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재성의 철학자들/저서

니체, 김정현 역,『반시대적 고찰』, 책세상, 2002.

Ritournelle 2024. 1. 23. 19:44

반시대적 고찰 Ⅱ: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서론

1. 활기를 주지 않는 교훈, 활동을 잠재우는 지식, 또 값나가는 인식의 과잉과 사치인 역사가 왜 쾨테의 말처럼 우리에게서 정말 미움을 받아야 하는지 이 고찰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2. 우리는 삶과 행위를 위해서 역사를 필요로 하지, 삶이나 행위를 편안하게 기피하기 위해서 또는 이기적인 삶이나 비겁하고 나븐 행위를 미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역사가 삶에 봉사하는 만큼 우리도 역사에 봉사할 것이다. 3. 이 고찰이 반시대적인 것은, 시대가 자랑스러워하는 역사적 교양을 내가 여기서 시대의 폐해로, 질병과 결함으로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며, 또 심지어 나는 우리 모두가 소모적인 역사적 열병으에 고통을 받고 있으며 적어도 우리가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4. 고전 문헉학이 반시대적으로 - 다시 말해 시대와 대립해서, 그렇게 함으로써 시대에 그리고 바라건대 앞으로 도래할 시대를 위해- 영향을 미치는 것 이외에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르기 때문이다.

1.

1-1. 동물은 비역사적으로 산다. 기이한 분수를 남기는 어떤 수처럼 동물은 현재에 완전히 몰두하며, 꾸밀 줄도 모르고 아무것도 감추지 않으며, 매 순간 진정 있는 모습 그대로다. 다시 말해 동물은 정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 달리 인간은 과거의 커다란 하중, 점점 더 커지는 하중에 저항한다. 이 과거의 하중은 그를 짓누르거나 옆으로 휘게 만든다.1-2. 죽음이 마침내 그토록 망각을 가져다주지만, 죽음은 동시에 현재와 현존재를 앗아가며, 그로써 현존재는 단지 끊임없이  있었던 것, 스스로를 부정하고 소모하고 스스로에게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살아가는 것에 불과하다는 저 인식에 날인을 하게 된다(291).1-3. 가장 작은 행복에서도, 또 가장 큰 행복에서도 행복을 행복으로 만드는 것은 언제나 하나다. 잊을 수 있다는 것, 또는 학문적으로 표현한다면, 자신이 지속되는 동안 비역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1-4. 망각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인간이 어디에서나 생성만을 봐야 할 형벌을 받았다면, 그런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믿지 못할 것이고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할 것이며, 모든 것이 움직이는 점으로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만을 볼 것이며 이 생성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릴 것이다. 1-5. 동물이 보여주듯이 기억 없이 살아간다는 것,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망각 없이 산다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또는 좀더 단순하게 내 주제를 설명한다면, 불면과 되새김질, 역사적 의미에도 어떤 한도가 있는데, 이 한도에 이르면 인간이든 민족이든 문화든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해를 입고 마침내 파멸한다. 1-6. 과거의 것이 현재의 무덤을 파지 않으려면, 과거의 것이 잊혀야 할 한도와 한게를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 인간, 한 민족과 한 문화의 조형력[니체에 따르면, 조형력이란 "스스로 고유한 방식으로 성장하고, 과거의 것과 낯선 것을 변형시켜 자기 것으로 만들며, 상처를 치유하고 상실한 것을 대체하고 부서진 형식을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조형력을 번역하면 <Formative Fähigkeit>으로 나온다.]이 얼마나 큰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1-7. 또한 우리가 제때에 기억하는 것처럼 제때에 잊을 줄 아느냐, 우리가 힘찬 본능을 가지고 언제 역사적으로 느껴야 하고 언제 비역사적으로 느껴야 할지 감지해내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바로 이것이 독자들에게 한번 고찰해보라고 권하고 싶은 명제다. 즉 비역사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은 한 개인이나 한 민족 그리고 한 문화의 건강에 똑같이 필요하다(294).1-8. 인간이 사유하고 숙고하고  비교하고 분리하고 결합하면서 저 비역사적인 요소를 제한함으로써, 또 저 에워싸는 안개구름 안에서 밝은 섬광이 발생함으로써, 그리고 삶을 위해 과거를 사용하고 이미 일어난 것에서 다시 역사를 만드는 힘을 통해서 인간은 인간이 된다. 그러나 역사의 과잉 속에서 인간은 다시 인간이기를 중지한다. 비역사적인 것의 껍질이 없다면 인간은 결코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며 감히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1-9. 역사가 삶에 봉사하는 한, 그것은 비역사적 권력에 봉사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런 종속관계에서는 수학처럼 그렇게 순수한 학문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 삶이 역사의 봉사를 필요로 하는가 하는 질문은 한 인간과 한 민족, 한 문화의 건강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질문들과 근심거리들 중 하나다. 왜냐하면 그것이 지나칠 경우 삶은 붕괴되고 타락하며, 삶의 타락으로 인해 역사 자체도 타락한다.

2.

2-1. 세 가지 측면에서 역사는 살아있는 것에 속한다. 역사는 행동하고 추구하는 자로서, 보존하고 존경하는 자로서, 고통 받고 해방을 요구하는 자로서 살아 있는 것에 속한다. 이런 세 가지 관계는 세 가지 역사의 종류와 일치한다. 구별이 허용된다면, 역사의 기념비적 방식, 골동품적 방식, 비판적 방식을 구별할 수 있다. 2-2. 역사의 기념비적 방식 2-2-1. 무엇보다도 역사는 행동하고 권력을 가진 자에게 속한다. 그들은 거대한 투쟁을 벌이며, 모범이 되는 사람, 선생과 위로해줄 자를 필요로 하지만, 자기 동료들 중에서는 그리고 현재에는 그들을 찾을 수 없다(301). 그의 훈계는 다음과 같다. 과거에 '인간'이라는 개념을 더욱 확대하고 더 아름답게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던 것은 이런 일을 영원히 하기 위해 영원히 존재해야만 한다. 위대한 순간들이 개인의 투쟁 속에서 하나의 사슬을 형성하고, 인류의 사맥이 수천 년을 이어 이 순간들 속에서 결합하며,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순간들 중 최고의 것이 내게는 아직 생생하고 밝고 위대하다는 것- 이것이 기념비적 역사의 요구 속에 표현된 인간성에 대한 믿음의 근본 사상이다. 위대한 것은 영원해야 한다는 요구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투쟁이 생겨난다. 2-2-2. 기념비적인 역사가 현대에 유익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로부터 현대적인 것은 과거에 있었던 위대한 것이 어쨌든 한번 가능했으며, 앞으로도 가능할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해낸다.2-2-3. 기념비적 역사는 다른 것을 유사하게 만들고, 일반화하고 끝없이 동일시할 것이며, 원인을 희생시켜 결과를 기념비적으로, 다시 말해 전범으로 그리고 모방할 만한 것으로 내세우기 위해 주제와 동기의 차이점을 약화시킬 것이다(305). 2-2-4. 기념비적 역사는 '효과 그 자체'의 집합이라고 부를 수있을 것이다. 민족의 명절이나, 종교나 전쟁 기념일에 경축하는 것을 바로 그런 '효과 그 자체'다(305~6). 2-2-5. 이 역사의 결과" 전혀 예술적이지 않거나 예술가의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이 기념비적 예술사의 갑옷으로 무장하고 방어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들은 이제 누구를 향해 무기를 겨누겠는가! 그들은 강한 예술 정신의 소유자, 즉 저 역사로부터 진실로, 즉 삶을 위해 배울 수 있고 배운것을 고차원적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향해 겨눌 것이다.

3.

3-1. 역사의 골동품적 방식:두 번째로 역사는 충성과 사랑으로 자신이 태어나 자라난 곳을 뒤돌아보는 보존하고 존경하는 자에게 속한다. 이런 경건함으로 그는 자신의 현존재에게 감사를 표한다. 3-2. 그러나 최고의 가치를 가진 것은 역사적-골동품적인 존경의 감정이다. 그것은 한 인간이나 한 민족이 사는 소박하고 거칠고 궁색하기까지 한 상태를 넘어 단순하고 감동적인 즐거움과 만족감을 퍼트린다. 3-3. 시야에 들어온 오래된 과거의 것은 모두 동등하게 소중한 것으로 간주되지만, 이 오래된 것을 존경심으로 대하지 않는 모든 것, 즉 생성 중에 있는 새로운 것은 거부당하고 적대시된다. 3-4. 골동품적 역사는 현재의 신선한 삶이 그것에 혼을 불어넣지 않고 감동을 주지 않는 그 순간 퇴화해버린다. 3-5. 골동품적 역사는 삶을 보존할 뿐 생산할 줄 모른다. 그래서 골동품적 역사는 생성하는 것을 과소평가한다. 왜냐하면 기념비적 역사가 가진 그런 본능, 즉 생성하는 것을 어떤 것인지 탐지해내는 본능이 골동품적 역사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힘찬 결단을 방해하며, 행위자로서 항상 경건함을 손상하거나 손상할 수밖에 없는 행위자를 마비시킨다. 3-6.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인간에게는 기념비적 역사와 골동품적 역사와 함께 과거를 고찰하는 세 번째 방식, 즉 비판적 방식이 필요하며, 그것도 삶에 대한 봉사를 위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인간은 살기 위해 과거를 파괴하거나 해체해야 할 힘을 가져야만 하고 때에 따라 실제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위해 그는 과거를 법정에 세우고 고통스럽게 심문하고 마침내 유죄를 선고해야 한다.3-7. 여기서 법정에 앉아 있는 것은 오로지 삶, 저 어둡고 몰아대며 지칠 줄 모르고 스스로를 갈망하는 권력이다. 3-8. 그러나 이 망각이 필요한 바로 그 삶이 때때로 이 망각의 파괴를 요구한다. 그렇게 되면 삶은 어떤 사물의 존재가, 즉 어떤 특권이나 어떤 계급, 어떤 왕조의 존재가 얼마나 부당한지, 이런 것이 얼마나 당연히 몰락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 이것은 언제나 위험한, 즉 삶에게도 위험한 과정이다. 과거를 재판하고 파괴하는 방식으로 삶에 봉사한 사람들이나 시대들은 항상 위험한 그리고 위험에 처한 사람들과 시대들이다.

4.

4-1. 이것이 역사가 삶을 위해 할 수 있는 봉사다. 각각의 인간이나 민족은 자기 목표나 힘, 고난에 따라 과거에 대한 특정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 어떤 때에는 기념비적 역사, 다른 때에는 골동품적 역사, 그러다가 비판적 역사가 필요해진다. 4-2. 바로 이런 것이 한 시대, 한 문화, 한 민족이 역사오 맺는 자연스러운 관계라는 것[굶주림이 만들어내고 욕망의 정도가 조정하며 내재한 조형력이 제한하는 관계]과거에 대한 지식은 어느 때를 막록하고 현재를 약화시키고 생명력 있는 미래의 뿌리를 말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와 현재에 봉사하기 위해서 탐구되어야 한다는 것, 이 모든 것은 진리가 단순한 것처럼 단순하며, 역사적 증거가 있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곧 그것을 확신한다. 4-3. 현대인은 결국 엄청난 양의 지식 돌멩이를 몸에 달고 다니는데, 이 돌멩이는, 동화에서 말하듯이, 때가 되면 본격적으로 몸 안에서 덜커덩거린다. 이 덜커덩 소리를 통해 현대인의 고유한 특성이 무엇인지 밝혀진다. 외면과 일치 하지 않는 내면 그리고 내면과 일치하지 않는 외면이라는 기묘한 대립이 현대인의 특성인데, 고대민족들은 이를 알지 못했다. 4-4. 배고프지도 않는데, 욕망을 거슬러 과도하게 포식한 지식은 이제 더이상 변혁적인, 바깥으로 몰고 가는 동기로 작용하지 못하며, 일종의 혼동의 내면 세계 속에 감추어져 있다. 그런대 현대인은 이것을 이상한 자부심을 가지고 그들의 고유한 '내면성'이라고 부른다. 4-5. 우리가 추구하고 정치적 통일보다 더 열렬히 추구하는 것은 최고의 의미에서 독일의 통일, 즉 형식과 내용, 내면성과 외면성의 대립을 파괴한 후의 독일적 정신과 삶의 통일이다.

5.

5-1. 어느 시대가 역사를 포식하면 다섯 가지 측면에서 삶에 적대적이고 위험하게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1)  인격이 약해진다. 2) 정의를 어떤 다른 시대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망상에 빠진다. 3) 민족의 본능은 손상되었고, 개인도 전체 못지않게 성숙을 방해받는다. 4) 항상 유해한 믿음, 즉 인류의 연륜에 대한 믿음, 늦둥이이며, 아류라는 믿음을 심어준다. 5) 시대는 자신에 대한 아이러니라는 위험한 분위기에 빠지고 거기서 더 위험한 견유주의의 분위기에 젖게 된다. 5-2. 강한 인격만이 역사를 감당할 수 있으며, 약한 인격은 그것을 완전히 소멸시킨다. 감정과 감각이 자신에 비추어 과거를 평가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하다면, 역사가 감정과 감각을 혼란시키기 때문이다.

6.

7.

8.

8-1. 역사적 교양의 근원은- 그리고 새로운 시대, 현대적 의식의 정신에 대한 역사적 교양의 내적으로 완전히 극단적인 대립은-스스로 다시 역사적으로 인식되어야 하며, 역사는 역사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며, 지식은 자신의 가시를 자신에게로 돌려야 한다- 이 세 가지 해야 함은 새 시대의 정신 속에 진정으로 새로운 것, 강력한 것, 삶의 약속하는 것과 근원적인 것이 들어 있는 경우, 이 정신의 명법이다. 8-2. 그래서 가장 고귀한 보상으로서 더욱 엄청난 과제, 즉 이 알렉산드리아적 세계로 다시 돌아가고 이 세계를 넘어가서 대담한 시선의 전형을 위대한 것, 자연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원시 세계인 고대 그리스에서 찾겠다는 과제를 우리 자신에게 부과할 것이다. 거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비역사적인 교양의 현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렇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이 풍요롭고 생동감 넘치는 교양의 현실이다. 8-3.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당돌하게 돌변한 이 후예를 모든 과거사의 진정한 의미요 목적이라고 우상화한다면, 본인도 아는 자신의 비참함이 세계사의 완성과 동격이 된다면, 그것은 파괴적이고 무시무시하게 보일 것이다. 그런 고찰 방식으로 인해 독일인들은 세계 과정에 관해 말하고 자신의 시대를 이 세계 과정의 필연적 결과로 정당화하는 데 익숙해졌다. 그런 괄 방식으로 인해 역사는 예술과 종교와 같은 다른 정신적 힘들을 대신하여 유일하게 자주적인 것으로 자리매김 되었는데, 이 경우 역사는 '스스로 실현하는 개념'이며 또 '민족 정신의 변증법'이자 '최후의 심판'이다. 8-4. 신화와 미덕이 섞인 그런 복합체에 대해 나는 얼마나 낡은 생각을 가슴에 품고 있는가! […] 역사는 언제나 우리에게 "과거에는 어떠했다."라고 주입한다. 도덕은 "너희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또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야 한다."라고 각인시킨다. 이렇게 역사는 사실적인 부도덕의 편람이 된다. 동시에 역살르 사실적인 부도덕의 심판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심각한 잘못을 범하는 것인가!9.9-1. 천지만물을 엮는 그물의 매듭에 앉아 잇는 커다란 십자 거미, 현대인은 모든 기초를 미친 듯이 무분별하게 부수고 찢고, 이 기초를 항상 흐르고 흩어지는 생성으로 해체하며, 생성된 모든 것을 지치지도 않고 풀어헤치고 역사화한다- 그것은 도덕주의자, 예술가, 경건한자, 그리고 정치인의 마음을 빼앗고 걱정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철학적 패러디 작가의 화려한 마술 거울 속에서 보면서 즐거워할 것이다. 그의 머리속에서 시대는 자신에 분명하다 못해 '흉악무도할 정도로' 역설적인 의식을 얻게 된다. 9-2. 오로지 명랑함을 통해서만 길은 구원에, 저 오해받기 쉬운 부엉이의 진지함을 지닌 구원에 이른다. 우리가 세계 과정이나 인류-역사의 모든 구조를 현명하게도 포기하는 시대가 앞으로 올 것이며, 우리가 더 이상 대중을 관찰하지 않고 다시 개개인 즉, 생성의 거친 강물 위에서 일종의 다리가 되는 개개인을 관찰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이 개인들은 하나의 과정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공동의 영향을 허용하는 역사 덕분에 무시간적-동시적으로 산다. 9-3. 내가 생각하기에 대중은 세 측면에서만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1) 나쁜 종이 위에 낡은 건판으로 제작된 위인의 희미한 복사로서의 2) 위대한 인물에 대한 저항으로서 3) 위대한 인물의 도구로서의. 9-4. 그러나 거대한 대중의 충동을 역사에서 중요하다고 주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모든 위대한 인물을 단지 가장 명백한 표현으로, 마치 범람하는 수면 위에서 눈에 띄게 되는 조그만 거품으로 간주하는 역사 서술의 방식이 지금 일반적으로 존중받고 있다.이때 대중은 스스로 위대한 것을, 다시 말해 혼동은 스스로 질서를 낳아야 한다. 그래서 결국 찬가는 분만하는 대중에게 조율될 것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그런 대중을 감동시켰고, 우리가 보통 역사적 권력이 있이다고 말하는 모든 것이 위대하다고 불릴 것이다. 9-5. 우리 삶과 우리 문화의 이험이 이 추한, [...] 우리는 이 둘에 대항하여 우리 젊은이의 권리를 이를 악물고 지키고자 하며, 지치지 않고 우리의 젊은이에게서 미래를 저 미래상-돌격대에 대항하여 수호할 것이다. 그러나 이 투쟁에서 우리는 특별히 추악한 인식을 해야 한다. 즉 현재는 역사적 감각의 과잉에 고통을 당하는데, 사람들이 바로 이런 과잉을 의도적으로 장려하고 고무하고-이용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10.

10-1. 그렇게 생명은 없지만 무척 활동적인 개념 및 단어-공장으로서 나는 나 자신에 관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나는 살고 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할 권리는 없다. [...] 나에게 우선 삶을 선사해다오, 그러면 거기서 문화를 창조해 너희에게 줄 것이다! - 이렇게 이 세대에 속한 모든 개인이 외친다. 그들은 이 외침에서 서로를 알아본다. 누가 그들에게 이 삶을 선사할 것인가?  

10-2.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다. 오로지 그들 청춘만이 할 수 있다. 이 청춘의 사슬을 풀어주어라. 그러면 너희는 청춘과 함께 삶도 해방시킬 것이다.

10-3. 그러나 이 사슬에서 풀린 삶은 병이 들었고 치유되어야 한다. 삶은 수많은 질병에 병들어 있으며, 자신의 사슬에 대한 기억으로 고통을 당할 뿐 아니라- 여기에서 특히 우리와 관계되는 사안인데, 삶은 역사 병에 괴로워하고 있다. 역사의 과잉은 삶의 조형력을 공격했고, 삶은 과거를 마치 영양이 풍부한 식량처럼 사용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10-4. 청춘은 역사 병, 역사적인 것의 광잉에 대처할 수 있는 기적의 물약과 내복약을 알고 있다. 그것이 독약의 이름이라도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인 것에 대처할 수 있는 약은 비역사적인 것과 초역사적인 것이다.

10-5. 비역사적인 것과 초역사적인 것이다. 비역사적인 것이란 잊을 수 있고 제한된 지평 안에 스스로를 가둘 수 있는 기술과 힘을 말한다. 초역사적인 것이라는 말로 나는 시선을 생성을보퉈 현존재에 영원성과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 즉 예술과 종교로 돌릴 수 있는 권력이라고 이른다.

10-6. 학문은 저 힘고 이 권력 속에서 적대적인 권력과 힘들을 본다. 왜냐하면 학문은 사물의 고찰만을 진정하고 올바른 고찰로, 즉 학문적 고찰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문적 고찰은 어디서나 생성된 것 ,즉 역사적인 것만을 보며 어디에서도 존재하는 것, 영원한 것을 보지 않는다.

10-7. 그리스인들도 몇 세 동안 우리가 처해 있는 위험에, 다시 말해 낯선 것과 과거의 것, 역사의 홍수에 몰락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차차 카오스를 조직하는 법을 배웠다. 즉 그들은 델포이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에게 되돌아가, 자신의 진정한 욕망을 자각하고 거짓-욕망을 사멸시킴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자신을 소유했다. 그들은 자신과의 힘든 투쟁 끝에 저 신탁을 실천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상속받은 유산을 불리고 키운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며 모든 미래의 문화 민족의 선구자며 모범이 되었다.

10-8. 이는 우리 각자를 위한 비유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자각함으로써 자신 안의 카오스를 조직해야 한다. 그의 문화가 삶의 장식, 즉 근본적으로 항상 가장하고 은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모든 장식은 장식된 것을 감추기 때문이다. 그렇게 문화의 그리스적 개념이 베일을 벗고 그에게 드러난다. 즉 내면도 외면도 없고 가식도 관습도 없는 개선된 새로운 자연으로서의 문화 개념념, 삶과 사유와 외관과 의욕의 일치로서의 문화 개념이 그에게 드러난다. 그렇게 그는 그리스인이 다른 모두는 문화에 대한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한 것은 윤리적 자연의 보다 높은 힘이었으며, 진실성의 증대는 항상 진정한 교양을 장려하고 준비한다는 것을 자신의 경험에서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