M과 M'는 모두 화폐이다. 그런데 M'=M+ΔM이어야 한다. 여기서 ΔM는 화폐의 증가분을 나타낸다. 가령 상품을 100만원어치 샀다가 팔아서 10만원이 남았다면, M'=110만원(100만원+10만원)이 된다. 단순한 상품유통의 경우 시작과 끝에 오는 C의 질적인 차이가 판매와 구매의 반복을 야기했다면, 여기에서는 양끝에 오는 M의 양적인 차이가 구매와 판매의 반복을 야기한다(110~1쪽).
1)-3. C―M―C'이 상품의 단순한 유통을 표시한다면, M―C―M'는 자본의 유통을 표시한다. [...] 따라서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 자본이란 M――C―M'[독일어로는 G―W―G']으로 표시할 수 있다(자본의 일반적 공식). 이는 자본이란 <증식을 목표로 유통에 투여되는 화폐> 혹은 <자기증식하는 화폐>임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 도식을 비교함으로써, 맑스는 두 가지 도식이 상이한 욕망을 표현하는 상이한 배치임을 보여준다. 배치는 계열화의 양상으로 표시되는 사물의 상태를 의미한다. C―M―C'과 M―C―M'은 똑같은 것이 계열화되는 양상이 달라짐에 따라 다른 상태 속에 들어감을 표시한다. 즉 다른 관계를 표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배치 내지 관계가 달라지면 M이나 C의 본성 또한 달라진다. 앞의 배치에서 M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C'을 사기 위한 수단이지만, 뒤의 배치에서 M은 구매와 판매의 목적이다. 요컨대 C―M―C'와 M――C―M'은 상이한 욕망의 배치를 표시하는 도식이다. 전자에서 욕망은 사용가치라는 질적 대상을 추구하지만, 후자에서는 양적인 증식을 추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ΔM은 자본의 본질적 욕망이고, 자본의 본질을 정의하는 욕망을 표현하며, 무한한 자본의 증식을 위해서 활동하게 하는 권력의 성분을 포함한다. 자본가란 이러한 자본의 욕망에 동일화되어, 그것에 따라 활동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자본가란 자본의 이러한 운동논리에 따라서 움직이고 행동하는 존재다. 이런 의미에서 맑스는 자본가란 자본의 의식적 담지자/대행자라고 말한다(111~3쪽).
1)-4. M―C―M', 이는 자본의 운동을 표시하는 일반 공식이지만, 동시에 화폐가 자본으로서 사용되는 배치를 표시한다. 이를 '화폐의 자본주의적 사용'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화폐의 자본주의적 사용'은 화폐의 자본주의적 운동을 무한히 연장하며, 무한한 자본주의적 욕망을 생산한다. 이는 직업 자본가만이 아니라, 가령 증식을 위해 부동산이나 증권을 사는 경우나, 이자를 받기 위해 돈을 투자하는 경우에도 해당된다. 이러한 배치 자체가 바뀌지 않는 한, 생산력의 발전이나 물질적 부의 증가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서 가져가는" 그런 종류의 관계를 배태하기는커녕, 반대로 화폐의 증식을 추구하는 욕망에 따라서 사용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도식을 통해서 맑스는 판매와 구매의 순서를 바꾸는 것만으로, 혹은 M과 C의 순서를 바꾸는 것만으로 전혀 다른욕망의 배치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기도 한다(113쪽).
2) 자본의 일반적 공식의 모순
2)-1. 자본의 일반적 공식은 자본 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모티브가 바로 가치의 증식이고 증식된 화폐로서 ‘잉여가치’(ΔM)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이 있다면 자본의 운동은 무한히 계속될 수 있지만, 그것이 없다면 자본의 운동은 종식된다. 거기서 화폐는 자본이기를 중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의 일반적 공식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바로 가치의 증식이자 증식된 가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M―C―M'에서 M보다 M'이 더 커야 한다. 어떤 x의 가치의 크기를 V(x)라고 표시하기로 하면, 이는 다음과 같이 표시된다.
즉 V(M)〈 V(M') ― (1)
그런데 자본에 의한 구매도, 판매도, 상품의 구매와 판매인 한 가치의 법칙에 따라서 등가교환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공리 ① , 즉 교환의 공리). 즉 M―C에서 V(M)=V(C), 그리고 C―M'에서 V(C)=V(M')이어야 한다.
따라서 V(M)=V(M') ― (2)이어야 한다.
하지만 식 (2)는 식 (1)과 모순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증식하는 화폐라는 자본의 정의는 [노동가치론의] 교환의 공리와 모순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은 구매와 판매로 이어지는 그러한 교환을 통해서만 증식될 수 있다. 여기서 자본의 일반적 정의는 근본적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즉 화폐가 자본으로 변환되는 것은 "반드시 유통영역에서 일어나야 하며, 또 그러면서도 유통영역에서 일어나서는 안 된다."(김수행 판, 217쪽). 이러한 이율배반을 맑스는 ‘자본의 일반적 공식의 모순’이라고 한다.
2)-2. 이를 다른 식으로 말한다면, 가치론의 첫 번째 공리인 등가교환의 원칙에 따르면 자본의 증식이 설명될 수 없고, 자본의 증식을 정의하려면 등가교환의 원칙에서 벗어난다. 등가교환의 원칙을 포기하면, 노동가치론의 다른 공리들은 무효화된다. 가치대로 교환되지 않는데, 가치의 크기나 척도, 기원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증식하는 화폐라는 자본의 정의를 포기한다면, 경제학은 정작 설명해야 할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자본에 대한 그러한 정의 없이 이윤, 이자, 소득, 투자, 자본에 대한 모든 설명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의 증식은 그 자체로 노동가치론의 근본적 이율배반(antinomy)을 보여준다. "자본은 (C와 M의) 유통에서 발생할 수 없고, 또 유통의 외부에서 발생할 수도 없다."(김수행 판, 216쪽). 먼저, 자본은 유통 외부에서 발생해선 안 된다. 상품생산자는 다른 상품의 소유자들과는 접촉하지 않고선, 즉 유통의 외부에선 가치를 증식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은 유통에서 발생해야 하는 동시에 유통의 외부에서 발생해야 한다." 그러나 유통 내부에서 발생하려면 등가교환의 공리를 포기해야만 한다(114~6쪽).
2)-3. 교환 내지 유통이 등가교환의 공리를 따르는 한, 증식의 원천이 교환가치 자체에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아무리 교환해도 같은 양의 교환가치와 교환될 뿐이다. 그런데 맑스는 이미 교환가치와 사용가치를 구분해야 한다고 했다. [...] 그렇다면 노동가치론에서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교환가치를 생산하는, 그래서 가치증식의 원천이 되는 특별한 사용가치를 상정하는 것이다. 아니, 가치의 원천인 노동(공리 ②)을 그러한 특별한 사용가치라고 정의한 것이다. 그러면 노동을 구매했다가 판매하는 거래로서의 유통을 통해 자본은 가치의 증식을 도모한다는 결론을 끄집어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노동을 가치가 아니라 사용가치로 정의하면 또 다른 난점이 발생한다. 노동이 사용가치라면, 마치 공기가 그렇듯이 그 자체로는 자본이 구매하고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맑스는 노동이 자본에 의한 매매 과정 속에 들어가려면, 매매될 수 있는 어떤 상품의 사용가치, 즉 교환가치를 갖는 어떤 사품의 사용가치로 노동을 정의해야 한다(116~7쪽).
2)-4. 여기서 맑스는 노동과 노동력을 서로 구별한다. 자본가는 노동력이란 상품을 사서, 새로운 교환가치를 생산하기 위해서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화폐와 교환되고 거래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이고, 그 거래는 노동력의 가치에 따라서 이루어지며, 노동은 그 노동력이란 상품의 사용가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과정을 좀더 뚜렷하게 구별해 보면, 가치증식을 표시하는 일반적 공식인 M―C―M' 보다 좀더 복잡하다는 게 드러난다. ① 먼저 자본가는 노동력이란 상품을 구매한다. 이는 M―C의 공식 그대로 따른다. 그렇지만 그걸 그대로 다시 팔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남는 게 없다. [...] ② 다음으로, 구매한 노동력의 사용가치를 이용해야 한다. 즉 노동을 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노동을 시키는 것은 가치증식을 위한 것이고 잉여가치를 위한 것이므로, 상품으로 팔 수 있는 무언가를 생산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자본가가 구매한 애초의 상품(노동력)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상품 C'이 만들어진다. 그다음에는 이 새 상품 C'을 판매해서 돈으로 바꾼다(C'―M').
이 과정은 다시 다음과 같이 공식화 된다.
M―C …… C'―M'.
이러한 공식에서 점선은 노동력 상품의 사용가치를 사용하는 과정, 즉 노동과정을 표시한다. 이는 상품의 교환과정이 아니라 노동력의 사용 과정이고, 그것을 사용해서 [자본가는] 상품 C'을 생산하는 생산과정이다. 여기서 노동력이란 상품을 구매하는 M―C도, 생산된 상품을 파는 C'―M'도 모두 등가교환에 따라 이루어진다. 즉
V(M) = V(C) ― (3)
V(C') = V(M') ― (4)
여기서 C와 C' 사이에는 노동력을 사용하는 과정이 숨어 있는데, 여기에서 생산된 C'의 가치는 C와 같은 이유가 없다. 상품의 유통과정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C의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려고 할 것이다. 그게 자본의 정의에 부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V(C) 〈 V(C')이다.
(3)과 (4)를 이 식에 연결하면,
V(M) = V(C) 〈 V(C')=V(M')가 된다.
이로써 V(M) 〈 V(M')이어야 한다는 자본의 증식이, 등가교환의 공리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설명될 수 있게 된다(113~9쪽).
3) 노동가치론의 이율배반
3)-1. 이제 우리는 노동과정과 가치화Verwertung[가치증식valorization] 과정을 다룬 그 뒤의 서술에서 제시한 대답을 통해 다시 질문해야 한다. 노동력이 상품이라는 관념, 즉 노동이가치를 생산하는 특별한 사용가치라는 관념이 정말 노동가치론의 공리들에 부합하는가?
① 노동가치론 공리계 안에서 과연 노동력은 상품으로 정의될 수 있는가? 즉 노동력은 가치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노동가치론의 공리에 의하면, 생산이 공리에 따라, 가치는 즉 가치를 갖는 상품은 오직 인간의 노동만이 말들어낼 수 있으며, 척도의 공리에 따라, 그것의 가치는 노동시간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런데 노동력은 인간 노동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며, 팔거나 사용하지 않아도 소모되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 노동력은 인간의 노동이 생산한 게 아닌데도 '노동력이 가치를 갖는다'고 한다면, 이 명제는 인간의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하는 유일 원천이라는 '생산의 공리'[공리 ②]와 대립한다. 하여 노동력이 가치를 갖는 상품이라고 정의하려면 이 생산의 공리를 포기해야 한다(119~21쪽).
② 노동력은 노동력의 사용가치라는 정의, 즉 증식된 가치를 생산하는 특별한 사용가치라는 새로운 정의는 과연 노동가치론의 공리들과 부합하는가?
노동가치론의 공리에 의하면, 햇빛은 옥수수를 키우거나 오징어를 말리는 데 필수적이지만 가치를 생산하거나 증가시키지 않으며, 겨울츼 찬 기온은 명태 가공에 필수적이지만 명태의 가치를 증가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숲속의 초목이 노루를 키우지만, 노루의 가치는 그것과 무관하며 오직 그것을 잡는 인간의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된다고 했다[척도의 공리]. [...] 노동가치론의 공리에 의하면, 사용가치는 가치를 증가시키지 못한다. 이미 본 것처럼 가치가 양적인 측면이라면 사용가치는 질적인 측면이다. 그런데 질적인 측면은 양적인 측면과 서로 독립적이다. 즉 노동이 사용가치고 질적 성분인 한, 그것은 가치라는 양적 성분의 변화와 무관하다. 심지어 가치는 노동의 질과도 무관하다. [...] 전자는 5T짜리 2개를, 후자는 2T짜리 5개를 만들었으니 10시간 노동은 똑같이 10T만큼 생산한 것이다. 즉 가치의 양은 10시간이라는 양에 의해서 결졍된 것이지, 사용가치로서 노동(질)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용가치와 가치의 개념 구별에 의하면, 노동을 사용가치로 정의함으로써 가치의 증가를 설명할 수는 없다(121~2쪽).
3)-2. 노동가치론의 공리계 안에서 가치의 증식이라는 자본의 본질이 정의되려면 노동가치론의 가장 근본적인 공리를 반박하고 기각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해서 가치증식하는 화폐로서의 자본을 노동가치론 안에서 해명하기 위해서 노동과 노동력에 관한 맑스의 새로운 정의를 받아들이는 순간, 노동가치론에서 전제하는 가치의 개념과 가치생산의 공리를 버려야만 하는 것이다. 이는 자본의 일반적 공식이 갖는 모순을 넘어서기 위해 가능한 유일한 선택지가 노동을 사용가치로, 노동력을 가치를 갖는 상품으로 정의하는 것이었지만, 바로 그렇게 할 때 그 개념들이 노동가치론의 다른 공리, 즉 생산의 공리와 척도의 공리와 또다시 충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가치론의 공리들로 정합적인 이론을 구성하기 위해서 노동가치론의 공리 자체와 상반되는 그런 개념이나 명제가 필요하다는 이율배반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로써 ‘자본의 일반적 공식의 모순’은 이제는 ‘노동가치론의 이율배반’으로 이전되는 것이다. 맑스는 이와 같이 정치경제학자들이 지닌 한계를 교정시켜 그것을 넘게 해주고, 노동가치론에 내재하는 모순을 내파시키는 내재적 적합성을 추구하여, 정치경제학의 외부를 사유하는 것이다(122~4쪽).
3. 노동과 노동력
노동력은 결코 가치를 갖지 않으며, 따라서 상품이 아닌데 어떻게 해서 현실적으로 상품으로 거래되는가? 즉 그것은 어떻게 가치의 원천이 되고, ‘증식된 가치’의 원천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맑스는 노동은 가치가 아니지만 ‘가치화’(Verwertung)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노동력을 상품이 아니지만 ‘상품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맑스는 "노동력이 상품화되기 위해서는 상품이나 매매, 소유의 개념에 특별한 변형이 필요하며"(김수행 판, 220~1),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특별한 역사적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김수행 판, 222~3)을 보여준다. 가치화된 노동과 노동력의 가치를 비교하여 영유하여 잉여가치를 착취 내지 포획하는 메커니즘은 부르주아지가 만들어내는 것이다(이진경, 125쪽).
1) 노동의 가치화
1)-1. 맑스는 노동을 통해 ‘증식된 가치’인 ‘잉여가치’의 생산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묻는다. 맑스의 이에 대한 대답은 그것(노동)은 가치가 아니지만 가치화될 수 있다고 본다. 가치화됨으로써 노동은 가치를 생산하고 증식된 가치를 생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질적인 것(사용가치)가 양적인 것(교환가치나 잉여가치)으로 됨으로써만 가능하다. 즉 양화를 통해 가능하다. 양화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질적인 것들을 동질화해서 비교하게 해줄 척도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노동이 한편으로, 양화되는 데에는 일정한 현실적 조건이 수반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의 결과를 양화해서 판매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을 화폐화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126~7쪽].
1)-2. 노동의 가치화란 이처럼 노동의 결과를 화폐에 의해 양화하고, 그것을 통해 노동 자체를 양화하는 것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노동의 결과의 가치화가 화폐를 척도로 이루어진다면, 노동의 직접적인 가치화는 시간에 의 해서 이루어진다. 노동을 가치화하기 위해 구매해야 하는 노동력이란 상품이 시간을 단위로 지불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노동의 가치화는 화폐에서 노동의 결과로, 그 노동의 결과에서 노동 자체로 소급되는 두 가지 벡터를 따라서 이루어지며, 이로 인해서 시간과 화폐가 중첩되어 가치의 척도로 자리를 잡게 된다[127~8쪽].
1)-3. 노동의 결과에서 노동으로 소급되는 이러한 가치화의 벡터를 통해 질적인 사용가치인 노동은 양적인 가치로 변환된다. 사용가치가 가치의 증가에 기여할 수 없음에도 노동이 가치의 증식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노동을 '가치화' 함으로써다. '노동의 가치'라는 관념은 노동의 결과를 화폐화하고는 그것으로 노동을 가치를 갖는 어떤 것으로, 일정한 크기를 갖는 '가치'로 만들어버리는 가치화의 소급적 벡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증식된 가치의 기원, 가치 자체의 기원은 노동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노동의 가치화다. 이를 다루기 위해서 맑스는 생산과정을 노동과정과 가치화과정(가치증식과정)으로 구분한다. 전자는 노동력의 사용가치를 사용하는 질적 과정이지만, 후자는 동질화하는 어떤 척도와 노동의 결과를 화폐화함으로써 노동을 가치화하는 양화 과정이다. 자본주의에서 노동과정은, 노동이 언제나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판매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항상 가치화과정으로 진행된다. 즉 자본주의에서 노동과정은 항상 가치화과정 안에서만 존재하고 존속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사정으로 인해 노동과정은 노동을 가치화하려는 자본의 의지 아래 시작되고 진행되게 한다(128~9쪽).
1)-4. 가치화과정은 노동이라는 사용가치를 가치라는 양으로 변형시켜 증식된 가치를 획득하는 과정이다. [...] 자본의 일반적 공식에서 자본의 욕망을 규정했던 ‘증식된 가치’(ΔM)는 바로 이러한 가치화과정의 결과물이자 동시에 자본가로 하여금 가치화 과정에 나서게 하는 동력인 것이다. 이런 연유에서 가치화과정은 항상 자본에 의한 가치의 증식과정이다. [...] 이로써 비로소 자본의 일반 공식에서 요청된 '요술', 즉 등가교환의 원칙에 따라서 구매와 판매를 행하는 데도 가치가 증식되는 자본의 요술이 해명될 수 있었다. 노동을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사용가치로 정의하여 노동과 노동력을 구별하는 것은 이처럼 노동의 가치화가 진행되는 과정에 대한 규명을 통해서 비로소 가치증식의 비밀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맑스는 "요술은 드디어 성공했다.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된 것이다."[맑스, 『자본』 1권, 7장, 김수행 판, 258쪽 ; 이진경, 126~9쪽).
2) 노동력의 상품화
2)-1. 노동을 통한 가치화과정(가치증식과정)이 노동력 상품화의 논리적 이유의 제공이라면, 반대로 노동력의 상품화는 노동을 가치화하기 위한 현실적 조건을 제공한다. [...] 그러나 노동력은 상품이 아니다. 노동력은 일할 수 있는 능력일 뿐이다. 그것을 애초에 만들어내는 것은 자연의 능력이지 가치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인간의 노동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가치론에서 말하는 의미의 가치를 갖지 않는다. 가치를 갖지 않기에 상품 또한 아니다. 따라서 노동력을 자본가가 구매하여 사용할 수 있기 위해선 노동력이 상품화되어야 한다. [...] 이를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어야 한다. 즉 그것을 자신의 의사에 따라서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또 하나, 노동력의 처분권을 자신이 갖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노동력을 판매하지는 않는다. [...] 노동력의 상품화는 노동력 처분권을 제한하는 신분적 조건에서 벗어나는 것과 더불어, 노동력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생산수단과 생계수단을 빼앗는 어이없고 참혹한 사태를 전제로 해서만 가능하다. 맑스는 이를 '신분으로부터의 해방'과 '생산수단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의미에서 이중의 해방이라고 부른다. [...] 이는 논리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정치경제학자들이 할 수는 없었던 것이었지만, 식민주의자들의 배를 타고 간 자본가들은 어디서든 실제로 행했던 것이다. 이는 정치경제학의 공리계 밖에 있지만, 그 공리계를 조건짓고 가능하게 하는 외부다. 노동력의 사용인 노동이 ‘가치를 생산하는 특별한 사용가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현실적 조건 때문이다. 노동의 가치화는 노동력의 상품화 없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정치경제학자들은 부르주아지의 손안에 있다. 요컨대 가치증식의 논리적 비밀을 담고 있는 저 특별한 노동의 개념은, 논리에 반하는 부르주아지의 현실적 행동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던 셈이다(130~3쪽).
2)-2. 우리는 자본의 일반적 공식 M―C―M'이 M―C……C'―M'으로 변형되어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노동의 가치화와 노동력의 상품화 과정을 고려한다면, 그 공식은 이제 다음과 같이 고쳐 쓸 수 있다.
M―C(노동력)
∥
노동―C'(상품)―M'
먼저 M―C는 상품화된 노동력의 구매를 표시한다. 즉 C는 노동력이란 상품이다. 이 상품의 사용가치가 노동인 것이다. 노동력과 노동은 하나의 동일한 상품의 두 가지 측면이므로 등호로 표시된다. 그리고 C'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사용해서 생산한 것이다. 이는 교환에 의해서 획득된 것이 아니라 노동력을 사용해서 생산에 의해서 획득된 결과물이기 때문에 C와 질적으로 뿐만 아니라 양적으로 다르다. 즉 자본가가 구매한 상품 C는 노동력이지만, 노동력을 이용해서 얻어낸 상품 C'은 그와 다른 재화가 된 것이다. 이를 판매해서 이 공식의 목표인 화폐 M'가 얻어진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이렇게 얻어진 M'을 통해 C'을 생산한 노동은 가치화된다. 노동력 상품화에 투여된 화폐 M과 노동의 가치화를 통해 획득된 M'의 차이가 증식된 가치인 ‘잉여가치’(ΔM)인 것이다. 자기증식하는 요술의 비밀, 그것은 M―C―M' 사이에 숨어 있는 이중의 과정을 통해서 연출된 것이다(이진경, 135쪽).
3) 노동의 개념
3)-1. 자본가가 노동력을 상품으로 구매해서 사용하는 것이 노동이며, 그런 사용에 의해서 노동력의 판매자는 비로소 노동자가 된다는 것이다. 노동이란 이처럼 노동력을 구매해서 사용하는 사회적 관계 안에서 구체적으로 정의되는 것이지, 정신 활동의 본성이나 특징으로 일반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노동이란 가치화된 활동이다. 즉 노동력이란 상품으로 구매되고 자본에 의해서 사용되어 가치화되는 활동이 바로 노동인 것이다. [...] 요컨대 노동자가 있고, 그의 노동이 있고, 그 다음에 그것이 매매되는 게 아니라, 노동력의 매매와 사용이 있고, 그것에 의해서 노동과 노동자가 정의된다는 것이다. [...] 노동력을 상품으로 매매하는 관계가 존재할 때 비로소 노동과 노동자가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누가 무슨 일을 하는가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방적노동이 노동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노동력의 지출이기 때문이지, 그것이 방적이라는 특수한 노동이기 때문은 아니다.>(김수행 판, 251쪽; 이진경, 같은 책, 136~8쪽)
3)-2. 혹자는 "당신이 지금 인용하고 있는 『자본』의 바로 그 부분에서 맑스는 노동을 합목적적 활동이라고 정의하지 않았던가?그래서 '꿀벌의 집은 인간 건축가들을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가장 서투른 건축가를 가장 훌륭한 꿀벌과 구별하는 점은, 사람은 집을 짓기 전에 이미 자기의 머리 속에서 그것을 짓는다는 것이'(1권, 236쪽)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삽화처럼 지나가며 드러나는, 1845년 이래 스스로 던져버리고자 했던, 그러나 긴장을 늦춘 순간 무심코 되살아난 낡은 유제가 아닐까?" [...] 노동이란 ‘도구를 사용하는 활동’이나 ‘의식적이고 합목적적인 활동’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서 가치화된 활동’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예는 노동력의 소유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활동은 '가치화된 활동'으로서 노동이 된다. 이러한 경우는 자본주의가 비자본주의적 활동조차도 그 결과를 상품화함으로써 가치화하는 경우이다. [...] 자본주의는 활동의 결과나 활동 자체를 가치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모든 활동을 착취하고자 한다. 노래, 스포츠, 섹스도 자본에 의해서 가치화되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경우 생산 노동이 될 수 있다.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어떤 활동이, 굳이 인간의 활동이 아니라고 해서 노동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노동이란 생산적인 활동이 가치화를 통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으로 변환되는 그 문턱의 이름이다. 노동이 노동력의 사용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노동가치론의 주장은 '노동력의 사용'에 대한 찬사이고 가치화를 수행하는 한에서 노동의 찬미이지,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어떤 활동 내지 노동자의 본성에 속하는 어떤 활동의 찬미가 아니다. "노동하는 자만이 인간"이라는 인간학적 주장은 가치화되어 가치증식에 기여하는 활동으로서의 노동에 대한 찬미인 동시에 노동하지 않는 인간에 대한 저주이다(이진경, 138~40쪽).
제4장. 착취와 잉여가치
1) 비교와 가치화
1)-1. 이처럼 투여한 자본과 산출된 결과의 비교는 사실은 자본가가 노동력을 구매한 화폐의 소유자임을 상기시키는 방식으로 가치증식의 명령어를 발동한다. 여기서 잉여가치에 대한 요구의 실질적 원천은 비교 자체보다는 비교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자본의 소유권이다. 비교하는 이유를 만족시킬 수없다면 더이상 노동력을 구매하지 않겠다는 자본 소유자의 항의이다. [....] 자본가의 항의가 발원하는 곳은, 투여 자본을 철수시키겠다는 위협이라기보다는 동일 자본을 투여해서 좀더 많은 이윤을 획득한 동료 자본가에 대한 선망이고, 그 자본가처럼 좀더 많은 이윤을 획득하려는 욕망이다. [...] 이를 앞서 자본의 일반공식을 변형시킨 도식을 통해서 다시 말할 수 있다.
M―C(노동력)
‖
노동―C'―M'
여기서 윗줄은 노동력 상품화의 계열을, 아랫줄은 노동의 가치화의 계열을 표시한다. 투입된 자본M과 노동결과의 가치화를 통해 획득한 M'을 비교하는 것은 윗줄과 아랫줄을 비교하는 것이고, 동일성의 등호로 연결된 노동력과 노동을 가치화하여 비교하는 것이며, 따라서 수직축을 따라서 비교하는 것이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노동력의 가치와 가치화된 노동의 차이로서의 '잉여가치'이다.
1)-2. 그런데 "남들만큼은 해야지"라고 하는 비교는 노동을 가치화해서 얻은 M' 사이에서 행해진다. 이러한 비교는 <M―C>가 동일한 조건 아래 <노동―C'(노동력)―M'>라는 가치화의 계열 안에서 이루어진다. 역으로 <노동―C'(노동력)―M'>의 결과가 동일한 조건에서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비교하는 <M―C>의 계열 안에서 이루어진다. 어느 경우든 여기서 비교는 앞서와 달리 수평축을 따라 행해진다. 이는 노동력의 가치가 동일하게 지불된 조건에서 획득하는 추가적인 이득과, 혹은 산출된 '노동의 가치'가 동일한 조건에서 지불되는 '노동력의 가치'의 차이와 결부된다. 이는 노동력의 가치와 가치화된 노동의 차이로 정의되는 통상적인 '잉여가치'의 정의에 포함되지 않는 잉여가치를 표현한다. 앞의 것이 소유로 환원되는 비교라면, 뒤의 것은 비교 그 자체가 바로 추가적 이득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앞의 것이 자본가들 사이의 평균적인 잉여가치화와 결부된 것이라면, 후자는 평균에서 벗어나는 잉여가치이다. 각각의 자본가에게 양자는 혼합되어 주어지지만, 사실은 가치의 증식을 위한 자본의 두 가지 전략과 결부된 것이란 점에서 개념적 구별을 필요로 한다.
2) 절대-이윤과 상대-이윤
2)-1. 순수한 비교에 의해 발생하는 이윤에 대해 살펴보자. a가 고용한 노동자들을 A, b가 고용한 노동자들을 B, c가 고용한 노동자들을 C라고 쓰자. 세 집합의 노동자는 모두 책상이라는 동일 상품을 생산하며, 동일 임금으로 고용되어고 한 달간 동일한 시간 동안 동일 기계로 노동을 했다고 하자. 하지만 그 경우에도 그들이 생산한결과물들이 셋 다 동일한 가능성은 0에 가깝다. [...] 기계와 원료 등에 투입된 비용을 제외하고, A는 100개, B는 120개, C는 140개의 책상을 만들었다고 가정하자. [...] 이처럼 다른 노동과의 비교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윤을 산출한다. B와 C는 '노동의 대가'를 받는 경우에도 각각 20, 40개치를 착취당한 것이다. 이를 상대적인 비교에 의해서 획득되는 이윤이란 의미에서 '상대-이윤'이라고 부르자. [...] 반대로 투자한 자본 내지 생산수단의 소유라는 조건의 절대성 위에서 획득한 이윤이라는 의미에서 '절대-이윤'이라고 부르자. [절대-이윤과 상대-이윤의 종합적 상황이라는 의미에서] a는 20개치의 이윤을, b는 40개치의 이윤을, c는 60개치의 이윤을 얻을 것이다. 이는 절대-이윤과 상대-이윤의 합으로 잉여가치의 착취는 비교에 의한 착취로서의 상대-이윤과 소유에 기초해서 얻어지는 절대-이윤이 있다. 착취는 언제나 이러한 이중의 방식으로 행해진다(145~7쪽).
2)-2. 절대-이윤은 생산수단의 배타적 소유에 기초해서, 노동이 산출한 가치의 일부를 노동자에게 지불하지 않는 방식으로 발생하는 잉여가치, 즉 불불노동의 형태로 발생하는 잉여가치로 자본가가 지출한 것 이상이 산출될 때까지 노동하게 함으로써 발생하는 잉여가치라는 점에서 일단 노동시간의 외연적 확대를 통해 발생하는 잉여가치다. 이러한 절대-이윤의 크기는 사회적 평균에 의해 결정된다. a, b, c 모두 절대-이윤은 평균화된 동일한 값을 갖지만 사실상 모든 평균이 그렇듯 평균이란 평균화하는 추세 내지 경향을 의미할 뿐이어서, 평균화된 동일성이란 사실 평균화되는 경향을 갖는 유사 크기를 뜻할 뿐이다.
2)-3. 이에 반해서 '상대-이윤'은 생산된 결과의 직접 비교에 의해서 발생한다. 이른바 '노동의 가치' 내지 '노동의 대가'를 모두 지불하는 경우에도 발생하는 잉여가치다. 이는 착취란 노동의 가치를 다 받지 못해 발생하는 통념을 근본적으로 재고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즉 노동의 대가를 모두 받는 경우에도 착취는 발생한다. 이는 동일 시간 동안 노동한 경우에도 발생하는 잉여가치이고, 따라서 노동시간의 직접적 연장 이전에 발생하는 잉여가치다. 상대-이윤을 획득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다. 노동의 조직방식을 바꾸거나 노동강도를 높이는 것이 대표적이다. 가령 다윈의 외조부 웨지우드는 시간준수에 대해 상과 벌금을 엄격히 하여 노동자들이 출퇴근 시간, 작업시간을 엄수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생산성을 크게 높일 수 있었다고 한다(톰슨, customs in common, 385). 기계나 생산수단의 대체를 수반하지 않는, 즉 노동방식의 변형만으로 발생하는 생산성의 증가는 모두 상대-이윤의 원천이다. [...] 절대-이윤은 노동의 가치화가 노동력의 구매에 투입된 가치를 능가해야 한다는 것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가치화의 결과는 항상 잉여가치를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동자가 받은 돈에 비해서 더 많은 가치를 자본가에게 제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치론의 공리계 안에서 '잉여가치법칙'이 보여주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상대-이윤은 노동을 가치화하는 순간, 가치화된 것의 비교 자체를 통해서 발생하는 잉여가치다. 즉 상대-이윤은 '가치법칙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착취법칙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는 가치호와 동시에 발생하는 잉여가치이고, 노동력의 사용과 동시에, 즉 노동과 동시에 발새하는 잉여가치다. 잉여가치 없는 가치는 없고, 잉여노동 없는 노동은 없다.
제5장. 잉여가치와 계급투쟁
잉여가치란 바로 노동력의 사용을 둘러싸고 발생하는 이런 충돌과 대립관계를 표현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노동력의 사용을 둘러싼 근본적인 적대관계를 의미하며, 노동 내지 생산의 양상 자체가 항상-이미 계급 대립 속에서 규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맑스는 잉여가치를 두 가지 개념으로 구별한다. 하나는 절대적 잉여가치로서, 노동시간의 외연을 연장함으로써 잉여가치를 확대하는 방법과 결부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상대적 잉여가치로서, 노동시간의 외연은 그대로 둔 채 노동력의 가치를 감소시켜 잉여가치를 확대하는 방법과 결부되어 있다.
1. 상품 가치의 구성요소
몇 가지 개념적 정의들에 대하여
― 노동과정 : 자본인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결합하는 과정. 생산수단은 노동수단과 노동대상으로 구별된다.
―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 전자인 '불변자본'constant capital[c]은생산수단에 투여되는 비용은 노동과정을 거쳐도 가치가 변하지 않는데 비용의 형태로 보존되는 자본이다. 후자인 가변자본은 노동자에게 지불되는 임금으로 임금은 노동력의 가치로 정의되지만, 노동과정(가치화과정)을 거치면서 증식된 가치를 생산한다. 임금으로 지불되는 자본은 '가변자본'variable capital[v]이라고 부른다. 이때 증식된 가치를 '잉여가치'surplus capital[s]라고 부른다.
― 생산물의 가치[W] = 불변자본c+가변자본v+잉여가치s의 합으로 표시될 수 있다[W = c+v+s]
― 가치생산물[부가가치] = 노동과정을 통해서 추가적으로 생산된 부분으로 이는 생산물의 가치 W에서 불변자본을 제외한 부분이다. 이는 w = 가변자본v+잉여가치s의 합으로 표시될 수 있다[w = v+s, 즉 불변자본+잉여가치]
― 잉여가치율s' = 추가로 생산된 가치생산물 가운데 가변자본과 잉여가치의 비율을 가리킨다. s' = s/v로 표시될 수 있다. 이는 지불된 노동인 지불노동v와 지불되지 않은 노동인 불불노동s의 비율을 표시한다는 점에서 '착취율'을 표현한다. 여기서 착취율은 자본가가 투자한 총비용c+v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이 아니라 가변자본에 대한 잉여가치율의 비율을 나타낸다.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비율, 지불노동과 불불노동의 비율이 착취율의 개념과 부합한다[ s' = s/v, 즉 잉여가치율=잉여가치/불변자변]. 여기서 착취율은 자본가가 투여한 총비용(c+v, 즉 불변자본+가변자본)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이 아니라 가변자본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인데, 이는 말 그대로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비율, 지불노동과 불불노동의 비율이 착취율의 개념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2. 잉여가치의 외부성
1) 무엇이 잉여가치를 결정하는가?
잉여가치란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생산물 가운데 노동력의 구매에 사용된 부분(가변자본, 임금)을 초과하는 부분이다[s=w-v, 즉 잉여가치=가치생산물-가변자본, 임금].
― s=w-v, 즉 잉여가치=가치생산물-노동력 구매에 사용된 부분(가변자본, 임금)
이 공식은 잉여가치의 양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① 하나는 가치생산물의 양 w이다. 이는 노동이라는 비-가치(사용가치)를 사용해서 가치를 생산한 결과물의 양이다. 가치생산물의 양w의 크기는 가치론의 공리계에 대해 외부적이다. w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노동시간과 노동강도, 노동방식 내지 노동생산력이다. 이것들은 가치법칙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그것은 노동할 의사와 능력을 얼마에 죽 샀는가와는 무관하게 자본가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 노동시간은 생물학적 생존능력의 보존에 필요한 한계 안에서 자본가의 의지에 정해진다. 나아가 그것은 그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에 의해, 그리고 그 결과 만들어지는 사회적 관습과 법 등에 의해 결정된다. 노동강도 역시 마찬가지다. [...] 예컨대 컨베이어 벨트의 회전 속도를 5% 내지 10%, 혹은 그 이상으로 올리는 것은 노동력 구매비용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다만 자본가의 의지와 그에 대한 노동자의 저항에 의해 결정된다. [...] 이는 협업이나 분업에 의해 상승되는 노동생산력에 대해서도 동일하다. 분업이나 기계의 도입, 공장이라는 '완화된 감옥'의 도입 역시 가치론의 공리계에 대해서 외부적이다. 그렇게 해서 증가된 생산력은 사회적으로 평균화되면 개별 가치량의 감소로 귀결되어 전체적으로는 생산된 가치량에 변함이 없는 것으로 된다는 가치론의 가정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것은 외부적 요인에 의한 변화를 가치법칙을 통해 가치론의 공리계 안으로 포섭했음을 뜻할 뿐이며, 결코 가치법칙이 그러한 변활를 창출한 것은 아니다. 하여 w[가치 생산물]은 가치법칙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으며, 가치론의 공리계에 대해 외부적이다.
② 노동력 재생산비용을 의미하는 v 역시 가치법칙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정의상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크기는 나라와 사회마다 상이한 사회적 평균 비용에 의해서 규정되고 그 사회적 비용의 평균은 실제로 자연적, 문화적, 역사적, 도덕덕인 요소에 의해서 결정된다.
2) 잉여가치와 계급투쟁
결국 w나 v나 모두 가치론의 공리계에 대해서 외부적 요인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노동력의 가치나 노동의 가치가 먼저 있고, 이를 일정한 교환의 규칙에 따라서 밀고 당기며 거래하고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24시간 노동 동안 노동력을 사용하려고 하며 가능한 한 임금을 적게 주려는 자본가의 욕망과 그에 반하는 노동자의 욕망이 노동과정의 처음부터 대립-투쟁하여 산출된 결과가 노동력의 가치를 결정하고, '노동의 가치'(노동이 생산물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이다. [...] 한편에서 그것은 노동력의 사용양상을 장악하고 좌우하려는 부르주아의 의지와 노동력의 물리적 담지자로 자신의 신체를 자신의 의지 아래 두려는 노동자의 의지가 노동의 방식 자체를 둘러싸고 대립, 투쟁하는 과정으로 노동과정 자체가 항상-이미 계급투쟁의 과정이다. 다른 한편 그것은 잉여가치를 극대화하려는 부르주아지의 전략 및 권력과, 잉여가치를 위한 신체적 지출을 극소화하고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한 조건을 최대한 확보하려는 노동자계급의 의지와 힘이 항상-이미 잠재적으로 적대하는 과정이다. 즉 가치화과정은 항상-이미 존재하는 현실이다(이진경, 166~7쪽).
3. 절대적 잉여가치
1) 노동의 형식적 포섭
1)-1. 노동은 노동력의 사용이고, 노동력을 사용하는 것은 그것을 구매한 자본가다. [...] 노동시간을 둘러싼 계급투쟁이 절대적 잉여가치를 규정한다면, 노동방식을 둘러싼 계급투쟁이 상대적 잉여가치를 규정한다. 노동과정은 자본가에 의한 노동력의 사용과정이라는 점에서, 자본가 역시 노동자와 더불어 노동과정에 들어가지만 노동하는 자가 아니라 노동력을 사용하는 자, 노동의 지휘자로서 들어간다. 그 결과 노동력의 사용과정은 노동과정인 동시에,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의 노동 착취과정이 된다. 여기서 노동은 자본에 포섭subsumption되며, 자본의 지배 아래 이루어지게 된다. 이로써 노동의 흐름은 자본에 포섭되어 훈육되고, 효율성과 생산성이라는 척도 아래 조직되고 평가된다. 반면 자본에 포섭되지 않은 노동의 흐름은 무규율과 비효율, 비생산적 소모, 낭비 등의 말들로 비난받게 된다. 그런데 자본은 노동력을 자신의 지휘 아래, 자신의 의지 아래 복속시키지만, "노동과정, 실제 생산과정의 현실적 방법에 처음부터 본질적인 변경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반대로 자본에 의한 노동과정의 포섭은 기존의 노동과정―그 포섭 이전에 존재했던 과거의 다양한 생산과정과 여타 생산조건에 기초해서 형성되었던―에 기초해서 이루어"진다. 즉 자본은 노동과정을 포섭하지만, 주어진 노동방식에 따라 포섭할 수 있을 뿐이다. 자본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노동과정을 변경하려고 하지만, "이런 포섭이 이루어진 뒤에 나타나는 점진적 결과로서만" 가능할 뿐이다(맑스, <직접적 생산과정의 결과들>, 89쪽). 그래서 이런 포섭을 자본에 의한 노동의 형식적 포섭이라고 부른다(같은 글, 90쪽). [...] 자본이 노동을 형식적으로 포섭한 조건에서 자본은 노동방식 자체에서 노동을 장악하고 사용할 수 없으며 다만 노동의 결과물만을 자신의 소유로 영유할 수 있을 뿐인데 이런 의미에서 자본에 의한 노동력의 사용은 형식적으로만 자본에 의해 장악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조건에서 잉여가치의 생산은 단지 노동시간의 연장에 의해서만 발생할 수 있고, 그것에 의하여서만 확장될 수 있는데 이처럼 노동시간의 절대적 길이를 연장함으로써 발생하는 잉여가치를 '절대적 잉여가치'라고 부른다. 형식적 포섭과 절대적 잉여가치의 개념은 잉여가치의 생산에서, 아니 가치 개념 자체에서 시간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해 준다. [...] 따라서 절대적 잉여가치는 "시간은 돈이다"란 명제 하나만을 오직 진실로 믿고 고지식하게 최대 시간 동안 노동하게 하려는 자본의 욕망을 표시한다. [...]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까지 노동력을 사용하는 것은 노동력의 재생산을, 따라서 반복적 사용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노동시간 연장의 사실상 절대적 한계로 작용한다. 즉 노동자도 노동을 끝내고 먹고 자고 쉬어서 다시 일할 수 있도록 노동력을 회복해야 한다(169~72쪽).
2) 노동시간과 계급투쟁
2)-1. 노동시간에 대한 자본의 한없는 욕망으로 인해서 노동은 처음부터 노동자의 신체적 한계를 잠식하는 '공격'이 되고 자본가가 사용하는 노동력은 노동력의 소유자에 반하는 상품이 된다. [...] 그래서 자본과 노동자의 계급투쟁은 처음부터 시간을 둘러싼 투쟁의 양상을 취하게 된다. [...] 14세기부터 18세기 중엽까지, 즉 산업혁명으로 인해 노동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기 이전까지 영국의 노동법규는 노동일을 강제로 연장시키는것을 주로하고 있었다. 이는 노동일의 제한과 축소를 목표로 하는 19세기 이래 노동법과 정반대의 양상을 보여준다. 왜그랬을까? 왜 자본가의 욕망도 모자라 국가적 법률로 노동시간을 더 연장했던 것일까? 이는 역으로 자본가가 법적 규제가 없이는 자신의 욕망을 노동자에게 관철시키는 실질적 능력이 부족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시기에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노동 자체를 자신의 뜻대로 장악하고 통제할 능력이 없었다. 노동은 노동력의 사용이지만 노동하는 노동자의 의지와 능력, 노동방법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노동일을 강제로 연장하려는 노동법규들은 자신만의 개별적인 힘으로는 노동자들을 장악할 수 없었던 시기의 자본가들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즉 그들은 국가적 법을 이용해서라도 노동시간을 확보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노동의 형식적 포섭'은 노동과의 계급투쟁에서 자본 권력의 형식적 우위만을 보여줄 뿐이며, 절대적 잉여가치란 일차적으로 그런 상황의 다른 표현이다.
2)-2. 19세기에 이르면서 사태는 근본적으로 달라지는데 산업혁명으로 인해서 노동방식의 근본 변화가 나타났고, 노동은 숙련노동의 성격을 점차 잃어갔고 노동과정의 리듬은 기계에 의해 장악되었다. 자본가들은 기계의 운동을 장악함으로써 노동의 리듬을 실질적으로 장악할 수 있었고, 이로써 노동에 대한 실질적 포섭이 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조건이 성립되면서, 잉여가치의 중요한 형태가 절대적 잉여가치에서 상대적 잉여가치로 이전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노동시간은 거꾸로 절대적 잉여가치가 지배적이던 시기보다 훨씬 더 연장되어 노동자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으로까지 확대되었다.
2)-3.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연장이 법적 형식의지원 없이 자본가 개개인에 의해 충분히 가능한 것이 되었다는 점으로 이는 계급투쟁으로서, 노동 내지 노동과정 자체에서 자본가가 결정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는 반대로 노동자들이 노동시간을 제한하기 위에서 법의 힘을 요청하게 되는데 표준노동일의 제정을 위한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 이제 '나태'와 '방탕', 자유를 근절하고 '근면'의 정신을 기르기 위한 자본가들의 다양한 조치들이 노동 자체를 포위하고 노동자들의 삶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 노동시간은 16시간으로, 14시간으로, 12시간으로, 10시간으로 제한하려는, 지금은 8시간을 대체적 표준으로 정하게 된 노동법은 이러한 자본가의 공격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저항을 통해 달성된 최소한의 방어조치였다. [...] 이런 종류의 "규제를 둘러싼 투쟁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일단 일정한 성숙단계에 도달하면 개별 노동자[즉 자기 노동력의 '자유로운' 판매자로서의 노동자]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굴복하게 된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표준노동일의 제정은 장기간에 걸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의 다소 은폐된 내전의 산물인 것이다."[맑스, 김수행 역, 『자본론』 1권, 402쪽]
4. 상대적 잉여가치
1) 노동의 실질적 포섭
1)-1.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은 노동방식의 변화와 결부되어 있다. 이는 자본이 산업혁명을 통해 노동과정 자체를 실질적으로 포섭한 사태와 결부되어 있다. [...] 이처럼 노동시간의 절대적 길이가 제한되어 있을 때, 노동시간 중에서 필요노동시간을 축소하여 획득하는 잉여가치를 '상대적 잉여가치'라고 불린다. [...] 요컨대 산업혁명을 계기로 한 노동방식의 급격한 전환과 기계의 적극적 도입은 그 자체로 노동 자체가 자본의 손아귀에 실질적으로 장악되고 포섭되는 결과를 낳았는데 노동시간의 제한이 이른바 '내포적 생산'(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시작한 게 아니라 역으로 '내포적 생산'(실질적 포섭)이 노동시간의 극한적 연장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이 본격화된 시기는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이 극적 양상으로 추구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노동시간 제한을 위한 투쟁은 그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대응이었던 것으로 이른바 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노동방식의 전환은, 혹은 내포적 생산의 전략 자체는 처음부터 노동 자체를 겨냥한 계급투쟁이었다. [...]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바라보는 맑스의 태도는 좀더 신중하다. 그에 따르면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추구하는 이른바 '내포적 생산'의 전략은, 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기술과 기계의 혁명적 발전에 의해서 갑자기 가능하게 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이전부터 노동력의 사용과정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려는 의지 아래 오랫동안 추구되어 온 것이다. 산업혁명은 그 집요한 의지가 현실적인 결실을 이루게 된 결과였다. 상대적 잉여가치에 대한 맑스의 분석이 분업과 협업에 대한 분석으로 소급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2) 분업과 협업
[...] 요컨대 대공업 시대에 이르기까지 자본은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전체를, 노동력의 사용과정 전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맑스, 김수행 역, 『자본론』 1권, 497쪽]. 자본가가 노동과정 자체를 둘러싼 계급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그리하여 노동을 완전히 자신의 손아귀에 장악하고 포섭하는 것은 대공업의 등장을 통해서였다.
3) 기계와 계급투쟁
자본이 노동을 실질적으로 포섭하고,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서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으로 중심을 이동하는 것은 기계와 대공업, 공장체제의 발전과 결부되어 있다. [...] 노동과정은 기계를 중심으로 재구성되고, 기계는 새로운 분업의 '객관적' 중심이 된다[맑스, 김수행 역, 『자본론』 1권, 517~8쪽 참조].이제 노동력의 사용이 노동자의 활동 이전에 기계의 작동이 되게 함으로써 노동과정의 일차적이고 능동적 역할은 노동자에서 기계로 이전한다[맑스, 김수행 역, 『자본론』 1권, 567쪽 참조]. 맑스는 기계의 도입으로 인해서 야기되는 가장 중요한 결과가 아동 노동 및 여성노동의 도입, 노동일의 연장, 노동의 강화임을 지적하고 있다[맑스, 김수행 역, 『자본론』 1권, 529~59쪽 참조]. 기계의 사용이 노동자가 사용해야 할 물리적 힘을 덜어주었지만, 자본가에게 그것은 남성 대신 힘이 약한 아동이나 여성 노동력을 사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도한 노동자가 기계에 복속됨에 따라 기계의 사용은 노동력의 사용과정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게 해주었다. 그것은 곧 노동력의 사용방식이나 사용시간, 나아가 노동강도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을 자본가가 장악했음을 의미한다. 기계의 전면적 도입은 노동자체에 하나의 결정적 변환을 야기한다[맑스, 김수행 역, 『자본론』 1권, 652/567~8쪽 참조]. [...] 이런 의미에서 기계의 도입은 단순히 생산의 효율이나 생산비 절감을 위한 기술적 문제이기 이전에 노동과정 자체를 장악하기 위한 자본가의 계급투쟁이었던 셈이다[맑스, 김수행 역, 『자본론』 1권, 584쪽 참조]. 자본가들이 기계를 도입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혹은 기계 자체에 대해서 노동자들이 적대감을 갖고 그것을 파괴하는 기이한 운동이 다양한 영역에서 벌어지는 것은 전혀 기인한 일이 아니다. [...] 그것은 노동과정 자체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노동자의 노동 능력 자체를 무력화하려는 자본가의 시도에 대한 노동자들의 거의 본능적인 대응이었으며, 기계를 통해 새로이 강제되는 규율과 강제, 단조로워진 노동 등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는 푸코가 말한대로 훈육적인 생명권력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렇다면 흔히 하듯이 '러다이트 운동'과 같은 기계에 대한 투쟁을, 기계를 자본주의적으로 사용하는 자본에 대한 분노가 기계 자체에 대한 분노로 빗나간 잘못된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4) 공장체제
기계적 대공업은 공장과 함께 왔는데 거디한 기계에 의해서 작업들이 할당되고, 그 작업들이 행해져야 할 자리에 노동자의 자리가 고정된다. 기계가 그 분리된 작업들을 시간적으로 연결하며, 기계가 그 분리된 자리를 공간적으로 통합한다. [...] 이런 점에서 공장은 분명 하나의 물질적 장치이며, 권력이 작동하는 하나의 체제이다. 하나의 권력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지휘하며 통합하는 장치로서 작동하는 체제이다. 이 새로운 체제가 이전의 작업장을 대체한다. 공장은 푸리에의 지적대로 완화된 감옥임이 분명한데 맑스는 또한 공장이 노동의 자악을 위한 수용소임을 지적한 바 있다[맑스, 김수행 역, 『자본론』 1권, 371쪽]. 푸코는 실제로 공장이란 장치는 노동자들을 자본의 지배 아래 종속시키기 위해서 제안된 것이며, 실제로 감옥을 모델로 고안된 것이다. "노동수단의 규칙적 운동에 노동자들을 기술적으로 종속시켜야 하기 때문에 하나의 병영 같은 규율이 필요하게 된다. 이 규율은 공장에서 완전한 제도로 정교해진다."[맑스, 김수행 역, 『자본론』 1권, 569쪽]. 푸코는 『감시와 처벌』 에서 근대의 공장체제가 감옥에서의 훈육과 통제 방식을 모델로 작동했음을 보여준다. [...] 특정화된 장소의 공간적 폐쇄, 작업의 분할에 따른 공간 재구성, 기능적 배열에 따른 개개인의 위치할당, 시간표를 통한 행동 통제, 노동자의 신체와 노동대상의 유기적 배치, 다양한 힘이나 활동 등의 조립, 세심한 명령 및 통제 조직의 수립 등등의 방법이 노동자를 훈육하기 위해 도입되었다[푸코, 『감시와 처벌』, 191~222쪽]. 이는 감옥에서 공장으로, 병원으로, 학교로 확장되었고, 이를 통해서 사회 전역으로 확장되었다. 19세기는 공장의 시대이자 감옥의 시대였다. 이처럼 공간을 특정한 목적과 기능에 따라서 구획하고, 그 안에서 사람들의 적절한 위치를 할당하며, 특정하게 형식화된 동작들을 통해 신체를 직접적으로 훈육함으로써 삶의 과정을 자악하는 체제를 훈육체제라고 한다면, 19세기의 공장과 대공업은 이러한 훈육체제가 사회 전체로 확장되는 결정적 시점이었다. 노동을 시간에 따라 양화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노동의 평균화, 노동능력의 평균화는 이러한 훈육체제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훈육 체제가 지배하는 사회를 들뢰즈는 훈육사회라고 부른다.
5. 기계적 잉여가치
1) 새로운 산업혁명
자본은 과학/기술의 발전이나 기계의 발전 자체를 자신의 목표로 하진 않지만 그것이 자본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 된다면, 지체 없이 그것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 그런 과학/기술의 발전은 돈을 필요로 하고, 자본은 이윤을 위해 그 돈을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리하여 1960년대 말~1970년대 초반을 통과하면서 이른바 '자동화' 기술이 적극적으로 개발되어 노동과정에 도입되기 시작했고, 이는 정보기술의 발전과 나란히 진행되었다. 이미 1950년대에 인간의 두뇌활동에 기계화하려는 시도들이 사이버네틱스라는 새로운 학문을 창출한 바 있고, 그 시기를 전후로 해서 컴퓨터의 발전이 독립적으로 진행되어 왔는데, 반도체 집적 기술의 혁명적 발전과 더불어 이 두 가지 흐름이 하나로 접속되었다. 그 결과 기초적인 수준에서나마 인간의 정신활동을 대신하려는 물리 기계의 가능성이 가시화되게 된다. 나아가 센서 기술의 발전과 정보처리 기술의 발전은 입력과 피드백, 그에 따른 수정의 기능까지를 포함하는 새로운 세대의 기계 출ㄹ현을 가능하게 했다. 또 한 번의 '산업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2) 노동의 기계적 포섭
2)-1. 이전에 매뉴팩처가 인간 자신을 기계로 만들었다면, 산업혁명기의 2세대 기계는 인간의 활동을 역학적 기계와 대응하는 활동으로 변형시켰다. 반면 3세대의 컴퓨터화된 기계들은 이제 기계적 활동 자체를 정신화한다. [...] 18~19세기의 '2세대 기계'들이 인간의 육체노동을 기계화함으로써 성립되었다면, 새로운 산업혁명의 '제3세대 기계'들은 인간의 정신노동을 기계화함으로써 성립되었다. [...] 이전의 기계들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분리해서 '정신 없는 육체노동'을 통해서 노동과정 자체를 기계적으로 장악하려는 전략을 함축하고 있었다면, 이번의 기계들은 정신노동마저 기계화함으로써 노동과정 자체에서 노동자를 축출하고자 하는 전략을 함축하고 있었던 셈이다. 다른 한편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사용과 더불어서 센서가 급속히 발달함에 따라서 기계의 피드백 능력은 더욱 확장되고, 기계적 작용의 영역은 기계의 물리적 신체 외부로 확장된다. 네그리/하트는 그래서 "상호작용적이고 인공두뇌적인 기계들은 우리의 신체들과 정신들에 통합된 새로운 인공보철물이 되고 우리의 신체와 정신 자체를 재규정하는 렌즈가 된다."(네그리/하트, 『제국』, 383쪽)라고 쓴다. [...] 자동화와 정보화는 '노동자 없는 노동'을 자본이 착취하는 두 가지 새로운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자동화가 노동자의 육체적 및 정신적 활동능력을 기계화함으로써 노동자의 노동능력 자체를 착취하는 것이라면, 정보화는 기계적 네트워크와의 접속을 수반하는 모든 종류의 활동을 가치화하고 착취한다(198~202쪽).
노동능력 자체를 기계화하는 것, 그리고 모든 사회적 활동에 요구되는 접속을 기계적으로 포섭하고 장악하는 것, 이 모두는 노동이나 활동 자체를 기계적으로 포섭하려는 것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이 경우 노동이나 활동은 노동자나 활동을 하는 사람의 그것이 아니라 기계의 작동으로 나타나고, 노동이나 활동이 산출한 결과는 기계가 산출한 결과로 나타나는데 자본가는 그 결과를 가치화하여 영유한다. 이를 '노동의 기계적 포섭'이라고 부를 수 있고 그러한 기계적 포섭 아래 노동자 없이 기계만으로 생산되는 잉여가치를, 그리고 기계와 인간의 접속에 의해 생산되는 잉여가치를 기계적 잉여가치라고 할 수 있다. 유전자공학과 분자생물학, 생명공학의 발전은 이제 생명활동 자체를 기계적으로 처리할 수 잇는 가능성을 제공하는데, 새로운 세대의 기계가 기계의 활도을 정신화 하는 만큼 노동자의 활동을 기계화함으로써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넘어섰다면, 이는 생명활동 자체를 기계적 활동의 영역으로 변환시킴으로써 기계와 생명 간의 경계를 넘어선다. 생명 활동 자체가 기계화되는 것이다. 이식할 인간의 신장을 배양하기 위해 유전자 조작된 돼지는, 신장이란 기관을 인간에게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다. 이러한 생명활동 자체의 가치화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노동의 기계적 포섭은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발생한 새로운 변화를 포착할 것을 요구한다. 절대적 잉여가치가 노동의 실질적 포섭을 하지 못한 상태에 상응하는 잉여가치의 주된 형태였고, 상대적 잉여가치가 기계적 대공업을 통해 자본이 노동을 실질적으로 포섭한 단계에 상응하는 잉여가치의 주된 형태였다면, 기계적 잉여가치는 기계 자체의 노동을, 혹은 인간과 기계와의 접속을 가치화할 수 있데 된 단계에 상응하는 잉여가치의 주된 형태이다.
3) 기계, 인간, 생명
노동의 기계적 포섭과 기계적 잉여가치의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노동가치론의 공리와 반하는 새로운 사태에 직면한다. 자동화는 노동 자체를 기계화해서 영유하기에 노동자 없이 노동을 착취하는데 이 경우 잉여가치 생산의 원천에서, 아니 가치 생산의 원천에서 인간의 노동을 발견할 수 없다. 정보화의 경우 자본이 새로운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것은 기계와 인간의 접속이었고, 접속의 효과로서 여기에서 자본이 가치화해서 획득하는 잉여가치의 원천은 기계와 인간의 접속이다. 생명활동 자체의 가치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사태는 인간만이 가치 내지 잉여가치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인간학적 관념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노동자 없이 기계만으로 상품을, 가치를 생산하게 되었다면, 인간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만큼이나 기계 또한 잉여가치를 생산하게 되엇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진 돼지의 신장 또한 마찬가지다. [...] 주어진 대상을 변형시켜 다른 것으로 가공하는 '종합'이 발생하는 모든 경우에, 우리는 유의미한 활동을, 가치있는valuable 생산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을 인간의 손으로 비용을 들여서 생산할 때만 그것이 가치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학적-경제학적 독단의 산물이라고 봐야 한다. 이로써 인간의 활동이 노동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계적 종합활동도, 생물들의 생명활동도 모두 '노동'이 된다. 가치 있는 모든 것을 가치화하고 상품화하는 것, 그런 식으로 자본은 모든 것을 화폐적인 비교공간, 동질화된 공간 속에 집어넣는다.
4) 훈육체제에서 통제체제로
노동의 기계적 포섭은 노동자를 착취하기 위해 노동자를 공장이라는 제한 공간에 가두어둘 이유가 매우 적어졌음을 의미한다. 특히 생산의 정보화와 소통기술의 발전은 생산 자체의 탈영토성을 강화한다. 즉 생산이나 노동은 공장이라는 특별한 영토에 제한될 이유가 없으며, 심지어 공장이나 사무실이 있는 경우에도 접속가능한 네트워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생산과정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공장의 거대한 어셈블리 라인은 비형태적이고 비가시적인 접속의 네트워크로 대체된다(카스텔, 『정보도시』, 200쪽 이하, 네그리/하트, 『제국』, 387쪽). 이는 기계와 접속해서 어떤 '가치잇는' 활동을 생산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잉여가치를 착취할 수 있는 곳으로 변형되었음을 의미하는데, TV를 보는 것도, 인터넷과 접속하는 것도, 신문을 보는 것도 자본이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계기가 된다. 네그리는 공장이라는 국지적 영역을 벗어나 사회 전체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공장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사회적 공장'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네그리, 『전복의 정치학』, 79]. 이제 19세기적인 훈육 체제를 새로운 규제 메커니즘이 대체하는데, 19세기의 훈육체제는 가령 공장, 사무실, 학교, 병원, 감옥 등과 같이 공간적인 제한과 유폐, 그 안에서의 특별 배열과 특정 행동의 강제 등에 의해서 작동하던 것이었다. 노동의 기계적 포섭으로 인해서 생산에 관여된 사람드르이 활동범위가 사회 전체로 확장되고, 노동자가 아닌 사람들의 활동을 영유하고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은 이런 훈육 체제가 적절하게 작동하기 어렵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 더불어 다양한 종류의 인센티브가 범람하게 된다. [...] 이런 식으로 사람들의 모든 활동을 가능한 한 화폐로 유인하고, 화폐를 따라가며 진행되는 삶에 '파산'과 신용불량자라는 경계선을 쳐두고는 그 한계 안에서 스스로의 삶과 행동을 규제하고 통제할 것을 요구하는 그러한 종류의 새로운 통제방식이 작동한다. 다른 한편 사람들의 모든 활동과 경력을 정보하하고 그 정보를 활동이 통과해야 할 모든 문턱에서 검사하고 확인하는, 컴퓨터 칩이 내장된 다양한 종류의 카드들이 등장한다. [...] 18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지던 '훈육사회'가 이제는 새로이 '통제사회'로 변화되고 있다는 들뢰즈의 지적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6장. 자본축적의 일반적 법칙
1. 자본의 축적
1.1. 우리는 노동가치론 공리계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잉여가치가 어떻게 자본으로부터 발생하는가를" 보았지만 자본의 축적에 대한 연구는 반대로 "자본이 어떻게 잉여가치로부터 발생하는가를" 보여준다[맑스, 김수행 역, 『자본』 Ⅰ, 788]. 이는 자본 축적을 연구하는 맑스의 문제설정을 명료하게 표현한다. 자본의 일반적 공식은 M―C―M으로, 여기서 M'=M+ΔM으로 잉여가치를 뜻하는 ΔM이 바로 상품교환과 구별되는 자본의 교환 목적이었고, 그러한 교환을 반복하게 하는 동력이었다. 증식된 가치로서의 잉여가치, 그것이 바로 자본의 욕망이었다. 그것은 자본으로 하여금 자본의 대행자로 행동하도록 하는 힘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노동력을 구매하여 사용하게 하고, 이를 위해 노동 자체를 포섭하고 장악하게 한다는 점에서 자본의 권력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의 일반적 공식은 권력의 배치로서 자본을 표현하는 정의다.
1.2. 자본의 축적이란? "잉여가치를 자본으로 사용하는 것, 즉 잉여가치를 자본으로 재전환시키는 것"이다[맑스, 김수행 역, 『자본』 Ⅰ, 788]. 앞의 공식이 M'→M+ΔM을 설명하는 정의였다면, 이제 축적은 그 ΔM이 자본의 새로운 유통을 시작하는 M이 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ΔM→M[잉여가치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것]이라고 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자본의 욕망이자 권력을 이루는 성분이 새로이 자본의 일불 통합되고 누적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 매번 자본의 운동을 추동했던 욕망 내지 권력은 축적되고 집적되어 거대한 권력구성체가 된다. 축적 개념을 통해서 자본을 포착한다는 것은 잉여가치의 집적물로서 자본을 포착하는 것으로 이경우 자본은 그 자체로 화폐의 집적인 동시에 거대한 상품의 집적이고, 또한 생산수단의 집적인 동시에 가변자본인 노동력의 집적이다. 자본은 그 자체로 화폐와 상품, 노동력의 거대한 집적이고 통합체이다.
1.3. 이런 이유로 인해서 자본의 축적에 대한 연구는 생산과정의 내부에 국한되지 않는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그것은 국민적 형식으로 축적되는 인구/주민 자체를 대상으로 작동하는 자본의 효과를 연구하게 될 것이다. 근대적 주체화를 내포하는 19세기의 인구/주민 개념은 이처럼 자본의 일반성 내지 보편성을 통해서 인민들을 훈육하고 길들임으로써 동질화된 또다른 구성체가 된다. 푸코는 미시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권력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미시적인 권력과 그것에 의해 훈육되어 등질화된 사람의 축적이 긴밀하게 연결된 것임을 보여준다. 푸코, 『감시와 처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 이 두 가지 과정, 사람의 축적과 자본의 축적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즉 사람들을 보유함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생산장치의 증가가 없었다면 사람들의 축적이라는 문제는 해결될 수 없었을 것이다. 역으로 사람들의 누적적인 다양체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권력 기술이야말로 자본축적의 운동을 가속화해 주는 것이었다."[푸코, 같은 책, 284쪽]
2. 자본축적의 일반적 법칙
1) 축적과 재생산
자본의 축적은 자본을 새로이 자본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축적은 확대된 규모로 자본을 재생산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확대재생산'을 야기한다. 한편 이와 달리 자본의 규모가 증가하지 않고 예전과 동일한 규모로 다시 시작하는 경우에도, 자본은 자본으로 재생산된다. 이를 확대재생산과 대비해서 '단순재생산'이라고 부른다. 잉여가치에서 기인하는 "수입이 자본가에게 소비재원으로서만 사용된다면 [...] 단순재생산"이다[김수행 역, 『자본론』 1권, 770쪽].
자본의 욕망은 일차적으로 잉여가치를 다시 자본으로 재투자하는 것이다. [...] 그러나 이러한 자본가의 '낭비'는 "축적을 방해하지 않았으며 축적의 증대와 더불어 증대"했는데, "어느 정도의 낭비는 부의 과시로서 또 신용획득의 수단으로서 '운이 나쁜' 자본가의 사업상의 필요로까지 된다"고 한다(김수행 역, 『자본론』 1권, 809쪽].
축적욕과 향략욕 사이에서 자본의 축적률이 결정된다. 즉 생산된 잉여가치를 축적에 투여하는 부분과 향략과 소비에 지출하는 부분으로 나누는 비율에 의해서 축적률이 결정된다. 축적률은 생산된 전체 잉여가치(S)와 그 중에서 자본(불변자본C+가변자본V)으로 전환되는 부분의 비율로 정의된다.
축적률 α = Sc+Sv/S이다[S는 잉여가치, Sc는 잉여가치 중 불변자본으로 전환되는 부분, Sv는 가변자본으로 전환되는 부분을 가리킨다].
이 경우 자본 규모의 증가를 표시하는 자본성장률은 기존의 투하 자본(c+v)에 대한 추가적인 투하자본(Sc+Sv)의 비율로 표시된다.
즉 자본성장률을 γ라고 한다면, Sc+Sv/C+V이다[여기서 자본성장률은 축적률과 이윤의 곱으로 표시된다. 이윤을을 P'라고 한다면 P'=S/C+V이며, 이때 자본성장 Sc+Sv/C+V=Sc+Sv/S×S/C+V= α×P' 즉 자본성장률=축적률×이윤율이다].
가령 A기업에서 4000만원의 불변자본과 1000만원의 가변자본(임금)을 들여서 6000여만원어치 상품을 생산했다고 하자[잉여가치는 1000만원].
이때 A기업이 생산한 생산물의 가치는 다음과 같다.
생산물의 가치 W=6000W=4000c+1000v+1000s이다.
여기서 생산된 잉여가치(1000)을 반(5000)은 소비하고 반은 축적한다고 한다면(400c+100v이 비율로 축적한다고 하자)
축적률 α =500/1000=50%이고, 자본성장률 γ=400+100/4000+1000=10%이다.
이처럼 축적률이 양의 값을 가질 경우에, 즉 생산된 잉여가치의 일부를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경우, 자본은 확대된 규모로 재생산된다. 그런데 만약 이런 비율로 계속해서 축적할 경우 7년이면 확대된 규모의 자본은 원래 자본의 거의 2배가 되고, [...] 20년도 채 되기 전에 애초의 자본은 6배를 넘는 규모로 확대된다.
따라서 "생산의 홍수 속에서 최초 총투하자본은 직접적으로 축적된 자본[즉 자본으로 재전환된 잉여가치 또는 잉여생산물]과 비교하면 무한소량이다."[김수행 역, 『자본론』 1권, 800쪽]. 요컨대 자본의 축적이 진행됨에 따라서, 최초 투여된 자본은 무한소에 가까운 크기로 줄어들고, 잉여가치에서 연원하는 자본이 실제로 가동되는 대부분의 자본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맑스는 '소유의 법칙'이 '자본주의적 영유법칙'으로 전환된다고 한다[김수행 역, 『자본론』 1권, 800쪽]. 이제 소유를 대신해서 착취가 지배를 하게 된다. 착취한 잉여가치가 자본이 되어 다시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자본주의적 영유법칙을 통해서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가치에서 더욱더 멀어지고, 더욱더 적대적 관계에 놓이게 된다.
2) 자본의 유기적 구성
2)-1. 자본은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구매하여 생산과정을 시작하고 재시작한다. 생산과정에서 노동력은 생산수단과 결합한다. 이 양자는 자본을 구성하는 두 가지 핵심적 요소이다. 이 양자의 비율을 '자본의 구성'이다. 이를 표시하는 방법에는 크게 세 가지다. 소재적 측면에서 생산수단과 노동량의 비를 표시하는 '자본의 기술적 구성', '기술적 구성을 가치량으로 표시하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 가치의 측면에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비를 표시하는 '자본의 가치구성'이 그것이다. 그래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의 구성은 두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가치의 측면에서 고찰하면, 이 구성은 자본이 불변자본[즉 생산수단의 가치]과 가변자본[노동력의 가치 또는 임금총액]으로 분할되는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 생산과정에서 기능하는 소재의 측면에서 고찰하면, 어떤 자본이든 생산수단과 살아 있는 노동력으로 분할되는데, 이 구성은 사용되는 생산수단의양과 이 생산수단의 활용에 필요한 노동량 사이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전자를 자본의 가치구성이라고, 후자를 자본의 기술적 구성이라고 부른다. 양자 사이에는 긴밀한 상호관계가 있는데,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 나는 자본의 가치구성이 자본의 기술적 구성에 의해서 결정되고 또 기술적 구성의 변화를 그대로 반영하는 경우, 그것을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라고 부른다"[맑스, 김수행 역, 『자본론』 1권, 836~7쪽 참조].
2)-2. 맑스가 '자본의 구성'이라고 할 경우 그것은 항상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의미한다. 맑스 말대로 간단하게 자본의 구성이라고 할 때는 z=c/v로 정의하고, 이는 유기적 구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분자의 c는 상품의 가치구성을 표시할 때 사용되는 가령 기계의 감가삼가액이 아니라 투하된 불변자본 비용 전체를 의미하는데 기계는 가치형성 과정에는 언제나 부분적으로(감가삼각비만큼) 참여하지만, 노동과정에서는 항상 전체로서 참여하는데[김수행 역, 『자본론』 1권, 520쪽],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노동과정에서 이른바 노동량과 생산수단의 비율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구별하기 위해 c대신 대문자 C를 써서 유기적 구성은 z=C/v라고 쓸 수 있다.
2)-3. 자본의 기술적 구성은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물리적 양의 비율이다. 한 사람이 방추를 한 개 사용하는 경우와 비교해서, 새로운 방적기를 통해 방추를 12개 다루게 되는 경우 기술적 구성은 12배가 되는 것이다. 한 공장에서 사용되는 생산수단을 노동자의 수로 나누면 개별자본의 기술 구성을 구할 수 있다. 기술 구성을 Zo이라고 한다면, Zo=C/n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한 나라의 사회적 총자본의 기술 구성은 총불변자본을 총노동자수 으로 나누면 된다. 그래서 Zo=C/N이라고 할 수 있다.
2)-4. 자본의 가치구성은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비율로 구할 수 있다. 그것을 Z라고 표시한다면 Z=C/v이다. 앞서 A 기업의 경우 c=4000이고(c=C라고 하자), v=1000이므로 이 기업의 자본의 가치 구성은 z=4000/1000=4가 된다. 자본의 가치구성을 사회적 총자본 수준에서 검토한다면, 그 사회의 불변자본 총액을 임금총액으로 나누면 된다. 불변자본 총액을 C로 쓰고, 임금총액을 L이라고 한다면, 이때 자본의 가치구성은 z=C/L이다.
노동자가 다루어야 할 기계의 규모가 커지고, 다루어야 할 원료의 양이 증가하면, 당연히 자본의 가치구성 또한 증가한다. 이는 통상 노동생산성 증가를 수반한다. 자본의 가치구성이 기술적 구성의 상승을 반영하는 경우, 즉 기술적 구성이 상승함에 따라서 자본의 가치구성이 상승한다면(역으로 기술적 구성이 하강함에 따라서 가치구성이 하강한다면), 이때 자본의 가치구성을 맑스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경우 자본의 축적에 따라서 기술 구성은 자연히 증가하고 생산성 증가로 인한 가치저하가 자본의 가치구성 자체를 저하시키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에 따라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도 증가한다고 할 수 있다.
3) 자본축적의 일반적 법칙
자본축적은 불변자본 및 가변자본에 대한 추가적 투자를 통해 진행되는데 전자에 대한 새로운 투자는 생산수단의 추가적 구매로 진행되고, 후자에 대한 새로운 투자는 노동력의 추가적 구매로 진행된다. 즉 자본의 축적은 생산수단의 구입과 더불어 추가적 노동자의 고용을 야기한다. [...] 유기적 구성이 증가한다는 것은, 가변자본에 비해서 불변자본 비율이 더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노동자에 비해서 기계의 비중이 좀더 커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 자본이 축적되고 생산성이 상승하면서 이처럼 자본의유기적 구성이 상승하는 것은 산어혁명 이후 자본주의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발생하는 일반 법칙이다. 이를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결과 "자본주의적 축적 그 자체가 [자기 자신의 정력과 규묘에 비례해] 상대적으로 과잉인 [즉 자본의 평균적인 자기증식욕에 필요한 것보다 더 큰 규모의] 노동인구를 끊임없이 생산해내고 있는 것이다."[김수행 역, 『자본론』 1권, 860쪽]
[...] 요컨대 자본의 축적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상승을 수반하고 이로 인해서 노동력에 투여되는 가변자본 부분이 항상 상대적으로, 많은 경우에는 절대적으로 줄어든다. 임금을 삭감하거나, 그게 쉽지 않을 때는 노도자를 해고한다. [....] 따라서 자본의 축적은고용된 노동자의 증가보다는 오히려 과잉화된 노동인구의 증가를, 쉽게 말해서 실업자의 증가를 야기하고 임금율을 낮춘다. 자본주의 하에서 어디에나 있기 마련인 과잉인구는 바로 이런 자본의 축적에 따라서 만들어진 것이지, 식량에 비해서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인구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자본축적의 일반적 법칙이며,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 특유한 인구법칙"[김수행 역, 『자본론』 1권, 861~2쪽 참조]이다.
4) 과잉인구, 혹은 산업예비군
4)-1. 자본축적이 만들어내는 과잉인구는, 자본의 축적에 필요한 새로운 추가적 노동인구를 언제든 제공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 그러나 새로운 생산수단이야 시장에서 사면 된다지만, 일할 수 있는 노동자가, 이처럼 새로운 수요가 있다고 해서 새롭게 만들어지거나 늘어날 수는 없다. [...]이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사실은 상품이 아닌 것을 상품화한 것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노동력이란 일정 시간만 투여하면 맘대로 찍어낼 수 있는 상품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이런저런 이유로 노동자가 필요하게 되었을 때, 특히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을 때는 돈을 준다고 해도 노동자를 구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이 경우 노동력의 가치는 크게 상승할 것이고, 자본가는 노동자를 상전 모시듯 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정말 다행히도 자본 자신이 축적하면서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과잉인구와 실업자, 유휴노동력은 이처럼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을 때, 자본이 쉽게 구할 수 있는 노동력 풀(pool)을 형성한다. [...] 자본가에게 실업자 내지 과잉인구란 노동력에 대한 추가적 수요에 대비한 일종의 예비군으로 맑스는 이를 산업예비군이라고 표현한다[김수행 역, 『자본론』 1권, 862쪽 참조].
4)-2. 이런 점에서 과잉인구는 자본축적의 필연적 산물인 동시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생산조건"[김수행 역, 『자본론』 1권, 862쪽 참조]이다. [...] 이러한 과잉인구가 노동력에 대한 수요와 공급, 임금률의 변동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조건이다[김수행 역, 『자본론』 1권, 872쪽 참조]. 다시 말해서 노동력의 가격을 결정하는 가치법칙은, 혹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이러한 과잉인구를 전제와 배경으로 해서만 작동할 수 있다. 자본축적의 일반적 법칙이 자본축적에 따라 상대적 과잉인구가 필연적으로 생산되는 자본주의적 인구법칙이라고 한다면, 이 자본주의적 인구법칙이야말로 노동력 상품을 교환하는 영역에서 가치법칙이 작동하는 작동하는 전제조건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가치법칙의 외부, 그러나 그것이 필연적으로 요구하고 도입하는 '내적 외부'인 것이다.
4)-3. 맑스는 이러한 과잉인구의 존재양상을 그 처지와 조건에 따라서 네 가지로 구분한다. 1) 유동적 과잉인구[김수행 역, 『자본론』 1권, 875쪽 참조]. 2) 잠재적 과잉인구[김수행 역, 『자본론』 1권, 877쪽 참조]. 3) 정체적 과잉인구[김수행 역, 『자본론』 1권, 877 참조]. 마지막으로 과잉인구의 최저 침전층[김수행 역, 『자본론』 1권, 878 참조].
4)-4. 지금까지는 자본축적의 일반적 법칙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상승이라는 개념을 거쳐 상대적 과잉인구의 창출로 귀결된다. 여기서 맑스는 자본축적의 일반법칙을 경제학적 법칙이라기보다는 인구학적 법칙이라고 해야 할 결론을 도출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본주의적 인구법칙이, 노동력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가치법칙의 전제조건임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자본의 축적은 노동력을 과잉화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판매할 수 없는 과잉노동력을 생산함으로써만 노동력 상품의 가치를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종속시키며, 이를 통해서 노동력 상품의 가치를 끊임없이 저하시킨다. 이는 자본주의적 축적이 노동력이란 상품을 비상품화하는 방식으로만 상품화하며, 노동을 탈가치화(Entwertung)하는 방식으로만 노동을 가치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4)-5. 노동가치론의 공리계는 여기서 또 다시 외부로 열리고, 그 외부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 가치론의 공리계 내부에서 볼 때, 자본주의적 일반적 법칙은 가치론의 공리계에 외부적이다. [...] 바로 이러한 점에서, 아니 바로 이러한 점에서만,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의 예증'이라는 제목의 『자본』 1권의 제25장 5절에서 맑스가 축적이나 공황에 따른 노동자와 실업자, 유랑민, 그리고 농업노동자 등의 생활양상의 변화를 다루는 것[김수행 역, 『자본론』 1권, 885~976쪽.]은 어이없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 법칙을 통해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지극히 충실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자본 축적과 인간 축적
1) 동일자와 타자
정치경제학과 노동가치론, 철학적 인간학은 자본의 별 주위를 돌고 있는 자본의 인공위성들로 그들은 "노동하는 자만이 인간이다.", "노동만이 가치를 창조한다.", "우주는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다.", 인간의역사는 생산성 발전의 역사다", [...]그런데 맑스는 그들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그 규모를 확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본이자 자본의 축적법칙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자본은 노동하는 인간을 모델로 삼고, 그것을 절대적 도덕으로 강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 자신이 그에 반하는 비인간들을, 무가치한 노동력을 반복해서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 노동하는 인간, 그것은 분명히 자본이지배하는 질서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는 동일자의 표상인 반면 실업자와 빈민, 부랑자는 그러한 동일자의 정상성과 복됨을 확인해 주는 타자들이다. [...] 자본의 축적이 필연적으로 만들어내는 실업자 내지 과잉인구란 바로 이런 타자들의 구체적 양상들이다. [...] 자유주의란 어떤 형식으로 말해지든 것이든 간에, 노동을 향한 열정을 일으키는 냉정한 시장의 역설적 권력에 대한 찬미를 항상 내포한다. 시장의 권력이란 노동하지 않는 삶을 죽음이란 극한값을 향해서 수렴하게 하며 작동하는 권력이다.
2) 실업화 압력
노동하지 않는 자들, '인간'이 아닌 자들에게 주어지는 자본의 참혹한 저주는, 노동하지 않는 자들뿐만 아니라 취업해 일하고 있는 자 또한 항상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 보게 함으로써 노동과삶의 동일성, 노동자와 인간의 동일성을 확인하게 한다. 맑스는 "실업자들의 압력은 취업자들로 하여금 더 많은 노동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하며, 따라서 일정한 정도까지는 노동의 공급을 노동자의 공급과 무관한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행해지는 노동의 수요 및 공급의 법칙의 작용은 자본의 독재를 완성한다."[김수행 역, 『자본론』 1권, 873~4 참조]. 실업화 압력은 실업자라는 타자의 존재를 통해서, 공장의 창 밖에서 퍼붓고 있는 거친 폭풍우를 통해서, 노동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더 자본의 지배 아래 묶어놓는 내면적 속박이다. 공장에서 작동하는 훈육체제가 일차적으로 자본의 경계 내부에서 노동자들을 자본의 권력 아래 통합하고 그에부합하는 삶의 방식에 길들이는 메커니즘을 표시한다면, 실업화의 압력은 노동자와 비노동자, 인간과 비인간, 동일자와 타자의 경계에서 그 내부와 외부를 향해 동시에 작용하여 개개인을 자본이 요구하는 인간의 형상에 따라서 동일화하는 메커니즘을 표시한다.
3) 자본의 요구, 노동자의 욕망
[...] 요약하면, 자본의 축적이 필연적을 생산하는 실업자의 존재는 단지 임금을 낮춘다는 경제적 효과로 제한되지 않으며, 상대적 과잉인구를 생산한다는 것은 인구학적 효과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자본주의 사회의 '타자'를 생산함으로써, 그 타자를 통해 '인간' 내지 주민/인구라는 개념으로 요약되는 '동일자'의 형상을 개개인의 욕망으로 전환시키며, 그것을 통해 개개인을 자본의 어떠한 요구에도 부응할 수 있는 그런 '인간'으로 만들어낸다. 근대에 출현한 지배적인 인간의 형상은, 그래서 많은 '인간과학'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되었던 인간의 형상들은, 이런 '인간'에게 요구되었던 형상의 다면성에 대응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차라리 '인간'이란 이름으로 동일화를 요구했던 수많은 철학에 반하여 "인간이란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될 그 무엇이다"라고 갈파했던 니체의 명제는, 자본의 권력에 반하여 그것의 외부를 사유하려는 맑스의 사유와 보기보다 훨씬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4. 자본주의의 미래, 혹은 미래의 자본주의
1) 생산의 사회화, 자본의 딜레마
1)-1. 자본은 한편으로는 대중의 자율성과 창조성이 확장되는 것을 이용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일정한 한계 안에 가두고 통제해야 한다는 이율배반적인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 정보혁명이 창출해낸 새로운 생산의 조건은 대중들의 결합 노동을 이용하는 방법에서 창조성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대중 자신의 일상생활 자체가 자율적일 것을 요구한다. 생기발랄한 대중들의 욕구와 욕망이야말로 새로운 착취의 중요한 자원이다. [...] 정보 혁명이 자본에게 비용의 지출을 극소화한 새로운 착취의 조건을 제공한다면, 바로 동일한 이유로 인해 그것은 대중들에게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삶의 확대된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는 생산 자체가 '공장'으로 상징되는 개별자본의 영역을 벗어나 사회 전체로 확장되는 경향을 띠게 되었음과 동시에, 대중의 생산적 능력이 개별자본의 통제력 밖으로 점차 벗어나는 경향을 띠게 되었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2. 다른 한편 그것은 자본이 생산자의 노동 자체를 가변자본의 지출없이 착취할 수 있게 된 것과 동시에, 생산 활동이 공장 안에서 자본에 의해 조직되는 노동에서 벗어나 탈노동화되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음을 뜻한다. [...] 맑스는 자본의 축적이 진행됨에 따라 유기적 구성이 상승된다는 명제를 통해서, 축적에 따른 생산의 사회적 성격이 점차 확장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두 사람의 노동자가 아니라 기계와 결합된 거대한 집합 노동자가 생산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경향이 매우 현저하게 진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일 것이다. "노동과정의 협업적 형태의 성장, 과학의 의식적 기술적 적용, 토지의 계획적 이용, 노동수단이 공동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전환되는 것, 모든 생산수단이 결합된 사회화된 노동의 생산수단으로 사용됨으로써 절약되는것, 각국의 국민들이 세계시장의 그물에 얽히게 되는 것, 따라서 또 자본주의 체제의 국제적 성격의 증대 등등이 더욱 대규모로 일어난다."[김수행 역, 『자본론』 1권, 1049 참조]. 생산의 사회화가 공장의 벽을 넘어서 전사회로 확장되고, 생산의 기계화가 탈노동화의 양상으로 확장되는 것이, 과학이나 협업(결합노동 !), 생산수단 등 노동과 결부된 모든 것이 점점 더 공동으로만 사용될 수 있는 것으로 전환되는 경향과 결부된다.
2) 탈노동화, 혹은 '노동의 종말'
정보화가 새로운 고용 없이 거대한 정보관련 이윤의 증가를 가능하게 했다면, 자동화는 개별 공장에서 직접적인 노동자 고용의 감소를 야기한다. 자동화는 노동자 없이 노동력만을 사용하겠다는 자본의 전략과 결부되어 있으며, 노동자 없는 공장을 그 이상으로 한다.
3) 사회적 양극화?
이런 점에서 새로운 생산조건 속에서 사회의 '양극화'가 새로운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고전적인ㅇ 의미에서 양극화란 '계급적 양극화'였다. 소농민이나 소생산자, 소소유자 같은 중간계급이 소부르주아지가 분해되어 아주 적은 일부는 부르주아지가 되고, 대부분은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하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지금 어느 정도 가시화된 양극화의 양상은 부르주아지에 편입되는 소수의 고숙련 전문가들이 한편에서 느린 속도로 늘어나는 것과 동시에, 이전에 전통적인 노동자계급에 속햇던 사람들의 많은 부분이 기계에 의해 밀려나가면서 실업자가 되거나 다양한 종류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는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소브루주의지가의 분해로 인한 양극화가 아닌, 노동자계급이라고 하기 힘들던 소수의 고숙련 전문직과 기술직에 속하는 사람들이 더욱 확고하게 부르주아지화되는 것과 더불어, 노동자계급이 전반적으로 하강하는 가운데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와 실업자로 층화되는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사회 전체가 분절된 두 개의 층으로 분할되는 경향이 점차 강화되고 있으며, 그 분할의 경계는 점점 더 불연속적인 것이 되고 있다. [....] 이러한 양극화를 '사회적 양극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4)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
노동자의 산 노동을 점점 기계들의 죽은 노동으로 대체하는 자본 축적의 일반 법칙은 그러한 대체과정과 나란히 생산의 사회적 성격, 생산수단의 공동적 성격을 증대시킨다. 맑스가 '생산의 사회화'라고 명명했던 이러한 과정은 20세기 말의 이른바 정보혁명 내지 '극소전자기술혁명'을 거치면서 더욱더 가속화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거대한 기계적-정보적 네트워크의 단말기와 연결되어 활동하며 기계적 생산과정의 입-출력 지점이 되는 상황, 그리하여 기계가 그런 인간들 신체의 일부가 되고 인간이 그런 기계의 일부가 되는 상황, 나아가 그러한 접속의 네트워크가 세계화의 장 안에서 거칠게 연결되는 상황, 그리하여 세계 전체의 인민이 거대한 사회적 양극화의 불연속적인 두 개의 세계로 나뉘어 생존하게 되는 상황이 형성된다.
맑스는 자본의 독점 영유 안에서 진행되는 생산의 사회화가 대중들의 삶을 비참하게 하는 만큼 그것은 빈곤과 비참을 떨쳐내려는 대중 자신이 자본의 지배에 조종을 울리가 되리라고 맗했다[김수행 역, 『자본론』 1권, 1050 참조]. [...] 공장의 외부에서 진행되는 사회적 활동 자체를 착취한다는 사실, 그래서 노동력의 판매 없이 활동 그 자체가 생산활동이 되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자본의 착취 영역이 사회 전체로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생산하는 대중들의 능력이 공장이나 자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자본이 노동력의 구매 없이 생산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역으로 정확하게 노동자가 노동력의 판매 없이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마한다. [...] 이는 자본가에 노동력을 팔아야만 생산수단과 결합될 수 있었던 치명적 조건이 생산의 사회화를 통해 어느새 소멸하고 있음을 뜻하는 게 아닐까?
[...] 지불없는 가치화를 거부하는 생산자들의 ;연합체, 활동가들의 공동체를 통해 자본에 대해 집합적으로 지불받는 새로운 관계를 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 [....] 맑스는 "생산수단의 집중과 노동의 사회화는 마침내 자본주의적 외피와 양립할 수 없는 점에 도달한다."[맑스, 같은 책, 1050]라고 한 것을 상기해야 한다.
세계적 규모에서 생산의 사회화가 진행되리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새로운 국제주의의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예측을 덧붙여도 좋을 것이다. 자본이 세계적 시장 하에서 생산하고 판매하여 착취하는 만큼 노동의 흐름 내지 대중의 흐름 자체도 그와 더불어 세계화될 것이 이미 분명하게 드러난다.
제7장. 이른바 '본원적 축적'과 자본의 계보학
1. 자본의 기원 신화
맑스는 앞서 자본의 축적이란 잉여가치가 자본으로 변환된 것일 뿐이며, 그것이 일정 시간을 지나면 원래의 자본을 무한소에 가까운 크기로 만들 만큼 급속하게 증가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 이로써 자본은 통상 경제학자나 법률가들이 경건하게 절대적인 것으로 찬미하는 '사적 소유의 신성한 법칙'과는 다른 종류의 법칙에 따라 작동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즉 자본은 노동자가 생산한 것으로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주의적 착취법칙'에 따라 작동하고 성장한다는 것이다. 『자본』 Ⅰ권의 마지막 장에서 맑스는 "정치경제학은 판이한 두 종류의 사적 소유를 원칙상 혼동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생산자 자신의 노동에 입각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타인노동의 착취에 입각하는 것이다."[맑스, 『자본』, Ⅰ, 1052]. [...] 이런 식의 추적과 비판에 대해 정치경제학은 자본이 잉여가치를 획득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할 이유를 다시 제시하고자 한다. 애초의 자본, 혹은 '시초의 자본'내지 '본원적 자본'이 그것이다. [...] 이는 현재 존재하는 착취와 축적을 최초의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정당화하는 방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아득한 옛날에 한편에는 근면하고 영리하며 특히 절약하는 특출한 사람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게으르고 자기의 모든 것을 탕지해 버리는 탕자가 있었다"는 식으로[맑스, 『자본』,Ⅰ, 979]. 결국 베짱이처럼 탕진하던 게으름뱅이와 반대로 개미와 같이 부지런히 일하고 절약하던 특출한 사람은 아끼고 아껴 돈을 모을 수 있었고, 그 돈이 바로 남을 고용할 수 있는 '최초의 자본'이 되었다는 것이다. 최초의 자본을 만든 저 개미의 축적이 바로 사전의 축적이라는 것이다. [...] 맑스는 다시 이들의 주장을 따라가면서 본원적 축적의 비밀이 "생산자와 생산수단 사이의 역사적 분리과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맑스, 『자본』,Ⅰ, 981]라고 강조한다. [...] 맑스는 『자본』의 제8편에서 이른바 '본원적 축적'의 계기를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첫째,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분리라고 요약되는 근대적 무산자의 창출, 둘째, '산업 자본을 위한 국내 시장의 조성', 셋째, 국가장치를 이용한 '본원적 축적'이 그것이다.
2. 근대적 무산자의 창출
1) 농민으로부터의 토지약탈
① 제1차 엔클로저 운동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토대를 마련한 변혁의 서곡은 15세기 마지막 1/3기와 16세기의 첫 수십 년 동안에 연주도었다."[맑스, 『자본』,Ⅰ, 986] 통상 '엔클로저'라고 불리는, 토지에 울타리를 치고 농민들을 그 밖을 쫓아내는 운동이 그것이다. 도시간 교역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던 플랑드르 지방에서 양모 매뉴팩처가 발전하면서 양모 수요가 증가하자, 거기에 가까이 있던 영국 양모 가격이 급등한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이미 돈맛에 취해 있었던 대지주나 귀족, 혹은 봉건영주들은 경작지를 양을 키우는 목장(목양지)으로 바꾸고자 했다. 폴라니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쓴다. "엔클로저 운동은 빈민에 대한 부자의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 그들은 문자 그대로 빈민으로부터 공유지 사용권을 박탈하고, 아직 망각했던 관습에 의해 빈민들이 자기네 것으로 알았던 가옥들을 허물어 버렸다."[폴라니, 『거대한 변환』,53쪽] 맑스에 따르면 "새로운 귀족은 화폐가 모든 권력 중의 권력으로 된 그 시대의 자식"이 되었다[맑스, 『자본』,Ⅰ, 986]
② 제2차 엔클로저 운동
이러한 엔클로저 운동은 16세기 내내 지속되었고, 17세기에도 결코 저지되지 않고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18세기에 다시 한 번 대대적으로 발생한다. 다만 다른 것은 " 엔클로저 운동의 주체가 영주나 귀족이라기보다는 부유한 향신(gentry)이나 상인들인 경우가 많았다"[폴라니, 앞의 책, 54쪽]는 것이다.이 시기의 주 타깃은 개방경지라고도 불린 공동용지, 공동지, 공동황무지, 공동목초지 등이었다. [...] 즉 제2차 엔클로저 운동은 대규모 토지에 울타리를 둘러치고 곡물을 대규모로 경작하거나 가축을 기르는 새로운 양상을 포함하고 있었고, 그 계급적 중심 또한 이미 충분히 달라졌다. 좀더 근본적인 차이는 이전과 달리 "18세기에는 법률 그 자체가 국민의 공유지를 약탈하는 도구로 되었다는 점이다. 이 약탈적 의회적 형태는 공유지 엔클로저 법, 즉 지주가 국민의 토지를 사유지로 자기 자신에게 증여하는 법령, 국민수탈의 법령"이 잘 보여준다[맑스, 『자본』,Ⅰ, 995]. 엔클로저 운동을 통해서 거대한 공유지를 포함하는 대규모 토지가 지주의 손에 축적되었다. 19세기에 리카도 등이 곡물법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일 때, 거기에는 곡물가를 낮추어 임금을 줄이려는 산업 자본가와, 이미 이처럼 또 다른 부와 권력을 형성한 지주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있었다고 흔히 말하는데, 이것은 이런 식을 지주들이 축적한 권력과 부가 이 시기 산업자본가들과 대결할 만큼 거대한 것이었다.
③ 공유재산 횡령
당시 가톨릭은 영국 토지의 거대한 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16세기의 종교개혁에 따른 교횐재산의 방대한 횡령"은 대대적으로 프롤레타리아를 양산한 또하나의 중요한 계기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토지를 농민들이 소작하고 있었는데 이 토지가 "왕의 총애를 받는 탐욕스런 신하들에게 증여되거나, 투기적인 차지농업가와 도시 부르주아에게 헐값으로 팔아 넘겨졌는데, 이들은 종전의 세습적 소작인들을 대량으로 축출하고 그들의 경영지를 통합했다."[맑스, 『자본』,Ⅰ, 990. 또 하나 "농촌주민으로부터 토지를 빼앗은 최후의 대수탈과정은 이른바 '사유지 청소'다. 위에서 본 모든 영국식 수탈방법 중에서 '청소'가 그 절정을 이룬다."[맑스, 『자본』,Ⅰ, 1000] 맑스는 스코틀랜드 고지에서 발생한 '사유지 청소'를 예로 드는데, 그에 따르면 스코들랜드 고지의 켈트 족은 씨족으로 조직되어 있었고, 각 씨족은 자신이 정착하는 토지의 소유자였다. [...] 또 19세기에 행해진 방법의 대표적인 예로, 서덜랜드 여공을 들고 있다[맑스, 『자본』,Ⅰ, 1007~8쪽]
2) 유혈입법과 감금
상품이 아닌 노동력을 상품으로 만드는 과정은 이처럼 농민들을 삶의 터전이었던 토지로부터 분리시키고 그들로부터 일체의 생산수단을 탈취하는 과정이었다. ① 빈민법 : 15세기 말 ~16세기 전체에 이르기까지 믿을 수 없는 잔혹한 피의 입법이 만들어지고 시행되는데 17세기에는 유럽 전역에 수용소가 만들어지고 엄청난 규모의 감금이 행해진다. 그것이 집적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대대적으로 부랑자와 실협자이다. 맑스가 지적하듯, 농민들이 토지로부터 축출된 16세기 이래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이 일할 수단을 상실한 실업자들, 극빈자와 부랑자들이 넘쳐나게 된다[맑스, 『자본』,Ⅰ, 1009쪽 참조]. 토지수탈은 대규모적이었지만, 16세기에 이들을 고용할 수 있는 자본의 성장은 매우 미미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질서와 안녕을 삶의 신조로 삼고 사는 지배층의 많은 사람들을 불안과 두려움에 떨게 했다. 푸코의 『광기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많은 소교구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을 싫어하는 건강한 노동자들이 생존을 위해 구걸, 소매치기, 도둑질로 눈을 돌리낟. 그래서 온 나라에 걸인, 소매치기, 도둑들이 들끓게 되었다(146~7쪽).국가와 입법자들은 이들을 이미 부랑하고걸식한다는 사실 그 자체로 자발적 범죄자로 취급했고, 노동할 조건이 없음에도 그들이 노동하지 않는 것을 그들의의지 문제로 간주했다. [...] 또 1547년 법령에 의하면 "노동하는 것을 거절하는 사람은 그를 게으름뱅이라고 고발하는 사람의 노예로 된다. [...] 그는 채찍과 쇠사슬로 노예가 아무리 싫어하는 일이라도 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 누구나 부랑자의 자녀를 그로부터 빼앗아 도제로 남자는 24세, 여자는 20세까지 사용할 권리가 있다."[맑스, 『자본』,Ⅰ, 1010쪽]. 빈민들의 부랑을 금지하고 처벌하는 이런 법들을 통칭해서 빈민법――구빈법――이라고 불렀다.
② 대감금
부랑을 막기 위해서 17~8세기를 전후로 해서 유럽에서는 실업자, 가난뱅이, 게으름뱅이, 거지, 광인, 범죄자 등을 모두 잡아서 감금하는 방법을 널리 사용했다[푸코, 『광기의 역사』, 143쪽]. 또 1657년 칙령은 이 무차별적인 대중들에게 이유여하를 막론학 모든 형태의 구걸을 금지했다[푸코, 『광기의 역사』, 145쪽]. 17세기에 유럽 전역에서는 이들을 감금하는 거대한 수용소들이 만들어진다. 프랑스는 이를 종합병원이라고, 독일이나 영국은 교화소라고 불렀다. 종합병원의 탄생을 가져온 프랑스의 1656년 칙령에 따르면, 그 제도의 목적은 "모든 무질서의 원천인 구걸과 게으름을 막는 것"이었다[[푸코, 『광기의 역사』, 143쪽]. 종합병원은 의학적 의미의 병원으로서 탄생한 것이 아니며, "어떠한 의학적 관념과도 관련이 없는" 장치였다. "종합병원은 의료기관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존의 권력기구들과 나란히 재판소 밖에서 결정하고 판결하며 집행하는 준-사법적 조직이자 일종의 행정단위다."[푸코, 『광기의 역사』, 120쪽]. 이러한 감금의 규모는 너무도 거대했는데 17세기 파리에서는 시민 100명 중 한 명을 '종합병원'에 가두었다. 푸코는 이를 두고서 '거대한 감금'이라고 불렀다. "실업자들의 비참한 형편을 가리고 실업자들의 동료로 인해서 야기될 사회적 및 정치적 난관을 방지하는 것"이, 수용소로 실업자를 흡수했던 감금의 실질적 기능이었다[푸코, 『광기의 역사』, 152쪽].
③ 노동교화
감금의 직접적인 목표는 일자리를 주는 게 아니라 구걸을 막고 부랑자를 가두는 것이엇지만, 가두는 사람들은 가둔 사람들을 노동을 통해 '교화'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산업화의 그 초기 국면에서는 노동은 산업화가 야기한 문제가 아니라 반대로 그것의 일반적 해결책, 최선의 만병통치약으로, 일체의 빈곤에 대한 처방으로 인식된 것 같다. 노동과 빈곤은 단순한 대립관계로, 즉 간단한 반비례관계로 파악되었다."[푸코, 『광기의 역사』, 153쪽]. 이러한 점에서 노동이란 일반화된 하나의 도덕적 힘이었다. 부랑을 금지하는 유혈입법이나 거대한 감금시설에서 노동이란 원죄 이래로 인간이 받아야 할 불가피한 징벌이며 모든 악의 치유책이요 구원의 보증이었다. "수용소에서의 노동은 윤리적 의미를 갖는다. [...] 감금에 대한 도덕적이고 경제적인 요구는 바로 이러한 노동 경험의 형태로 제기되었다. 고전주의 시대[17~8세기]에 노동과 게으름 사이에는, 이전의 나병환자의 대대적인 배제를 대신하는 하나의 분계선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푸코, 『광기의 역사』, 156쪽].
④ 경찰
이로써 이제는 "도덕이 경제나 상업처럼 행정의 대상이 되었다."[푸코, 『광기의 역사』, 160쪽]. 감금과 노동을 연결하며, 그것을 통해서 '도덕화된 인간'. '도덕화된 신체'를 만들고자 하는 이러한 조치의 요체를 푸코는 '치안'(police)의 문제라고 요약한다. "고전주의 시대에 치안이라는 낱말은 매우 구체적인 의미, 다시 말해서 노동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모든 이에게 노동을 가능한 동시에 불가피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수단들 전체라는 의미를 갖는다."[푸코, 『광기의 역사』, 142쪽].
⑤ 빈곤의 힘
노동과 빈곤이 도덕적을 대립되는 것이었음에도, 실제로 양자는 상보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 18세기 말 내지 19세기 정치경제학자들은 '빈곤'에 만족하지 않고, 좀더 강력한 개념인 기아로 그 개념을 대체한다. 그들 또한 칼뱅처럼 기아의 도덕적 기능이 바로 노동자를 길들이는 것이었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지적한다. 타운센드는 기아의 동물학에 기초해서 구빈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고통과 쾌락의 계산을 신조로 삼았던 벤담은 빈곤이란 사회에 잔존하고 있는 자연이고, 따라서 그에 대한 육체적 제재가 바로 기아라고 보았다. ""육체적 제재의 힘이 충분하다면 정치적 제재의 채택은 불필요할 것이다, 필요한 것은 빈미늘 과학적이고 경제적로 취급하는 것뿐이다."[폴라니, 『거대한 변환』, 145쪽].
⑥ 전방위 감시장치
벤담은 이전 시기에 빈민을 노동하게 했던 치안 내지 경찰이라는 정치학적 장치를,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다른 종류의 비정치적 장칠 대체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는데 '전방위 감시장치'(panoticon)이 그것이다. [...] 이는 감옥은 물론 공장과 학교, 심지어 내각에 이르기까지 단 한 사람의 감시자만으로 모든 사람의 행동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자동장치로 벤담을 비롯한 공리주의자들은 최소비용에 의한 최대 다수의 행복이라는 슬러건을 내걸었는데 좀더 정확히 최소 비용에 의한 최대 효과를 의미한다. [...] 벤담은 그것을 단지 감옥의 모델로서만 제시한 것이 아니라, 학교와 공장, 병원은 물론 정부의 내각조차 수상 한 사람이 모든 관리들을 감시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 부랑과 구걸을 처벌하는 끔찍한 피의 법률들, 그런 사람들을 추방하거나 가두는 거대 장치들, 그와 더불어 노동자나 빈민들에게 도덕을 가르치며 강제도는 빈곤과 기아 등, 부랑자들의 자유를 강제 정착과 노동으로 길들이여는 조치들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거대한 규모로 시행된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폭력적으로 토지를 수탈당하고 추방되어 부랑자로 된 농촌주민들은 그 다음에는 무시무시한 법령들에 의해서 채찍과 낙인과 고문을 받으면서 임금노동의 제도에 필요한 규율을 얻게 된 것이다."[맑스, 『자본』,Ⅰ, 1013쪽].
3) 자본의 혈통
자본은 단순히 화폐축장이나 집적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증식을 위해서 투여되는 화폐로 노동자를 착취해서 잉여가치를 획득할 수 있을 때 화폐는 비로소 자본이 된다. [...] 가치증식의 조건, 노동력이 상품화될 수 있는 조건, 그것이 바로 화폐가 자본이 되는 조건이고, 자본축적이 시작될 수 있는 조건이며, 자본주의가 시작될 수 있는 조건이다. [...] 이 비밀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 그것은 자본의 증식의 전제조건인 노동력의 상품화를 이루기 위해 생산자로부터 토지를 비롯한 생산수단을 약탈하고 그들의 생존수단을 빼앗음을써 그들이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좋든 싫든 자본의 명령과 자본이 제시하는 새로운 규율에 순응하는 습속의 도덕이 부가되어야 한다. 상품이나 가치와는 전혀 무관하던 삶이, 생산이나 활동이, 이로써 가치를 생산하고 가치화되는 과정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탄생을 위해 요구되는, 화폐나 토지의 거대한 집적보다도 훨씬 더 일차적인 저네조건이다.
3. 국내시장의 창출
1) 자본주의적 시장
생산수단을 잃었기에 자신의 노동력이라도 팔아아먄 하는 광범위한 무산자의 존재와 더불어, 자기증식하는 화폐로서 자본의 정의가 가능하게 했던 실질적이고 역사적인 또 하나의 조건은 시장이었다. 노동력을 팔려는 무산자의 존재 자체는 바로 노동력 상품의 시장(노동시장)이 존재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인 생산의 조건이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자본은 또한 자신의 생산물을 판매할 수 있는 상품 시장을 필요로 한다. [...] 반면 자본주의에서 시장은 강한 의미에서 강제고 의무가 된다. 기아에 의해서든 결핍에 의해서든 시장에 나가서 노동력을 팔고 시장에 나가서 상품을 사는 '내적 강제'가 자본주의적 시장의 전제고 요체다. [...] 유럽의 식민주의자들은 다른 대륙의 원주민으로 하여금 노동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도록 강요하려는 목적으로 그들의 전통적 제도를 파괴하고 상호부조적인 공동체를 뿌리째 뽑아버린다[폴라니, 『거대한 변환』, 205쪽 참조]. 맑스 또한 이렇게 말한다. "농촌 주민의 일부의 수탈과 추방은 산업자본을 위해 노동자와 그들의 생활수단 및 그들의 노동재료를 분리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국내시장을 창조한다. 사실상 소농민을 임금노동자로 전환시키며 그들의 생활수단과 노동수단을 자본의 물질적 요소로 전환시킨 사건들은 동시에 자본을 위한 국내시장을 조성했다. "[맑스, 『자본』, 1027] 이전에는 농민들이 직접 생산하던 물건들이 이제는 자본가들에 의해 생산된 상품이 되고, 무산자가 된 농민들은 이것을 사야만 한다. 농업적 소생산이나 농촌가내공업은 이러한 시장의 적이다. "농촌의 가내공업을 파괴함으로써만 한 나라의 국내시장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 필요한 귬와 안정성을 가질 수 있었다." "[맑스, 『자본』1권, 1028] [...] 따라서 단순상품생산 내지 소생산에서 국지적인 자연발생적 교환의 장으로서의 시장과, 기아와 결핍을 통해서 강요되는 전면적 교환의 장으로서의 자본주의적 시장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 "시장을 맡겨 두라"는 자유주의의 구호에서 '시장이 기아에 의해 강요되는 시장임을 보지 못하는 것도,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자유가 기아에 의한 강제를 의미함을 보지 못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2) 도시와 시장
자본주의적 시장의 발생을 이미 충분히 발전도어 있었던 도시에서 상업과 시장이 확대되면서 나타난 것이라고 하는 것 또한 하나의 신화이다. 14세기, 특히 15세기를 넘어서면서 유럽에는 상업이 발달한 자치도시들, 한자 동맹이라고 불리는 북유럽의 거대한 도시 동맹체, 베네치아나 피렌체, 밀라노, 제노바 등의 북부 이탈리아 도시들, 혹은 안트워프나 암스테르담 등의 서유럽 도시 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시장은 이러한 시장의 양적 확대로 형성되지 않았다. 반대로 자치도시를 조직하던 다양한 조직들은 상품시장이나 노동력시장이 ㄷ시 바깥으로 확산되는 것을 저지했다. [...] 그들은 도시에서 도시 바깥으로 시장과 교역이 확산되는 것을 여러 가지 독점적 권리를 이용해서 방지하고 방해했는데 왜냐하면 자신들이 상업과 무역을 독점함을써 획득하는 초과이윤이 시장의 확산에 따라 감소되는 것을, 농촌 지역에서 얻던 초과이윤이 감소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농촌의 봉건제도와 도시의 길드제도는 고리대금업과 상업에 의해서 조성된 화폐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전환되는 것을 방해했다. [...] 새로운 매뉴팩처는 해안의 항구 또는 농촌지역들에 건설되었다. 이 때문에 영국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공업 배양지들을 반대하는 자치도시의 치열한 투쟁이 일어났다.""[맑스, 『자본』, 1032~33] [...] 이처럼 도시 원격지교역은 자본주의적 국내교역의 모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방해자였다. 농촌에서 제한적으로 이루어지던 장(지방 시장)이 자본주의적 시장의 모태가 된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도시가 지배한 원격지교역과 이런 지방 시장은 단절되어 있어서, 가령 외국 상인의 소매행위는 전면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이 두 가지 성장은 "유동적인 자본이 도시의 여러 제도들을 해체시킬지도 모른다는 위협에 대한 도시측의 반발"로 인해서 더욱더 엄격하게 분리되었다[맑스, 『자본』, 87]
3) 시장과 국가
자본주의적 국내시장은 어떻게 창출되었는가? 그것은 한편으로는 농민들의 생산수단을 탈취하고 소생산을 파괴하여 상품시장과 노동력시장을 창출한 피비린내 나는 저 '본원적 축적'의 과정에 의한 것이었다.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자치도시의 특권과 텃새를 분쇄하여 도시간의 구별이나 지방간의 구별, 도시와 농촌의 구별을 점차 넘어선 전국적 시장을 수립하고자 했던 국가에 의해 이루어졌다. 16세기경의 중상주의 체계는 바로 이러한 과제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절대주의 앙정을서는 봉건귀족에 의한 지역적 분할과 자치도시에 의한 지역적 분리를 극복해서 하나의 영토 국갈 통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였다. 중상주의는 절대주의 국가 입장에서 이처럼 분리된 교역을 통합해서 하나의 전국적 시장을 창출하려는 전략이었고, 이로써 영토적으로 통합된 국가를 확립하려는 통치의 기술이었다. 자본주의적 국내시장은 토지약탈과 유혈입법, 거대한 수용소 등을 경유하는 경로로든, 아니면 이렇듯 절대주의 체제의 정치적 목적을 경유하는 경로로든, 국가의 적극적 개입과 통제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창출된 것이었다. [...] 그것은 시장의 '자연적' 작동을 보장하려는 다양한 국가적 통제에 의해서만 유지되었다. 자본가들이 시시장을 만들어내기 위해 인위적으로 기아와 굶주림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시장의 힘을 신봉하고 숭배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시장의 '자연적' 작동을 위해 국가와 제도를 이용하려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4. 본원적 축적은 어떻게 축적되었나?
1) 공채와 세금
본원적 축적은 일차적으로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분리로 정의된다. [...] 그런데 그것은 동시에 폭력적을 약탈학 강탈한 토지와 생산수단을 무산자 대중의 반대편에 집적하고 '축적'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렇게 '축적'된 자본이 바로 소위 본원적 축적을 형성하며, 그런 축적이 스미스가 말했던 사전적 축적이자 본원적 축적이다. 영국의 경우에는 본원적 축적의 상이한 요소들을 이러한 식민제도와 더불어 국채제도와 근대적 조세제도 및 보호무역제도 등으로 체계적으로 통합하였다고 한다[맑스, 『자본Ⅰ』 , 1033]. 그런데 "공채는 본원적 축적의 가장 강력한 지렛대가 된다. 마치 마술 지팡일 치는 것처럼, 공채는 비생산적인 화폐에 창조하는 힘을 부여하고 그것을 자본을 전환시킨다."[맑스, 『자본』, 1038] 국가는 은행이나 다른 채권자들에게 공채 내지 국채를 발행함으로써 가령 은행은 채권자가 되고 국가는 채무자가 되며 국가의 채무는 누가 갚는가? 그 국가의 국민이다. [...] 국가 안에 포섭된 국민은 국가가 발행한 채권과 그에 대한 이자까지 갚아야 된다. 따라서 세금 내지 조세제도는 이러한 공채나 국체 제도의 필수적 보완물이다[이에 대해서는 맑스, 『자본』, 1040을 참조].
2) 식민주의
본원적 축적의 요소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아니 외부세계를 강탈하여 획득한 부의 요소들이다. "아메리카에서 금 은의 발견, 아메리카 대륙에서 원주민의 섬멸과 노예화 및 광산에서의 생매장, 동인도의 정복과 약탈의 개시, 아프리카가 상업적 흑인 수렵장으로의 전환―이러한 것들이 생산의 자본주의적 시대를 알리는 새벽의 특징이었다. 이러한 목가적인 과정들은 본원적 축적의 주요한 계기들이다."[맑스, 『자본Ⅰ』 , 1033]. 이를 유럽 내부에서 자행된 토지 약탈과 농촌주민의 축출, 감금과 대비해서 본원적 축적의 '외적 계기'라고 말할 수 있다(물론 여기서 사용되는 '외부', '외적 계기'라는 말은 지리적이고 외연적인 경계를 통해 정의되는 개념이며, '내부'와 대립되는 개념인 반면 '외부'라는 개념은 가치론의 공리계의 '외부'처럼 공리계 내부에서 존재하며 작동하는 외부이고, 그러한 내부를 가능하게 하는 외부이며, 가장 넓은 의미로는 공리계의 제한이 존재하기 이전의 모든 방향을 향해 열린 잠재성 전체다].
3) 노예사냥
[...] 맑스는 "17세기의 전형적인 자본주의국이었던 네덜란드의 식민지 경영사는 '배신, 매수, 학살, 비열의 유례없는 광경'을 보여준다"면서 그들이 자바 섬에서 사용할 노예를 얻기 위해서 셀레베스 섬에서 실시했던 인간약탈제도를 옐 들고 있다. [...] "거기에는 가족으로부터 강제로 분리되어 쇠사슬에 얽매여 있는 가엾은 인간들로 가득 차 있다."[맑스, 『자본Ⅰ』 , 1034]. [...] 노예무역에 의한 '축적'은 영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의 공업 중심지 가운데 하나인 리버풀은 "노예무역에 의해 크게 성장했다. 노예무역은 이 돗의 본원적 축적의 방법이었다. [...] 리버풀에서 노예무역에 사용된 선박 수는 1730년 15척, 1751년 53척, 1760년 74척, 1770년 96척, 1792년 132척이었다."[맑스, 『자본Ⅰ』 , 1044~5]. [...]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적인 방법으로만 축적하고 착취한다는 것처럼 순진하고 어리석은 믿음은 없다. 17세기는 네덜란드 도시들의 시대였고, 18세기 후반 이후는 영국이 그리고 미국이, 자본주의의 가장 선진적이고 전형적인 사례를 형성하던 시기로서 그 시기 전형적인 자본주의는 이처럼 노예매매와 노예사냥을 통해서 거대한 자본을 축적하고 있었다.
4) 축적의 신과 그 선교사들
[...] 맑스는 "진정한 식민지들에서도 본원적 축적의 기독교적 성격은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신교의 엄격한 주창자들인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1703년에 그들의 의회의 결의에 의해 [...]"[맑스, 『자본Ⅰ』 , 1036]이라고 말한다. 즉 "이른바 기독교 인종이 세계의 도처에서 또 모든 주민들에 대해 수행한 야만 행위와 잔인한 행위는 어떤 역사적 시기에서도 그 유례가 없으며, 또 아무리 난폭하고 몽매하여 무정하고 파렴치한 인종도 그것을 따라갈 수 없다."맑스, 『자본Ⅰ』 , 1033~4].
5) 폭력의 경제학
국가권력을 앞세운 이러한 식민주의는 "자본 집적의 강력한 지렛대"였으며, 이른바 '본원적 자본'의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 "[유럽 밖에서 집적적인 약탈과 토착민의 노예화와 살인 강도에 의해서 획득한] 재물은 본국으로 흘러 들어와 거기에서 자본으로 전환되었다."[맑스, 『자본Ⅰ』 , 1036~]. [...] 그래서 맑스는 "만약 화폐가, 오지에가 말하는 바와 같이, '한쪽 볼에 핏자국을 띠고 이 세상에 나온다'고 한다면, 자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이 세상에 나온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맑스, 『자본Ⅰ』 , 1046]. 마지막으로 확인해 두어야 할 것은, 본원적 축적, 사전적 축적이니 하는 이름으로 자본의 신성한 기원이 된 끔찍한 탄생과정 전체에 걸쳐서 보편적 수단이 되었던 것은 국가장치 내지 국가적 폭력이었다. "신흥 부르주아지는 [...] 노동자 자신을 자본에 정상적인 정도로 종속시켜 두기 위해서, 국가권력을 필요로 하며 또한 그것을 이용한다. 이것이 이른바 본원적 축적의 하나의 본질적 측면이다.[맑스, 『자본Ⅰ』 , 1013~4]. 혹은 전국적인 시장의 창출이나 국채제도, 조세제도, 보호주의, 나아가 악마적인 식민주의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저 거친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었다. "이 모든 방법들은 봉건적 생산양식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의 전환과정을 온실 속에서처럼 촉진해 그 과도기를 단축시키기 위해서 국가 권력을 이용한다. 폭력은 낡은 사회가 새로운 사회를 잉태하고있을 때에는 언제나 그 조산사가 된다. 폭력 자체가 하나의 경제적 잠재력이다."[맑스, 『자본Ⅰ』 , 1033]. 본원적 축적이란 국가적 폭력을 통해서 전세계의 인민대중을 착취하고 수탈함으로써 본원적 자본이 형성된 과정이었다. 본원적 축적의 경제학에 대한 맑스의 비판은 역설적이게도 국가적 폭력이라는 비경제적 요인이, 아니 그저 국가적 폭력만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폭력 자체가 자본의 경제적 과정의 기원이었다는 것을 보여는 것이고, 인류 역사상 최대의 잔혹한 폭력이 가치법칙의 출발점을 형성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써 그것은 근면성의 신화를 통해서 최초의 자본에 순수 경제적-도덕적 형식을 부여하는 정치경제학의 은폐된 폭력성을 드러낸다. 경제학의 폭력성, 그것은 아마도 일체의 폭력이 사라진 과정으로 경제를 묘사하는 것이다. [...]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자본의 권력이란 이 폭력의 경제를 통해서 집적된 집적된 온갖 재화들이 화폐적 형식의 일반성 안을 통합됨으로써 구성되는 경제적 폭력의 체제다.
5. 자본의 계보학
1) 맑스의 '방법론'
[...] 맑스는 『자본』 을 쓰면서 "좀더 추상적인 개념에서 좀더 구체적인 것으로의 상향"이라는 점에서 순서에 따라 배열했다는 것이라는 맑스의 방법론에 대한 유명한 공식을 알고 있다. 이것을 흔히 '서술방법'이라고 부른다. 가치의 개념에서 가치증식을 포함하는 자본 개념을, 그런 '자본 일반' 개념에 경쟁이란 변수를 추가해서 '다수 자본' 개념을 점점 구체화되면서 서술되고 있는데 그런 서술 이전에 출발점이 되는 가장 추상적인 범주는 어떻게 설정한 것이고 거기에 어떻게 도달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해서 통상 제시되는 대답은 구체적 대상에 대한 경험적연구를 통해서 가장 중심적이고 추상적인 범주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를 서술방법과 대비해서 연구방법이라고 부른다. 즉 맑스는 경험적인 구체성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가장 추상적인 범주인 가치에 도달했고, 거기에 하나씩 변수들을 더해 가면서 보다 구체적인 것으로 올라갔으며, 그 결과 사유된 구체성에 도달한 것이라고, 앞의 것을 분석이라고 부르고, 뒤의 것을 종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좀더 추상적인 것에서 좀더 구체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종합의 방법이라면, 체계적으로 서술하려는 어떤 사람도, 그럴 능력만 있다면, 선택할 수 있는 방법 아닌가? 가령 헤겔의 『논리학』 이나 『정신현상학』 이야말로 가장 추상적인 범주에서 가장 구체적인 범주로 상향하고 잇지 않은가? [...] 맑스의 방법론을 그런 식으로 본다면, 그것은 『자본』 을 자본에 대한 맑스의 입론을 제시한 책으로, 즉 『자본론』 으로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방법론에 대한 지식이 과연 『자본』 을 읽는데에 어떤 도움을 주는 것일까? [...]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향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자본』 안에서는 적지 않게 존재한다. 대표적을 본원적 축적을 다룬 『자본Ⅰ』 의 제8편으로, 『자본Ⅰ』 의 제7편이 다루는 것은 자본의 축적 과정이다. 여기에 이어지는 8편을 두고서 자본의 축적에 어떤 새로운 변수를 덧붙여 보다 구체적인 것을 향해 한 걸음 나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후퇴면 후퇴이지 상향이나 전진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보면 제8편은 일종의 기나긴 부록이나 군더더기로 간주되고 만다.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향'이라는 방법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또 하나 이른바 역사적 사실을 언급한 장들은 전부 그 앞의 논지에 대한 일종의 예증에 지나지 않게 된다. 역사적 장들은 좀더 추상적인 것과 좀더 구체적인 것을 단계적으로 잇는 논리적 연결 속에 끼여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상향이라는 방법론은 『자본』 의 구성에서 역사를 부차화시키는 방법일 뿐만 아니라, 그런 식을 논리와 역사를 대립시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적 장들을 배제한다면, 절대적 잉여가치나 상대적 잉여가치의 개념은 계급투쟁과 분리되거나 아니면 그 경우 계급투쟁이란 노동시간의 선분을 둘로 쪼개는 경제주의적 대립에 머물고 만다. 『자본』 이 역사적 순서에 따른 배열이 아니라 논리적 순서에 따른 배열이라고 할 때조차도, 그 논리는 역사를 내재적 요소로 함축하고 있는 논리이고, 역사라는 외부를 전제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논리임을 다시 강조해야만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좀더 추상적인 범주에서 좀더 구체적인 범주로 상향한다는 관념에 쉽지 않은 난점이 또다시 발생하는데 왜냐하면 절대적 잉여가치나 상대적 잉여가치에 이어지는 역사적 장들은, 노동일을 둘러싼 투쟁에서처럼 국가가 항상 관여하고 있고 이는 본원적 축적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국가나 세계체제의 문제는 자본의 생산과정은 물론 자본의 총과정을 다 다룬 뒤에 등장할 아주 구체적인 개념이다. 맑스는 자신이 설정한 방법론을 스스로 위반한 것일까? 분명한 것은 국가를 제외하고는 노동일을 둘러싼 투쟁이나 본원적 축적을 제대로 서술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자본의 논리를 범주 자체의 내적 발전과정으로 다루려는 이러한 방법은 차라리, 그것이 포함된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전체의 분위기가 그러듯, 알튀세르의 말대로 헤겔과의 불장난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것은 자본주의의 모든 것을 가치 내지 자본 개념의 내적 자기 전개로 설명하려는 관념론의 잔영인가? 그것은 어쩌면 자본주의 세계 안팎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치론의 공리계 안에서, 자본의 공리계 안에서 자기발전하는 양상을 서술하는 정치경제학의 고유한 방법론은 아닐까?
2) 계보학적 비판 : 정치경제학 비판의 방법
우리는 맑스의 방법론 또한 정치경제학의 방법론이 아닌 정치경제학 비판의 방법론이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서 강조해야 한다. 『자본Ⅰ』 에서 서술된 것을 차례대로 요약해 보자. 먼저 '상품과 화폐'를 다룬 1편에서 맑스는 어떻게 단순 교환을부터 화폐가 발생하게 되었는지, 가치라는 개념이 성립하게 되었는지를 서술했다. 다음 '화폐에서 자본으로의 전환'을 다룬 2편에서는 자본의 일반 고식을 보여주면서 '증식된 가치'인 ΔM이 대체 어떻게 발생하였는가 질문해서 가치론의 공리계가 갖는 내적 이율배반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잉여가치 생산을 다루는 3~5편에서는 자본으로부터 어떻게 잉여가치가 발생하는지, 그러기 위해선 어떤 조건이 필요하며, 어떤 방식으로 잉여가치의 착취가 행해졌는지를 보여주었다. 자본의 축적과정을 다룬 7편에서는 반대로 어떻게 잉여가치에서 축적된 규모의 자본이 발생하는지, 그리고 자본축적의 일반적인 법칙이 뜻밖에 상대적 과잉인구를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적 인구법칙'으로 요약된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마지막을 소위 '본원적 축적'을 다루는 8편에서는 자본축적의 기원이 디는 본원적 축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즉 자본주의는 대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이미 이런 식으로 맑스가 정치경제학의 논리를 따라가면서, 그리고 그것을 보완하고 보충해 주면서 그것을 비판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는데, 이럼으로써 그는 정치경제학적 이론의 치소치가 아니라 최대치와 대결하고 있다. 동시에 이를 통해서 논리적 안결성이나 진리성과는 다른 차원에서,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양상에 치대한의 논리적 일관성을 부여하여 개념적으로 포착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낸다. [...] 그런데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식으로 정치경제학의 논리에 최대한의 일관성을 부여하려 하고 있음에도 그 일관성이 중요한 지점에서마다 파열되고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본의 일반적 공식에서 그 개념의 모순으로, 거기서 다시 노동가치론의 이율배반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아니면 자본 증식의 개념을 위해선 정치경제학에 없는 것이, 즉 노동력의 상품화를 위한 특정한 조건이 전제된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하고 자본의 본원적 축적 내지 자본주의의 탄생을 위해서 정치경제학이 가린 것이, 거대한 폭력과 약탈, 수탈과 횡령의 역사가 필요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식으로 맑스는 정치경제학자가 당연시하는 것들이 암묵적을 전제하고 있는 어던 이부를, 혹은 그것의 논리적 일관성이 붕괴되는 또 다른 외부를 외부를 드러낸다. 바로 이것이 있음으로 인해서 정치경제학을 따라가며 완성하고 보충해 주는 논리는 정확하게 그에 대한 비판을 이어진다. 우리는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방법을 다시 두 가지로 구분해야 한다. 하나는 정치경제학의 논리에 따라서 그것을 보충해주고 완성해 주려 하지만, 그럼에도 발생하는 내적 모순과 이율배반을 드러낸다. 다른 하나는 정치겨제학이 사용하는 공리나 개념이 가능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그 공리계 내부에 없는 특정한 조건을 드러낸다. 즉 그런 공리나 개념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 다시 말해서 발생조건 내지 연기적 조건dependent condition에 대해서 질문하고 찾아낸다. 가령 정치경제학자들이 잉여가치의 발생지점을 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맑스는 강조한다. 그것을 본다는 것은, 정확하게 말해서 자본이나 정치경제학이 은폐하고자 하는 것을 드러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맑스가『자본』 에서 사용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차라리 발생에 대한 질문, 혈통과 계보에 대한 질문과 결부되어 있다. 그는 정치경제학자들이 당연하게 여긱 있는 개념들이나 범주들을 그 발생 내지 출현의 지점을 드러냄을써 근본적인 비판과 의문에 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맑스의 방법은 근본적을 발생에 대한 계보학적 문제설정을 통해 당연시되어 있는 의미나 가치, 개념이나 범주를 근본적인 의문으로 몰고 가는, 니체적인 의미에서 계보학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들뢰즈, 『니체와 철학』 , 18~9쪽]. 여기서 니체적이락 말한 것은 푸코가 19세기 에피스테메의 한 특징이라고 말했던, 기원으로 회귀하는 방법, 기원의 신성함을 통해 현재 존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방법과 정반대로, 혈통을 추적하여 그것의 혼혈성과 우연성을 드러내고 이로써 그것의 정당성을 문제삼는 비판의 방법이라는 의미에서이다[푸코, <니체, 계보학, 역사>, 336~44쪽]. 사전적 축적에 관한 스미스의 설명이 기원의 광채를 통해 자신을 정당화하는 족보학적 방법에 속한다면, 그것을 비판하는 맑스의 연구는 그 발생지점을 찾아들어가서 그 조건이 갖는 특정한 역사성과 우연성, 그리고 폭력성을 드러내서 그 정당성 자체를 근본적인 의문에 부쳐버린다는 점에서 계보학적 비판의 방법에 상응한다. 『자본Ⅰ』 의 배열에서 본원적 축적의 장들이 책의 마지막에 배열된 것은 바로 정확하게 이러한 계보학적 비판의 방법이다. 즉 자본의 축적에 대한 장에서 축적의 원천이 잉여가치임을 드러내고, 일정 시간 이후라면 자본의 대부분은 잉여가치로 이루어진 것임을 드러내자, 정치경제학은 그럼에도 최초의 자본이 있음을 주장했고, 사전적 축적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맑스는 축적에 뒤이어 본원적 축적을 물고늘어지고 있다. 맑스의 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계보학을 다시 정리할 수 있는데 그것은 현재 자명한 것으로 당연시되어 있는 모든 개념이나 가치를 그 발생지점까지 추적해서 그 외부를 드러내고 이를 통해 그것의 정당성이나 자명성을 의문에 부치는 비판 방법이다. 계보학은 발생지점을 찾악아가는 역사적 연구를 수반하지만 역사적 연굴 환원되는 역사학의 일종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공리계적인 형식 자체를 따라가면서, 그것이 가능하게 되는 은폐된 외부를 찾아내고, 그것을 포섭하여 내부하하는 양상을 추적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논리를 통해서 발생지점을 표시하는 역사를 드러내고, 역사를 통해서 논리의 한계, 그 외부를 드러내는 방법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맑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자본의 계보학에 대해서도 다시 정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자본의 공리계, 가치론의 공리계를 그 발생지점까지 추적해서 정치경제학적 공리계의 외부를 드러내고 이를 통해서 가치, 노동, 화폐, 이윤, 자본, 축적, 지대 등과 같은 당연시디는 개념들을 근본적인 의문에 부치는 방법이고, 자본의 논리가 진리(Truth)가 되는 양상, 그것도 유일한 현실적 진리가 되는 양상에 대한 연구이고, 대개는 자연적 현실성의 형태로 나타나는 그것의 진리됨을 근본적인 의문에 부치는 연구이며, 진리의 형식을 취하는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적 연구이다. 요컨대 '자본과 그 외부에 대한 연구', 그것이 바로 맑스가 『자본』 에서 보여준 자본의 계보학이다.
제8장. 자본의 유통과 자본주의의 재생산
『자본Ⅰ』이 '자본의 생산과정'을 다루고 있다면, 『자본Ⅱ』은 '자본의 유통과정'을 다룬다. 자본은 주기적인 순환을 통해 운동하는데 화폐에서 생산수단 및 노동력을, 생산물로, 다시 그것을 팔아서 화폐로 순환된다. 이 화폐는 다시 자본으로서 새로운 순환을 시작하는데 이처럼 원래 형태에서 변환되어 다시 원래 형탤 되돌아오는 자본의 운동을 자본의 순환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운동은 주기적인 양상으로 반복되는데, 자본의 주기적 순환의 반복을 자본의 회전이락 한다면, 순환이 2번의 주기를 완성하면, 자본은 2회 회전한 것이다. 자본의 순환에서 중요한 것은 화폐 형태의 자본이 생산수단이 되었다가 상품의 형태가 되는 변환의 양상이라고 한다면, 자본의 회전에서 중요한 것은 투여한 돈이 회수되는 양상이다. 한편 각각의 순환은 화폐 형태의 자본이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구매하거나 생산한 상품을 판매하는 유통과, 노동력과 생산수단이 결합디어 생산하는 생산의 두 과정을 이루어져 있다. 즉 <자본의 순환과정=자본의 생산과정+자본의 유통과정>이다. '자본의 유통과정'을 다루는『자본Ⅱ』은 순환과정 내부에서 특히 유통과정을 다루며, 이런 의미에서 자본의 '생산과정'을 다루는 『자본Ⅰ』과 대비된다. 이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자본의 형태변한과 순환을 다루면서 생산과 유통의 관련양상을, 그리고 유통과 가치 생산의 관계를 다룬다(제1편). 둘째 자본의 회전을 다루는데, 특히 회전의 양상이 잉여가치의 취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다룬다(제2편). 셋째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산과 유통'을 다루는데, 생산물을 생산수단과 소비재로 나누어서 총생산물이 어떻게 그 가치를 실현―상품이 판매될 때 그 상품의 가치는 실현된다―하는가를 다루는 요명한 재생산표식이 등장한다(제3편).
1. 자본의 순환과 그 외부
1) 자본의 세 형태
자본은 상이한 형태들을 순차적을 통과하는데 가령 자본의 '일반적 공식' M―C―M'은 화폐가 상품의 형태로 바뀌었다가(M―C ; 구매), 다시 화폐의 형태로 바뀌는(C―M' ; 판매) 양상을 보여준다. 화폐의 형태로 존재하는 자본은 화폐자본이라고 하며, 상품의 형태로 존재하는 자본을 상품자본이라고 한다. 이 두 개의 변환 사이에 또다른 변환이 있다. 자본가는 화폐로 상품을 사서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건 소비자일 뿐이며, 그런 식으로 사용되는 화폐 또한 자본이 아니다. 그저 구매수단인 화폐일 뿐이다. 이걸 맑스는 '화폐로서의 화폐'라고 했는데 자본가는 기계와 원료 같은 생산수단을 사고, 일을 시킬 노동력 상품을 사는데 이 양자가 결합되어 생산과정이 시작되고 여기서 자본은 생산과정에 직접 투입되는 요소의 형태를 취한다. 이처럼 생산과정에서 자본이 취하는 소재적 형태는 '생산자본'이라고 부르는데 이렇게 사용될 때 화폐는 '자본으로서의 화폐'가 된다. 화폐로서의 화폐가 기호 M(혹은 M')라고 한다면, 자본으로서의 화폐는 M―C―M'이 함축된 M(혹은 M')이다. 가령 자본가의 수중에 집적되어 있는 화폐는 화폐자본이다. 자기 증식을 위해서 사용되는 화폐, 혹은 거기에 사용될 화폐만이 화폐자본이 된다. 누군가 옷을 만들어 팔고자 한다면, 컴퓨터, 재단기, 재봉틀 등의 기계, 면직물을 비롯한 옷감, 노동력, 노동자로 하여금 그것을 사용해서 일을 하게 해야 한다. 이 경우 기계와 옷감, 노동력은 '생산자본'이 된다. 그리고 생산의 결과 만들어진 옷들은 내다팔아야 할 상품의 형태를 취하는 뜻에서 '상품자본'이 된다. 그것을 팔아서 획득한 화폐는 다시 '화폐자본'으로 자본가의 수중에 집적된다. 그리고 다시 그것은 기계나 원료 등으로 바뀌어 '생산자본'이 되고, 다시 거기서 생산된 '상품자본'이 된는데 이런 식의 변환이 반복해서 이어지고 잡ㄴ의 이러한 형태변환 운동을 '자본의 순환'이라고 한다.
M―C ...... P ...... C'―M'
여기서 LP는 노동력, MP는 생산수단을 표시한다. C와 이 양자를 연결하는 선은 별도이 교환이나 변환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C를 구성하는 요소를 표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등호에 가깝다. 만약 이를 따로 표시하지 않고 교환만을 표시하면 M[=LP+MP] 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화폐를 통해서 노동력과 생산수단이 결합된다는 것을 표시하는 도식으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요약해 주는 도식이다. 독일어로 화폐는 G(Geld)로, 이는 이전에는 공동체(G; Gemeinde)가 수행하던 역할, 즉 노동력과 생산수단의 결합이라는 역할을 자본주의에서는 화폐가 대신하게 되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도식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화폐 없이도 노동―생산수단과 노동력의 결합―할 수 있게 해주는 공동체를 파괴학 제거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렇게 파괴된 공동체의 자리에 화폐가 대신 들어선다. 화폐를 통해서만, 즉 화폐를 위해 노동력을 판매하고서만 생산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만들어진 것인데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자본주의에서는 화폐가 생산의 영역에 존재하는 유일한 공동체가 된 셈이다.
2) 자본 순환의 세 형태
(1) 화폐자본의 순환
화폐자본이 구입하는 특수한 상품(LP, MP)를 생략해서 모두 상품 C라고 표시한다면 자본의 순환은 좀더 간단하게 다음처럼 표시된다. M―C ...... P ...... C'―M' 이는 화폐자본에서 시작해서 화폐자본으로 종결된다는 점에서 화폐자본의 순환을 표시한는 도식이다. 자본의 순환은 역사적, 논리적으로 화폐자본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화폐자본은 자본 운동의 출발점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 순환의 도식은 화폐가 소모되는 것이 아닌 투여되고 다시 회수된다는 것을 표시하여 화폐와 구별되는 화폐자본의 특성을 보여주고, 뒤에 오는 C'이나 M'이 증식딘 가치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이 도식은 자본이 가치증식을 목표로 운동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표시한다. 뒤에 오는 C'이나 M'이 증식된 가치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이 도식은 자본이 가치증식을 목표로 운동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표시해준다. 중간에 오는 과정은 모두 이를 위해서 필요한 매개항일 뿐이다. 중상주의자들은 어떤 수단(매개항)을 통해서든 오직 가치의 증식이라는 목적에 집착한다는 점에서, 자본의 순환을 화폐자본의 순환으로만 본다.
(2) 생산자본의 순환
자본의 순환은 그 뒤에 다시 이어지며 시작된다. 이는 다음과 같이 표시된다.
M―C ...... P ...... C'―M'―C ...... P ...... C'―M'―C......(......)
―――――――― (①)
――――――――― (②)
――――――――― (③)
여기서 자본의 순환을 꼭화폐자본의 순환 (①)이라고 국한해서 볼 필요는 없다. 생산자본으로 출발해서 생산자본으로 돌아오는 과정(②)으로 볼 수 있고, 상품자본에서 시작해서 다시 상품자본으로 돌아오는 과정(③)으로도 볼 수 있다. ②는 생산자본의 순환이고, ③은 상품자본의 순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산자본의 순환의 도식, 즉 P ...... C'―M'―C ...... P에서 생산자본은 순환과정의 시작이자 끝을 나타나는데, 다른 말로 한다면 생산자본은 생산의 기원이자 목적으로 나타난다. 중간에 있는 변환(유통과정)은 생산에서 생산으로 이어지는 이 과정의 매개항일 뿐이며, 생산과정의 끊임없는 갱신을 위한 과정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이 도식에서는 자본의 순환이 생산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즉 이 순환의 도식에서는 자본의 직접적인 목표인 가치증식은 사라지고, 자본주의적 생산은 다만 '생산을 위한 생산'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생산자본의 순환은 중상주의에 대해 비판하면서 가치 생산 자체를 강조했던 고전학파 경제학이 자본주의적 순환을 고찰하는 방법이다. 중간에 있는 유통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상품을 단순히 팔고 사는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잉여가치를 생산에 다시 투여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된다. 즉 증식된 가치를 다시 확대된 규모로 생산에 투여하는가, 아니면 개인적 향락을 위해 소비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를 간단히 표시하기 위해 증식된 부분을 소문자로 표시하면, C'=C+c, M'=M+m으로 쓸 수 있다. 여기서 잉여가치를 자본가가 개인적으로 소비하는 경우 생산자본의 순환은 단순재생산의 도식이 된다.
P......C'[C―M―C(LP+MP)......P + c―m―c]이다. 여기서 위에 표시된 계열은 동일한 규모에서 이루어지는 생산자본의 순환을 표시하고, 아래에 표시된 계열은 자본가가 잉여가치를 개인적 소비를 위해서 사용하는 경로를 표시한다. 축적이 발생하는 경우, 즉 확대재생산의 경우에는 아래에 있는 m의 일부가 위에 있는 C(LP+MP)에 추가되어 애초의 P가 확대된 규모로 진행된다는 것을 표시할 수 있다.
(3) 상품자본의 순환
마지막으로 상품자본의 순환은 다음과 같이 표시할 수 있다. C'―M'―C......P......C'이다. 화폐자본의 순환 도식에서 유통은 생산과 더불어 화폐의 증식을 위한 과정으로, 생산자본의 순환도식에서 유통은 생산을 위한 매개과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도식에서는 유통이 자본의 순환 과정의 출발점으로 나타나며, 생산과정과 독립적인 국면으로(C'―M'―C) 표시된다. 이런 점에서 첫째 도식(화폐자본의 순환)에서는 가치증식이 주제가 되고 있다면, 둘째 도식(생산자본의 순환)에서는 생산과정의 반복이 주제가 되고 있고, 셋째 도식(상품자본의 순환)에서는 생산과정을 매개하는 유통과정이 생산과 별도로 독립적인 주제가 되고 있다.
3) 자본의 순환과 '축적체제'
(1) 자본의 순환과 소비
상품자본의 순환에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다른 도식과는 달리 이 도식에서는 잉여가치를 포함하는 증식된 상품자본 C'으로 시작한다는 점이다. "제3형태를 이전의 두 형태와 구별하는 것은, 이 형태에서만 [......] 이미 증식된 가치가 순환의 출발점을 나타난다는 점이다."[맑스, 『자본Ⅱ』, 108쪽] 이 도식은 앞서와는 다른 질문을 던지는데 잉여가치만큼 증가된 상품은 어떻게 판매될 수 있을 것인가? 즉, 증식된 상품자본 C'이 생산되기 이전에 자본의 순환과정 속에 있는 화폐는 M이었다. 이는 증식되기 이전의 상품C의 가치와 상응한다. 그렇다면 C'가운데 새로 증식된 부분은 어떻게 판매될 수 있을까? 즉 그것을 구매할 추가적 하폐는 어디에서 찾아야만 하는가? 사실 C'―M'이라고 쓰면 될 것 같지만, 그러러면 C에 추가된 c만큼을 구매할 화폐 m이 있어야 C'의 가치는 실현된다. 이미 자본의 순환과정 안에서 돌고 있는 화폐는 M뿐인데 그렇다면 c에 해당되는 화폐 m은 어디에서 끌어올 수 있는가? 바로 이것이 생산된 상품의 판매(실현) 과정인 '자본의 유통과정'에 고유한 문제이다. 이는 특수하게는 잉여가치에 해당되는 상품의 판매가능성 문제고, 좀더 일반적으로는 상품의 판매가능성(소비가능성) 자체의 문제란 점에서 '(상품가치의) 실현문제'라고 부른다. 혹은 정치경제학자 '시스몽디의 문제'라고도 부른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생산된 상품이 소비되는 문제를 생산의 양상과 관련해서 검토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맑스는 소비를 '생산적 소비'와 '개인적 소비'로 구별한다. 전자는 기계나 원료처럼 생산을 위해 필요한 것을 구매하여 소비하는 것이고, 후자는 자본가나 노동자가 자신의 소득을 먹고 입고 자는 데에 사용하는 것처럼 생산에 재투여되지 않고 그 자체로 사용되어 소모되는 그러한 소비다[맑스, 『자본Ⅱ』, 108쪽 참조]. [...] 그래서 맑스는 이를 위해 생산 자체를 둘로 나누어 설명한다. 하나는 기계나 원료 등 생산적 소비에 사용될 상품을 생산하는 부분으로, 생산재 생산부문이고, 다른 하나는 음식이든 자동차든 개인적 소비에 사용도는 상품을 생산하는 부문을, 소비재 생산부문을 말한다. 이 두 부문 간에 발생하는 교환을 세심하게 보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 맑스는 '재생산표식'이라는 유명한 표식을 만들어냈다. 이에 대해서는 『자본Ⅱ』제3편인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산과 유통'에서 자세히 보게 딜 것이다. 이로써 추가적인 생산수단 구입이나 다른 자본가의 추가적 소비, 노동자의 추가적 소득이 어떻게 소비되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주제로 부각된다. 상품자본의 순환을 표시하는 도식은 생산된 상품자본의 판매, 즉 상품의 소비가 생산(C......P......C')의 전제임을 표시한다.
(2) 축적체제와 노동력 재생산
소비는 물론 생산적 소비와 개인적 소비를 모두 포함한다. 전자는 자본축적의 논리에 따라서 규정되는데 잉여가치 가운데 새로이 자본으로 전환되는 비율인 축적률에 따라서, 그리고 자본축적의 일반적 법칙인 유기적 구성의 상승이라는 논리에 따라 자본이 추가로 구입해야 할 생산수단의 비율과 양이 결정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는 분명 자본축적의 논리에 따른다. 반면 개인적 소비를 규정하는 요인들은 아주 다른데 이는 사회적 관습, 습관, 생활방식, 평균적 생활수준 등에 의해 결정된다. 가령 어떤 시기에는 중요하지 않았던 교육간련 서비스나 의료관련 서비스가 다른 시기, 다른 조건에서는 전체 소비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이전에는 노동자들이 구입하기 힘들었던 자동차가 널리 보급됨에 따라서 자동차와 과년된 생활양식이 확산되고 이른바 레저와 관련된 새로운 소비가 창출된다. [...] 이러한 소비의 양상을 '소비양식'이라고 부르자. 이는 물론 자본이 생산하는 것과도 결부되어 있고, 자본이 축적하는 방식과도 결부되어 있지만, 생산의 방식이나 축적의 논리와는 독립적이다. 즉 생산이나 축적에 대하여 외부적인 요인들에 의해 결정된다. 상품자본의 순환을 표시하는 도식은 이러한 소비양식이 생산과정을 시작하기 위한 조건임을 표현한다. 이는 생산이, 아니 자본의 순환이 그와 같은 외부적 조건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자본의 순환을 표시하는 도식은 자본을 주어로 해서 그것의 (내적인) 자기전개로 진행되는 양상을 보이지만, 그것에는 필경 그것을 가능케 하고 그것을 특정한 양상으로 규정하는 외적 조건이 은폐된 전제로 항상 나란히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자본의 순환에 대한 분석이 자본의 논리에 대한 분석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데 자본의 순환에 대한 분석을 위해서는 소비양식처럼 자본 순환과 독립적인 요소에 대한 고려와 분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글리에타를 필둘 하는 프랑스의 '조절이론'에서는 이 문제에 아주 큰 관심을 기울이는데 대개 그들은 생산과 수요의 '모순'에 주목하면서 양자 사이의 불일치를 조절하기 위해 동원되는 다양한 요인들을 '축적체제'와 '조절양식'이란 개념으로 명명한다. "축적체제는 생산조건의 변화(투하자본량, 이의 부문간 배분, 생산규준)와 최종 소비조건의 변화(임금노동 및 다른 계급의 소비규준, 공공지출 등) 간의 장기적 조응을 보장하는 체계적인 사회적 생산물의 분배 및 재분배 양식을 의미한다."[리피에츠,『조절이론과 마르크스 경제학의 재해석』, 8쪽]. 이것이 단지 소비양식만의 문제가 아닌 것은, 소비양식 자체가 소비될 상품을 생산하고 분배하는 양상 전반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자본의 순환에서 발생하는 '위기'를 다양한 사회적 요인들에 의해 극복해 가는 역사적 과정을 자본주의 분석의 중요한 주제로 부각시켰다. 요컨대 상품자본의 순환을 원활하게 보장하기 위한 조건의 집합, 즉 소비를 규제하는 욕망의 배치와 그에 따른 생활방식, 이와 결부된 노동자 포섭의 전략, 이를 통해 소급적으로 규정되는 축적 전략, 그리고 이를 전반적으로 규정하는 국가정책의 집합을 '축적체제'라고 정의할 수 있다. 생산된 상품의 판매와 새로운 생산요소의 구매로 요약되는 상품자본의 유통은 바로 이러한 축적체제를 조건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을 통해서 자본은 상품자본에서 화폐자본으로, 그리고 생산자본으로 변환되는 순환과정을 원활하게 진행시킬 수 있다. 상품자본의 순환 도식은, 유통과정을 생산과정과 구별해서 그에 선행하는 '조건'임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유통의 조건이 축적 전략의 형태로 생산과정 자체를 규정하는 조건이 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축적체제와 관련 속에서 소비양식이란, 노동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노동력을 판매하고 받은 임금으로 상품을 구매하여 소비하며 이를 통해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그런 과정이다. 이런 점에서 또 하나의 순환과정이다. 자본이 형태를 바꾸면서 순환되는 것과는 달리, 노동할 능력이 상품으로, 화폐로, 소비재로, 다시 노동할 능려글 순환되는 순환과정을 '노동력의 순환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M―LP라는 교환의 고리를 통해서 자본의 순환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지만, 자본의 순환과는 다른 순환인데, 그 순환을 규정하는 것은 자본의 논리가 아니라 노동력을 재생산학 위한 사회적 관습과 제도이고, 노동력의 재생산의 형태로 나타나는 생활방식의 습속이다(소비양식이란 이러한 생활방식과 상품자본의 순환이 만나면서 만들어지는, 생활방식의 한 측면이다). 그런데 자본의 순환과정에서 순환되는 화폐는 이 노동력의 순환과정 안에서 순환되는 화폐와는 이질적이다. 전자가 명백하게 M―C―M'이라는 증식의 도식을 따라서 흐르는 양화된 부의 흐름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C(LP)―M―C'(소비재)의 생활의 도식을 따라서 흐르는 질적인 재화의 흐름을 매개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 이질적인 흐름이 동일한 형태를 갖는 화폐 M에 의해 연결되기에, 양자의 이질성은 동질적인 것으로 혼동된다. 이질적인 것을 통합하여 동질화하는 화폐의 형식을 통해 지배적인 흐름인 자본의 순환 속으로 노동력의 흐름이 양화되고 포획된다. 이것은 노동의 결과를 상품화함으로써 노동 자체를 가치화하는 과정과 간련되어 있다. 최근에는 여기에 노동력 재생산과 결부된 생활과정이 자동화와 정보화의 결합에 의해 만들어진 기계적 과정을 통과한다는 사실로 인해 생활과 결부된 모든 활동이 자본의 새로운 착취의 대상이 되었음을 다시 덧붙여야 한다.노동자분만 아니라 그러한 기계적 처리를 통과하는 모든 생활과정이 새로운 착취의 대상, 즉 주부와 학생, TV시청자 등이 모두 함께 잉여가치의 제공자가 된다. 축적체제라는 개념 또한 이와 동형적 양상을 보여준다. 즉 자동화와 정보화를 통해 유통이 생산의 내적인 일부가 되고, 소비나 유통을 통해서 유통이 생산의 내적 일부가 되고, 소비나 유통을 통해서 생산의 양상을 직접 규제하려고 하는 새로운 축적체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POS를 통해 소비를 생산에 연결하고, 유통을 생산에 소급적으로 피드백시키며, 이를 통해 생산의 유연화, 생산물의 다양화, 생산 기획 자체의 유연화를 결합하는 소위 '포스트-포드주의' 체제가 그것이다. [...] 한편에서는 유통업이 좀더 강력한 강력한 경제적 권력과 이권을 획득하게 되고, 생산업에서도 마케팅이 중요한 요소로 부상하는 것, 다른 한편에서는 소비를 자극하고 소비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훈육하며 그리하여 소비를 사회적 강제 내지 의물 만들어버린 사회라는 의미에서 소비사회 개념이 부상하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2. 자본의 유통과 가치 생산
1)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
자본의 순환은 애초에 화폐자본에서 시작된다고 하더라도 이미 시작된 이상 서로 꼬리를 물고 진행되는 무한한 원환운동을 이룬다. 그것은 또한 화폐자본의 순환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다른 자본의 순환형태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의 순환은 앞서 말한 세 가지 순환형태의 통일이다. 자본의 순환은 앞서 말한 세 가지 순환형태의 통일이다. 자본의 유통은 생산과 대비되는, 자본 순환의 한 국면이다. 즉 자본의 순환과정은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의 통일이다. 자본이 생산과정에 머무는 기간을 생산기간이라고 하고, 유통과정에 머무는 기간을 유통기간이라고 한다면, 자본이 그 순환을 마치는 데 걸리는 기간은 생산기간과 유통기간의 합이다. 생산기간과 유통기간의 외연을 어떻게 구분될까? 어디까지가 생산기간이고 유통기간인가? [...] 일단 운송에 대해서 보자면, 맑스는 공장문을 경계로 생각하는 통념에 반대한다. "생산물의 양은 그것의 운송에 의해 증가되지 않는다. [...] 그러나 물건의 사용가치는 그것의 소비에 의해서만 실현되는 것이고, 그것의 소비를 위해서는 장소의 변동, 따라서 운수업이라는 추가적인 생산과정이 필요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맑스, 『자본Ⅱ』, 168쪽 참조]. 운송업이 추가적인 생산과정이라는 말은 그것이 다른 사람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지만, 어떤 상품의 생산과정의 연장이라는 말이다. 또 하나, 운송이 독립적인 생산과정으로서의 나름의 가치를 생산한닥 하는 것은 그것이 생산된 상푸므이 소비를 위해 필요한 작업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이는 소비를 위해 필요한 과정은 모두 추가적인 생산과정이라고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운수업에 투하된 생산자본은 수송되는 생산물에 가치를 첨가하는데, 그것은 일부는 운수수단으로부터의 가치이전에 의해서, 그리고 또 일부는 운수노동에 의한 가치첨가에 의해서이다."[맑스, 『자본Ⅱ』, 168쪽 참조]. 맑스는 명확하게 운송업이 추가적인 생산과정이며, 운송에 관련된 노동은 명확하게 생산적 노동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생산된 상품이 창고에 있는 보관과정 또한 추가적인 생산과정이라고, 생산과정의 연장이라고 해야 한다. [...] 맑스는 『자본』4권인 『잉여가치학설사』에서 생산적 노동[고전적 정치경제학은 이에 대해서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라고 말하는데, 통념적인 생각은 어떤 물질적인 것을 생산했을 때 그것을 생산적 노동이라고 말하면서, 이는 서비스 관련 노동에 비해서 직접 물건을 제작하는 노동에 우월성을 부여하는 이유가 되었다.] 개념을 비판한 바 있다[같은 책, 165쪽 이하]. [...] 생산적 노동이란 이처럼 노동의 결과가 갖는 가시적인 특징이 아니라 그것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가 아닌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가령 집에서 하는 밥은생산적 노동이 아니지만 임금을 받고 식당에서 밥을 하면 생산적 노동이 된다]. 자본가에 의해 고용되어 자본의 증식에 이용되는 경우라면 어떤 것을 생산하든 생산적 노동이라는 것이다. 생산적 노동은 사회적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생산물의 질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고전경제학의 흔적 안에서 정치경제학은 유통과 생산을 대비하고, 새로운 가치의 생산과 생산된 가치의 유통을 대비하는 전통을 확장해 왔다. 이러한 경우 자본가에게 고용되었다고 하더라도, 상품을 생산하기보다는 생산된 것을 판매하거나 유통시키거나 관리하는 활동을 비생산적인 노동으로 간주하려는 태도로 이어진다. [...] 생산적 노동에 대한 맑스의 개념적 비판이 이런 입론에 대한 이론적 비판이라고 한다면, 운수노동에 대한 맑스의 언급은 이론 이전에 작동하는 어설픈 직관적 판단에 대한 비판이다. 즉 소비에 필요한 과정이라면 어떤 것도 생산과정의 연장이고 거기에 관여딘 노동은 가치를 추가하는 생산적 노동이라는 것이다.
2) 생산비용과 유통비용
생산과 유통을 구별하는 문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을 구별하는 문제는 생산비용과 유통비용의 구별이라는 문제로 이어진다[맑스, 『자본Ⅱ』, 156쪽 참조]. 여기서 운송이나 보관 등 상품의 유통과 관련된 비용은 상품의 가치에 들어가며 보전되어야 한다고 맑스는 강조한다. 이는 비용으로 보존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사용가치에 작용하여 유용성을 크게 한다. [...] 이는 상품이 제값에, 혹은 좋은 값에 팔리게 되기 위한 조건일 뿐만 아니라, 가치의 증가 자체를 야기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사용가치를 증가시킨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사용가치는 상품의 질적 측면인 반면, 증가와 감소는 양적 변화를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역의 차이에 따라서 상이하게 판매디는 상품은 흔하다. 이것이 교역이나 교환을야기하는 이유인데 이 경우 이러한 이동은 당연히 상품 가치의 증가를 수반한다. 그것은 사용가치의 증가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지만, 사실 사용가치 증가라는 형용모순의 표현을 통해서 가치의 증가라는 사실이 직간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다른 측면에서, 정치경제학에서 말하는 가치 개념 또한 사실은 사회적 가치이기 때문에, 사회적 승인과 무관한 상품의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가치는 상품이 판매되는 공간과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데 승인의 사회적 조건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품을 공간적으로 이동시키거나, 보관하여 시간적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그 상품의 가치를 변화시킨다. 통상 유용성의 증가로 표현되는 이 현상을 두고서, 가치가 아닌 사용가치만 증가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우습다. 맑스는 가치를 갖는 생산물은 비용의 지출을 필요로 하는 "일정한 객관적 조건 밑으로 옮겨져서 추가적 노동이 그 사용가치에 대하여 작용하기 때문에 상품들의 가치가 보존 내지 증가된다."[맑스, 『자본Ⅱ』, 156쪽 참조]라고 말한다. 이를 좀더 확장해서 말한다면, 사용가치의 증가에 기여하는 모든 활동은 동시에 그 상품의 가치 증가에 기여한다고 말해야 한다. 유통이나 보관에 관여된 활동이 좁은 의미에서 생산적인 것은 이런 연유다. 또한 도구나 원료처럼 생산자본의 형태로 창고에 보관하는 것은 생산이 제때에 제대로 원활하게 수행되기 위해서 필요하다. 이 역시 시간적으로 유용성을 증가시키기에 생산적이다. 이러한 비용은 모두 유통비용이다. 맑스는 "이러한 유통비용은 생산과정으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것인데, 다만 이 생산과정이 유통영역에서 속행되어 그 생산적 성격이 유통형태에 의하여 은폐되어 있을 뿐이다."[맑스, 『자본Ⅱ』, 154쪽 참조]. 이로써 생산비용과 유통비용의 경계는 모호해지는 듯이 보인다. 이는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과 동일한 의미다. 그러나 여기서 좀더 중요한 것은 윹ㅇ비용의 형태로 지출되는 것이 실제로는 사용가치의 증가와 결부딘 것인 경우, 그것은 가치의 증가를 야기하는 생산과정의 연속으로, 유통형태에 의하여 은폐된 생산과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맑스는 또한 상품을 매매하는 데에 드는 비용이나 부기 비용 등은 순수유통비용이라고 말한다. 이는 가치를 생산하는 게 아니라 단지 그 형태를 변형시키는 데 사용되는 비용이다[맑스, 『자본Ⅱ』, 146쪽 참조]. 맑스는 "자본가의 수중에서 행해지는 상품매매의 규모 여하가 이 노동을 가치창조적 노동으로 전환시킬 수 없다는 것은 물론이다."[맑스, 『자본Ⅱ』, 147쪽 참조]. [...]그러나가치의 부가를 단지 물리적 형태로 제한할 수 없다는 것을 맑스도 알고 있었다. "운소되는 것이 사람이든 상품이든 간에 그 결과는 공간적 위치의 변환"이고, 그런 점에서 "운수업이 판매하는 것은 장소를 변경시키는 것 자체"이며, 물리적 형태를 갖지 않는 유용효과이다. 맑스는 그 "유용효과가 생산적으로 소비되어 그것 자체가 수송되는 상품의 생산의 한 단계라면, 그 유용효과의 가치는 부가가치로서 그 상품에 이전된다."[맑스, 『자본Ⅱ』, 160쪽 참조]. 즉 가치의 부가는 물리적 변환만이 아니라 '유용효과'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치의 생산'과 '가치형태의 변환을 구별할 물리적 근거는 찾기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점원이나 영업사원이 하는 판매 내지 영업활동은 보관업과 대비해서 말하자면, 대칭적인 양상의 유용효과를 갖는다. 보관업은 상품을 보존함으로써 그 자체로 가치의 소모와 파괴를 막는 유용효과를 생산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가치의 증가로 귀결도는 유용효과를 갖는다. 역으로 영업이나 판매활동은 판매를 촉진하기 위한 활동이다. 즉 그것은 보관업이 보관 내지 보존함으로써 가치의 감소를 막는 방식으로, 다시 말해서 수동적 방식으로 수행하는 것을, 적극 나서서서 판매를 촉진한다는 능동적 방식으로 수행하는 것은 아닐까? 마케팅, 광고, 포장과 같은 가치형태 변환 역시 가마찬가지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가치 감소를 막을 뿐만 아니라, 가치 감소를 막는 데에 드는 비용을 줄임으로써 일정한 유용효과를 생산한다. 이는 가치의 생산이 아닌 생산된 가치의 실현에 봉사하지만, 그것이 가치의 실현을 위해 장소를 이동하는 운송업과 근본적 차이를 갖는다고 하긴 어렵다. 리카도의 주장처럼 가치가 이미 개별 상품마다 체현된 각각의 노동시간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판매라는 사회적 승인의 절차를 통해서만 규정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면, 가치의 생산과 가치의 실현, 혹은 가치의 생산과 가치형태의 변환을 명확하게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화폐화에 실패한 어떤 상품도 자신의 가치를 갖지 못하며, 있었다고 하더라도 무용한 것으로 파괴된다. 화폐와의 교환(이른바 사회적 승인)을 통해서만 상품은 자신의 가치를 획득하며이 경우에 사회적 승인을 받기 위한 비용, 혹은 승인에 필요한 시간을 축소시키는 데에 필요한 비용은, 분명 일정한 유용효과를 갖는다. 즉 사회적 승인을 통해 규정되는 상품 가치의 일부분이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는 생산적 노동을 단순히 노동의 물리적-소재적 형식을 통해 정의하려는 관념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잉여가치학설사』나 <직접적 생산과정의 결과들>에서 맑스가 제시한 것처럼 자본에 의해 구매되어 가치화되는 활동이라면, 그래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이라면 어떤 활동도 생산적 노동이 된다. 가수가 자신이 좋아서 노래하는 것은 생산적 노동이 아니지만 자본에 의해서 고용되어 노동력을 사용하는 것이 된다면 생산적 노동이 된다. 창고지기 노동자나 판매직 노동자 역시 자본에 의해서 고용되어 노동력을 사용하는 한 그것은 생산적 노동이다.
3) 유통과정에서 생산과정으로
이와는 약간 다른 측면에서, "생산영역이 유통 형태로 속행되는" 경우 그것은 "유통형태로 은폐된 생산과정"이라는 맑스의 말은 현대 자본주의의 새로운 양상과 어떤 문제를 규명하는 데 훌륭한 디딤돌을 제공한다. 도요타 자동차 공장에서 시작된 적시(just-in-time) 생산방식은 유통 즉 상품의 매매에서 발생한 결과를 통해서 생산의 속도와 생산량, 생산할 물품의 종류 등을 통제하는 생산방식을 대대적으로 확산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 판매자들의 구체적인 수요관련 정보를 통해 생산물의 종류와 생산량을 최대한 실시간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이런 생산체제에서 유통 내지 판매는 생산과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유기적 일부분이다. 즉 네트워크를 통해서 유통 내지 시장상황이 생산 자체와 연결됨에 따라서, 유통 자체가 생산의 조건을 입력하고 생산의 양상을 규정하는 생산과정의 일부가 된 것이다. 이는 유통과 생산을 밀접하게 하여 시장상황을 실시간으로 반영해 생산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시장에서 수용의 변화, 소비자 욕망의 변화를 생산 자체에 반영하는 그런 유기적 생산체제를 형성한다. [...] 요컨대 유통 내지 판매를 생산과정의 연속으로 만들려는 이러한 체제는 상품의 매매라고 불렀던 순수유통 자체가 생산의 유기적인 일부분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코드를 이용한 POS나 컴퓨터를 통한 생산-유통 간 시간과 공간의 축소, 그리고 그런 통신기술로 인해서 소비자 반응을 단시간 내에 생산과정에 입력하는 방식 등은 생산과 분리된 순수유통의 영역이 매우 축소되었음을 의미하며, 특히 상품의 매매가 생산의 직접적인 일부분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앞서 본 것처럼, 노동의 기계적 포섭이라고 불렀던 현상은 공장이나 생산라인에 노동자를 붙잡아 두지 않고서도 착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 아닌 사람까지도 착취할 수 있는 새로운 조건을 만들어냈고 이 또한 잉여가치 생산 내지 착취의 영역이 공장을 넘어서서 이른바 유통의 영역으로, 사회적 영역 전반으로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 이러한 요인들 모두가 상품의 판매나 유통을 생산과정의 속행으로, 생산과정의 은폐된 연속으로변환시키는 새로운 조건이며 유통영역의 확대가 유통영역을 점차 생산의 일부로 만듦으로써 독자적인 순수유통영역 자체를 축소 내지 제거하는 귀결로 귀착된 것으로 포드주의 이후 가동되고 있는 새로운 종류의 축적체제의 한 단면이다.
3. 자본의 회전과 속도의 화폐화
1) 고정자본과 유동자본
"자본의 순환을 개개의 단일한 과정이 아닌 주기적 과정이라고 파악할 때 그것은 자본의 회전이라고 불린다."[ 맑스,『자본』, 2, 176] 따라서 자본의 회전기간은 생산기간과 유통기간의 합이라는 점에서 자본이 화폐자본에서 생산자본, 상품자본을 거쳐 다시 화폐자본으로 되돌아오는 시간과 동일하다. 자본의 순환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로 변환되는 문제, 가령 상품자본이 판매되어 화폐자본으로 변환되는 문제, 혹은 화폐자본이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구매해서 생산자본으로 변형되는 문제가 중요한 반면, 자본의 회전에서는 투자된 자본이 이런저런 경로를 거쳐서 원래의 형태로 되돌아오는 주기적인 운동이 중요하다. 즉 자본의 순환에서는 자본의 세 가지 형태(화폐/생산/상품자본)의 대체와 복귀가 중요했지만, 자본의 회전에서는 회전의 속도와 더불어 하나의 주기 안에서 자본이 소모되고 다시 회복되는 방식이 중요하다. 그 소모 양상의 차이가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의 구별로 나뉜다. 전자는 생산과정에 전체로서 참여하지만 그것의 가치는 조금씩 점차적으로 생산물로 이전되는 자본인 반면 후자는 "생산과정에 있는 투자자본 중 고정자본을 제외한 모든 소재적 구성분"[맑스,『자본』, 2, 180] 이다. 고정자본이 여러 번의 회전을 거치면서 가치가 소모되고 이전되어 다시 회수되는 자본이라고 한다면, 유동자본은 한 번의 히전 때마다 완전히 소모되어 유통영역으로 이전된 후 다시 회수되는 자본이다. 대규모 기계나 부동산은 자본이 여러 번 회전하는 동안 계속해서 생산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고정자본에, 원료나 노동력은 자본이 1회전하는 동안 모두 소비되고 다시 회수된다는 점에서 유동자본에 속한다. 고정자본은 불변자본과 동일하지 않고, 유동자본은 가변자본과 동일하지 않다. 원료나 일회성 물품 등은 불변자본에 속하지만, 일회의 회전기간 안에 모두 소모된다는 점에서 유동자보넹 속하기 때문이다. 물론 기계처럼 여러 회전기간 동안 사용되는 생산수단은 불변자본인 동시에 고정자본에 속한다. 임금에 대응되는 가변자본은 매번 소모되기에 유동자본에 속한다. 고정자본은 여러 번 회전을 거치는 동안 마모되는데 가령 1년에 1회전하는 자본이 있다 하고, 거기서 어떤 기계(고정자본)를 10년 동안 사용한다고 하면, 그 기계는 10년에 걸쳐 마모된다. 10년 뒤에 그 기계를 다시 사기 윟서 자본가는 매년 기계값의 1/10씩 감가상각을 하는데 그 감가상각비용이 1년(1회전 기간)마다 그 기계로 생산되는 상품에 비용의 형태로 이전되지만 기계의 가치는 그처럼 나누어 이전되지만, 기계는 항상 전체로서 생산과정에 참여한다. 기계는 물리적 수명이 있어 그 수명이 다하는 것을 물리적 마모 내지 자연적 마모라고 한다. 가령 개인용 컴퓨터는 물리적 수명이 다하기 전에 못 쓰게 된다. [...] 많은 경우 기계의 발전이나 그 기계를 사용하는 데에 필요한 조건의 변화로 인해서 자연적 수명 이전에 기계를 대체하게 되는데 이러한 요인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마모를 사회적 마모라고 하고, 그 마모의 연한을 사회적 수명이라고 한다. [...] 이처럼 기계의 발전 속도가 빨라지고 사회적 수명이 짧아지면, 당연히 기계의 비용을 상각하는 속도도 빨라지는데 상각속도가 빨라진다는 것은 그 기계를 사용해서 생산하는 상품의 생산비용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쟁은 비용의 전가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는데 전가하여 가격을 올리는 것이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서, 최근에는 특히 기계의 갱신속도가 빠른 영역에서는 기계를 사기보다는 임차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확산되고 있다. 고정자본 비용의 부담이 자본에 점점 더 가중되는 조건에서 가속도로 증가하는 고정자본 비용을 임차한 기계의사용료 형태로 유동화하려는 경향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이 또한 새로운 산업혁명에 의해 야기된 새로운 현상이다.
2) 자본의 회전기간과 속도의 경제
자본의 회전기간은 농업에서 자본의 순환이 1년을 단위로 하기에 1년이란 기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각각의 자본 회전기간은 매우 다양하다. 회전기간은 생산기간과 유통기간의 합으로 구성되지만 생산기간이 항상 노동기간인 것은 아니다. [...] 물론 자본은 회전기간이 짧을수록 많은 잉여가치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기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인위적인 조치들을 고안하여 사용한다. [...] 유통기간은 교통수단이나 소통수단, 광고나 판촉활동 등에 의해서 단축되지만, 그로 인해서 유통영역이 확대됨에 따라서 반대로 유통에 필요한 기간은 연장될 수도 있다. 여기서도 자본은 유통기간을 줄이기 위해서 다양한 수단을 사용하는데 마케팅이 점차 기업활동의 중요한 영역으로 부상하고, 광고료를 비롯한 마케팅 비용이 급속히 상승한다. 유기적 구성의 상승 내지 생산규모의 확대, 그리고 생산수단은 물론 생산물 자체의 갱신속도가 빨라지면서 상품의 수명이 급속히 짧아지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이러한 경향은 더한층 강화된다. 생산에 대한 유통의 지배력이 점차 커지는 현상 역시 이와 관련된 것이다. 자본이 한번 회전하는 동안 생산되는 잉여가치량(s)은 잉여가치율(s')과 가벼자본(v)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 즉 s=s'·v이다. 그런데 1년 동안 생산되는 잉여가치량은 이 잉여가치의 양에 회전수를 곱한 값이다. 연간 잉여가치량을 S라고 하고, 1년간 자본의 회전수를 n이라고 한다면 S=s·n=s'·v·n이다. 이는 자본의 회전수에 비례해서 잉여가치가 증가한다는 수학적 표현으로 생산기간의 단축이든 유통기간의 단축이든 간에 회전기간의 단축은 연간 잉여가치량의 증대를 야기한다. 자본은 회전수를 늘리고자 하며,이를 위해서 회전속도를 최대한 빠르게 하고자 하는데 자본은 이제 노동기간뿐만 아니라 비노동 기간에도, 그리고 유통기간에도 좀더 빨리, 좀더 빨리라는 슬로건을 관련된 모든 것에 강요한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프랭크린의 명제는 "속도는 돈이다"라는 명제로 변형된다.
4.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산과 유통
우리는 자본의 유통과정에서 다루는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생산된 상품의 소비, 즉 실현문제라고 말한 바 있는데 특히 잉여가치만큼 증식된 생산물은 대체 누가 구매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자본이 자본으로서 순환하려면 이러한 실현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거기서 실패한다면, 화폐자본으로 채 바뀌지 못한 상품들이 창고에 쌓인 채 팔 곳을 못 찾아 결국 버려지게 될 것이다. 자본이 자본으로서 계속 존속할 수 있으려면 이처럼 순환과정을 통과해서 자본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즉 자본으로서 다시 기능할 수 있도록 재생산되어야만 한다. 자본이 자본으로서 재생산되기 위해서는 생산된 상품이 팔려야 하고, 필요한 생산수단이나 노동력이 구매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사회 전체적인 범위에서 전체 자본이 자본으로서 재생산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실현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유통이 자본의 재생산과 결부되어 있다면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인데 그렇지만 그것은 개별자본의 재생산이 아니라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산과 결부된다. 즉 개별자본들이 판매와 구매로, 즉 유통을 통해서 서로 연결되어, 사회 전체 범위에서 자본이 재생산되는 문제로 다루어져야 한다.
1) 단순재생산
우리는 자본의 순환과 회전을 보았는데 이는 맑스 말대로 개별자본의 운동이든, 사회적 자본의 자립적 일부의 운동이든[맑스,『자본』, 2, 414], 혹은 총자본의 수준에서 자본의 운동을 다룬 것이든, 단순 명사로 표시된 자본이 어떻게 순환 내지 회전하는가를 다룬 것이었지만 개별자본의 순환은 서로 다른 자본을 전제하며 서로 뒤엉키고 다른 자본의 존재와 운동을 조건으로 하여 진행된다. "사회적 총자본의 구성부분으로서의 개별자본들의 유통과정을", 그것들이 서로 연관되며 서로 구매하고 판매하며 운동하는 과정을 보아야 한다."[맑스,『자본』, 2, 414] . 이것이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산과 유통을 다루는 맑스,『자본』, 2권 3편의 주제이다. 유통과 관련해서 자본의 재생산을 다룬다는 것은 생산과 소비를 연결하는 문제, 즉 실현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는 잉여가치만큼의 상품을 누가 소비하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해서 생산된 상품이 소비자를 찾아 판매되는 문제인데 이를 다루기 위해서는 생산물의 소재적 형태를 고려해야 했다. 이제까지 상품은 오직 가치구성이라는 측면, 즉 불변자본(c), 가변자본(v), 잉여가치(s)라는 가치 구성요소와, 잉여가치율이나 자본의 유기적 구성, 혹은 축적율 등처럼 그 요소들간의 관계가 중요한 분석대상이었다. 그러나 이런 측면들에 머물러 있는 한, 넓은 의미의 실현 문제는 물론, 잉여가치는 누가 구매하는가 하는 시스몽디 식의 문제에도 올바로 접근하기 어려운데 생산된 상품을 누가 소비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 상품이 어떤 상품인가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 전자(제철공장에서 생산한 상품)를 새로운 생산을 위해 구매하여 소비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생산적 소비라고 하고, 후자[세탁기나 가방] 자본가나 노동자가 개인적으로 소비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개인적 소비라고 구별할 수 있다. 이는 상품의 소재적 형태에 따라 생산재와 소비재로 나누는 것인데, 최소한 이 두 가지 소재적 형태를 구별하지 않는다면 소비를 자본가나 노동자가 개인적으로 소비하는 것으로 국한해서 오해할 수 있다. [...] 생산물의 소재적 형태와 가치구성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유통 내지 재생산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말스는 유명한 '재생산표식'을 고안해냈다. 여러 가지 자본을 그 소재적 형태에 따라서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부문(1)과 소비재를 생산하는 부문(2)으로 나누고, 각각의 부문을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잉여가치의 합으로 표시하는 방법이 그것이다[맑스,『자본』, 2, 466~7].
재생산표식의 기본형태는 다음과 같다. Ⅰ. c1+v1+s1=W1 Ⅱ. c2+v2+s2=W2
2) 확대재생산
[...] 확대재생산의 경우라면 생산과 소비는 어떻게 균형을 이룰 수 있으며, 총자본의 유통은 어떻게 완결될 수 있는가? 축적 내지 확대재생산이란 잉여가치가 자본으로 전환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생산된 잉여가치의 일부는 새로운 생산수단을 사는 데에 사용하고(SC), 새로운 노동자를 고용하는 데에 사용하며(SV), 다른 일부는 자본가가 개인적으로 소비한다(SK). 잉여가치를 s=sc+sv+sk로 세분해서 표시할 수 있다.
3) 재생산표식과 균형의 문제
이처럼 맑스는 재생산 표식을 통해서 단순재생산이든 확대재생산이든 생산된 상품은 모두 판매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로써 실현문제는 해소되어 버리는데 그것은 시스몽디 말처럼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라 애처부터 문제가 아니었던 것임이 드러난 셈이다. 그것은 생산물의 소재적 형태를 고려하여, 상이한 두 부문 간에 발생하는 교환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이는 사실 맑스의 비판적 문제의식을 염두에 둔다면 매우 이해하기 힘든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 마치 자본주의가 수급의 균형 아래 충분히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나,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문제설정에 따른다면 여기서 증명했어야 할 것은 차라리 자본주의의 붕괴가능성이었을지 모른다. 바로 이 도식을 이용해서 자본주의의 붕괴 가능성을 증명하려는 시도들이 이 지점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맑스는 정치경제학자가 설명하는 데에 실패한 자본주의의 균형 가능성을 '대신'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자본주의가 그런 균형 가운데 계속해서 확대재생산될 수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처럼. 이는 맑스의 논지를 정치경제학 비판보다는 정치경제학의 확대발전을 이해하려는 이후의 정통적 시도를 지지해 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하지만 여기서 맑스 자신이 재생산표식을 통해 자본주의의 확대재생산이 지속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대개는 훌륭한 맑스주의자인 전자는 맑스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논지를 펼치고, 대개는 합법적 맑스주의자들인 후자는 그것을 반박하면서 자본주의의 존속 가능성을 증명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맑스는 어째서 자본주의의 난점이 아닌 그것의 존속가능성을 증명했던 것일까?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재생산표식이 스미스의 가치구성 도식에 대한 이론적 비판을 겨냥한다는 점이다. 스미스는 모든 상품의 가치가 임금과 이윤, 지대로 구성된다고 본다. 이윤이나 지대를 잉여가치라고 보는 맑스의 견해에 따르면 W=v+s라는 것이다. 맑스가 제시한 가치구성 개념과 비교하면 불변자본(c)이 빠져 있다. 이는 불변자본 역시 상품인 한 또 다시 v+s로 계속해서 분해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를 맑스는 '스미스의 독단'이라고 부르면서 그 도식의 결함을 반복해서 비판한다. 단순재생산에 대한 분석에 들어가기 전 스미스와 다른 경제학자들을 미리 자세하게 언급하는 것[맑스,『자본』, Ⅱ, 421~61]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맑스처럼 가치구성을 개념화하게 되면 난감한 문제가 하나 발생하는데 생산된 상품 가운데 v에 해당되는 것은 노동자가 구매하고, s에 해당되는 것은 자본가와 지주가 구매한다고 하지만, 불변자본에 해당되는 c는 누가 구매하여 소비하는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시스몽디와 다르지만 또다시 '실현문제'가 발생한다. 반면 스미스의 경우에는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상품의 가치는 v+s이고 소득(임금, 이윤, 지대)의 합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노동자와 자본가, 지주가 자신의 소득을 이용해 구매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맑스는 생산물의 소재에 따라서 생산수단 부문과 소비수단 부문으로 분할했던 것이고, 두 부문 간의 교환을 통해서 불변자본이 판매되고 소비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맑스,『잉여가치학설사』, 1, 116 이하]. 따라서 여기서 단순재생산이나 확대재생산의 균형조건을 추적하는 것은 바로 이같은 이론적이고 논쟁적인 목적에 따른 것이며, 그것의 결론은 "상품의 가치구성에 불변자본을 포함시켜도 그것의 구매자를 구할 수 없다는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생산표식을 이용해서 맑스가 하고자 했던 것은 자본주의의 균형 가능성 자체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스미스를 비판하면서 제시한 자신의 가치구성도식의 타당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맑스의 논증은 실질적으로 자본주의가 균형을 이루며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적어도 방증한 것은 아닌가? 『자본』 Ⅱ권이나 Ⅲ권은 Ⅰ권과는 달리 미완성의 초고로 끝나다는 것이다. 『자본』 Ⅱ권 3편의 내용을 보면 대부분이 스미스 비판과 단순재생산에 대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고, 확대재생산에 대한 분석마저 매우 적은 분량을 차지학 있다. [...] 이는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재생산표식이 매우 불완전하다는 점으로도 드러난다. 가령 그는 자본축적의 일반적 법칙을 설명하면서, 자본축적이 진행됨에 따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상승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확대재생산을 다루는 표식에는 이러한 요인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 재생산표식에서는 그것이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현실을 형성하는 다양한 조건들이 제외되어 있다. 맑스가 어떤 계획을 갖고 있었든 간에, 재생산표식이 불변자본을 포함하는 가치구성 개념의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한 것인 한, 그래서 그런 개념을 통해서 상품의 유통과 자본의 재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인 한, 균형 개념과 분리해서 재생산표식을 사용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론적 난점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재생산표식이라는 분석 도구 자체에 이미 특정한 가정과 문제설정이 내포되어 작동하기 때문이다. 가령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상승을 고려한다고 해도, 그 표식은 확대재생산의 지속적 가능성을 증명하는 데에 사용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아마도 그러한 균형 개념이 정치경제학 비판의 기획 안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서 『요강』은 재생산표식을 통해서 그가 무엇을 하려고 했던가를 잘 보여준다. 맑스는 거기서 "자본의 가치증식과정이 필연적을 산업부문간의 불비례와 교환영역의 확대를 창조하게 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재생산표식을 삽입하고 있다. [...] 잉여가치를 증가시키려는 자본가적 방법(곧, 생산력의 끊임없는 혁명)이 생산과 소비 사이 및 산업 부문 사이의 비례성을 파괴시킨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김수행, <재생산표식과 상품가치의 실현>, 『가치이론』, 82쪽]. 『자본』 Ⅱ권의 3편은 『요강』에서 말한 이러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 않지만 여기서 우리는 균형 개념을 전제로 하고 있는 재생산표식이 정확하게 그것가 반대의 목적을 위해 고안되었다는 사실을 포착해야 한다.
4) 재생산표식과 정치경제학 비판
균형개념을 전제한 재생산표식이 어떻게 그와 반대되는 '산업간 비례성의 파괴'를 증명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 맑스가 『자본』 Ⅰ권에서부터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해서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는 비판의 방법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정치경제학의 공리나 전제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서 이론적인 추론을 최대한 완성된 형태로 밀고 감으로써 거꾸로 그러한 공리나 전제에 반하는 이율배반을 드러낸다. 여기서 재생산표식을 맑스가 이용하는 방법은 전자의 방법과 대응하는데 재생산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균형을 가정하고 그 균형조건을 좀더 명시적으로 구체화한다. 이는 단순재생산 및 확대재생산의 균형조건을 표싷는 방정식으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이런 균형을 위해서는 가치와 소재의 측면에서 매우 제한적인 '비례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자본주의의 다른 조건들을 고려하는 순간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로써 전제된 균형조건이 사실은 불가능한 것임이 드러난다. [...] 이런 고정자본의 갱신 양상은 자본의 재생산과 관련된 피할 수 없는 문제이고, 이런 점에서 충분히 이론적인 문제이다. 이는 추상적 조건과 대비되는 현실의 변수를 고려하는 문제 이전에, 자본의 재생산과 관련된 본질적 문제인다는 점에서 맑스는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의 비례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물론이고, "고정자본이 그저 유지되는 경우에도 그러한 불비례는 생길 수 있으며, 또 생기지 않을 수 없다는 것, 그러한 불비례는 이미 기능하고 있는 사회적 자본의 단순재생산의 기초 위에서 이상적인 정상적인 생산을 전제하는 경우에도 생길 수 있으며, 또 생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자본』 Ⅱ, 557]. 그 결과 "단순재생산인데도 불구하고 공황―생산공황―이 일어날 것이다"[ 『자본』 Ⅱ권, 555]. 확대재생산의 경우라면, 그래서 고정자본의 양이 증가하는 경우라면, 더 나아가 유기적 구성이 증가하기에 고정자본의 비율이 증가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난점은 더욱더 증폭될 것이다. 맑스 자신이 『자본』 Ⅱ권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 사례는 재생산표식을 통해 그가 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즉 재생산표식은 매우 제한된 조건에서 매우 엄격한 조건 아래 생산의 균형과 비례가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지만, 고정자본의 보전을 비롯한 다양한 조건은 그 균형조건을 전제하는 경우에도 균형을 파괴하고 공황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런 의미에서 재생산표식이 보여주는 균형조건은, 그 균형조건을 가정하는 경우에도 균형이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역설을 통해서 정치경제학에 대한 또 하나의 비판적 매듭이 된다. 따라서 재생산의 균형조건은 거꾸로 자본주의가 그러한 균형에 도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역설적 기능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재생산표식의 내적 논리를 통해서 자본주의의 영원성이나 붕괴 가능성에 도달하려는 발상과는 달리, 그것의 균형을 가정해도 규전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미 상반되는 방향의 다양한 선례들이 보여준 것처럼, 재생산표식의 내적 논리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다만 그것은 다양한 자본가들이 어떻게 자본주의적 관계 안에서 서로 필요한 상품을 구매하고 판매할 수 있는가에 대한 추상적 가능성을 보여줄 뿐이다. 거기서 제시되는 균형조건이란 이런 추상적 가능성의 표현일 뿐이며, 그것이 실질적으로보여주는 것은 그 조건에 도달하는 경욷 균형느 불가능하며 불비례가 발생하고 위기(공황)의 발생을 막을 수 없다는 역설적 결론이다.
5. 자본의 재생산과 현대 자본주의
1) 현대 자본주의에서 재생산과 균형
우리는 다른 경로를 통해 이를 다시 확인할 수 있는데 재생산을 위한 균형조건 자체가 함축하는 비대칭성이 그것이다. 그것은 재생산 조건이 전제하는 또 다른 외부를 통해서 말하는 것으로 확대재생산의 균형조건은 다시 한번 상기해보면 v1+sv1+sk1=c2+sc2이다. 여기서 c2+sc2를 결정하는 것은 자본의 축적과 직접 결부된 요인들로 축적율과 자본의 유기전 구성이지만 좌변인 v1+sv1+sk1를 결정하는 것은 자본축적의 논리로는 환원불가능한 외부적 조건들이다. 가령 v1 및 sv1은 일단 임금을 둘러싼 계급투쟁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v1이나 sk1은 단지 축적율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양식이나 생활방식과 결부된 사회적 습관과 습속 등에 의해서 결정된다. 양변은 전혀 다른 요인들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처럼 설 독립적인 요인들에 의해서 결정되는 두 변이 균형에 요구되는 등식을 만족시킬 것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균형에 도달하는 것은 우연적이고 예외적인 경우일 뿐이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일반적이다. 축적체제나 축적전략 등은 이러한 항상적 불균형을 메우고 보완하며 그 정도를 축소해서 위기의 폭과 강도를 완화하는 전략이다. 이는 동시에 축적체제가 자본축적의 논리로 환원될수 없는 자율성과 가변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970년대 이래 자동화와 정보화를 축으로 해서 새롭게 전개디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양상에서 이러한 균형조건은 더욱더 곤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노동의 기계적 포섭에 대한 언급에서 자동화는 노동자 없는 노동을 통해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정보화는 노동 없는 활동을 통해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이는 노동자에게 지출되는 비용을 급속히 감소시키면서 기계 등에 지출디는 불변잡ㄴ 비용은 크게 증가시키는 것이다. 즉 앞서의 균형조건을 갖고 말하자면, c2나 불변자본 증가분인 sc2의 비율은 계속해서 엄청나게 증가하는 반면, 임금 v1이나 그것의 증가분 sv1의 비율은 계속해서 하락하는 경향을 갖는다. 다시 말해서 균형조건을 표시하는 방정식의 좌변은 감소되는 경향을, 우변은 증가하는 경향을 갖는데 확대재생산을 위한 균형조건에 근본적인 곤란을 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가상적이지만 두 가지 방법이 사용될 수 있다. 하나는 자본가 자신의 소비 sk1을 양자의 격차만큼 증가시키는 것이다. 소비사회라고 명명된 새로운 소비체제에서 자본가 자신의 소비 또한 크게 증가하는 경향이 있음은 사실이다. [...] 사회적 양극화에 대응해서 상품시장의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인위적으로 임금 관련 비용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개별자본이 v1이나 sv1을 축소시키는 것은 막을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 국가를 통해 사회적으로 지출되는 비용을 늘려야 한다. 의료, 교육 등을 비롯한 다양한 소위 복지서비스가 학대된다면, 균형 조건에 필요한 새로운 소비시장을 보완할 수 있다. [...] 아마도 그런 종류의 사회적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작은 국가를 요구하는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점점 더 목소리를 높여 것은 이런 상황의 다른 한 단면이다. 그렇지만 바로 그렇기에 그것은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산에 필요한 균형조건에 정면으로 반하는 그런 요구란 점에서 새로운 생산체제에서 자본 자신이 당명하게 될 또 하나의 근본적 난점과 딜레마를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임금 관련 비용의 사회적 지출을 줄이면서 축적 관련 비용을 확대하는 새로운 산업혁명 이후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적 재생산이 균형조건은 심각한 위기를 피하기 어려워지게 된다. 자본가의 소비를 확대하고 그것과 관련된 서비스직 임금이 늘어난다고 해도, 그것으로 균형조건에 주어지는 강력한 비대칭성을 극복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실현문제가 새로이 심각한 문제로 제기된다. 시스몽디가 생각한 출구는 바로 해외시장이고, 룩셈부르크는 재생산표식을 이용해서 유기적 구성의 상승을 고려할 경우 자본의 축적은 필경 실현문제에 봉착할 수밖에 없으며, 그 해결책은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해외시장을 찾으려는 선진 자본주의적 경쟁적 시도가 바로 제국주의 내지 제국주의 전쟁을 야기하리라는 것이다. 동일한 이유에서는 아니지만, 자동화와 정보화 이후 자본주의 생산체제는 축적에 따른 생산수단의 증가와 자동화 등에 따른 임금비용의 감소로 인해서 필경 발생한 불균형을 메우기 위해서 해외사장을 필요로 한다.
2) 위기의 경제학, 위기의 정치학
[...] 자본의 시장에는 균형이라는 조화로운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기적인 것이든 장기적인 것이든 간에 말이다. 다만 불균형과 그것에 따른 조정이 있을 뿐이고, 그 결과 야기되는 또 다른 불균형이 있을 뿐이다. 노동자의 과잉인구와, 사회적 과잉자본, 그것이 바로 그 불균형에 대해 자본이 대처할 수 있는 여백과 여유를 제공한다. 공황이나 불황이 자본의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그로 인해서 대대적으로 창출되는 과잉인구와 과잉자본이다. 자본의 불균형과 불안정은 노동자 삶의 불균형과 불안정으로 전가된다. 요컨대 실업이나 삶의 불안정, 위협이라는 조건 아래서 이루어지는,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희생을 통해서만 자본주의는 필연적인 불균형과 불안정을 넘어서며 존속한다. [...] 그것은 노동자들의 삶을 완충지대로 삼아 재생산에서 발생한 자본간의 불균형과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이다. [...] 공황은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격하될 조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노동자들의 삶 전체가 위축될 조건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비관의 이유가 될 수 없는 것만큼이나 낙관의 이유 한 제공되지 않는다. 희망이나 절망이 객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만다는 것이듯, 낙관이나 비관의 이유 또한 겨엦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제 9장. 이윤율의 논리와 자본주의
『자본』Ⅲ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과정을 다룬다. 총과정이란 유통의 문제를 고려한 생산의 과정, 혹은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이 결합되어 진행되는 과정 전체이다. 이 경우 자본의 생산과정(Ⅰ)에서 나오는 잉여가치 개념은 이윤으로 변형되어 다루어지게 되고, 그에 따라서 잉여가치율이 표시하던 가변자본과 잉여가치의 관계는 비용과 이윤의 관계인 이윤율로 변형되어 다루어진다. 또한 가치의 개념은 유통과 경쟁, 평균이윤율 등이 고려딘 가격 내지 생산가격 개념으로 변형되어 다루어진다. 이러한 변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윤이라는 개념인데 이는 평균이윤 개념으로 확장된다. [...] 이윤 전체는 산업자본의 이윤과 유통에 참여하는 상인자본의 상업이윤, 그리고 대부자본의 이자로 분할되는데, 이런 맥락에서 상업과 이자, 신용 등의 문제를 다룬다. 마지막으로 이윤의 일부이면서 평균이윤을 초과하는 특별한 이윤으로서 지대를 개념화한다. 차액지대와 절대지대가 그것이다. 이러한 분석 위에서 노동자의 임금, 자본가의 이윤, 지주의 지대라는 세 가지 소득형태에 대한 정치경제학의 입론을 비판하면서, 그 모든 것의 원천이 잉여가치라는 것을, 그 모든 소득이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의 상이한 분배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본』 Ⅰ권에서 가장 중심 개념이 잉여가치였다면, Ⅲ에서 가장 중심 개념은 이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이윤율과 평균화
1) 이윤율 평균화와 생산가격
2) 가치와 가격의 괴리
3) 가치와 가격의 일치
4) 평균화의 논리
5) 평균화와 정치경제학 비판
①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
②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③자본의 물리학?
④ 평균화와 탈-평균화
2. 지대론과 포획의 논리
1) 봉건적 지대와 자본주의적 지대
2) 차액지대와 절대지대
3) 지대론, 혹은 포획의 논리
① 초과이윤과 독점이윤
②지대론과 초과이윤
③지대론과 정치경제학 비판
4) 지대와 자연
3. 이윤율 저하 경향과 자본주의
1)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
2) 이윤율 저하를 생쇄하는 요인들
[...] 요컨대 투하자본 중 가변자본에 투하되는 부분이 점점 더 적어지게 되는데(이는 특히 자동화를 추구하는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아주 극명하게 드러난다), 잉여가치는 가변자본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잉여가치 내지 이윤 또한 상대적으로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자본은 노동자를 착취함으로써만 잉여가치를 취득할 수 있는데, 자본의 축적법칙은 가변자본에 대한 투자의 비율을 줄이는 경향이 있다는, 자본이 취하고 있는 매우 역설적인 경향의 단면을 요약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윤율 저하 경향은 그 상쇄요인에 대해서 일차적익 기본적이다. 그것은 자본의 축적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일반적 경향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윤율 저하를 막기 위해서 동원되는 '상쇄요인들이 자본의 축적법칙에 의해서 규정되는 역설적인 상황을 부정할 수 없다[『자본』 , Ⅲ, 278 참조].
3) 이윤율 저하와 과잉자본
이윤율 저하가 이윤량 감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윤율 저하는 이윤량의 증가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이윤율이 저하해도 총투하자본이 증가하면 이윤량은 증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윤율 저하는 한편을 이윤율 저하를 이윤량의 증대를 통해 보상할 수 없는 자본의 증가로 이어지거나, 아니면 적절한 이윤을 기대할 수 있는 투자처를 찾지 못해서 유휴화된 자본 증가로 이어진다. 이른바 자본의 과다 내지 과잉이 발생하는 것이다[『자본』 , Ⅲ, 299 참조]. 이러한 조건에서 자본의 금융화가 촉진된다. 상품의 과잉생산이, 생산된 상품의 양이 수요를 크게 초과하여 비용가격을 보존할 수 없는 상품의 과잉상태를 의미한다면, 자본의 과잉생산이란 이처럼 이윤율 저하를 이윤량에 의해서 보상할 수 없는 자본의 과잉상태를 의미힌다. 이윤율 저하 경향으로 발생하는 자본의 과잉이란 그러한 점에서 자본 증식의 한계를 표시한다. 이러한 한계의 최대한은 자본의 절대적 과잉이다. 맑스는 자본의 절대적 과잉을 통해서 자본의 한계를, 그리고 자본주의 생산양식 자체의 한계를 사유하려 한다. 자본의 절대적 과잉이란 "증가한 자본에 의해서 생산되는 잉여가치량이 증가 이전가 동일하거나 심지어 보다 적은 경우"에 발생한다[『자본』 , Ⅲ, 299 참조]. [...] 절대적 과잉까지는 아니더라도 과잉자본은 일정한 이윤율이 보장되는 적절한 투자처를 찾지 못해 유휴화하게 되는데 이 경우 자본은 신용이나 주식, 외국환이나 채권 등 다양한 투기적 사업을 향한다. 혹은 임금이 낮아 높은 이윤율에 기대되는 외국을 향하여 이동한다[『자본』 , Ⅲ, 304~5쪽 참조]. 새로운 시장을 찾아서 상품을 수출하는 것과 대비해서 이처럼 높은 이윤율을 찾아 과잉된 자본을 수출하는 것을 가리켜 '자본수출'이라고 부른다. [...] 자본의 절대적 과잉은 자본축적에 따라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상승하고 그와 나란히 이윤율이 저하하기 때문에 발생하는데 이는 앞서 과잉인구를 야기하는 것과 동일한 요인에 의해서 발생한다[『자본』 , Ⅲ, 299 참조]. 새로운 투자처를 찾지 못하는 과잉자본의 존재는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과잉인구를 생산한다. [...] 그런데 "자본은 상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따라서 자본의 과잉생산은 상품의 과잉생산을 포함하고 있다"[『자본』 , Ⅲ, 305 참조]. 이러한 과잉축적이 그 반대편에 가잉인구를 만들며 진행되듯, 이러한 과잉생산 또한 그 반대편에 과소소비를 야기하며 진행된다. [...] 과잉생산과 과소소비는 동전의 양면이다. 한쪽에는 생활수단이 부족한 과잉인구가 있음에도, 그리하여 상품에 대한 수요가 있음에도, 그 반대편에는 과잉생산되어 팔리지 않은 과잉상품과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한 과잉자본이 존재하는 사태는 공황 내지 위기라는 사태로 이어진다. "너무나 많은 부가 생산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인 절대적인 형태의 부가 주기적으로 너무나 많이 생산된다는 것이다."[『자본』 , Ⅲ, 307 참조]. 한쪽에는 굶주린 대중들의 고통이 극점에 이르고, 다른 한쪽에는 과잉된 상품을 파괴하고 과잉된 자본을 잠식하는 탈가치화(Entwertung)가 진행된다. 주가는 폭락하고 자본은 감가된다. [...] 자본의 가치화(Vertwertung) 내지 가치증식은 이처럼 반복하여 찾아오는 탈가치화를 수반한다. 자본은 자본 자체의 과잉생산을 넘어서기 위해서 새로운 출구를 찾는데 자본은 자신의 운동법칙을 부정함으로써 즉 자본의 논리 내부로 환원불가능한 방식을 통해서 자신의 출구를 찾는 것이다. 이러한 공황 내지 위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지지했듯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의 한계를 집약해서 드러낸다. 공황이라는 현상이 자본주의 자체의 위기를 의미할 수 있었던 것처럼, 자본주의적 생산이 자본의 한계 자체에 도달하며 그것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일 것이다"[『자본』 , Ⅲ, 307~8쪽 참조].
4) 자본주의의 한계
따라서 이윤율 저하경향이 산노동과 불변자본 간의 관계에서 자본주의적 축적 자체가 야기하는 역설적 사태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또한 정학히 이와 동일한 의미에서 자본의 한계를, 자본주의적 생산의 한계를 표시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진정한 한계는 자본 그 자체다. 즉 자본과 자본의 자기증식이 생산의 출발점과 종점, 동기와 목적으로 나타난다는 점, 생산은 오직 자본을 위한 생산에 불과하며 따라서 생산수단이 생산자들의 사회의 생활과정을 끊임없이 확대하기 위한 단순 수단이 아니라는 점에 자본주의적 생산의 진정한 한계가 있다."[『자본』 , Ⅲ, 297~8쪽 참조]. 맑스와 리카도의 다른 점은 후자의 경우 이윤율의 저하 경향이 자본의 축적법칙 자체가 아닌 임금의 명목적 상승과 지대의 실질적 증가에 의해 야기된다고 보았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윤율이 0에 수렴하는 상태에서 자본의 투자가 중단되고 생산이 정지되는 상태를 뜻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역사의 종말에 관한 역사철학적 사고의 정치경제학적 표현. 맑스는 이윤율의 저하 경향에서 발견한 자본주의의 한계를 리카도의 비관적 예상과는 달리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절대적 한계를 의미한다고 보지 않는다. 맑스가 지적한 것처럼 이윤율의 저하와 이로 인한 자본 과잉은 이윤을 저하를 상쇄하는 요인을 끊임없이 추구함으로써 극복되고, 자본주의적 생산의 한계를 야기하는 자본의 과잉은 공황이라고 불리는 탈가치화를 통해 새로운 출구를 찾기 때문이다. 자본의 한계,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한계이지만, 끊임없이 갱신되고 넘어서며 새로운 지점으로 그 한계를 이전하는 그런 한계이다. 자본의 축적이 이윤율의 저하 경향을 야기한다는 것은, 그리고 그것이 자본의 이윤량의 증가 없는 상태로 정의되는 자본의 절대적 과잉이라는 한계를 갖는다는 것은, 자본축적의 법칙이 결국은 이윤 없는 생산을 향한 운동을 야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요컨대 우리는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과 그것을 상쇄하는 요인에서 이윤 없는 생산을 예견하며 저지하는 역설적 메커니즘을 본다. 맑스가 이윤율에 대한 논의를 총괄하면서 보여준 자본의 한계 내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한계는, 자본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생산의 운동과 그것을 다시 자본의 한계 안에 가두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그 역설적인 메커니즘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자본에 의해 통제되고 이윤에 의해 지배되는 생산과는 다른 생산의 생산의 잠재적인 힘이 자본 자체에 의해 성장하지만, 그것의 자본의 한계를 넘어서는 어떤 변환을 통해서만, 어떤 종류의 혁명을 통해서만 비로소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다.
10장 자본주의의 외부
우리는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문제설정 속에서 자본에 대해, 그것이 자신의 모습대로 세계를 바꾸고 그것이 자신의 모습대로사람들의 삶을 바꾸어가는 양상을 대략적이나마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외부에 대한 사유, 아니 외부를 통한 사유로서 유물론 내지 역사유물론을 정의하고 그것을 일관딘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다. 정치경제학 비판이란 바로 이런 방법을 통해 정치경제학적 공리계의 외부를 찾아내고 드러내는 방법이다. [...] '자본의 외부'란 정치경제학에서 공리계의 외부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자본주의적 관계를 가능하게 했던 조건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으며, 자본 자신이 자본주의적 관계 내부에서 생산하는 자신의 외부를 언급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고, 나아가 자본주의적 관계에서 벗어나는 지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자본의 외부란 자본의 논리 내지 정치경제학의 논리로 환원불가능한 어떤 것을 표시한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분명 자본의 논리를 의미하는 공리계의 외부이다.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그런 공리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고, 다른 경우에는 그러한 공리계의 내적인 논리 자체가 만들어내는 생산물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상이한 발생적 위치를 갖는다고 해야 하지만. [...] 그리고 맑스가 잘 보여주었듯이, 그런 논리 자체가 끊임없이 자신의 외부를 생산한다는 것을 자본 축적의 일반적 법칙이 함축한다고 할 때, 자본의 논리 내부란 사실 항상 그 외부를 생산하며 그것에 기대어 그것과 병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외부란 개념은 순수한 내부의 불가능성을 표시하기 위해서, 결국은 내부와 외부가 닫힌 경계를 갖지 않음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이는 어떤 공리나 명제들의 내적인 논리를 따라 추론하여 구성되는 그런 순수 공리계―수학자들이 완전한 공리계라고 부르는―의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어떤 불변의 내적 본성이 부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서 그것이 만나는 외부에 따라서 다른 것이 되고 다른 본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 화폐는 교환의 외부에서 만들어지고 경제적 교환(유통)의 외부에서 일반화된 척도가 되지만, 그것이 만나는 모든 것을 화폐에 의해 통합된 세계, 상품세계 안을 내부화 하려 한다. 자본 또한 다르지 않은데, 그것은 모든 가치있는 것을 가치화학자 하며, 이를 통해서 모든 것을 잉여가치의 원천으로 만들고자 한다. [...]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게 자본이 자신의 내부로 포섭하여 내부하하는 순간 이미 그것으로 환원불가능한 외부가 다시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 그렇다고 여기서 자본이 스스로 창출하는 외부가 자본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지대를 자동적으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아무리 가능성을 주어지는 새로운 외부라고 해도, 그것이 가능성에 머물러 있는 한 그것은 현실이 아니며 부재하는 세계에 속할 뿐이다. 가능성을 현실의 일부로 만다는 것은 그것을 창안하고 현실화하려는 실질적인 활동이고 실천적인 시도이다. 자본이 모든 것을 내부화하려는 세계 속에서 그것의 외부를 창안하고 창출하려는 실질적인 활동, 그러한 의지와 능력, 활력이 수반될 때에만 자본의 역사적 경향은 자본의 독점과 지배를 벗어나는 문턱을 넘을 수 있다. 그때에만 비로소 생산의 내적 경향은 이윤을 위한 생산의 문턱을 넘어선다. [...] 우리른 이런 종류의 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산주이라는 개념 대신 코뮨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자본의 외부, 아니 자본주의의 외부를 표시하기 위해서이다. 공산주의가 자본주의 이후, 아니 사회주의라는 이행기까지 통과한 이후에야 오는 머나먼 미래의 시제를 갖는 사회구성체 내지 생산양식이라면,코뮨주의는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 안에서 다양한 양상을 창안되고 창출될 수 있는 현재의 시제를 갖는 이행운동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