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낡은 ‘것’)이나 생명체(발칙한 ‘것’), 소유물(내 ‘것’), 생각과 감각(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다)이나 상상(이 작품은 관심을 끌 ‘것’이다), 방향설정(선을 가늘게 그을 ‘것’) 등을 가리키는 데 두루 사용되는 우리말 ‘것’(Ding)은 힘들의 특정한 배치, 하나의 시간적(역사적) 관계이다. 그‘것’은 실체라기보다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만남이다. 그 ‘것’은 때들의 직조이다.(때의 문제에 대해서는 조정환, 「비물질노동과 시간의 재구성」, 『비물질노동과 다중』 , 갈무리, 2005 참조, 그리고 http://amelano.net/19813 도 참조) 이런 의미에서 모든 '‘것’'들은 하나하나가 예술품들이다.
모든 존재는 ‘것’ 속에서, ‘것’으로서 실존한다. 이‘것’, 그‘것’, 저‘것’, 요‘것’으로 실존한다. ‘것’으로서 실존할 수 있는 능력은 다른 존재들과 특정한 관계 속에, (밀거나 당김을 통한, 감쌈과 감싸임을 통한, 그리고 ....을 통한) 얽힘과 배치 속에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다. 그 특정한 관계는 이미, 그 ‘것’이 아닌 관계에 대한 부정이자 바로 그러한 관계의 긍정(이‘것’)으로서 출현한다. ‘것’들은 개체화된 관계이다.
하나의 ‘것’이 복합적 힘들의 얽힘이며 힘은 바로 때이기 때문에 ‘것’은 부단한 불안정성을 갖는다. 꽃은 피었다 지고, 생명체는 살다 죽으며, 강철 구조물은 녹슬어 사라진다. 지금의 이 ‘것’은, 그때 그 ‘것’으로 된다. 이 변화는 때들의 운동 때문이다. 아니 때들이 바로 운동력이고 운동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때들이 모든 ‘것’들의 요소이다. 때들이 변화의 원인을 구성할 때 그 때들은 때문으로 된다. 이런 의미에서 때들은 어떤 ‘것’들을 구성하면서도 그 ‘것’ 속에서 다른 ‘것’으로 될 잠재력을 또한 구성한다. 이때가 그때로 되는 순간, 이미 다른 ‘것’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때는 ‘것’을 ‘것’으로 있게 하면서 그 ‘것’을 다른 ‘것’으로 변용시키는 잠재력인데 이렇게 기존의 ‘것’ 속에서 다른 ‘것’을 감각하고 상상하고 생각하고 또 실제로 그‘것’을 다른 ‘것’으로 만드는 힘으로서의 때를 우리는 예술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예술력은 예술적인 ‘것’의 의지이다. 알르아 리글의 예술의지(Kunstwollen)는 예술적인 ‘것’으로 되고자하는 의지로 ‘것’의지(Dingwollen)의 한 형태이다. ‘것’의지는 다양할 수 있다. 정치적인 ‘것’의 의지(네그리 하트가 Rechtwollen이라고 부르는 ‘것’), 사회적인 ‘것’의 의지(벤야민이 도시의지Stadtwollen이라고 부르는 ‘것’) 등도 ‘것’의지의 다른 형태들이다. 그런데 예술력은 의지일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수단들, 매개들과 관계할 수 있는 능력이다. 도구들, 수단들, 기계들과 관계함으로써만 예술의지는 예술적인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 몸을 사용하는 춤의 경우에도 예술의지는 몸이라는 수단과 필요한 관계를 맺는다. 예술력은 예술적인 ‘것’의 때이다. 예술력이 예술적인 ‘것’으로 나타날 때 그 ‘것’은 관계들의 그물망 안과 주변, 혹은 부근에서 생성된다. 외계는 가깝고 먼 관계들 안에서 구성되어 나오는 ‘것’이지 터무니없는 곳에서 침입해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관계들의 인접성이 예술적인 ‘것’이 출현하는 특정한 스타일을 만들어낸다. 예술적인 ‘것’들은 복수적이지만 다른 예술적인 ‘것’들의 구성을 위해서는 새로운 관계들의 구축이 필요한 만큼 그 복수성은 무한수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예술수단들의 사용과 관련하여 몇 가지 인접하는 방향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다른 예술적인 ‘것’의 구축은 이렇게 블록적이다. 스타일과 장르는 이 블록성의 표현형태들이다.
어떤 ‘것’이 예술적인 ‘것’으로 될 수 있고 어떤 ‘것’은 그렇지 못한가? 마치 예술의 개념을 묻는 듯한 이 질문은 실제로는 그 당대의 사회적 예술관계에 관한 질문이다. 한 시대는 예술적인 ‘것’을 선별하는 장치들을 갖는다. 예술이론, 예술사학, 예술평론 등은 이 선별의 정신적 장치들이다. 물적 장치들도 있다. 화단, 문단 등으로 불리는 예술단(흔히 정계, 재계 등과 나란히 쓰이는 예술계)이다. 다양한 등단제도들은 이 예술계를 나날이 구성하며 예술학교와 예술학과들이 그‘것’의 기초를 구성한다. 화랑, 박물관, 전시관, 갤러리, 시집, 소설집, 낭송회, 연주회 등이 예술단을 공고하게 만든다. 문예진흥기금 등은 예술가라고 명명되는 사회적 존재들에게 선별적으로 지원됨으로써 예술단의 존재를 법적 재정적으로 뒷받침한다.
이 다양한 예술제도들이 예술관계들을 일상 속에서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틀이다. 그‘것’은 선별과 배제, 진입과 퇴출, 보이게 하기와 보이지 않게 하기, 들리게 하기와 들리지 않게 하기, 언급되기와 묵살되기, 보존되기와 폐기되기, 장려하기와 벌주기 등의 메커니즘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무엇이 예술적인 ‘것’이고 무엇은 그렇지 않은가는 이 제도적 메커니즘에 의해 규정된다. 요컨대 우리가 보고 있는 예술제도는 격렬한 투쟁들이 진행되는 무대이자 그 투쟁의 산물로 나타난다. 그 ‘것’은 예술적인 ‘것’의 정의와 구성을 둘러싼 예술의지들의 투쟁이 나타나는 방식이다. 예술의지들의 역사적 투쟁무대인 이 사회적 예술관계 속에서 비로소 사람들에게 무엇이 예술적인 ‘것’인가를 지각하는 틀이 주어지고 특정한 인지양식이 구축된다.
오늘날 우리는 예술적인 ‘것’에 대한 암묵적 정의를 갖고 있다. 문학, 미술, 음악, 춤, 건축 등등이 그‘것’이다. 이 암묵적 정의는 일상에서 우리의 예술감각을 규정한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날의 예술철학, 예술이론, 예술대학, 예술평론, 그리고 여러 예술기관들의 특정한 역사적 사회적 관계망(그‘것’은 이해관계망이자 권력관계망이고 욕망관계망이다) 속에서 형성되는 정의이다. 예술을 ‘것’(물)과는 다른 그 무엇으로 정의함으로써 누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익을 보는 ‘것’일까? 진리의 자리를 그렇게 협소하게 규정된 예술에 둠으로써 어떤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일까?
이 암묵적 정의는 예술적인 ‘것’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정의를 수반하는데,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은 예술적이지 못한 ‘것’으로 배제되었던 ‘것’들의 유령에 늘 덧씌워지곤 했다. 잡음들(백남준), 공백들(선무), 일상들(보이스). 예술에서 배제되었던 ‘것’들이 중음신처럼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몸을 빌어 예술적인 ‘것’들로 나타나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야말로 다른 예술의지가 작용하는 모습이다. 다른 ‘것’을 부르는 다른 때가 오고 있다.
'과학들의 포월경들 > 인문 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준만,『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 제3권』, 2003. (0) | 2024.01.23 |
---|---|
그라우트,『서양음악사』, 2007. (0) | 2024.01.22 |
손민정,『트로트의 정치학』, 2009. (0) | 2024.01.22 |
음악에서의 리토르넬로에 대하여 (0) | 2024.01.21 |
권도희,『한국 근대음악 사회사』, 2004. (0) | 2024.01.21 |
일제 강점기 사료: '사상범보호관찰법' (0) | 2024.01.21 |
레이코프, 유나영 역,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 2015. (0) | 2024.01.19 |
남무성,『JAZZ IT UP』, 2018. (0) | 2018.10.01 |
* 정옥자,『조선후기 중인문화 연구』 (0) | 2013.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