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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들의 포월경들/인문 과학

그라우트,『서양음악사』, 2007.

제3부 17세기

제13장 17세기의 새로운 양식

1. 17세기의 유럽

1.1. 17세기의 유럽에서 음악에 영향을 미친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조건들은 크게 과학 혁명, 정치/종교/전쟁, 식민지, 자본주의, 후원 체계 등의 요소다. 1.2. 과학 혁명: 1609년 요하네스 케플러는 지구를 포함한 행성이 태양의 주위를 타원형의 궤도를 그리면서 돌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619년 천체의 운행 법칙 증명, 베이컨은 직접적 관찰에 의거한 경험적 연구로서의 과학 연구를 주창. 데카르트의 근대적 의식철학의 주창. 아이작 뉴턴은 1660년대에 중력의 법칙 고안. 이에 의해서 인식/인식된 것의 효과가 1600년경의 예술, 음악에서 새로운 양식의 핵심으로 등장: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제2작법과 오페라. 1.3. 정치, 종교, 전쟁: 홉스의 『리바이어던』 (1651)이 출간. 국가라는 주권권력으로서의 리바이어던에 대한 정치철학적 입장 정초. 17세기에 프랑스, 영국,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등 유럽의 전 지역에서 종교, 정치적 전쟁이 발발했고, 지속되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국가의 권위가 확대. 종교적, 정치적 갈등은 음악에 큰 영향을 미침. 통치자, 교회권위자들이 여전히 중요한 음악의 후원자였기 때문. 1.4. 식민지 개척: 17세기에 유럽,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가 스페인, 포르투칼과 경쟁적으로 북미 대륙, 캐리비안, 아프리카, 아시아에 식민지 개척. 식민 국가는 자신의 식민지에 카톨릭 의전 음악과 비얀시코, 박절 시편송을 전파. 1.5. 자본주의 탄생과 심화: 이는 공공 오페라와 공공 연주회의 성장, 상류층/중산층에서 생겨나 악보, 악기, 음악 레슨에 대한 욕구를 자극. 1.6. 후원의 체계: 음악가들은 여전히 궁정, 교회, 시의 후원에 의존. 후원을 받을 수 있는 음악의 종류가 지역마다 다름. 이탈리아 음악가들이 가장 풍족. 이태리는 무역 덕분에 부유했지만, 스페인의 영향을 받은 남부, 교황령인 로마, 독립적인 여러 국가의 북부로 분할. 통치자, 도시, 주요 가문들이 자기들의 명망을 위해 음악, 미술을 후원. 피렌체 귀족들은 1600년대에 생긴 음악, 무대 예술에 있어서의 눈부신 개혁을 후원. 동일한 일이 만토바 공작, 로마의 성직자, 베네치아 정부/시민에게서 발생. 이들의 후원에 의해 이탈리아는 유럽 음악에서 주도적 지위권을 18세기 중반까지 확보. 프랑스는 왕권집중국가. 루이 14세는 음악을 포함한 모든 예술들을 통제, 예술을 통한 영광의 표상. 그 결과 부분적으로 프랑스 음악이 여러 곳에서 모방. 영국은 시민전쟁과 의회 특별권이 왕실의 부를 제한했지만 왕실의 후원이 국가의 예술적 취향에 미치는 영향력은 막강. 신성로마제국은 30년 전쟁이라는 참화가 재정을 궁핍하게 만들었고, 독일의 궁정과 자유 도시국가는 이태리, 프랑스로부터 영향을 받아 나름의 음악적 기초를 다짐. 교회는 여전히 음악을 지도했지만 그 역할은 전 세기에 비해서 현저히 약해짐. 귀족, 시, 교회의 지원 외에도 사적인 도시의 모임인 '아카데미'가 존재했고 이들의 여러 역할 중 중요한 것은 음악활동을 지원하는 것. 공공 오페라 하우스가 637년 베네치아를 필두로 여러 도시에서 생겨나고, 공공 음악회[회원 가입, 입장료 지불]가 1627년 영국에서 최초로 탄생. 이러한 관습은 유럽 전역에 1700년대 후반까지 잘 알려지지 않음.

2.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2.1. 바로크라는 용어는 비정상적, 괴상, 과장된 것, 수준 낮은 취향 같은 것을 의미. 이 용어가 여러 세대에 걸쳐 미술, 음악에 적용되었다느 것은 취향, 가치 기준의 변동을 의미. 이 용어는 모양이 보기 흉한 진주라는 뜻이 바로코(BAROCO)라는 포르투칼 어원을 가진 프랑스어. 18세기 주엽, 보다 새롭고 단순한 양식을 선호하던 비평가들이 이 용어를 음악, 미술에서 처음 사용. 그때는 경멸하는 의미로 사용. 여행 작가인 샤를 드 보로스는 이 용어를 건축물을 묘사하는데 그는 로마의 팜필리 궁전의 선조(線條 세공 장식이 건축물보다 식기류에 어울릴 듯하다고 비난하면서 1755년에 처음 사용. 2.2. 19세기 미술 비평가들이 장식적, 극적, 표현적인 17세기 회화, 건축 경향을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이 용어는 비로소 긍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고, 1920년대 이후 음악사가들은 바로크라는 용어가 1600년경부터 대략 1750년[대략 17세기부터 18세기 중반]까지의 시기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 이는 바로크를 시기적으로 구분한 것이지, 양식적으로 구분한 것은 아님[이 시기에는 수많은 양식(음악, 미술, 건축)들이 존재한다. 대충 생각나는 것만 하더라도 매너리즘, 바로크, 고전주의, 등등]. 2.3. 17세기 예술[음악, 미술, 문학, 건측]의 특징은 모두 극적 효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훌륭한 극작가로서 세익스피어, 벤 존슨, 코르네유, 라신, 몰리에르 등. 또한 시는 연극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밀턴의 유명한 『실락원』,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등. 미술에서는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의 <다비드>(1620), <성 테레사의 황홀경>에서 그런 극적 형상이 잘 나타남. 2.4. 바로크의 거의 모든 작곡가들은 슬픔, 기쁨, 분노, 사랑, 공포, 흥분, 놀람의 정서인 감정을 표현하거나 발생시키는 음악적 방법을 추구. 음악을 통해서 여러 가지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 더 균형 잡힌 기분을 만들어내고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증진시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악이나 기악음악들은 거의 다 각기 상반되는 분위기의 곡들을 순서대로 제공, 작곡가는 자신의 개인적 기분을 표현하려하지 않고,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감정을 그려내려고 노력. 그러기 위해 기악음악에서는 특수화된 관습적 기법 사용, 성악에서는 가사의 정서, 성격, 극적 상황을 시사하려고 노력. 2.5. 표현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시를 잘 전달하기 위해 고의로 음악적 규칙을 어기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무정한 아말릴리>이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 불협화음들이 대위법 규칙들을 위반한다. 가령 강박에 나오는 경과음[마디 2/6], 순차진행으로 만들어지거나 해결되지 않는 불협화음[마디 2/6의 베이스와 13의 칸투스] 등이 그렇다. 이 곡에서 규칙을 어기는 충격적인 불협화음들은 수사학적 장치로 사용. 그래서 'CRUDA'(무정한)이라든가 'ahi lasso(아)'라는 말들을 강조[이 표현들을 강조하기 위해서 노래에서는 불필요한 음이 개입해들어가 있어가, 불협화음으로 해결이 되고 있다.]하고 있어서 이 시대 청자들에게 그 규칙을 어긴 음악들을 가사에 비추어 해석하도록 안내함. 음악이 원래 기대되는 그러한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기에 듣는 사람들도 가사를 통해 표현된 정서를 극화하는 방식으로 고통을 느끼며 그 감정을 인지,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조반니 마리아 아르투지는 <아르투지, 혹은 현대 음악의 불완전성에 대하여> (1600)에서 몬테베르디의 마드리갈을 비판. 그이유는 불협화음 때문이 아니라 불필요하게 규칙들을 어겼기 때문이다. 아르투지는 13마디에서 칸투스(canto)가 순차적으로[규칙적으로] 움직였다면(G-A-G-F-E) 불협화음이 허용되 수도 있었을 것임을 지적하고, 그리하여 규칙을 일부러 무시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에 몬테베르디의 형제는 "프리마 프라티카(제1작법), 즉 차를리노에 의해 체계화되고, 16세기 다성양식과 당시 이탈리아인들이 사용한 세콘다 프라티카(제2작법)을 구분한다. 그는 제1작법에서 음악은 그 자신의 규칙을 따랐으며 그리하여 언어로 된가사를 음악이 지배하였던 반면, 제2작법에서는 가사가 음악을 지배하여 선율 진해의 규칙은 어길 수도 있고, 불협화음은 가사에 의해 촉발된 감정을 보다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즉 제2작법은 제1작법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각 작법은 더 적합한 곳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3. 바로크 음악의 일반적 특징

1) 선율과 베이스로 나뉘어지는 양극성 3.1. 르네상스 음악에서 가장 흔히 나타나는 짜임새는 각각 독립적인 성부로 이루어진 다성음악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17세기 음악은 보통 호모포니 짜임새를 강조하며 베이스와 선율선이 두드러진다. 거기에다가 기보되거나 즉흥으로 연주되는 내성들이 화음을 채워넣는다.

2) 지속저음(Basso Continuo, 이태리어로 '계속되는 베이스'라는 뜻) 3.2. 지속저음 혹은 통주저음이라는 기보 체계가 이러한 양극성과 관계가 있다. 이 체계를 계속 사용할 때 작곡가는 선율선과 베이스는 작곡하지만 그에 맞는 화음이나 내성은 연주자에게 채워넣도록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베이스 화음은 한 개나 혹은 그 이상의 콘티누오 악기[하프시코드, 오르간, 류트 혹은 테오르보가 콘티누오를 담당]로 연주된다. 17세기 후반, 베이스 선율은 흔히 비올라, 다감바, 첼로, 바순과 같은 선율 악기에 의해서 강화. 만일 연주될 화음이 기본 위치의 평범한 화음이 아닐 경우이거나 화음에 포함되지 않는 음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 또는 임시표가 필요한 경우에는 작곡가가 숫자나 플랫, 샵 등의 기호를 베이스 음의 위나 아래에 적어 넣어 정확한 음을 표시해준다.

3) 다른 성부 채워 넣기 3.3. 베이스 선율을 기초로 다른 성부를 채워넣는 것은 그 작품의 종류에 따라, 상당한 즉흥 연주의 여지를 가지고 있는 연주자의기술과 취향에 따라 다라진다. 연주자는 단순히 화음만을 연주할 수 있고 경과음을 넣을 수도 있고, 베이스나 선율선을 모방하여 선율적 동기를 만들 수도 있다. 모든 작품들이 지속저음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목적은 반주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솔로 류트 음악, 건반 악기 음악에는 불필요. 또 한편으로는 옛 양식의 무반주 모테트나 마드리갈들이 새로운 관습에 맞추어 때때로 지속 저음 성부와 함께 출판되기도 함.

4) 콘체르타토 방식 3.4. 17세기 작곡가들은 사람의 목소리를 각기 다른 성부를 연주하는 악기들과 함께 사용. 그 결과 생겨난 것이 바로 콘체르타토[이탈리아어 concertare, '합의에 이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임. 음악에 있어서 콘체르타토란 대조를 이루는 세력들이 조화로운 앙상블을 이루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그것은 솔리스트와 관현악단을 위한 작품이라고 여겨지지만 17세에만은 그 뜻이 더 넓어서 하나 이상의 성부와 지속저음으로 되어 있는 기악 반주가 붙은 마드리갈과, 악기와 함께 연주하는 종교적 성악 작품인 종교적 콘체르토를 모두 포함하는 말이다. 여러 가지 음색을 조합해서 사용하는 것이 바로크 시대의 특징이 되었고, 이는 균질한 앙상블을 선호하던 16세기와 대조를 이룬다. [악기 류트]

5) 가온음율과 평균율 3.5. 성악과 현악기, 건반악기, 류트가 함께 사용되자 조율법에 문제가 생김. 16세기 음악가들은 여러 가지 다른 조율 체계를 사용. 순정률은 성악가들과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더 좋아함. 왜냐하면 이 조율법은 화음의 음정을 완벽하게 맞도록 조정할 수 있게 해줌. 건반악기 연주자들은 연주 중간에 음정을 조정할 수 없기에 보통 가온음률을 사용. 이 음조를 사용하면 온음계상의 거의 모든 3화음의 울림은 좋게 만들지만 플랫이나 샵이 늘면 음이 맞지 않는 경향이 생김. 이에 프렛이 있는 악기들인 류트나 비올은 옥타브가 제대로 맞으려면 평균율을 사용해야 함. 이렇게 비율이 정확히 맞지 않는 세 가지 조율법을 조합하여 쓰는 것이 아르투지가 당시의 음악에 대해 비난했던 이유다. 실제 연주자들은 타협점을 찾았는데, 작곡가들이 점점 더 넓은 범위의 화음과 조를 사용하게 되자, 점점 더 평균율에 가까운 것을 사용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6) 화음, 불협화음, 반음계주의 3.6. 지속저음을 사용하는 음악 작품은 협화음적인 음향을 베이스 위에 놓인 일군의 음정들이라고 여기기보다는 하나으 하음으로 여기도록 만듦. 이번에는 이러한 생각이 불협화음을 성부 사이의 음정의 관계라기보다는 하나의 화음 속에 들어 있는 어울리지 않는 음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17세기 중반에 다양한 불협화음들이 허용. 반음계주의 역시 비슷한 발전의 과정을 거쳐서 17세기가 시작될 무렵에 실험이 시작되어 17세기 중엽 나름의 질서 체계 안에서 자유롭게 사용. 이것은 특히 성악 작품에서 강도 높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거나 기악음악에서 화성적인 탐구를 위해 사용되거나 혹은 모방적인 대위법적 작품에서 독특한 주제를 만들어 내는 데에 사용.

7) 화성법에 기초한 대위법 3.7. 바로크 시기에 대위법의 성격 자체가 변동. 선율선-베이스 양극화 현상과 콘티누오의 사용으로 인해서 성부들 사이의 균형 관계가 바귀어 16세기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던 동등한 성부들로 된 다성음악이 베이스를 강조하는 음악으로 변하게 됨. 모방적 대위법에서조차 각각의 선율선은 베이스에 의해서 암시되는 화음 진행에 의존한 것이 되었고, 화성법에 기초한 대위법이 생겨남.

8) 규칙적인 리듬과 유동적 리듬 3.8. 바로크 시대의 박자가 매우 엄격하게 재어져 있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매우 자유로워졌음. 작곡가들은 성악 레치타티보에서와 마찬가지로 즉흥적인 기악 작품들인 토카타나 프렐류드에는 유동적인 리듬을 사용. 다른 음악에 잇어서는춤곡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규칙적인 리듬을 사용, 그러한 리듬이 더욱 많이 퍼져나가게 되었음. 15세기부터 타블라투어에서 사용하던 마디 선[처음에는 같은 길이거나 아니거나 간에 단순한 프레이즈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은 17세기에는 모든 음악에서 사용. 하지만 17세기 중반 마디 선은 근대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마디와 반복되는 강/약박의 패턴을 표시하게 됨. 이에 따라 음가와 박의 수는 박자표로 표시. 이러한 두 가지 리듬, 즉 자유로운 리듬과 박절적 리듬은 종종 연이어 사용되어 레치타티보아 아리와, 토카[타[와 푸가처럼 대조를 이룸. 3.9. 성악, 기악의 어떤 조합도 가능한 다성음악은 성악/기악 양식을 모두 동일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음. 바로크 시대에 와서 솔리스트의 역할이 두드러지면서, 작곡가들은 특정한 매체, 그러니까 바이올린이라든가 성악 독창을 위한 관용적 음악을 써야 할 필요성을 느기게 되어있음. 가령 바이올린족[family]의 발전이 이런 면에서 중요했는데, 그 이유는 활을 손바닥이 밖으로 보이게 잡고 연주하는 비올족과는 달리 손등이 밖으로 보이게 잡고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강력한 활 사용이 또렷하고도 선명한 소리를 만들어냈기 때문. [그리고] 성악을 위한 양식과 각각의 악기군을 위한 양식이 점차로 구별되었고, 마침내는 다른 것이 되어서 심지어 작곡가가 기악 작품을 작고할 때 성악 양식을 의식적으로 빌려 쓰거나 혹은 그 반대로 하는 일까지 가능하게 됨.

9) 실제 연주에서의 꾸밈음 사용과 즉흥 연주

3.10. 바로크 음악들은 작곡가나 작품이 아닌 주로 연주자, 그리고 연주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 바로크 시대의 음악가들은 악보를 연주를 위한 기본 자료로 여겼지, 고정된 텍스트로 여기지 않음. 콘티누오 연주자는 화음, 선율, 주어진 베이스 위에 대선율도 즉흥적으로 연주. 성악, 기악 독주자들은 연주할 때 선율에 장식음을 붙여넣음. 이러한 연주 관습은 나라마다, 세대마다 다름. 오늘날 장심음 붙이기라는 말이 단순히 장식을 첨부하는 것이 아닌, 바로크 음악가들은 장식음 붙이는 일은 감정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

3.11. 선율선을 장식하는 두 가지 원칙: 1) 장식음이라고 불리는 짧은 음형(트릴, 돌릴 꾸밈음, 전타음, 모르덴트를 어떤 음에 덧붙여서 악센트나 종지, 선율상의 중요한 지점을 강조하는 것). 2) 원래 적힌 선율선에 장식된 패러프레이즈를 만들기 위해 더 긴 꾸밈음[스케일, 아르페지오] 같은 것들을 덧붙이는 것.

3.12. 연주자들은 원래 적혀 있는 악보에다가 자유롭게 장식을 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었음. 가수들은 아리아에다가 카덴차[주요한 종지부를 꾸며 주는 장식적 악구]를 집어넣기도 하였고, 오페라에서는 가수에 맞춰 아리아를 없애거나 다른 아리아를 부르게 하거나. 10) 선법 음악으로부터 조성 음악으로

3.13. 17세기 초 음악가들은 자신들을 8개의 교회 선법이나 글라레아누스가 정리한 12개의 확장 선법을 가지고 작업한다고 생각. 하지만 17세기 마지막 30년 동안 코렐리, 륄리 그리고 다른 다른 작곡가들은 조성이라고 부를 만한 18세기, 19세기 음악에서 익숙해진 장/단조의 음악을 만듦.

3.14. 르네상스 시댕서부터 선법 체계처럼 조성 역시 서서히 발달. 오랫동안 지속된 특정 기법들[표준적 종지 진행, 4도나 5도로 움직이는 베이스, 관습적 베이스의 움직임,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계류음의 사용 등]이 더 적극적으로 사용되어 늘 사용되는 일관성이 있는 것처럼 되어 마침내 이론으로 정리가 가능하게 되었음.

4. 이 시기에 등장한 새로운 요소

4.1. 이 시기에 등장해서 18, 19세기에도 전형적인 것은 극적인 효과에 대한 관심, 정서적 표현성, 수사학적 장치로서 음악적 규칙을 허무는 것, 선율선-베이스 사이의 양극성, 수직화음적 화성, 반음계주의, 관용적 어법, 조성 등이다. 4.2. 그리고 지속저음, 가온음률은 점차 사라짐. 음악의 공동 작곡가로서의 연주자의 역할은 19, 20세기를 통해 작곡가가 연주자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되자 축소됨. 제14장 오페라의 탄생 오페라[이태리어로 '작품']는 음악을 계속하거나 혹은 거의 계속사용하여 연주하는 연극으로 무대 장치, 의상, 연기를 사용한다. 오페라의 대본을 리브레토[이태리어로 '작은 작품']라고 부르는데, 보통 운율이 있기도/없기도 하는 연극 대본. 오페라의 정수는 시, 연극, 음악이 하나가 되며 공연을 통해 그 모두가 생명력을 얻게 된다는 것. 오페라는 1600년경 처음 시작된 이래 17세, 18세기의 가장 중요한 장르가 됨. 오페라의 기원: 1) 오페라를 새로운 창조무로 보는 것으로 고대 그리스 비극의 경험을 근대적 방식으로 되살리는 것.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로 불려 음악이 정서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연극 2) 원래 존재하던 장르인 연극, 극장에서 열리는 볼거리, 춤, 마드리갈, 독창 노래를 혼융해서 만든 것.

1. 오페라 형성에 영향을 준 것.

1) 르네상스 시대의 선구 장르 1.1. 오페라가 만들어지는 데 영향을 준 것 중 하나가 바로 전원극[음악, 노래가 섞여 있는 시구로 된 연극]. 이러한 전통은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시작. 전원시는 시골의 청년/처녀들 또는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교외에서 목가적 사랑을 이루는 내용을 가지고 있음. 1.2. 처음 무대에 올려진 전원시는 안젤로 폴리치아노가 쓴 『오르페오 이야기』로, 이 시는 오르페우스 전설에 관한 것으로 1471년 피렌체에서 공연됨. 전원극은 16세기에 점점 이탈리아 궁정과 아카데미에서 인기를 끌게 되었는데, 초기 오페라 작곡가들은 전원극의 주제, 양식, 신화적 인물들의 유형, 음아고가 춤의 사용을 모두 수용. [마드리갈에 대한 설명]

1.3. 마드리갈이 오페라의 형성에 또다른 영향을 미침. 가령 어떤 마드리갈은 인물들 간의 대화를 나타내기 위해서 성부 간에 대조를 사용하여 마치 연극을 축소시킨것 같기도 하였다. 마드리갈 작곡가들이 음악을 이용해 정서를 표현하고 가사를 극적으로 만든 경험이 오페라의 토대가 됨. 때론 작곡가들이 마드리갈을 시리즈처럼 모아서 여러 장면이 차례로 나오는 형태로 만들거나 간단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를 마드리갈 코메디/연곡이라고 함. 가장 유명한 마드리갈 연곡은 오라치오 베르키의 <파르나스 산기슭>,

1.4. 오페라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인테르메디오[intermedio, intermedi는 복수]라고 할 수 있음. 이는 연극 막간에 연주되는 간주곡으로 전원적이고 비유적, 신화적 주제를 담고 있음. 르네상스 시대에는 막 사이의 커텐이 없어 막이 끝났다는 것을 알려줄 무언가 필요했음. 인테르메디오가 그것을 담당. 연극은 보통 5막으로, 인테르메디오는 극 전, 극 후, 막간까지 합쳐 모두 6개가 있었고, 연극의 주제와 연결되는 경우도 있음. 또한 중요한 행사를 위한 인테르메디오는 대화, 합창, 독창, 기악음악, 의상, 춤, 무대 장치, 무대 효과를 총망라하는 정교한 제작물. 즉 줄거리와 노래를 부르는 극적인 새로운 양식만을 제외하고서 오페라의 모든 요소들이 다 포함.

1.5. 인테르메디오 중 가장 장관이었던 것은 1589년 피렌체의 토스카나의 페르디난드 데메디치와 로렌의 크리스틴의 결혼식에서 공연된 <순례하는 여인>이라는 희극에 삽입돼 있는 것. 여기에 참여한 많은 예술가들이 나중에 최초의 오페라를 만드는 데에 참여. 가령 제작자이자 작곡가 안무가인 에밀리오 데카발리에리, 시인인 옥타비오 리누치니, 가수이자 작곡가인 자포코 페리, 줄리오 카치니가 그들이다. 일관된 주제는 피렌체의 공작 조반니 드 바르디가 제안한 고대 그리스 음악의 힘으로, 이는 바르디의 모임에서 계속 관심의 대상이 됨. 2) 모델로서의 그리스 비극

1.6. 인문주의자들, 시인, 음악가, 후원자들이 그리스 비극을 부활하려는 데에 관심을 둔 것은 오페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침. 그들은 그리스 고대 음악이 가졌던 윤리적 효과를 그만큼의 정서적 힘을 가진 그들 시대의 작품을 통해 만들어내려고 함. 그런 의미에서 오페라는 고대 그리스의 조각, 건축에 상응할 만한 극적 음악을 만들어 내고자 했던 뿌리 깊은 인무주의자들의 문제를 해결해 준 셈.

1.7. 르네상스 학자들의 고대 비극에서의 음악의 역할에 대한 의견차이들: 1) 코러스만이 노래로 불리었을 것이라는 입장: 1585년 베네치아에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이태리어로 번역/공연했을 때 그렇게 했는데, 안드레아 가브리엘리는 단어의 운율을 강조하여 말하는 듯한 스타일의 호모포니로 된 코러스를 만들어넣음. 2) 그리스 비극 대사 전체가 노래로 불리었을 것이라는 입장: 지롤라모 메이는 피렌체의 학자로 몇 편의 그리스 연극을 편집한 사람. 로마에서 추기경의 비서로 활동, 음악에대한 철저한 연구 착수하여 잔존한 거의 모든 고대 저작을 희랍어로 읽은 뒤 그는 그리스 음악이 단선율로 되어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독창자나 코러스가 그것을 부르되, 반주는 있을 수 있고/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 3) 피렌체의 카메라타

1.8. 이런 생각을 그는 동료들과 나누었는데, 특히 바르디 공작과, 음악이론가, 작곡가이며, 천문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아버지인 빈첸초 갈릴레이와 그렇게 함. 1570년대 초반부터 바르디는 학자들이 문학, 과학, 예술을 논하고, 음악가들은 새로운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아카데미를 열고 있었음. 갈릴레이와 줄리오 카치니가 이 모임에 참여. 카치니는 나중에 이 모임을 카메라타[모임, 회합이라는 뜻]라고 부름. [줄리오 카치니]

1.9. 『고대 음악과 현대 음악 사이의 대화』(1581)에서 갈릴레이는 대위법 사용한 성악음악을 공격하기 위해 메이의 주장을 이용. 그는 가사에 적당한 음높이와 리듬을 가진 단선율만이 시구를 표현할 수 있다고 주장. 여러 성부가 각기 다른 선율과 가사를 동시에 노래로 부르며 각기 다른 리듬과 음역을 사용하여 어떤 성부는 낮고 어떤 성부는 높게, 어떤 선율은 올라가고, 어떤 선율은 내려가며, 어떤 성부는 느리게/빠르게 움직인다면 혼란만 생겨나고 가사의 정서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

1.10. 갈릴레이는 일종의 모노디를 주창. 모노디라는 용어는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까지 사용된 모든 반주 붙은 독창 노래를 포괄하는 말로 현대 역사가가 만들어낸 말이다.[반주 없는 선율을 일컫는 모노포니와는 구별됨]. 독창 노래가 새로운 것은 아니었는데, 독창자는 서사시나 다른 장절식으로 된 시들을 간단한 반주에 붙여서 정해진 틀에 맞추어 노래, 작곡가들은 류트와 성악을 위한 노래들을 작곡, 다성 마드리갈의 경우에도 한 성부를 노래로 부르고 다른 성부는 악기로 반주하는 경우가 흔했지만, 카메라타에서의 그리스 음악에 관한 논의는 새로운 길을 개척. 1.1. 카치니는 1590년대에 콘티누오가 있는 솔로 노래들을 많이 작곡. 그리고 1602년에 노래 모음집인 『레 누오베 무지케』(새로운 음악)라는 제목으로 출판. 그 노래 중 유절식 가사로 되어 있는 노래들을 '아리아'라고 했는데, 이는 유절식으로 된 시로 되어 있는 노래라고 한다. 다른 노래들을 마드리갈이라고 했는데, 이를 볼 때 그는 이 노래들을 다성 마드리갈과 같은 유형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마드리갈은 절이 없는 시에 통절식으로 음악을 붙인 것으로 스스로의 여흥거리로 부르거나 다른 사람들을 위한 연주용으로 불렀다. 이는 솔로 마드리갈로, 오늘날의 다성적 마드리갈과 구별된다. [줄리오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

2. 첫 오페라

2.1. 1592년 바르디가 로마로 거처를 옮긴 후에도 새로운 음악에 대한 토론과 새로운 음악의 연주는 또 다른 귀족 자코포 코르시의 후원에 의해 지속. 여기에 차먹한 사람들 중 1589년 인테르메디오에 참여했던 베테랑들 중 시인인 옥타비오 리누치니, 성악가/작곡가인 자코포 페리가 있음. 이들은 그리스 비극이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로 불렸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 고대 장르의 현대적 모습으로의 재탄생에 노력을 기울임. 리누치니의 전원시 <다프네>에 페리가 곡을 붙인 것이 1598년 10월 코르시의 궁정에서 공연. 음악의 일부분만이 남아 있지만 이 작품이 최초의 오페라로서 그리스의 모범을 따라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로 불리우며 음악으로 등장인물의 정서를 전달하고자 한 무대연극임.

2.2. 피렌체 궁정의 연극, 예술, 음악의 책임자인 에밀리오 데 카발리에리는 비슷한 스타일로 된 짧은 장면들 몇 개에 자기 음악을 붙여 무대에 올림. 1600년 2월 로마에서 음악이 붙은 도덕극인 <영혼과 육체의 극>을 공연했는데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으로 된 가장 긴 무대 작품. 1) <에우리디체>

2.3. 1600년 페리는 리누치니의 전원극 <에우리디체>에 음악을 붙임. 줒는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음악의 힘을 보여 주는 것. 오르페오는 노래를 불러서 지하세계의 사람들을 울게 만들고 설득시켜서 아내인 에우리디체가 살아나도록 한다. 이 작품은 대공의 조카인 마리아 데 메디치와 프랑스 왕 앙리 5세의 결혼식을 위해 피렌체에서 10월에 공연. 이때 공연된 작품에서는 원래 페리가 쓴 음악 대신 다른 사람들이 만든 음악이 상당 부분 사용. 이는 자기가 데리고 있는 가수들에게 다른 사람들이 작곡한 음악은 연주하지 못하도록 한 카치니의 것. 두 가지 판은 곧 따로 출판되어 최초의 현존 완성본 오페라들이 됨. 차니의 것은 더 선율적, 서정적이어서 <레 누오베 무지케>에 있는 아리아와 마드리갈을 닮았음. 그러나 페리의 것은 말하는 것을 흉내내는 새로운 방식을 따르고 극적 상황에 따라 접근하는 방식을 달리해서 극에 더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음. [페리의 <에우리디체>의 프롤로그]

2.4. 페리는 '레치타티보 양식'이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음악 어법을 만들어냄. <에우리디체> 서문에서 페리는 고대 그리스 이론에서 말을 할 때는 음높이가 이어지듯 바뀌고, 노래를 할 때는 도약적 혹은 '다이아스테마틱'하게 변하는 것을 구분했음을 상기시켰다. 그는 그 두 가지의 중간 정도에 해당하며, 학자들이 생각하기에 그리스 사람들이 영웅시를 읽을 때 사용했으리라고 생각한 말-노래 같은 양식을 추구. 잘 움직이지 않는 저속저음 위에서 노래 선율이 협화음/불협화음의 사이를 자유롭게 오고가게 함으로써 페리는 노래 선율을 화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 특정 음고가 정해져 있지 않는 자유로운 시 낭송을 흉내 냄.

2.5.  <에우리디체>에 나오는 다른 세 곡은 페리가 사용하던 유형의 세 가지 모노디를 모두 보여주는데, 프롤로그는 16세기에 사용되었던 유절시를 부르는 아리아를 모델로 삼은 곡이다. 각행은 반복되는 음과 종지로 되어 있으며 가수는 가사에 맞추어 각 절의 리듬을 조금식 바꾸었다. 리토르넬로라고 부르는 기악 후렴구가 각 절을 분리하는 역할을 한다. 티르시의 노래는 리듬이 경쾌하고 선율적이어서 칸초네타나 춤고과 비슷. 짧은 신포니아가 이 곡의 앞 뒤에 나옴.

2.6. <에우리디체>에서 페리는 극적 시가 요구하는 음악의 어법을 고안 .페리와 동료들은 자신들이 그리스 음악을 되살리지는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고대 극장에서 쓰였던 것과 유사할 뿐 아니라당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말-노래를 고안해냈다고 주장. 2) 모노디의 영향

2.7. 레치타티보, 아리아, 마드리갈 등의 여러 가지 유형의 모노디들이 다양한 세속음악, 종교음악 속에 침투해 들어갔는데, 모노디는 음악이 무대에 올라가는 것을 가능하게 해줌. 그것을 통해 음악이 나레이션, 대화, 독백 모두가 가능, 진정으로 극적 표현에 필요한 즉각성, 유연성을 모두 갖추게 됨. 페리가 만든 다양한 양식은 이후 오페라에서 계속 사용되고 확장됨. 작곡가들은 음악을 극적 상황에 맞추는그의 방법을 계속해서 추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