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세넷,『짓기와 거주하기』, 2020.
서론
○ 빌ville/시테cite의 구분: 물리적 장소/지각, 행동, 신념 ○ 시테와 빌의 이음매 없는 매끈한 연결의 어려움.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방식이 도시가 건설되는 방식으로 표현될 수는 없다. ○ 도시는 시테와 빌의 비대칭성이라고 하는 고난을 겪는다는 점에서 비틀려 있다. ○ 건축가 자신의 가치/대중의 가치의 불일치 ○ 사는 것과 지어진 것 사이의 어긋남을 계획가의 윤리적 올곧음으로 해결 불가능. → 도시에서 윤리적 문제를 파생시킴. 즉 "도시 계획은사회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야 하는가? 변화를 추구해야 하는가?" ○ 열린의 의미: 이상한 것, 구금한 것, 가능한 것을 한데 짜맞춘다는 의미. ○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 다른 사람들을 한데 모으는 것을 의미하는 시노이키스모스synoikismos라고 지칭했다. 신테시스/시너지처럼 한데 모아둠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만든다: Stadtluft macht frei: 경제적, 사회적 먹이질서의 고정되고 세습적인 위치에서 해방에의 약속을 품는 단어이다. ○ 건축가와 계획가의 역할은 복잡성을 장려해서 부분의 총합보다 더 큰 빌, 상호작용을 통해 시너지를 일으키며 그 속에서 질서의 포켓들이 방향을 지시해주는 빌을 창조하는 데에 있다. ○ 윤리적으로 열린 도시는 차이 용인, 평등 촉진, 사람들을 고착되고 익숙한 족쇄에서 풀려나게 해주어 경험확장 및 실험할 수 있는 토양을 창조하는 그런 도시이다. ○ 도시에서 호모 파베르의 역할을 이해하려면 노동의 존엄성에 대해서 달리 생각해야 한다. "도시에서 호모 파베르"는 어떤 세계관을 지지하기 보다는 소박한 방식의 실천, 즉 소규모 주택을 최소비용으로 개조하고, 거리에 묘목을 심고, 값싼 벤치를 설치하는 것에 있다.
○ 이 책의 계획:
1부에서는 도시 계획(도시 만들기라는 전문적 실천)이 어떻게 진화했는가를 탐색한다. 19세기의 도시 제작자들은 '사는 것'과 '지어진 것'의 연계를 시도했다. 20세기에서는 빌ville과 시테cité가 갈등하는 방식으로 진행 되었다. 가령 빗장 공동체gated community가 그것이다.
2부에서는 '사는 것'과 '지어진 것' 사이의 균열이 세 가지 큰 이슈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탐구한다.
3부에서는 도시의 개방성에 대한 기능적 탐구를 분석한다.
4부에서는 도시의 본질적 비틀림에 대해서 탐구한다.
제1부
제2장 불안정한 기초
1. 도시계획의 탄생
2.1.1. 1859년 일데폰스 세르다 : '도시계획'과 '도시계획가'라는 단어를 최초로 인쇄물에 소개했다. 2.1.2. 토목기사는 현대 도시 생활의 품질 개선을 위해 노력했는데, 1841년 공중변소가 공중보건을 크게 발전시켰다.
2. 시테-읽기 힘든 것
2.2.1. 엥겔스는 계급의 새로운 언어인 프롤레타리아트/룸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언어와 전적에 맞아 떨어지지 않는 도시의 면모들, 거리에서 아이들이 노는 방식들, 여성들이 거리를 걷는 속도, 술집에서 사람들이 누리는 줄거움을 인식했다. 2.2.2. 도시생활의 불안정성은 현대성 자체에 대한 공감가는 정을 만들어냈다. 가령 마르크스/엥엘스는 <공산당 선언>은 모든 견고한 것은 대지 속에서 사라졌다라고 말하였다. 보들레르는 일시적인 것, 무상한 것, 우발적인 것과 영원한 것 간의 관계를 현대성의 개념으로 주조해냈다. <유동적 현대성>
3. 빌
2.3.1. 중요한 세 인물: 오스만 남작, 세르다, 프레데릭으로 옴스테르 2.3.2. 오스만은 파리 혁명 이후 1850년대에 네트워크 도시 계획 구축을 시도했다. 이는 바리케이트 구축을 어렵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2.3.3. 네트워크형 대로 설치 후 파리의 새 중산층에게 공급될 주택들을 대로변에 배치했다. 2.3.4. 오스만의 파리의 대로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구경거리로서의 성격을 얻었다. 2.3.5. 네트워크화된 도시는 새로운 종류의 상업인, 대로변에 위치한 새로운 대형 백화점의 복합체, 백화점의 대형 판유리 진열창 설치 했다. 마르크스는 '상품물신주의'를 여기서 발견한다. 2.3.6. 아케이드는 백화점과 대조된 작은 상점들로 이루어졌다. 나폴레옹 전쟁 후 파리는 전천후 상업적 혈관의 정교한 네트워크를 발전시켰다. 2.3.7. 사람들은 공간 속에 움직이며, 장소에 거주한다. 둘의 차이는 사람들이 도시에서 움직이는 속도로 인해서 생겨난다. 2.3.8. 오스만은 대로 네트워크를 통한 쉽고 자유로운 이동성을 '좋은 도시'에 대한 정의의 핵심에 두었다. 도로-속도의 경험이 '빠른 것은 자유, 느린 것은 부자유'라는 특정 버전의 현대성 정의한다. 이로써, 네트워크화된 빌은 시테를 를 축소하게 된다.
직조
일데폰스 세르다는 19세기 중반 서유럽 일부에서 번성한 일종의 협력적 사회주의를 주조. 그는 세르다 격자의 설계자. 도시라는 직주 즉 도시를 하나의 전체로 엮어 짜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계획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직조fabric : 설계의 날실와 씨실, 건물과 거리와 열린 공간을 서로 엮음으로써 창조되는 패턴. 직조는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남. 1) 고대 로마 도시의 직교 격자 2) 세포 도시. 3) 추가 격자로 세르다의 계획. 결grain : 그 패턴의 복잡성, 거리의 너비, 내부와 외부의 관계, 건물의 스카이라인 높이. 재질texure : 결과 호환. 여러 용도의 혼합, 그리고 계획 속에 있는 장소들을 가리키는 용어. 매듭knot : 도심의 작은 길모퉁이 공원에 설치된 조각상이나 분수대 등 그 자체로 뚜렷한 성격을 지닌 모든 것이 도시의 매듭.
단일경작
세르다의 유산은 모두를 위한 도시를 건설할 방법을 찾았고, 격자는 평등성과 사회성의 공간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단일경작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발상의 취약점은 부동산에 극적으로 나타난다. 그의 목표는 빌을 평등하게 만들어 시테를 평등화하는 것이었다. 같은 환경에 서로 다른 건물들과 사람들과 활동들을 심어야 하는 것이 해결책. 열린 사고 가능. 전체가 부분들의 총합보다 커짐. 직조물이 쉽게 찢어지지 않음.
풍경
미국인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는 이 파괴성을 문제 삼으면서 도시 내 자연이 갖는 사회적 가치를 강력히 주장. 그는 이웃 간 장소보다는 군집적 장소로서 인종적으로 혼합된 공원을 구상. 후자는 넓은 공간에 도시 전역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 전자는 각가의 지역에만 봉사하며 더 균일한 정체성을 갖는 작은 공간. 센트럴 파크 공사는 옴스테드와 파트너 캘버트 복스의 공동 작업. 1858년에 시작 1873녕에 설계도 원안상의 형태가 거의 모두 완성. 술수 옴스테드는 대중이 처한 가혹한 여건을 알고 있었기에, 공원이 억압적인 도시 분위기를 이완시켜주기를 원했다. 공장이나 상업적 거리 같은 기능적 장소와는 달리 공원에서는 사람들이 즐거움을 위해 사교적으로 어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현실은 사교성을 줄이는 반면 술수는 그것을 활성화시킨다. 그는 자신의 설계가 특정한 종류의 환상을 통해 즐거움을 주는 사회적 선물이 되기를 희망했다. 그의 기준에서는 자연과 인공적인 것이 이은 자국 없이 매끈하게 이어지는 것이 목ㅍ다. 식재되고 조각된 공원의 세계와 도시 기반시설인 가로수, 배수 시설, 방파제는 매끈하게 통합되지 않는다. 기능적 생태학적 역할 면에서는 실패작. 착각의 법칙 4. 군중 폭도 르봉은 사람들이 새로운 공유 에너지를 발견할 때 '과장된 당당함'이 냉철한 이성을 대체한다고 말한다. 그는 군중심리 분석을 통해 사회심리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붐빔의 감각 르봉의 저서 <군중>이 출간된 지 8년 뒤 1903년 짐멜은 <대도시와 정신생활>을 썼다. 짐멜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릴 때 발생하는 감각 과부하에 관심을 갖았다. '외부 및 내부 자극이 빠르고 중단없이 변화항에 따라 생기는 신경 자극의 강화"라고 씀. 거리의 유동하는 현대성. 그는 도시 생활의 증가 및 자극의 증가를 두려워했다. 짐멜은 "인상은 흡수하되 자신의 약점은 드러내지 않는 냉정함의 전시"를 '무관심한 태도'라고 불렀다. 세넷은 이를 '가면'이라고 불렀다. 그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은 큰 틀에서의 불안이다. 자기방어를 위한 가면을 쓰는 사람은 일종이ㅡ 합리성을 적절하게 사용하기에, 충동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뒤로 물러서서 계산한다.
5. 베버는 불행하다
<경제와 사회>에서 진정한 도시는 방어 시설, 시장, 자체 사법 체계, 자주적 법률, 상이한 집단들의 연합 구조, 부분적 자율 혹은 자치 그리고 시민들의 참여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 베버에게 시민권은 보편적 전제 조건이 아니다. 권리와 권력은 장소를 기반으로 한다. 어떤 장소에 대해서 살지 않으면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발언권을 갖지 말아야 한다. 모든 시민은 동일한 장소에 살기 때문에 기본권을 다 같이 누려야 한다. 베버가 보기에 현대 도시는 자치 도시가 아니다. 민족국가, 국제적 사업, 관료제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가 찬양한 도시국가들에서는 전체적 빌 형성 계획에 대해 시민들이 투표를 했다. 베버의 도시국가상 속에서는 빌과 시태가 매끈하게 연결된다. 거기서는 시민들이 원하는 삶에 정확하게 사응하는, 성벽과 같은 물리적 형태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베버는 니체가 찬양한 야성적이고 디오니소스적인 반항자들에게 공감하지는 않았지만 관료제적 일상에 갇혀버리는 삶이 현대성의 진정한 특징이 아닐까 두려워했다. 현대 도시에 대한 베버식 암묵적 비판은, 그것이 자기 개정적이고 자치적인 조건들을 좋아하지 않고, 민주적 절차보다 관료주의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제3장 시테와 빌의 이혼
1. 사람과 장소의 헤어짐
3.1.1. 하비 워런 조보의 책 『골드코스트와 슬럼』은 시카고학파의 방법을 구현한 책이다. 시카고 북쪽 근방에 이웃하여 사는 부자와 빈민 사이의 긴장감이 이 연구의 조건을 제공했다. 3.1.2. 시카고학파는 지역사회의 분석에 탁월한 전문가들이지만, 그에 대해 양면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들이 느끼는 불편함의 한 가지 이유는 '지역사회'라는 개념의 역사에 있었다. 3.1.3. 시카고학파는 두 가지 이유로 퇴니에스에게 불만을 품었다. 첫째는 그가 지역사회와 일을 완전히 분리했다는 점이다. 시카고학파는 이웃 간에 화합하는 힘이 공장이나 도축장에서 함께 일하는 노동자들 간의 연대감보다 약한 경우가 종종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윌리엄 아이작 토머스가 좌파는 지역사회 조직보다 노동 조직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그런 연대감 때문이다. 둘째는 게마인샤프트를 여성, 게젤샤프트를 남성의 공간으로 보는 퇴니에스의 성차별적 시선 때문이다. 퇴니에스는 시테를 성차별적으로 다룸으로써 시테의 윤리 지평을 수축시킨 반면 시카고학파는 여성들이 대공황 시절에 의식의 규모를 확대했음을 알아냈다. 3.1.4. 시카고학파는 경험에 근거한 지식을 믿는 존 듀이의 영향을 받아 개인적 경험을 재서술하는 것에서부터 방법을 만들어냈다. 시카고학파는 우선 연구 대상들의 사소해 보이는 구체적 경험에 집중하면서, 해석이 확장되는 궤적을 따라갔다. 3.1.5. 슬럼 거주자들의 생활에 관한 조보의 저서 끝부분에, 그의 분노가 터져 나온다. 세상의 불에 뜨거운 맛을 본 인터뷰이의 경험에서 만들어진 해석적 구조물은, 인터뷰어 자신의 정치적 견해에 비해서 이데올로기적 성향이 약할 때가 많았다. 그들은 농촌인 남부에서 시카고로 온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들로 구성된 공산주의 세포 조직을 만들려고 했다. 경제적으로 탄압받는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로버트 파크, 샬럿 타울, 루이스 워스 같은 시카고학파 원로들은 그런 움직임을 두려워했다. 3.1.6. 정치와 맺는 관계에 문제가 있었을지라도, 시카고학파가 남긴 유산은 '경험'과 '지역'이라는 두 단어의 의미를 어떻게 두텁게 만들었는가에 있다. 노동자들(철강 노동자들)은 자기에 대한 이해를 추구함에 있어, 사는 지역이 편협한 사고방식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사실이 사람과 장소에 대한 시카고학파의 윤리적 신념이 되었다. 3.1.7. 복합적 지식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시카고학파는 도시 전체, 사람들만이 아니라 도시의 물리적 형태까지 포용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들의 작업은 시테를 강조하고 빌은 무시했다. 어니스트 버지스/버제스는 재산, 민족성, 인종/비지니스 구역, 제조업 구역, 주거 지역으로 나누어지는 동심원 과녁 모양의 2차원적 도시 이미지 지도를 만들었다. 사회적 경제적 차이가 중심으로부터 동심원 형태로 퍼져나간다는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차이의 측면에서 본다면 대도시는 가난과 부, 기능적 또는 사회적 집단의 콜라주를 이루는 지저분한 덩어리와 특이한 마름모꼴이다. 이는 2, 30년전 찰스 부스가 시도했던 이스트런던 빈민 구역 지도 제작 방식과 관련된 것으로, 그것은 파크와 버지스의 방식과 상반된다. 3.1.8. 도시계획의 창시자 세대가 만들어 낸 세 종류의 직조 가운데 둘(직교 격자 및 추가 블록)은 동심원 과녁처럼 환원주의적이다. 바로 뒤의 세대는 이 단순성을 의심하여 직조를 변형시키기 시작했다. 1900년 계획가들은 거리와 대로가 차지하는 비중의 불균형을 다시 조정하고자 했다. 바르셀로나의 계획가들은 외곽 블록이 도시 전역으로 확장되면서 세르다의 원래 형태가 단조로워질까봐, 외곽 블록의 파사드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3.1.9. 시카고학파는 동심원 과녁이 어떻게, 언제,어디서 덩어리가 될지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동심원적 구역 이론'은, 도시 내의 각 장소는 주거, 산업, 상업, 문화 등 특정 용도를 갖고 있다는 상상에서 나왔다. 그들은 엄격한 노동 분업(가령 포드주의와 같은)이 도시 공간에도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3.1.10. 시카고학파가 3차원에 대해, 건축 형태에 대하 이토록 관심이 부족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20세기 첫 2, 30년 동안 시카고는 현대 건축의 세계 수도가 되었다. 대니얼 버넘이 1909년에 세운 시카고 도시계획은, 시카고 원로들이 도시와 면한 거대한 호수 연안의 야외 공간을 보존하도록 유도했다. 시카고에서 활동했던 19세기 후반 건축가들은 건물 내부와 외부를 연결시키는 데에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건물들을 자신들의 탐구와 관련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시테 그 자체의 풍부한 의미를 빌의 복잡성과 연결시키지도 못했다. 3.1.11. 사람과 장소의 분리가 시카고학파의 정치에 스며들었다. 가령 루이스 워스는 "고도로 차별화된 생활양식을 가진 사람들과 문화들의 잡탕(혼합물)으로, 거기에는 매우 희미한 소통, 최대한의 무관심과 최대한의 관용, 때때로 벌어지는 쓰라린 투쟁이 있을 뿐이다."라고 도시를 정의했다. 물리적 도시에 대한 그의 무관심이 사회적 단절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3.1.12. 시카고학파의 건설된 도시에 대한 무관심은 장소 만들기와 거주의 결합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절반을 상징했다. 빌과 시테의 단절. 그런데 거주에 대한 이런 어이없는 무관심의 상징이 바로 르코르뷔지에가 제안한 파리 일부의 개조 계획에 담겨 있었다. 그는 1925년에 중세적인 마레 지구를 완전히 철거해서 파리 중심부를 개조하자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는 그곳을 평지로 만든 뒤 체스 판 모양의 격자 위에 각 공간에 격리된 하늘에서 봤을 때 X자 형태인 거대 고층 빌딩들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이 지구는 가난한 유대 상인들, 마시프 상트랄에서 갓 상경한 프랑스 농민들, 위그노파 직공들이 뒤섞여 사는 습하고 불결한 곳이었다. 3.1.13. 부아쟁 계획은 원리 면에서는 대규모 주거 시설에 빛과 공기를 가져와야 하는 고전적 도시계획 문제에 탁월한 해결책 같았다. X자형 고층 빌딩은 환기 측면에서 내부 마당에 공기가 갇힐 수 있는 외곽 블록보다 더 효율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계획은 콘크리트를 고층 빌딩의 건축 재료로 제시했다는 데 있다. 르코르뷔지에의 부아쟁 계획이 제안한 건물은 기둥을 최대한 없애고, 각 층에는 하늘에 떠 있는 탁트인 공간과 강화 콘크리트로 지은 기둥 둘, 그리고 콘크리트를 부어 만든 바닥판이 구조적 한계까지 뻗어 있는 형태였다. 3.1.14. 르코르뷔지에의 부아쟁 계획은 유동하는 현대성의 한 면모인 과거 지우기를 잘 보여준다. 그에게 있어 아무 칠도 하지 않거나 흰색으로 칠한 콘크리트는, 건물은 아무도 그고셍 산 적이 없었던 것처럼 언제든지 목원될 수 있다는 상징으로 보였기에 매력적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시테의 혼란스러움을 싫어해서, 거리에 그 혐오감을 집중시켰다. 1929년의 선언. "거리는 우리를 지치게 한다. 온갖 말과 행동이 있는 그곳이 우리를 역겹게 만든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주택은 그 안에 살기 위한 기계다"라는 구절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선언으로서 부아쟁 계획은 빌을 위해 시테를 부정한다. 르코르뷔지에의 부아쟁 계획은 시테의 부재가 주는 안도감을 1935년 뉴욕 여행에서 완벽하게 느꼈고, 그 경험을 <성당이 흰색이었을 때>라는 책을 써서 기념했다. 과거의 도시계획 관점에서 보자면 르코르뷔지에의 부아쟁 계획은 기능적 도시를 '연극성'이라는 용어에 포함된 모든 자극과 갈라놓는다. 짐멜은 기능적이고 합리적인 무관심이 거리의 드라마로부터 주체를 보호한다고 단언했다. 르코르뷔지에의 부아쟁 계획은 이런 무관심을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 본능으로부터 기계적으로 '해방된' 건축을 창조했다. 러시아 공산주의에 이끌렸다가 얼마 후 염증을 느낀 그는, 1930년대에 르코르뷔지에의 부아쟁 계획의 사회민주주의적 버전을 개발하려고 주위의 동료들을 모았지만 그들 모두 도시가 효율적인 기계처럼 작동할 수 있다는 것, 시테의 비틀린 재목이 곧게 퍼질 수 있다는 것에만 사로잡히게 되었다.
2. 균열이 커지다
2.1.1. 1933년 7월 이 그룹, CIAM(현대건축국제회의)의 멤버들이 아테네에 모여 전시회를 열고 전 세계 33개 도시 연구에서 얻은 네 가지(생활, 작업, 레크레이션, 순환) 기능을 중심으로 분류된 도시계획 아이디어를 발표. 바우하우스의 창립자 발터 그로피우스, 지크프리트 기디온, 르코르뷔지에 등이 함께 작업하기 위해 해외로 나갔다. 그들은 도시 설계는 여러 종류의 전문성을 합친 집단 프로젝트로 추진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네 가지 도시의 기능에 각각 그것과 뚜렷이 결부되는 공간이나 건물을 부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형태는 문자 그대로 기능을 표상해야 하므로 구조를 보면 즉각 그것이 왜 존재하는지를 이해할 수있고, 전체적인 구조를 살피면 도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르코르뷔지에의 저서 <빛나는 도시>의 주제였다. 그러나 그 배에 탔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전체주의 체제로부터 달아는 이들이었지만, 배 위에서는 기능적 도시를 찬양함으로써 경험의 형태를 잔혹하게 단순화하는 것에 굴복했다. 2.1.2. 이 잔혹한 단순화는 50년대 후반 루시우 코스타가 계획을 도왔던 브라질 새 수도에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났다. 제자 코스타는 정치를 목적으로 한 그 도시에 형태-기능 명료성이라는 원리를 적용했다. 코스타는 헌장의 포괄적 이념에 집착했다. "역설적이게도, 완전히 새로운 건설적 노하우가 논리적으로 자신이 속해야 하는 사회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그 근본적 요소들은 이미 완벽하게 개발되어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현대의 시테는 현대화하는 빌을 따라잡지 못했다고 단언한 부아쟁 계획을 뜻한다. 2.1.3. 일상적인 도시계획 속에 들어온 것은 르코르뷔지에의 전기의, 경험이 결핍된 신념이다. 아테네 현장은 20세기 내내 도시 계획 안내서 역할을 했다. 가령 르코르뷔지에의 옥외 거리 생활 말살은 실내 쇼핑몰을 예고했고, 스마트 시티의 한 버전을 주도하는 것도 부아쟁 계획과 헌장이다. 규모가 축소된 기능성이 낳은 결과는 1956년 하버드 대학에서 열린 콘퍼런스에서 명백해졌다. 파트리스호 승선자들 가운데 여러 생존자가 미국의 젊은 엔지니어, 건축가, 권력자에게 기능주의 윤리를 전파했다. 2.1.4. 이들의 분위기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두 개 있었다. 제인 제이콥스, 인문학자/도시 역사가/헌신적 진보주의자 루이스 멈포드. 멈포드는 "지역사회의 친밀한 사회적 구조를 파괴하면서 물리적 구조를 창조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어리석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3. 도시를 어떻게 여는가?
3.3.1. 제인 제이콥스는 로버트 모지스를 상대로 싸운 활동가였다. 그녀는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에서 도시를 순전히 기능적인 시스템으로 생각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녀가 지지한 것은 지역 사회를 질식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대형 마스터플랜에 반대해서 혼합형 동네, 비공식적 거리 생활, 지역 통솔권이었다. 3.3.2. 멈퍼드는 사회주의라는 명분으로 그녀를 공격하면서, 자본주의자들의 하향식 권력과 싸우려면 그들을 휩쓸어버릴 만큼 우세한 힘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 다는 좌파였지만 멈퍼드는 정책 수립을 강조하는 페이비언 사회주의로, 제이콥스는 아나키즘으로 강하게 기운 이단아였다. 둘 사이의 논쟁은 건설되는 것과 생활이 만드는것, 즉 빌과 시테 사이의 상대적 균형을 주제로 벌어졌다. 3.3.3. 제이콥스는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자신의 도시계획을 삶으로 직접 실천했다. 그녀는 그 술집과 그녀가 매주 순회하는 다양한 커피숍들에 오는 사람들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하며 관찰했다. 그녀의 책 페이지마다 그녀가 주의 깊게 관찰한 사건들, 상인들의 자잘한 질투, 지역사회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낯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는 시카고학파의 직계 후손으로 도시를 밑바닥에서 꼭대기까지 개방하는 것이었이다. 3.3.4. 멈퍼드는 개인적으로 무척 싫어하기는 해도, 오늘날 그의 견해는 들어줄 만한 가치가 있다. 특정한 사회주의적 계획을 따라서 빌을 만들어감으로써 도시를 개방할 방법을 그는 추구했다. 그의 이상형은 '전원도시Garden city'였다. 집, 공장, 학교와 상점이 자연과 균형을 이루면서 공존하도록 설계된 전원도시가 시테와 빌의 단절을 치유해서 모두에게 좋은 삶을 열어줄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3.3.5. 제이콥스의 정치경제학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느린 시간이었다. 그녀가 '격변하는 돈'cataclysmic money이라고 부르는 것은 건축가들 및 로버트 모지스와 같은 계획가들과 연대한 개발자들이 하는 일종의 투자로서, 크고 갑작스럽고 변형적인 프로젝트를 통해 지역사회에 큰 피해를 입힌다. 반대로 '점진적인 돈'은 액수도 적고 일상의 소박한 요구를 해결하는 돈이다. 그녀는 규칙성 없고 비선형적이며 끝이 확정되지 않은 개발의 길을 찬양한다. 느린 시간은 결국 특정한 도시 규모를 결정한다. 그녀는 지역사회에서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관계만이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곳을 결합시킨다고 강조하는 듯하다. 제이콥스는 친밀한 없는 이웃 관계를 중요시했다. 또한 건설 환경의 품질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카고학파와 맥을 같이 한다. 그녀에게 중요했던 것은 사람들이 그 속에서 자리를 잡고 각자의 생활 방식에 따라서 그 구조를 차츰 자르고 당겨 다듬어나가는 것이었다. 거주하는 방식에 따라 형태가 출현할 것이라는 그녀의 생각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명제의 또 다른 버전이었다. 여기서 기능은 얼굴을 마주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비공식적이고 자유롭고 느슨한 활동을 대변한다. 3.3.6. 정치적으로 제이콥스는 미국의 타운 홀 회의를 기초로 한 지역 단위가 민주적 실천에 가장 적합한 규모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직접민주주의가 세포 같은 방식으로 구축될 수 있다고 믿었다. 각 세포는 소리를 치면 들리는 거리 안에 있는, 서로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속한 동네다. 세 종류의 도시 직조 중에서 그녀의 견해에 가장 적합한 것은 마당 유형이다. 민주주의 형태를 결정하는 척도 개념에서 제이콥스 도시계획의 가장 도발적인 요소가 나온다. 질서와 무질서에 관한 것. 그녀는 『도시의 경제학』 (1969)에서 복잡한 도시를 움직이는 교역 및 또 다른 구조를 탐구하면서, 도시는 인구밀도가 높아야 하고 그 기능은 다양해져야 한다고 했다.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에서 그녀는 "조밀도와 다양성에서 생명이 생긴다면, 생명은 무질서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녀는 개방적이고 격렬한 토론이 있어야 정치가 활기를 띤다고 보았다. 도시는 이런 혜택을 위해 비공식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아테네 헌장의 미리 계획된 기능 네 가지 도시에게 이런 종류의 부글거리는 세렌디피티를 주지 않는다. 3.3.7. 멈포드는 제이콥스 사상의 특징들을 하나하나 반박하면서, 빌을 건설하는 어떤 공식적인 방법이 도시를 개방할 수 있기를 바랐다. 느리고 작은 과정을 강조하는 제이콥스의 정치 전략은, 대형 개발업자와 건설회사를 상대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제이콥스는 자기모순에 빠져 있었는데, (웨스트빌리지는) 거리의 범죄, 특히 폭력 강도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선형적으로 성장하는 역동적 도시에 대한 그녀의 찬양은 지속적인 자발성에 의존하는데 신좌파의 아나키즘적 열광에 직면한 구좌파의 많은 사람처럼 멈퍼드는 지속적인 자발성이란 불가능하며, 나르시시즘적 자기 탐닉에 불과한 관념 그 자체라고 여겼다.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행동에 따르는 패배와 난관에 직면할 때 사람들을 버티게 해주는 안정적인 행동 규범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멈포드는 느린 시간에 의존하는 것, 인도하는 이미지 없이 던져지는 기회에 의존하는 것으로는 도시에서의 삶이 개선될 수 없다는 확신을 남겼다. 도시가 더 정의로워지려면 그 기초는 설계를 통해 질서 지워져야 한다는 것, 즉 빌이 시테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3.3.8. 그는 젊은 시절 영국에 가서 페이비언 사회주의자 패트릭 게디스와 함께 일을 하게 되면서 빌을 위한 설계를 처음 보았다. 게다스 뒤에는 에버니저 하워드, 헨리 조지 등이 있었다. 『진보와 빈곤』은 전체를 포괄하는 마스터플랜에 의해 노동과 자본이 화해하는 비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를 구현했다. 산업적 슬럼의 표시인 무정부 상태와 소홀함을 처리해서,사회 개혁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이 좋은 설계라는 하워드와 게디스의 신념이 추종자들을 자극했다. 조지의 유토피아적 희망은 하워드의 전원도시에 구현된다. 기본 아이디어는 일, 교육, 가정, 레저의 공간들을 한데 단단히 연결하고, 주위에 그것들을 보호하는 그린벨트로 둘러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도시는 여러 개의 도시를 의미. 전원되시, 위성도시, 다음 단계의 위성도시. 위성도시의 규모는 연결된 활동 사이의 이동 시간에 따라서 결정된다. 시테의 생활은 일관성을 갖게 되는데 일, 가정, 공공 생활은 언제나 공간적으로 연결되기에 사회적으로도 연결된다. 이런 도시 이상형은 세계 전역에서 실현되었는데 최초이자 가장 유명한 전원도시는 런던 근처에 있는 레치워스다. 하워드의 사상은 1904년에 레이먼드 언원과 배리 파커에 의해서 실현되었다.다른 사례로는 뉴욕주의 퀸스 서니사이드, 뉴저지의 래드번, 위스코신의 그린데일, 메릴랜드의 그린벨트, 오하이오의 그린힐스 등이다. 그밖에 슬로바키아의 스비트, 페루 라마 지역의 산펠리페 주택지역, 브라질 상파울루의 알토 다 라파와 알토 데 핀헤이로스, 호주 멜버른 근처의 선샤인, 그리고 부탄의 수도 팀푸가 그것이다. 3.3.9. 전원도시에서 '전원'은 그린벨트의 자연이 거대한 채소밭으로 활용된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전원도시 계획가들은 도시 농업을 구상한 최초의 사람들이다. 멈퍼드는 지역주의가 권한 박탈disempowerment의 한 형태라고 생각했다. 멈퍼드는 시민들이 지역적 삶으로 물러나기보다는 전체 빌이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발언하고 근본적인 요구를 함으로써 자신들의 주체성을 주장하기를 원했다. 형태에 대한 이런 요구는 이상적인 전원도시의 사회주의적 측면이다. 멈퍼드는 도시뿐만 아니라 기술에 대한 분석가로 '스마트 시티' 운동의 한 분과의 대부이다. 『기술과 문명』이 출간된 1934년에, 그는 사회주의적 전원도시 계획에 대한 생각을 계속 밀고 나갔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뉴턴 시대에 기술의 힘이 도시에 대한 장악력을 확장했다. 기술은 자족적인 힘이 되어 인간을 대체하게 되었다. 그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모든 도시계획가의 성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내게 한 적이 있다. 노년기의 그는 염세주의로 빠져들어, 하이테크는 정치와 공존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상향식 기준에 입각해서는, 즉 세포 단위의 프레임워크에 따라 생각해서는 사회적 기간산업을 건설할 수 없기에 시스템을 하나의 통합된 전체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멈포드가 보기에 그녀는 지역에서 도시로 어떻게 뻗어나갈지를 가늠하지 못했다. 그녀식으로 도시를 '지역사회의 집합'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도로, 전기, 수도 같은 기반시설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내려가는 방식으로 건설되어야 한다. 멈포드의 도시계획은 큰 규모로 생각하는 민주적 사회주의 방식을 추구했다. (그러므로) 멈퍼드-제이콥스 논쟁은 열린 도시의 두 가지 상이한 버저넹 관한 논쟁이다. 그에게 '열린'이란 끌어안기를 뜻한다. 제이콥스는 현대적 열린 시스템이라는 의미에서 더 '열려' 있어서, 질서의 포켓이 있고 끝이 확정되지 않은 비선형적인 방식으로 성장하는 도시를 선호한다. 그에 반해 멈포드가 생각하는 시테는 그보다는 닫힌 모습이다. 질서 있고 예측 가능한 행동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술에 대해서는 개방적인 사고를 가져서 끊임없이 진화하고 스스로를 개정하는 스마트 시티를 상상한다. 반면 제이콥스가 생각하는 시테란 일상적이고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만남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시카고학파적이지만, 소도시의 친밀함을 싫어한다는 점에서는 순수하게 뉴욕적이었다. 제이콥스의 정치는 멈포드의 것보다는 더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멈포드는 시민들에게 사회주의적인 삶의 계획을 제공하는 반면 그녀는 토론과 논의의 과정, 그리고 저항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제2부 거주의 어려움
제4장 클레의 천사가 유럽을 떠나다
1. 비공식적인 거주 방식-델리의 미스터 수디르
4.1.1. 인도 델리의 네루 플레이스는 대규모의 신중한 기호기 덕분에 생긴 장소이다. 계획가들은 거액을 투재해서 네루 플레이스에 효율적인 지하철역과 버스 터미널을 제공했다. 비를 피하고 오물을 흘려보내기 위해 살짝 기울어진 형태로 만들어진 지하 주차장 지붕은 도시계획의 관점에서 걸작인데, 그 지붕 위에서 비공식적 시테가 기획된 빌에 접목되었기 때문이다. 4.1.2. 이곳에 고속 성장하는 신흥emerging 도시들에서 나타나는 네 가지 차원의 비공식성이 존재한다. 경제적 차원: 네루 플레이스의 사업가들은 관료제에서 벗어나 있다. 법적 차원: 이곳에서 거래되는 상품들은 '회색 상품'(장물, 불법 물건)이다. 정치적 차원: 노숙자나 경찰이 그렇듯이 엄격하게 관리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비공식적. 사회적 차원: 지속적이지 않기에 비공식적. 4.1.3. 델리의 미스터 수디르는 부정 거래를 통해 이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출처가 의심스러운 물건을 다루는 직업을 가졌어도 그의 견고한 가부장 의식의 아우라는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다. 단골 고객들이 있으니 두 아들이 사업을 물려받을 때 디디고 설 '견고한 바위'를 마련한 셈이었다. 그가 사는 집도 불법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20세기 도시 혁명이 가속화하면서 도시로 쏟아져 들어온 빈민 대중은 빈 땅을 점거했지만, 그에 대해 어떤 법적 권리도 갖지 못했다. 2000년도에 새로 도시 주민이 된 사람들의 40퍼센트가 빈집을 점거하거나 시멘트 블록이나 골판지로 오두막을 지어 살았다. 지주들은 자기들 땅을 돌려받기를 원했고, 정부는 그런 판자촌이 영구화된다면 도시의 오점이 될 것이라고 여겼다. 14년 동안 빈 땅을 점거하여 살아온 미스터 수디르는 생각이 달랐는데 그는 매년 자기 집을 개선해왔고, 그런 식으로 자신의 점거를 합법적인 것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4.1.4. 그의 상황은 도덕적으로는 불편하더라도 사회학적으로는 익히 보아온 것이다. 윤리적인 가족의 가치가 어둠의 행동과 공존하는 것. 가혹한 생존의 여건이 빈민들을 그런 처지에 놓이게 할 수 있다. "저는 쫓겨나리라는 걸 압니다." 이 점을 강조해야겠다. "우리 나이에는 다시 시작하기가 쉽지 않죠. 그래도 나는 눈을 열워둬야 합니다." 그는 다시 한번 불법 상점을 열지도 모르는 여러 다른 장소를 거론했다. 이 감탄스러운 사기꾼을 몰아내려고 애쓰는 권력은 어떤 존재인가? 4.1.5. 헐벗은 권력이 살아남으려면 옷이 필요하다. 즉 스스로를 합법화해야 한다. 성장의 약속이 그 한 가지 방법이다. 성장은 경제, 정치, 기술적 진보를 한꺼번에 감싸 안는다. 델리가 2010년에 영연방 경기 대회를 개최했을 때, 당국은 이것이 현대화의 순간, 따라잡을 순간이라는 말로 몇 가지 급격한 변화를 정당화했다. 도시의 유력 인사들은 "델리가 파리처럼 보일 것이다?"라면서 자랑스러워했다. '따라잡기'는 신흥 도시에서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정당화한다. 4.1.6. 사람들은 왜 대도시로 몰려드는가? 일부는 그곳의 반짝이는 매력에 이끌려서 온 것이겠지만 대부분은 어쩔 수 없이 떠밀려 온 것이다. 일련의 통계에 따르면 보다 최근 세대 인도인 중 65%는 농촌과 촌락에서 인구 100만 이상의 도시로 유입된 '비자발적 이민자'다. 사람들이 한 장소로 쏟아져 들어간 뒤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도 한 가지 차이를 발생한다. 옛날 이민 이야기는 사람들이 시골이나 촌락을 떠나 어느 도시에 가면 그곳에서 계속 머무른다. 그러나 오늘날의 빈민들은 도시에서 살게 된 뒤에도 계속 이동하는 패턴을 보인다. 4.1.7. '메갈로폴리스'는 도시가 확장할 수록 노동, 기능, 형태의 분업이 격화되는 성장 모델에서 나왔다. 가령 베이징은 효율적인 교통수단으로 준도시들이 서로 연결되는, 수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메갈로폴리스를 창조하고자 했다. 진 고트먼은 시카고 도시계획가들의 동신원을 거부하고, 대신에 640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에서 여러 기능이 교차하는 복잡한 벤다이어그램을 채택했다. 그는 수송, 제조, 사회적 서비스가 지역 전역에서 연결된다면 규모의 경제가 달성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4.1.8. 그러나 '메갈로폴리스'는 사스키아 사센이 '글로벌 시티'라고 부르는 것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글로벌 시티'에서는 지구적 경제가 수행하는 금융적 법률적 서비스를 비롯해서 여러 전문적 서비스들의 조합이 중요하다. 이런 '지구적 기능'은 각 도시가 특정한 역할을 하게 되는 네트워크 내의 여러 도시에게, 거리와는 상관없이 분배된다. 가령 지구적 수준의 구리 플레이어가 되는 맥락을 검토해본다면 시카고, 도쿄, 런던, 댈러스, 라파스와 요하네스버그는 함께 하나의 지구적 도시 분자라는 역할을 수행한다. 4.1.9. 온갖 세력들이 합쳐져 미스터 수디르를 위협한다. 한 지역의 비공식적 장소들이 전 지구적 정권들이 환영하는 과녁이 된다. 두 가지 환영방식. 첫째는 '기회 투자opportunity investing'다. 기회 투자자들은 상대적으로 작은 사건이 전체에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방아쇠가 되는, 열린 시스템의 특정한 측면으로 돈을 벌기를 원하는데, 이 방아쇠가 바로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라는 것이다. 기회 투자자들에게 있어 경제적으로 중요한 요점은, 티핑 포인트가 갑작스러운 큰 도약을 하게 해주어 가치를 증폭시킨다는 것이다. 벤처 투자자 윌리엄 제인웨이의 주장대로, 기회를 찾아다니는 개방적 투자 방식은 특정한 거래 그 자체의 수익성보다 그 거래가 다른 거래를 촉발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4.1.10. 이것이 '핵심 투자core investing'다. 본질적으로 핵심 투자는 매개 변수에 따라서, 구체적인 내용들에 따라서 투자한다. 투자할 구체적인 내용들을 결정하고 나면 어디에 건설할지를 찾는다. 그런 처리법은 지구화에 적합하다. 핵심 투자는 매개 변수에 따라, 구체적인 내용들에 따라서 투자한다. 투자할 구체적인 내용들을 결정하고 나면 어디에 건설할지 찾는다. 그런 처리법은 지구화에 적합하다. 핵심 투자자는 장소를 돈처럼 다룬다. 사실 여러 복잡한 부동산 거래에서 거래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실제 건물보다는 건물과 관련된 구체적 내용이다. 바로 앞 세대 때는 도시에서 기회 투자보다 핵심 투자가 더 많아지는 추세였다. 기회 투자자는 과소평가된 건물이나 장소에 주목하는 반면, 핵심 투자자는 큰 개입을 통해 돈을 버는데 이는 지방정부의 과세 수입도 늘려준다. 4.1.11. 핵심 투자자는 전체적인 도시계획보다는 개별 프로젝트에 집중한다. 오늘날 상황은 역전되어 계획가들은 (개별) 프로젝트의 하인이 되었다. 하버드 대학이 도시계획에 대해 주문처럼 내세우는 공식 입장은 계획과 프로젝트의 관계를 '중재'한 것이었던 반면, 현실은 이제 매우 불평등한 권력 균형 상태임을 기억하라. 유엔해비타트 총장인 후안 클로스가 만들어낸 '문어 도시'는 그런 개발의 결과를 말해주는 이름이다. 새 도로가 쇼핑센터와 관공서, 고층 빌딩과 신흥 주택을 연결시키는 문어 촉수처럼 뻗어 있다. 이런 연결 고리는 도시의 방치된 부분들이나 슬럼, 바리오, 파벨라(브라질 빈민가), 그리고 무허가 거주지를 우회한다. 클로스의 도시 문어는 머리들을 먼저 키운 다음 그것들을 연결하는 촉수를 키워가는 짐승이다. 도시계획가 리우 카이 커는 이런 불균등한 개발이 전 세계적으로 '성좌 도시 개념' 또는 '다중 도심' 모델 같은 전문 용어들로 위장되어 있다고 지적하는데,이런 용어들은 전체 도시의 집단 요구 사항을 지워버린다. 4.1.12. 문어 도시 델리에서, 네루 플레이스가 핵심 투자자드르이 과녁이 되었는데 그들에게 그곳은 장소로서보다는 구체적인 내용 면에서 매력적이었다. 델리에서는 당국이 스스로 법을 바꾸어, 큰 필지의 용적률을 150에서 200으로 높여 역사적인 17.5미터 높이 제한을 철폐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비교적 낮은 건물들이 이어지며 이루는 네루 플레이스의 윤곽이 과거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다. 4.1.13. 미스터 수디르의 상황은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인간은 그 자신을 만드는 자"라는 명제를 판단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오늘날 도시 경제의 배후 세력은 확실히 위협적이지만, 미스터 수디르와 같은 밑바닥 사람들에게서 힘을 완전히 박탈하지는 않는다. 그는 부유한 개발업자들과 그 정치적 하수인들이 자신의 운명에 완전히 무관심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지만, 그 사실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다. 살아남고 싶다면 사람을 좌절시키는 우울에 굴복하면 안 된다.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고, 그저 자신을 만드는 자로서의 인간을 믿어야 한다. 후안 클로스의 은유적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은 도시 문어 주변에 물이 넉넉하기 때문이다. 하향식 대형 프로젝트 계획에서 배제된 비공식 경제 안에서, 그는 그와 비슷한 사람들처럼 위로부터의 도움을 전혀, 또는 거의 받지 않고 자신의 길을 만든다.
2. "그들은 점거하지만 거주하지는 않는다." - 상하이의 Q 부인
4.2.1. 2004년경부터 주민과 계획가 모두 흰색 고층 빌딩으로 구현된 모더니즘의 대안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부분적으로는 이런 충동이 시쿠멘을 개보수로 이끌었다. 기존 시쿠멘의 개조는 전에 그곳을 살아 있는 시테로 만든 사람들의 축출을 뜻한다. 살 만한 멋진 시쿠멘을 열심히 찾아다니는 20대들은 그 상징적 아우라는 누리고 싶어하면서도 원래부터 그곳에 살던 '실제 인간들'과 같은 공간에서 사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젠트리피케이션과 축출이라는 익숙한 쌍둥이 죄악은 도시계획가 리처드 플로리다에게서 나왔다. 그에 따르면 역동적 도시는 유기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젊은이들과 기업가들이 지배해야 하며 늙고 지치고 순종적인 사람들은 사라져야 한다. 그가 말하는 창조적 경제는 폐쇄적인 사무실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비공식적인, 공용 테이블에서 이루어진다.발 그곳이 도시의 '혁신 구역', '창조적 허브'(플로이다의 용어)이다. 4.2.2. 작가 제임스 설터는 소설 <가벼운 나날>에서 "삶 그 자체라기보다는 삶의 삽화"처럼 보이는 어느 이상화된 미국인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상하이가 그려내는 삽화는 시테를 상실한 도시를 보여준다. 신티엔디와 와이탄 같은 장소를 지배하는 것은 단수화되고 소독된 이미지다. 그것은 어떤 삶의 방식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전개될 조사를 미연에 방지한다. 그렇지만 소독된 시뮬레이션 속에는 슬픔이 내재되어 있다. 신티엔디에 생긴 것도 지금은 사라진, 사교적이고 함께 나누던 삶의 방식을 환기시키는 환상이다. 여기에 보다 일반적인, 도시계획의 큰 딜레마가 있다. 어떻게 하면 도시를 박물관으로 바꾸어버리지 않으면서도 사라지면 애석할 과거와 연결할 수 있을까? 4.2.3. 훌륭한 보존가들 가운데 그런 고정적인 시뮬레이션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대신 어떤 장소의 계속 진행 중인 역사가 발굴되거나, 가짜 천장이나 페인트로 위장된 어떤 건물의 과거가 드러날 것이다. 원래 보존 작업은 원본의 변형을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베를린의 노이에스 박물관 개조 작업을 맡은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도 그 논리에 따라서 박물관 벽의 총탄 자국을 그대로 남겨두어, 2차 세계대전을 겪은 그 건물의 역사를 전달했다. 신티엔디가 이런 식으로 '보존'되었더라면 그곳의 건물들에 남아 있던 빈곤이 끼친 피해가 지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 부유한 난민들을 위해 지어진 그 건물들이 어떻게 빈민의 슬럼으로 전락했는가를 보여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노력을 들이면 제국 시데, 매음굴과 아편굴 시절, 그리고 문화혁명기의 파괴를 거치면서 와이탄의 구조물들에 남은 상처가 제대로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4.2.4. 이런 방식의 보존을 추구하는 것이 버내큘러vernacular(일반적 제도적인 디자인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생성되고 만들어지는 디자인을 의미하는 개념) 도시 계획이다. 이것은 옛날 형식으로부터 출현한 새 형식이 여전히 과거와 연결될 수 있는 길을 찾아보는, 시간 속에서 나아가는 내러티브 보존의 논리를 따른다. 사실 역사적 보존은 멜로드라마로 전락할 수도 있고, 유산을 보호하려는 다윗과 과거를 철거하고 영혼 없는 철강과 유리로 된 상자를 세우고 싶어하는 골리앗을 대결하게 만들 수도 있다. 다윗은 '더 나은 것을 지어라! 혁신하라!'라고 유구하지 않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순간을 지지한다. 이 대비 속에 더 큰 윤리적 이슈가 놓여 있다. 4.3.1. 거의 한 세기 전에 집필된 글 한편이 오늘날의 델리와 상하이의 차이를 분명하게 만든다. 바로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이다. 그는 그 글에서 성장의 전위, 창조적 파괴를 통해 발생한 노스탤지어의 형태, 비공식적 활동에 의해 자극된 에너지를 다룬다. 이 주제들은 모두 1920년대에 공산화된 도시 모스크바로의 여행과, 어떤 그림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다. 4.3.2. 공산주의 도시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그 시뮬레이션이 당시 모스크바에 나타났다. 마치 지금 그것이 베이징에 나타난 것처럼. 스탈린의 모스크바는 오스만의 파리를 닮아가고 있었다. 공산주의는 사람들을 앞으로 몰아가고 있었지만, 도시 건설자인 천사는 뒤쪽을 바라보았다. 4.3.3. 스탈린의 모스크바에서 벤야민은 현실이 예술을 모방하고, 역사가 뒤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전진하는 것을 발견했다. 클레의 천사는 또 다른 세기적 변이를 대표한다. '전 지구적'이라는 단어를 대체한 변이다. 델리에서 진보의 폭풍 아래에 쌓인 '잡석'은, 미스터 수디르처럼 자신이 속하지 않는 장소에서 자신만의 장소를 찾아내려고 분투하는 주변적 인간들이다. 그들은 권력의 반대편에 서 있지만 그래도 그들의 주변성을 이용해서 뭔가를 얻어낸다. 상하이에서 진보의 폭풍에 떠밀리는 천사는 도시계획가들과 시민들이 그 도시의 변신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대변한다. 상하이의 변신에 만족하지 못한 그들은 몸을 돌려 뒤를 보면서, 현재에 의미를 부여할 무언가를 과거에서 찾는다.
제5장 타자의 무게
1. 거주-이방인, 형제, 이웃
5.1.1. 2014년 1월 5일 밤, 페기다라는 그룹이 짐멜의 후원자들의 도시인 드레스덴에서 저항 행진을 조직했다. 페기다는 '서구의 이슬람화에 반대하는 애국적 유럽인들'을 의미한다. 그 그룹들은 그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은 함께 살 수 없다는 견해를 지지할 뿐이다. 차이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5.1.2. 페기다는 타자를 이질적 존재로 보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폐쇄적 사고방식을 드러낸다. 하지만 당시 이 순수성은 비판받았다. 한 해 뒤에 추는 다른 쪽으로 기울었는데 페기다의 입장으로 완전히 넘어간 것은 아니지만, 부족한 것이 많은 거대한 이방인 무리가 사회에 통합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 쪽으로 기운 것이다. 외국 신문들의 페기다와 뮌헨 사태에 대한 외국 신문들의 설명은 이런 기울기의 독일 배경을 강조하면서, 인종적 순수성에 대한 나치의 믿음을 상기시키면서, 지울 수 없는 홀로코스트의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5.1.3. 스웨덴인들은 1990년대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크로아티아에서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피해 온 난민들을 받아들였는데 난민들이 국내에 머물도록 5만 장의 임시 체류증을 발행했다. 체류 허가를 받은 난민들이 스웨덴에 어떻게 정착해야 할지가 다음 문제였고 곧바로 문화적 충돌이 시작되었다. 이런 문화적 충돌의 한 해결책은, 난민들이 자신의 기준에 따라 편안하게 생활하면서 직업 세계에서의 통합에 집중하게 하는 것이다. 통합은 실제적인 구원인 동시에 경험적으로는 상실이었다. 당신이 속하지 않는 장소에 어떻게 거주할 것인가? 역으로, 그런 장소에서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어떻게 대우해야 할까?
5.1.4. 이방인, 형제, 이웃은 타자를 규정하는 세 가지 방식이다. 세 단어는 세 철학자[후설, 하이데거, 오카쿠라쿠조/레비나스]의 글에 연원을 둔다. 20세기 초 후설의 현상학. 현상학이란 인간 존재가 그들과 독립적인 영역인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가 아니라, 그들이 세계 속에 실존한다는 느낌을 어떻게 경험하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이론이다. 후설의 실존철학의 계승자이자 개조자 하이데거. 그는 오카쿠라가쿠조와 레비나스를 가르쳤다. 물론 그들도 스승의 사상을 개조했다. 하이데거는 자신과 다른 존재(이방인)를 거부하는 문제에 실존철학을 결부시켰고, 오카쿠라는 그것을 우애의 이상에 적용했고, 레비나스는 이웃의 문제에 적용했다.
5.1.5. 시간이 지난 뒤 나는 레비나스에게서 그가 의도치 않았던, 그리고 사실은 싫어했을 법한 어떤 것을 가져왔다. 이 윤리적 견해의 현실적 적용이다. 낯선 자로서의 이웃은 도시의 세속적 영역과 관계가 있다. 자신과 다른 타인들을 알고 만나고 상대하는 것 모두가 개화하는 윤리를 구성한다. 이해 불가능하게 낯설다는 이유로 낯선 자에게 무관심한 태도는 도시의 윤리적 성격의 수준을 떨어뜨린다. 윤리적 불순성은 모든 인간 존재의 삶에 들어가 있다. 우리 중 누구든 페기다 행진을 '이해'했을 수도 있고 뮌헨 기차역에 나타났을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보다 더 하기 힘든 것이 레비나스 기준에서의 이웃됨을 실천하는 것이다.
2. 기피하기- 두 가지 거부
5.2.1. 이질적인 타자를 기피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그들로부터 달아간거나 그들을 고립시키는 것이다.
5.2.2. 하이데거의 도시로부터의 도피는 타자, 특히 유대인으로부터의 도피이기도 했다. 도시와 그 인간적 복잡성으로부터의 도피는 그가 프라이부르크 대학 나치 총장이 된 뒤에 특히 중요해졌는데 그는 레비나스와 한스 요나스 같은 추종자들과 연결된 다리를 불태웠다. 1933년 이후, 토트나우베르크[하이데어가 은둔했던 숲길 통나무집이 있던 지역]에 올 수 있는 사람은 아리아인뿐이었다. 하이데거의 유대인 제자들은 더 이상 초대되지 않았고 이미 그 나라를 빠져나간 상태였다. 도시에서 멀어진 하이데거는 대학 총장으로 있는 동안 억압하거나 해고했던 동료들과 거리에서 마주치는 고통으로부터도 멀어졌다.
5.2.3. 하이데거의 오두막은 타인들에게 저주의 상징이 되었다. 강제 노동 수용소의 생존자인 시인 파울 첼란은 1967년 하이데거의 오두막을 방문한 뒤, <토트나우베르크>라는 시를 썼다. 그 시는 그 사상가를 찬양하면서도 그가 역사에서 도피하지 못하게 했다.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 <토테나우베르크>라는 제목의 희극을 썼는데 토트나우베르크라는 마을의 이름이 '죽음의 산Todesber'과 비슷하게 들리도록 단어를 변조한 것이다.
5.2.4. 하이데거의 도시로부터의 도피에는 뭔가 당혹스러운 점이 있다. 벤야민은 하이데거가 살았던 그 지루한 장소를 생각하면 그가 도시를 이질적인 것(유대적인 것)으로, 적대적 현대성을 구현하는 트라우마의 장소로 상상하는 것이 괴상하게 보인다고 했다. 그 부조화가 벤야민이 하이데거의 철학을 '초현실주의'의 한 형태로 보고 무시한 한 가지 이유였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곳에 칸트가 말한 인간성의 비틀린 재목이 살았기 때문이다.
5.2.5. 하이데거의 오두막에 관해. 하이데거의 오두막의 철학적 관념은 그의 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짧은 에세이 <짓기 거주하기 사유하기Bauen Wohnen Denken>에 표현되어 있다. 이는 세 개념이 하나의 경험을 형성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간은 자연 속에, 큰 술수 없이 스스로 만든 장소에, 사유에 바쳐진 집에 자리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5.2.6. 장소와 정치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 그것은 배제와 단순화라는 공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장소를 만드는 자인 도시계획가들은 그 공식에 공감한다. 배제는 유대인이나 다른 타자들을 피하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장소의 외관과 건설을 단순화해서 그 장소가 한 종류의 사람들에게만 적합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포함한다. 꼭 필요한 것만 있는 환경, 즉 보다 단순하고 명료하고 간명한 형태일수록 누가 그곳에 소속되고 누구는 그렇지 않은지가 더 잘 규정된다. 그 극단에 오두막이 있다. 오직 아리아인들만 있는.
5.2.7. 하이데거식 도피에서 타자가 누구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예전에는 유대인이었고, 지금은 무슬림이다. 도피는 타자의 존재가 자신을(프라이부르크 같은 고요한 장소에서도) 뿌리내리지 못하게 방해한다는 느낌 때문에 일어난다. 도피하는 인물은 부조화를 제거하여 자아를 구축하려고 한다. 요컨대 그 오두막은 인간의 배제와 형태의 단순화를 결합시킨다. 이 점에서 그곳은 더 광범위한 위험을 나타낸다. 호모 파베르는 명료하고 직접적이고 단순한 형태를 만들면서 사회적 배제를 실천한다는, 게다가 도시에서 자연으로의 도피는 타인에 대한 거부의 위장일 수 있다. 하이데거는 도시에서 달아나 숲속의 단순한 삶을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행동에 따른 책임을 회피하고자 했다. 그의 가장 큰 윤리적 잘못은 회피성이다.
5.2.8. 빌인동시에 시테가 된 베네치아 게토 안의 유대인들은, 스스로 적응력 강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익혔다. 부분적으로 이것은 외부 세계를 향해 '유대인'으로서 발언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베네치아 게토에서, 또 그 직후에 로마 게토에서도 유대인들은 형제 조직을 결성해서 시너고그에서 모이고는 했지만, 이런 조직들은 순수하게 세속적인 문제만 다룰 뿐 분위기가 심각해질 수 있는 교리적 차이의 문제는 피했다.
5.2.9. 억압받는 자들이 연대하여 뭉친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일 뿐 실제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차라리 연대는 지배층에게 '우리는 통합했기 때문에 강하다'라는 것을 전달하는 데 필요한 허구다. 피억압자들은 이 허구를 사실로 믿고 행동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억압자들이 그들의 분열을 이용하여 분할 통치할 것이기 때문이다.
5.2.10. 억압자들의 입장에서 오두막과 게토는 배제의 두 가지 방식을 나타낸다. 오두막은 꼭 필요한 존재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들어설 여지를 주지 않는다. 낯선 자가 존재할 여유가 없는 사회적 에토스와 병행하는 건설 형태에 복잡성은 없다. 단순화하기 위해 배제한다. 게토는 타자를 사회적으로 추방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그들을 활용하기 위해 설계된 복잡한 공간으로, 배제하기 위해 수용한다.
3. 비교하기- 가까이에 있는 계급
5.3.1. 계급 차이는 오늘날 인종이나 종교, 민족 간 문화적 차이와 같은 방식으로 체험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계급의 사람들이 가까이에서 한데 섞일 때, 부당한 비교가 이루어진다. 즉 불평등은 개인적인 상처를 준다. 오늘날 부당한 비교는 도시를 무대로 행해진다.
5.3.2. 계급은 개인화되었고, 계급 차이는 노동하는 자아에 대한 새로운 발상인 실력주의로 인해서 부당한 개인적 비교의 근원이 된다. 세습된 특권과 대조되는 실력주의는, 당신의 사회적 지위는 당신이 노동에서 자신을 어떻게 입증했는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며, 특히(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이 얼마나 실력이 있는가가 삶의 무한 경쟁에서 당신이 얻을 모든 것을 정당화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실력주의는 평등한 출발점에 대한 믿음과 불공평한 결과의 합법화를 합친 것이다.
5.3.3. 이러한 (실력주의적인) 게급의 개인화는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만든다'는 오래된 사상의 한 가지 버전으로, 너의 입지는 세습이나 전통적인 한계에서 해방된 장소에서 너 스스로 만든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지난 세기에 도시 계급 구조가 놀랄 만큼 바뀌면서 도시의 노동계급은 더 다양해졌다. 도시는 서로 얽혀 있는 계급들을 공간적으로 분리하는 원심력으로 작용했다. 현대적 형태의 게토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부르는 것은 유행을 좇는 예술가들이 다체로운 동네를 식민지화하고, 그들을 뒤따라 첨단 미디어들이 들어오고, 아직도 여드름 투성이인 디지털업계의 억만장자들이 토찬민과 초기 개척자 모두를 돈으로 제압하는 것 이상의 문제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도시 인구의 70~5센트가 상위 25퍼센트에 의해 도시에서 쫓겨나는 과정이다. 임대료 상승에 의해서든, 가난한 집주인들이 집을 팔라는 유혹에 넘어가서든. 일부 원주민들이 태어난 곳에 남아 있기로 결정심하고 그간 축적된 자산에만 의지하면서 완강하게 버티는 노력은 주목할 만하다. 강요나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도심에서 사라졌거나 값싼 거리로 떠난 사람들은 이미 충분히 많다. 젠트리피케이션의 결과는, 계급 차이와 물리적 분리의 방식을 강화시킨다. 오늘날 도시에서의 계급 경험은, 점점 더 멀어지고 분리되는 신체 경험과 바로 곁에서 겪는 개인적 불평등의 경험이 결합된 것이다. 도시계획가들은 휴대용 기기를 통한 정보과학의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거리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당신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고 관련되어 있다는 의미다. 빌이 점점 더 계급적인 게토들로 구성되어가고 있지만, 시테 내에서 계급은 일종의 거리의 죽음으로 체험될 것이다.
4. 섞기- 정중함의 가면
5.4.1. 내가 런던에서 사는 곳은 제인 제이콥스가 찬양한 혼성 동네라는 규정을 만족시키는 아이콘 같은 장소로 보일 수도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의 꿈을 난파시키는 정점을 찍는 것은 래더라인의 다른 쪽 끝에 있는 공용 주택 프로젝트인 본 주택단지Bourne Estate이다. 이 프로젝트에 속한 오래된 건물들은 낡았지만, 그 단지는 영국 토박이 노동계급, 중년의 인도가족, 또는 이슬람 세계에서 건너온 젊은층 등 잡다한 거주자들의 손에 신중하게 관리되고 있다.
5.4.2. 내가 살고 있는 지역사회는 매일의 일상을 망치는 무슨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한, 구성원의 다양성으로 인한 문제 없이 느릿느릿 나아간다. 내 이웃들은 그(로버트 퍼트남이 고안한 '좋은 울타리' 이론)와 다른 전략을 택했다. 상이한 그룹들 간의 접촉을 원활하게 만드는 가볍고 피상적인 예절을 활용한 것이다. 그런 예절이 민족 간 균열이 생긴 이후로 다소 과장된 형태를 띠게 되었다. 소소한 예절은 '피상성은 악덕이 아니다'라는 제인 제이콥스의 명제를 구현한다. 진심으로 알고 싶은 마음은 없으면서도 이웃이 어찌 지내는지를 묻는 것, 이런 소소한 예절은 개성 없고 일반적이라는 점에서 짐멜의 가면의 사촌이다. 균열된 상태를 복구하기 위해, 사회적 연결을 재구축하기 위해, 사람들은 서로에게 느끼는 진정한 감정을 숨긴다.
5.4.3. 이런 예절의 역사적 배경은 칸트의 '인간은 비틀어진 목재'라는 주장의 원인이라고 할 인간적 차이들을 뛰어넘을 수 있는 존재로서 거론한 코즈모폴리탄이다. 프랑스어 코스모폴리트cosmoplite는 원래 이 장소, 저 장소, 이 문화, 저 문화를 쉽게 옮겨다닐 수 있는 능력을 얻은 외교관들에게 적용되는 단어였다. 이런 전문적인 영역 밖에서 코즈모폴리터니즘은 계급 차이를 나타냈다. 농민이나 육체노동자는 시야가 좁은 지역에 국한된 모습인 반면, 도시 상류계급 신사 숙녀는 정신 여행을 더 잘하는 것처럼 보였다.
5.4.4. 낯선 이들과 편하게 지내는 능력은 옛날부터 도시 생활과 관련이 있었다. 구 프랑스어에서 'urbain'이라는 단어는 도시 생활 및 그것에서 확장된 의미인 다른 도시에서 온 방문객들을 대한느 예절을 포함했다. 현대의 혼성 지역사회에서 이것은 정중함civility이라는 가면 속에 있는 피상성, 기만, 비개인성을 모두 의미한다. 이 세 가지는 하이데거식의 타자로부터의 은둔, 타자를 배제하는 울타리 속의 고립, 노골적인 개인적 비교와 타자의 해로운 힘에 대한 끔직한 환상의 대안이다. 그러니 나는 이웃들이 정중함의 가면을 쓰는 것이 옳다고 본다. 하지만 물론 피상성과 기만과 비개인성을 결합시킨 처신은 어떤 윤리적 의미에서도 올바를 수가 없다. 정줌함의 가면만 쓰고 있는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제3부 도시의 개방
7장 유능한 도시인
1. 스트리트 스마트- 한 장소를 건드리고, 듣고, 냄새 맡기
7.1.1. 콜롬비아 메데인으로의 여행 준비. 산토도밍고 구역은 새로운 시민 건축의 본거지가 되었다. 2007년에 건축가 히앙 카를로 마산티가 세운, 우아한 모더니즘 스타일의 검은 상자형 건물 셋으로 이루어진 도서관-주민회관이 있다.
7.1.2. 산토도밍고의 아이들은 끊임없이 사실 확인을 하고 생존 전술을 새롭게 짜야 한다. 메데인의 슬럼은 여러 다른 지역에서 유입되는 인구가 많아서 빠른 속도로 변하기 때문이다. 대규모 마약 전쟁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소소한 절도와 깡패 행각이 벌어지는 그곳의 아이들은, 다양한 변수와 심한 악천후 속에서 항해를 배우는 선원들과 처지가 비슷하다.
7.1.3. 스트리트 스마트는 체화한 지식이라는 개념 구조를 만든다. 이는 도시에서 특정한 형태를 갖게 되는 아주 일반적인 개념이다. 심리학자 제임스와 철학자 베르그손에게는 암묵적인 행동이 명시적인 행동보다 낯선 개념이 아니다. 사람들이 신체적 감각 안에 머무르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제임스의 '의식의 흐름'이라는 개념을 개발했다. '의식의 흐름'은 맥락에 대한 인지를 함의한다. 특정한 생각, 감정, 느낌을 가질 때 당신이 어디 있는지, 누구와 함께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맥락에 해당한다. 이러한 맥락에 대한 인지가 생각을 체화한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물리적 상황을 감지하는 문제이고, 그 '생각'은 감각적 연상들로 가득 차게 된다. 이런 상황이 변해야만 의식이 흐르기 시작한다.
7.1.4. 심리학자 제임스와 철학자 베르그손은 각자 방식은 달랐지만 스트리트 스마트의 철학자다. 무엇이 우리의 의식에 충격을 주는가? 암묵적인 지식이 현실을 감당하기에 불충분할 때, 체화한 지식의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된다.
7.1.5. '암묵적-명시적-암묵적'이라는 절차는, 걷는 동작이 의식적인 방식에서 본능적인 방식으로 확장되는 것과 동일하다. 기술자들이 망치를 좀 다르게 잡아보는 것처럼, 스트리트 스마트들도 새로운 방식을 숙고해서 그것을 암묵적 영역 속에 각인시킨다. 스트리트 스마트의 세 번째 단계.
7.1.6. 체화한 지식에는 두 번째 측면이 있다. 신체는 자신이 들게 될 것이 얼음처럼 차가울지 끓을 정도로 뜨거운지를 알기 전에 먼저 그것을 쥘 준비를 한다. 신체가 감각 자료를 얻기 전에 앞질러 예건하고 행동하는 움직임의 기술 명칭이 '포착'이다. 포착에는 예견에 따른 행동이 포함된다. 측면이 아니라 정면을 바라볼 때, 도시 공간의 규모와 면적에 대한 포착이 가능해진다.
7.1.7. 기어츠는 지역적 지식/국지적 지식local knowledge이라는 특정한 발상을 설정했다. 사람들이 당면한 이슈를 다루는 방식은 점차 그들이 일반적으로 '삶'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사람들이 지향하는 의례도 허공에서 건져지는 것이 아니라 장소별로 특정한 방식으로 시작된다. 현대에서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평가해야 할 것은 장소다. 그러나 지역의 스트리트 스마트에 대한 이런 관점(기어츠나 마르케스의 환상적 리얼리즘의 소설)은 위대한 인류학이나 예술을 만들었을지는 몰라도, 메데인을 돌아다니는 어린 소년들에게는 그 가치를 증명하지 못했다.
7.1.8. 산토도밍고에서 가장 중요한 건설 프로젝트는 가파른 산비탈에 위치한 바리오와 직장, 교회, 운동장, 상점이 있는 아래쪽 시내를 왕복하는 효율적인 케이블카 건설이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스마트폰도 그들과 바깥 세계를 연결해준다.
2. 걷기의 지식
7.2.1. 걷기는 오래전부터 구글 지도의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가는 행동 이상의 것을 의미했다. (보들레르가 만보를 하면서 본 것들) 그것들은 그의 내면에 있는 어떤 것을 반영하고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게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바로 도시의 복잡성이다. 만보객이라는 존재는 이 곤혹스러움에서 태어났다. 어떻게든 자신을 알기 위해 도시를 걷는 것이다. 이런 인물들은 시카고학파 연구자들에 의해 구체화된 민족지학자의 모습과 상반된다. 민족지학자는 타인을 연구한다. 만보객은 타인들 속에서 자아를 탐색한다.
3. 대화적 실천-낯선 사람들과 이야기하기
7.3.1. '대화체란 그가 1930년대 만든 용어다. 언어가 "현재와 과거 사이의, 과거의 상이한 시대들 사이의, 현재의 상이한 사회적-이데올로기적 그룹들 사이의, 성향들과 학파들과 서클들 사이의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모순으로" 가득 찬 것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모든 목소리는 다른 목소리들에 의해 틀이 구축되고 그 목소리들을 인지한다. 바흐친이 '언어적 다양성'이라고 부른 상황. 인간이란 다른 인간의 복사본이 아니기 때문에 발언은 오해, 모호성, 의도치 않았던 제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욕구들로 가득 차 있다. 언어는 비틀어져 있다(칸트). 특히 동일한 지역 여건과 동일한 지역 지식을 공유하지 않는 낯선 이들 사이에서 그렇다.
7.3.2. 대화체는 1930년대 스탈린 치하의 모스크바에서 글을 쓰던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깊은 단어였다. 술집에서의 대화체는 변증법, 적어도 사상경찰에 의해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승인받은 변증법적 추론에 대립한다는 점에서 사유의 독재에 대한 도전이었다. 사회에서 언어의 공식 개념은 정립과 반정립 사이의 놀이를 통해 사유들과 감정들을 통합하는 종합에 도달하는 것이다. 반면에 변위, 파열, 결론 나지 않음inconclusiveness의 대화 기술은 다른 종류의 발언 공동체를 세운다. 특별히 도시 거주자에게 유용한 대화 도구로 다음의 네 가지가 있다.
7.3.3. 첫째, 말해지지 않은 말 듣기.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 말해지지 않은 말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듣는 기술의 역할이다. 시카고학파는 '말해지지 않은 말을 듣기'를 원했지만 대표 표본representative same이라는 사회학적 신경증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신경증은 어떤 종류의 인간에게 진짜 목소리, 또는 저녕적인 본보기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 증세다.
시카고학파 이후 불분명하거나 모순적인 상태로 남아 있는 의미를 집중 조명하는 기술이 진화했고, 인지 부조화에 대한 주목이 현대 민족지학자들의 교육 과정에서 중요해졌다. 주체가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을, 그가 어리석거나 무식하다는 신호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바흐친이 본 대로, 비틀어지고 모순된 것은 언어 행위의 맥락이다. 결론적으로, 침묵의 실천에는 자기 수양적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적 측면도 있다. 언어적 수동성은 타인을 한 유형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대하는 존중을 보여준다.
7.3.4. 대화체의 두 번째 측면은 듣기보다는 말하기와 관련이 있다. 소통을 열기 위해서 가정법의 목소리를 쓰는 것이다. '나는 X를 믿는다', 'X가 옳고 Y는 틀렸다'라는 목소리에 따라나오는 응답은 동의나 부동의뿐. 반면 '나라면'이나 '아마'라는 가정법의 목소리는 훨씬 더 넓은 응답의 범위를 허용한다. 가정법의 목소리가 평서문의 목소리보다 더 사교적인 방식이라는 것이 대화체적 발상이다.
7.3.5. 비인칭의 목소리는 대화적이다. 그 주체가 자신으로부터 풀려나서 관찰하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를 분석할 때도 사람들은 1인칭 목소리와 비인칭 목소리 둘 다 사용한다. 'I'는 자신이 어느 장소에 속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쓰는 대명사이고, 'IT'은 장소 그 자체의 장단점을 평가할 때는 대명사이다.
7.3.6. 미스터 수디르와 나눈 것과 같은 비공식적 대화가, 대화적 교환의 네 번째 종류. 비공식적 잡담은 목적 없는 방랑이 될 수 있다. 대화의 흐름이 취할 수 있는 어떤 형태가 그것을 대화적 교환으로 전환시킨다. 비공식적 대화를 계속 이어가려면 어떤 종류의 비책임성이 필요하다. 변증법적 토론은 어떤 주제를 공격하지만, 대화적 잡담에서는 중간에 얼핏 사소해 보이는 발언들이 튀어나와 이야기 방향이 바뀌고 비틀어진다. 대화의 물꼬를 다시 터주는 것은 이런 사소한 발언이다.
7.3.7. 어떤 사람을 두고서 대화를 잘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비공식성의 파도를 넘나드는 능력을 가졌다는 뜻이다. 토론자나 변증법자 가운데 비공식적 대화에 능한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열린 시스템 분석가들은 비공식적 대화의 흐름에 관해, 그 전환점을 명료하게 설명한 공이 있다. 여기서 전환점은 비선형적 경로의존성Non-linear path dependency이다. 각 단계마다 뭔가가 발생하여 소목장이 원래의 계획을 바꾸는 것, 이것이 비선형적 경로의존성이다. 열린 시스템에서 운명이란 없다. 인생이 반드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가정하는 운명적 사고방식과는 달리, 열린 시스템에서는 과정이 끝을 형성한다.
7.3.8. 열린 시스템 이론에서 이것은 좋은 일이다. 경로의존성이 누적될수록 열린 시트메은 더욱 역동적이고 흥미로운지다. 바흐친은 사회적 소통 안에 있는 이런 에너지를 설명하고자 했다. 그는 이러한 비선형적 경험이 서로 다른 '사회적 방언, 특징적 집단 행동, 전문적 용어, 총칭적 언어. 세대 및 연령 언어, 편향적 언어, 당국과 다양한 서클과 지나치는 유행의 언어' 간의 교차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를 '언어적 다양성'이라고 지칭했고, 우리는 이를 '시테'라고 부를 것이다.
7.3.9. 비선형적 소설은 잘 구성된 소설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다. 소설에서든 실제 삶에서든 사람들의 관심을 계속 붙들어두고 흥미를 유지시키기 위한 기술 하나는, 외관상 목적이 없는 듯 보이는 과정과 사소한 이야기 속에 예상을 뛰어넘는 씨앗을 심어두는 것으로 이것이 비공식적 소통의 핵심이다.
7.3.10. 대화의 네 가지 방법. 말해진 것보다 의미하는 바에 주의하며 듣기, 타인에게 맞서기보다 협동하기 위해 가정법 쓰기, 자신의 자아와는 별개인 현실을 놓치지 않기, 비공식적 대화의 경로를 따라가기(경로-의존성). 내가 여기서 제시한 대화의 기술들은,세련됨과 기술이 적나라한 자만을 대체하는 복잡한 현실에 적응하는 방법들이다. 이런 실용적 가치를 가진 대화체는 또한 그 자체로 타인을 존중하고, 경쟁적이기보다는 협동적이며, 내향적이기보다는 외향적인 소통의 윤리적 실천이다.
4. 파열 관리-이민자, 모범적인 도시 거주자
7.4.1. 내가 아는 한 가스통 바슐라르는 동시대인인 하이데거처럼 실제로 오두막을 짓지는 않았지만, 경이로운 산문으로 오두막을 상상했다. <공간의 시학>은 오두막에서 평화롭게 거주하는 삶에 대한 찬양으로 보인다. 바슐라르가 포용한 정신분석은 우리가 도시에서도 원초적 온기, 친밀함, 내부성을 가진 오두막을 추구할 것이라고 말한다. 성인들은 밖에서 복잡하고 알려지지 않은 것들과 맞닥뜨리면서 오두막을 상실하고, 도시를 얻는다. 부재와 현존은 불가분의 관계가 된다. 바슐라르가 강조하는 것은 현재에 참여하는 것, 인식론적 단절을 처리하는 것,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변위를 일으키는 것이다.
7.4.2. 바슐라르의 입장에서는 변위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면 그로부터 사회적 결과가 발생한다. 사람들이 하이데거처럼 자신과 다른 타인들에 대해 너무 취약해져서 그들로부터 달아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과 함께 살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고향이 주는 안락을 포기함으로써 심리적으로 또 윤리적으로 발전한다. 자아는 강해진다.
7.4.3. 영어로 우리는 경험한다having an experience, 혹은 경험자가 된다becoming exprienced고 말한다. 독일어는 이 두 의미를 두 개의 단어 Erlebnis와 Erfahrung으로 분리한다. 전자는 모험적인 단어이며, 현존과 생생삼히 이 단어의 성격을 표시한다. 그것은 순진하게 방랑하는 만보객의 영역이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의 일상적 수행으로 보인다. 반면 후자는 한 인간이 충분한 분량의 인상을 축적한 다음 그것을 걸러내는 과정을 포함한다. 경험자가 된다becoming exprienced는 흥분의 남아 있는 잔재들을 조직하고 정리하여 장기적인 것으로, 안정적인 가치를 지닌 것으로 만드는 문제이다. 이것은 더 숙련된 만보객의 영역, 낯선 이들을 대화체로 끌어들이는 능력을 가진, 변위의 달콤씁쓸한 교훈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역이다. 바슐라르가 말한 '자아의 힘'에 가깝다.
7.4.4. 이민자도 이렇게 할 수 있다. 장소가 바뀌면 새로운 Erlebnis가 강요된다. 살아남기 위해 그는 변위 관리에 익숙해져야 한다. 즉 변위의 충격을 부정하지미도 말고 그 잠재력, 파괴력에 굴복하지도 말아야 한다. 이 균형이 이민자의 Erfahrung이다. 이런 이민자의 지식이 안전함을 제공하는 친숙한 지역을 떠나온 모든 도시이인에게 필요하다. 새로운 경험에 대한 욕구의 재촉을 받은 사람이든, 새로운 경험이 강제된 사람이든, 새로운 경험이 강제된 사람이든, 그들 역시 테주 콜처럼 과거를, 더 단순했던 그 시간을 마음 속에서 지워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8. 다섯 가지 열린 형태
1. 중심은 동시적이다- 두 개의 중심 공간과 실패한 설계
8.1.1. 도시의 중심에서의 활동은 1) 여러 가지 일이 동시에 발생하는 형태 2)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발생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동시적 공간(가령 네루 플레이스)과 순차적 공간(축구장/극장). 이 두 가지 형태는 고대 아테네에서 나타났다. 아고라와 프닉스. 전자는 네루 플레이스처럼 건물로 둘러싸인 열린 공간, 후자는 사발 형태의 원형극장으로 춤, 연극 공연, 도시의 정치적 회의가 개최. 전자는 동시적으로 전개, 후자는 순차적으로 전개.
8.1.2 아고라는 빈부를 막론하고 모든 시민에게 열려 있었지만,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대부분 그 오래된 도시의 경제를 떠받치는 엄청난 수의 노예나 외국인은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고대 전체에 걸쳐 시민은 아테네 거주 인구의 15~20%를 넘은 적이 없었다. 이 자유민들은 동시적 공간인 아고라를 통해서 아테네 민주주의의 진화에 기여했다. 특정 종류의 신체 행동이 아고라를 지배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아고라의 군중 사이에서 막대기처럼 곧게 걷는 것이 중요했다. 그들에게 꼿꼿한 신체란 개인적인 자부심과 존재감을, 미국 슬랭으로 '꼿꼿하게 선다'라는 뜻을 함축했다.
8.1.3. 5세기에 프닉스가 연극뿐만 아니라 정치적 모임도 수용하게 되었을 때 아테네의 6천 명 시민은 베마(연단이 있는 공간)bema에서 울려퍼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연극이나 토론의 줄거리를 따라가고는 했다. 앉는 것은 수동적인 지위, 사태를 수용하는 청중들의 자세로 여겨졌다. 서는 것과 앉는 것에서 그리스인들은 배우와 관객의 구분을 이끌어냈고, 이것이 예술뿐만 아니라 삶의 기본 범주가 되었다.
8.1.4. 아고라와 프닉스라는 이 두 가지 공간은 상반된 위험을 구현하고 있었다. 플라톤은 프닉스에서 벌어지는, 정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수사학의 위력을 두려워했는데, 수동적으로 앉아 있는 군중은 무자비하게 흘러나오는 언어에 의해 무력화되고 굴욕당하는 제물이 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아고라는 수사학적 방식보다는 인지적 방식으로 마음을 무력화시켰다. 불연속적인 인상들이 축적되는 곳이기 때문에. 순차적 공간에는 감정적 지배의 위험, 동시적 공간에는 지적 파편화의 위험이 있기에 플라톤은 김나지움의 차분한 공간에서 심신 양면에 집중하라고 조언했다.
8.1.5. 바흐친이 '언어적 다양성'이라고 설명한, 아고라의 뒤섞인 목소리들은 그저 떠들어대는 목소리일 뿐이지만, 동시적 형태라는 점에서 매력적. 메데인에서 본 어린 소녀들 같은 스트리트 스마트들은 곧 '아고라 스마트'들이다. 반면 연사의 수사학에 의해 흥분되는 군중(혁명적 폭동, 나치 전당대회 참석자 등)은 생각하지 않는 군중이다. 미스터 수디르는 언어적 다양성이 너무도 심한 네루 플레이스에서 자신만의 아고라 스마트를 개발하게 된 자이다. 그럼에도 그 어떤 동시적 공간도 '안전한' 축제의 장소라기보다는 이런 식으로 위태위태한 장소다. 아고라의 결점을 처리하면서도 동시적 에너지를 조금이라도 포착할 수 있는 방법은?
8.1.6. 2012년 건축가 헨리 콥은 조경 설계자, 토목기사, 조명 전문가로 구성된 팀과 함께 워싱턴 D.C. 내셔널 몰의 남쪽 하단 부분을 재설계하겠다고 신청했다. 우리가 다룬 문제는 세 가지였다. 1) 하나의 동시적 공간 안에 얼마나 많은 상이한 활동을 섞어야 할까? 19세기 초반, 윌리엄 해밀턴 경은 사람들이 코웃음 치고, 듣고, 보든 행위를 모두 동시에 한다는 사실로부터 멀티태스킹이라는 개념을 도출. 한 손에 구슬 여러 개를 쥐고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취급. 해밀턴은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구슬의 수는 최대 네 개임을 보여주었다.
8.1.7. 동시에 일어나는 일의 수에 관한 제번스의 법칙은 두 번째 설계 규칙으로 이어진다. 진정으로 다른 일들이 동시에 벌어져야 한다는 것.
8.1.8. 이런 조치들은 동시성 설계의 세 번째 측면을 보여준다. 섞임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섞임을 위한 초대장을 발부하는 것. 진정으로 동시적인 공간이 되려면 다른 곳에서는 쉽게 얻을 수 없는 무언가를 사람들에게 제공해야 한다. 나는 몰에 노인을 위한 사회보장 센터를 설치하고자 했다. 우리의 계획안은 대중들에게는 인기를 얻었지만, 의뢰자인 미국 의회의 한 분과에게 승인을 받지는 못했다. 사실은 초대를 설계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 계획에는 물리적인 유인 요소가 너무 많았다. 우리가 제안한 몰의 형태는, 도시인들은 과도한 자극 앞에서는 뒤로 물러선다는 짐멜의 믿음을 확인시켜주는 예였다. 동시성은 활기차지만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하는 공간적인 체험을 야기하는데 이것이 바로 동시성 설계가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2. 구두점 찍힌 곳- 기념비적이고 세속적인 표시들
8.2.1. 도시 설계의 궁극 목표는 특정 성격을 지닌 장소를 만드는 것이다. 가령 크고 과감한 기념물은 감탄부호, 벽은 마침표, 교차로는 흐름을 잠시 끊는 세미콜론 역할을 한다.
8.2.2. 감탄부호에 대해. 식스토 5세는 1585년에 교황으로 즉위하자자마 로마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그가 로마를 개조할 명분은 종교적인 데 있었는데 그 도시의 순례적 일곱 군데를 연결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로마의 중세적 직조를 관통하는 직선 도로들을 만들어, 순레자들이 오벨리스크의 뾰족한 끝이 표시하는 지점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했다. 로마의 도시인들은 기도하는 군중이 아니라 놀고 있는 군중과 섞이고, 여러 주거 지역과 시장을 가로지르면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오벨리스크가 영적 여정을 인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이 자기 위치를 알게 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9세기가 되자 기념물 중심의 도시계획은 감탄부호의 목적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도시의 주요 건물들이 바라보아야 하는 대상으로, 다른 연극적 스펙터클처럼 관람해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이것이 파리의 마들렌 성당 건축을 이끈 원칙이었다. 그곳 정면에 있는 거대 기둥들은 종교적 목적이 없는 감탄부호로, 순수 시각적 표시였다.
8.2.3. 도시계획은 감탄부호보다 더 세속적 대안을 제공하는데 그것은 바로 교차로, 즉 세미콜론의 물리적 상응물이다. 도시계획가 마누엘 데 솔라모랄레스의 견해에 따르면, 이런 도시의 세미콜론을 만들려면 교차하는 도로들의 크기가 현저하게 달라야 한다. 뉴욕의 애비뉴와 스트리가 바로 그런 교차로를 이루며, 모퉁이가 둘 사이의 대조를 표시한다. 솔라모랄레스를 포함한 '교차로론자'들은 모퉁이에 활동을 증가시켜 사람들을 그곳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스트리나 에비뉴에서 벌어지는 활동과 차별화하는 것이다. 그들은 모퉁이에 있는 큰 건물의 입구를 찾아내어, 보행자 통행량을 애비뉴를 따라 길게 늘이지 않고 그곳에 집중 배치한다. 그들은 큰 소매점들을 더 작은 거리에 두기를 꺼린다. 대신 옆길에는 소박한 소매점과 작은 레스토랑을 둔다. 그들은 스트리트를 애비뉴와 흔적 없이 융합시키는 것보다는 충돌을 계획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사무실 설계에는 교차로론과의 내적 유사성이 있다. 프랭크 더피가 선호하는 사무실 계획은, 사무실의 모퉁이와 교차점을 강조한다. 그는 하급 노동자들 및 그들의 작업을 공간의 아래쪽 영역에 보이지 않도록 치워버리기보다는 모퉁이에 배치하고자 했다. 어쨌든 교차로는 바슐라르의 의미에서 인식론적 단절이며, 공간 속으로 도입된 괴리다. 우리는 스트리트나 애비뉴의 한복판이나 사무실 복도보다는, 대체로 모퉁이에서 자세를 추스리고 자신이 어디 있는지를 파악하게 마련이다.
8.2.4. 교차로에서처럼 그것은 모퉁이를 돌아갈 때 작은 충돌을 수반할 수 있다. 그것은 교차로로론자들이 강조하고 싶은 대조다. 물리적 인용부호는 플라스틱 벤치를 설치하고, 가로수를 줄맞춰 심고, 땅 위에 돌을 배치함으로써 만들어질 수 있다. 그것은 자의적이고 문제적이고 가치를 만드는 형태를 표시한다.
3. 다공성
8.3.1. 스폰지는 물을 흡수할 수 있기 때문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으면서도 그 형태를 유지한다. 건물 역시 안팎으로 흐름이 열려 있으면서도 그 기능과 형태의 상태를 유지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것을 다공성 건물이라고 한다.
8.3.2. 인간의 지역사회에도 이런 생태학적 차이가 나타난다. 현대 도시를 지배하는 것은 폐쇄된 경계다. 도시 거주자들은 노동 구역, 상업 구역, 가정, 공공 영역 사이의 기능적 격리에 의해, 그리고 교통의 흐름에 의해 서로 분리된다.
8.3.3. 도시계획가들은 순수한 야외 공간, 순수한 허공이 다공적 존재로 인정된다고 상상만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대화를 스스로 주도해야 한다. 완전히 봉인된 것도 완전히 노출된 것도 아닌, 당공성과 저항 사이의 역동적 고나계는 놀리가 자신의 로마 지도에서 제시한 것이다.
8.3.4. 도시의 세포막은 다소 모순적이지지만, 돌로 만들어질 수 있다. 베버에게 벽은 경계, 그것을 넘어가면 정치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시민적인 것이 전혀 없는 도시국가의 바깥 한계였다. 벽 그 자체는 물리적 존재라기보다는 사범적 관념이었다.
8.3.5. 요컨대, 닫히 도시에서는 경계가 지배할 것이다. 열린 도시에는 접경지대가 더 많이 있을 것이다. 이런 접경지대는 다공성과 저항 사이의 역동적 긴장이 있는 세포막 같은 기능을 한다. 장소의 가장자리에 만들어지는 세포막은 단단한 벽에 구멍을 뚫고, 길거리의 기본 직조를 쭈그러뜨리고, 인지 가능하고 사교적인 음향을 만들어낸다.
4. 미완성-셸과 일반형
8.4.1. 도시계획은 빈민들의 미완성 형태 집 짓기에서 배울 것이 많다. 미스터 수디르 가족처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가 아니라, 설계에서부터 의도적으로 어떤 형태를 미완성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렇게 하면 어떤 이득이 있을까?
8.4.2. 칠레의 이키케가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다. 칠레의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가 미완성 형태의 집을 짓는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저품질의 거주지를 완공된 형태로 제공하기보다는 고품질의 집을 반쯤 짓고, 거주민이 직접 나머지를 완성하게 하자는 것이 그의 아이디어였다. 이키케의 미완성 형태 버전을 보면, 2층으로 된 건물의 절반까지 담이 세워져 있고 제대로 된 전기와 상하수도 시설이 제공된다. 이런 기반시설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공간의 공유벽이 아니라 그 집의 박공벽에 설치되어 있다. 이런 세심한 조처 덕분에 매우 융통성 있게 나머지 공간을 완성할 수 있다.
8.4.3. 셸은 이키케와 같은 프로젝트의 건설 유형이다. 셸은 빈민들의 필요에 대한 대답만이 아니라 다양한 겉모습을 띠고 나타났다. 원칙적으로, 오늘날은 셸 전성시대가 되어야 한다. 대량 생산되는 타설 콘크리트와 1자 철강빔 덕분에, 우리는 기둥이나 다른 구조물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거대한 바닥판을 가진 건물을 지을 수 있다. 셸은 처음에 주어진 특정한 배열에서 다른 가능성들을 시험해볼 수 있는 형태들을 만들어낸다. 또한 건물 내에 다공성을 만든다. 구조저긍로 고정된 벽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5. 다공성- 씨앗계획
8.5.1. 열린 도시의 단 한 가지 모델은 없다. 셀과 일반형, 접경지대와 표시물, 미완성 상태의 공간, 이 모두가 테마와 변주라는 음악적 모델을 따라 다양한 형태를 띤다. 스마트 시티의 하이테크 또한 효율성이라는 단일 표준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변화하는 복잡성을 조화롭게 조정한다면, 열려 있는 것이다. 복잡한 시테는 합성물이기보다는 혼합물에 가깝다. 따라서 미스터 수디르는 '하나'의 열린 도시를 계획할 수 있지만, 치파티를 파는 그의 이웃은 똑같은 공식 도구를 사용해서 전혀 다른 장소를 구성할 수 있다.
8.5.2. 이 합리적 제안은 열린 방식으로 규모를 키워가는 열쇠다. 길거리 시장의 일반적 형태를 도시 전역의 다양한 장소와 상황에서 반복하면, 다양한 종류의 길거리 시장이 발달한다. 메데인은 이런 계획의 놀라운 본보기이다. 도시계획가들은 이 도시의 빈민 구역 여러 곳에 도서관을 세우기로 하고, 비용의 최대한도와 건설의 최소 표준을 설정했다. 그러나 도서관의 형태에 대한 구상은 지역사회와 건축가들에게 맡겼다.
8.5.3. 나는 이 테크닉을 '씨앗 계획seed-planning'이라고 명명할 것이다. 오늘날 도시들은 경작되지 않는다. 대신에 마스터플랜에 따른다. 마스터플랜은 각각의 장소를 기능이 다른 장소들과 논리적으로 연결시키는 닫힌 시스템으로 도시를 분할한다. 즉 같은 종의 씨앗에서 발아한 여러 식물군들이 서로 물을 더 많이 얻으려고 경쟁하거나, 시간이 흐르면서 변형되거나, 다른 것들과의 접촉 과정에서 소멸되는 경작의 현실을 무시한다. 농장은 고정되어 있지 않은 역동적 생태계다.
8.5.4. 요약하면, 개방형 빌은 다섯 개의 형태로 표시되는데 그것들로 인해 시테는 복잡해질 수 있다. 공공 공간은 동시적 행동을 증진시킨다. 그것은 경계에 비해 접경지대를 우선시하며, 도시의 부분들 사이의 관계를 다공적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도시의 건물에서 일반형을 활용해서 테마와 변주 양식의 도시적 버전을 만든다. 마지막으로, 씨앗 계획을 통해 테마 그 자체-학교, 주택, 상점, 공원을 어디에 배치할지-는 도시 전역에서 독립적으로 발전할 수 있어서, 도시 전체의 복잡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제4부 도시를 위한 윤리
10장 시간의 그늘
1. 자연이 도시를 공격하다- 장기적, 단기적 위협
10.1.1. 기후변화는 단기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포르투나적 사건일 뿐만 아니라 불가피한 장기적 그늘도 드리운다. 단기적 영향과 장기적 영향 모두 도시 건설 방식에 대한 재고를 요구한다. 가령 즉각 알아볼 수 있는 장기적 그늘은 오염이다. 최악의 살인자는 초미세먼지다.
10.1.2. 물의 미학은 도시 내 가치가 불평등해지는 원인을 만들어내어 실질적으로 그로 인한 간접적 영향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뭄바이의 새로운 수변 프로젝트는 작은 점포들과 노숙자들을 수변 공간에서 추방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실용적이며 풍경을 제공해주는 물이 파괴적인 요소가 된 것이다. 뉴욕이나 리오, 뭄바이처럼 해변에 지어진 도시들은 간헐적인 홍수 위험을 감당해야 한다. 기후변화는 홍수와 가뭄 모두를 악화시킨다.
10.1.3. 지하의 대수층 고갈로 인한 물 부족은 기후변화의 장기적 위협이다. 한편 불규칙적인 폭풍우와 지표수 유출로 인한 물 과잉은 단기적인 위협이다. 도시 건설이 이 파괴적인 물의 힘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10.1.4. 일반적으로 기후변화를 다루는 전략은 두 가지다. 완화와 적응. 가령 폭풍 해일을 막기 위한 해빈단구berm 건설은 첫 번째 완화 전략에 속한다. 반면 끊임없이 스스로를 완충지대로 개조하면서 범람의 속도를 늦추는 습지의 보호는, 두 번째인 적응 전략에 해당한다.
10.1.5. 태곳적부터 산은 그 야성 때문에 인간이 살 수 없는 곳, 길들임의 위력을 초월하는 곳으로 여겨졌다. 문명이 번성할 수 있는 곳은 계곡, 혹은 바다에 가까운 평지였다.
10.1.6. 낭만주의 작품에서 어두운 숭고함을 가진 존재로 묘사되던 자연이 계속 진화해서, 이제 현실에서 해로운 물로 나타났다. 그것은 호모 파베르가 초래한 자연의 반격이라고 생태학자들은 믿고 있다.
10.1.7. 기후 위기를 다루는 데 있어 햄릿의 질문을 변형해서 '지을 것인가 짓지 않을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답은 지어야 한다. 다만 다르게 지어야 한다. 적응의 우선성을 인정하는 것이 도시에서의 윤리적 건설 방식이다. 완화와 적응은 모든 건설의 기본 양식이다. 불규칙한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이 두 가지 방식은 빌을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작업을 자신의 거울로 삼는다.
2. 파열과 결착- '정상적'인 도시 시간
10.2.1. 적응과 결착이라는 느린 성장의 영역은 우리를 감상적으로 끌어당기지만, 현대의 건설 환경에서 파열은 불가피하다. 현대의 건물들이 이전 시기의 건물들보다 수명이 짧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에 대처할 때 적응과 완화 전략 모두를 구사해야 하듯, 빌을 만드는 방식도 시간이 흐르면서 진행되는 결착과 설계에 의한 파열을 동시에 고려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10.2.2. 파열과 결착 간의 균형을 성찰하기 좋은 장소는 배터리파크 시티이다. 맨하튼 남단에 새로 조성된 지역, 허리케인 샌디의 직격타를 맞은 곳이다. 1980, 90년대에 동쪽 윌스트리트의 오피스 타우노다 좀 더 혼성적인 지역에 만들기 위해 매립지에 건설. 책임 설계자 스탠튼 에크스텃은 "거의 모든 건물들은 배경이 될 수밖에 없지만 그중 일부는 스타가 될 수 있다."라는 신조를 표현했다. 조경 건축가 폴 프리드버그가 주도한 배터리파크 시티의 조경은 많은 뉴요커들이 바라던 뉴욕을 재현했다. 첫째, 작게 생각하기. 둘째, 기존의 것을 활용하기. 셋째, 통합하기. 넷째, 거리를 활용하여 장소 만들기. 다섯째, 디자인 가이드라인 확립하기.
10.2.3. 배터리파크 시티에서 결착은 일반형 건설의 특이한 종류이다. 계획가들은 테마왑 녀주 방식 개발의 결과를 그 새로운 장소에 대규모로 적용했다.
3. 수선-품질 테스트
10.3.1. 복원력과 지속가능성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도시계획을 지배하는 클리셰다. 일반적으로 열린 도시는 닫힌 도시보다 수선하기가 더 쉽다. 그것은 더 느슨하게 작동하며, 권력관계가 지시적이 아니라 상호적이기에, 무언가가 잘못되거나 쓸모를 다해도 적응과 재정비가 가능하다. 현실에서는열린 도시를 어떻게 수선하고, 어떻게 회복력 있게 만들 수 있을까?
10.3.2. 도시계획가는 수선에 관해 장인에게서 특별히 배워야 할 내용이 있는데 부서진 꽃병을 수리할 때 장인이 세울 수 있는 전략은 세 가지다. 복원, 교정, 재구성. 도시가 기후변화로 공격을 받거나 내부가 파열될 때 바로 이 세 가지 전략을 쓸 수 있는 것이다.
결론: 여럿 중의 하나
1. 칸트슈트라세가 짐멜이 묘사한 도시적 여건을 대표한다. 사람들과 그들의 활동이 모두 잡다하기에 자극이 강한 그곳은, 서로에게 따뜻한 반응을 보이는 지역사회는 아니다. 칸트슈트라세에서 사람들은 짐멜의 가면을 쓰고 서로 개입하지 않으며, 감정적으로 차단된 채 살아간다. 이런 설명은 그 거리에 이름을 준 칸트에게는 너무 쉬워 보일 수도 있다. 그에게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낯선 채로 살아가는 지역이, 코즈모폴리턴 방식으로 보다 개방된 곳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2. 칸트는 1784년 에세이에서 코즈모폴리탄이라면 어떤 장소나 민족과 깊이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고 단언했다. 그는 이러한 형태를 확장해서 '우주 시민'의 대표로, 지역적 관습과 전통을 초월하는 인류의 상징으로 삼았다. 칸트는 이를 기본적인 인간적 긴장에 대한 반응로 여긴다. "인간은 타인들과 연합하고자 하는 의향이 있다. [...] 그와 동시에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놓으려는 강한 성향도 있다." <비사회적 사회성>은 바로 이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고 살아남으려면, 상호 거리를 설정하고 사람들을 냉정하고 비개인적으로 대해야 한다. 칸트는 "인간은 [...] 자신의 의지를 껶고 보편타당한 의지에 따르도록 강제하는 주인을 필요로 한다."고 말함으로써 사람들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끌어내어 개인적 기준이 아니라 보편적 기준에 따르게 하는 일련의 원리를 코즈모폴리탄이라는 개념에서 강조한다.
3. 칸트는 도시에서 상연되고 있는 커다란 드라마의 조건을 설정한다. 그가 생각하는 개입하지 않는[=무관심한] 코즈모폴리턴의 이미지는 현재 도시를 변형시키고 있는 지구적 시민 및 지구화 세력을 설명해줄 수 있다. 전 지구적 투기 자본과 가난한 이민자들.
4. 짐멜은 <대도시와 정신적 삶>의 자매편인 <이방인>에서 황금률에 반대해서, 이방인들은 기존의 지역사회와 그 생활 방식을 비춰주는 거울 역할을 한다고 했다. 시테를 위한 칸트식 원칙은, 시테가 동일시에 지배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동일한 맥락에서 '차이에 무관심'해져야 한다. 인류학이 뭐라고 하든, 그런 다음에야 같은 장소에 살고 있는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다.
5.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각자의 특별하고 사적인 상황에서 차단되어 자유롭고 평등하게 논의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장소로서의 공적 영역을 상상했다. 그녀가 말하는 공적 영역은 칸트의 그것과는 달리 장소에 의존한다. 그녀는 훌륭한 열린 시스템 이론가가 되었을 것인데 밀접한 도심지에서의 만남은 안정된 진실을 만들어내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녀가 '탄생성'이라고 부른 것은 소통과 상호작용의 끝없는 과정으로서의 타인과의 삶을 개작하려는 노력, 또는 그녀의 표현을 따르자면, 재탄생의 노력이다. 그것은 수학자 닐 존슨이 주장했듯, 시간 속에 질서의 포켓을 만들어낸다. 바흐친의 설명대로 대화적 교환을 요구한다. 시간이 흐르고 협력하는 법을 배우면서, 사람들은 탄생성을 점점 더 잘하게 되어 유능한 도시인이 되어간다.
6. 삶이 지속적으로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는 그녀의 믿음은, 아기 요람과 비슷한 오두막의 안전을 떠나 힘든 도시 속으로 들어가는 바슐라르의 인물에 공명한다. 도시를 건설하는 작업 역시 파열과 단절을 수반하는데 이것이 행하기의 영역, 재구성의 영역이다.
7. 하나의 빌로서 칸트슈트라세는 열린 형태다. 칸트슈트라세가 형태상으로는 열려 있어도, 도시계획가와 주민의 공동 제작이라는 의미에서 열린 거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오스만의 파리처럼, 베를린도 만든 사람들의 의도에서 독립하여 자체의 생명력을 얻었다. 1960년대의 베를린 도시계획가 중 그 누구도 그곳에 아시아인들이 오리라고 예견하지 못했지만, 이제 베를린은 그들을 흡수하고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형태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 자체의 주체성을 획득한다. 형태는 그것을 만든 사람의 의도에 한정되지 않는다. 시테처럼 빌도 시간 속에 열려 있다.
8. 지역사회 사이의 다공성 세포막, 장소에 따라지는 일반형, 그것들을 분배하는 씨앗 계획. 이 모두가 적용되는 범위는 지역을 넘어서지만, 그런 형태의 개성은 압도적이거나 장대하지 않다. 열린 빌은 그 표시물의 불규칙성과 불완정성 덕분에 개성으로 가득 차 있다. 오스만의 대로는 지금 같은 대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델리는 비공식성을 수용하지 못할 수도 있었고, 칸트슈트라세는 지금과 같은 규모의 다양성을 수용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도시계획가들은 그런 과정을 지원할 수 있다. 형태를 제안하고, 필요하다면 열린 방식으로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과 대면하기도 하면서. 그러나 통제와 질서를 자기 파괴에 이를 정도로 강조했던 것이 도시계획의 문제다. 형태 자체의 진화를 의도적으로 방해한 지난 시기의 아테네헌장이 그 예다. 도시계획가와 도시 주민의 윤리적 연결은 어떤 종류의 겸손함을 실천하는 데 달려 있다. 자신의 반영물이 아닌 세계에 참여하여, 여럿 중의 하나로 살아가는 것이다. 로버트 벤투리의 말을 빌리자면, 여럿 중의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면 "의미의 명료함보다는 의미의 풍부함"이 가능해진다. 이것이 열린 도시의 윤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