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바깥 그리고 내재성의 철학/단편

들뢰즈의 니체에 대한 단편들, 박정태 편역,『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2007.

Ritournelle 2024. 1. 23. 16:20

권력의지와 영원회귀에 대한 결론

Deleuze, Gilles, Conclusion sur la volontéde puissance et l'éternael retour, Cahiers de Royaumont n. Ⅵ: Nietzche, Paris, editions de Minuit. 1967, 275~87; L'îile Déserte et Autres Textes. textes et entretiens 1953-1974, edition préparée par David Lapoujade, Paris: Les Editions de Minuit. 2002, 125~30. [박정태 역, <권력의지와 영원회귀에 대한 결론>,『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이학사, 2008, 218~45.]

[...] 니체의 너무도 많은 것이 숨겨지고 가려져왔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출판상의 이유들을 지적할 수가 있다. [...] 하지만 니체의 많은 것이 숨겨지게 된 것은 병리학적인 이유들 때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니체의 작품은 완결되지 못한 채 광기에 의해서 갑작스레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서 우리는 영원회귀와 권력의지라는 두 근본 개념이 니체 자신에 의해서는 거의 소개된 바 없다는 점, 그리고 이 두 개념은 니체가 계획하고 있었던 발표나 논의 전개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 그러나 니체와 그의 작품 속에 그토록 숨겨진 것이 많게 된 가장 일반적인 이유는 방법론적인 이유이다 니체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무엇이 결코 하나의 의미만을 지니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각각의 것은 그 자신 속에서 작용하는 힘들과 힘들의 생성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게다가 니체에게는 그 어떤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해석만이, 의미의 복수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사실을 푸코는 [그의 글 <니체, 프로이트, 맑스>에서] 다음과 같이 보여주었다. 니체는 새로운 개념과 새로운 해석 방법을 발명한다. 즉 우선은 기호들signes이 분배되는 공간을 바꿔버리면서, 그리고 이전의 깊이가 이제는 더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그런 새로운 깊이profondeur를 발견하면서, 그러나 무엇보다도 특히 기호와 의미 사이의 단순한 [일대일] 관게를 모든 해석은 이미 끝없이 해석에 대한 해석을 가리키도록 하는 그런 의미의 복합체로 대체하면서, 니체는 새로운 개념과 새로운 해석을 발명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니체에게서 모든 해석은 동일한 가치를 지니지도, 동일한 평면 위에 있지도 않다. 반대로 해석은 새로운 깊이 속에서 층을 이루며 쌓여 있거나 또는 서로 끼워 맟추어져 있다. 그리고 해석은 이제 기준으로서의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소유하기를 멈춘다. 그 대신 고상한 것과 천한 것, 높은 것과 낮은 것이 해석과 가치 평가의 내재적인 원리를 이루게 된다. 말하자면 논리학이 위상학과 유형학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 따라서 해석은 무엇보다도 먼저 해석하는 자의 '유형'을 판단하게 되며, 또 이런 이유로 해서 해석은 '누가'Qui?라는 질문을 제기하기 위하여 '무엇qu'est-ce que?이라는 질문은 포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보면 진리를 물리치도록 해주며, 참된 것 또는 거짓된 것의 배후에서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심급instance을 발견하도록 해주는 니체적 가치의 개념이다. [...] 왜냐하면 우리는 [니체의 가치 개념과 더불어] 다음과 같이 물을 수 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처럼 모든 것이 가면이라면, 그리고 모든 것이 해석이며 가치 평가라면, 더이상 해석할 것도, 평가할 것도, 가면을 씌울 그 어떤 것도 없는 최후의 심급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최후의 심급에는 그 자체가 돌변의 역능, 가면들의 모양을 결정하는 역능, 해석하고, 가치를 평가하는 역능이 권력의지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 이 문제에 대해 지아니 바티모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우리에게 제시한 바 있다. 만약 우리가, 니체 철학의 핵심이 되는 두 측면인 기존의 모든 가치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가치의 창조를, 즉 신화와 기만으로부터의 해방과 전환을 시원적인 존재론적 깊이에 [...] 연관시킨다면, 결코 이 두 측면은 의식이 제안하는 단순한 상태 속에 포함될 수도 없고 다시 빠지지도 않는다. 이 같은 시원적인 깊이, 차라투스트라의 그 유명한 우월한 깊이profondeur-hauteur가 우리가 권력의지라고 불러야 하는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권력의지를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해 비로는 다음과 같은 규정을 내린다. 그것은 살기를 원하는 것vouloir-vivre과 관계가 없다. [...] 이러한 의미에서 권력의지는 결코 권력을 원하는 의지 또는 지배하기를 욕구하는 의지가 아니다. 권력의지를 권력을 원하는 의지로 해석할 경우 실제로 우리는 이러한 해석이 갖는 두 가지 약점을 보게 된다. 먼저 만약 권력의지가 권력을 원한다를 의미한다고 한다면, 이 경우 권력의지는 분명 기존의 가치, 명예, 부, 사회적인 능력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가치들이 욕구와 의지의 대상으로서의 권력의 할당과 그 할당된 권력에 대한 인정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의지가 원하는 이런 식의 권력은 오로지 권력의지가 투쟁 또는 전쟁 속으로 스스로를 던질 때만 쟁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이에 더하여 다음과 같이 물을 수가 있다. 도대체 누가 이런 방식으로 권력을 원하는가? 누가 지배하기를 욕구하는가? 정확히 말해서 그들은 니체가 노예들, 약자들이라고 부르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권력을 원한다는 것은 곧 권력을 갖지 못한 자들이 권력의지를 가지고서 스스로에게 씌우는 이미지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니체는 투쟁과 전쟁 속에서 거꾸로 기능하는 선별의 방식, 노예들과 무리들을 위해 작용하는 선별의 방식을 보았다. [...] 물론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 속에서, 권력을 갖지 못한 자들이 권력의지를 가지고서 스스로에게 씌우는 이미지 속에서 우리가 분명 그 어떤 권력의지를 발견하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낮은 정도의 권력의지에 불과하다. 자신의 강렬한 형식 또는 집중된 형식 아래에서 가장 높은 정도에 이른 권력의지는 탐내는 것도, 심지어는 취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주는 것이요 창조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하고 있듯이 권력의지의 진정한 이름은 주기를  실행하는 덕인 것이다. 실제로 가면은 그 자체가 가장 훌륭한 주기don와 다른 것이 아니며, 또 가면은 우리에게 유연한 힘으로서의 권력의지, 예술의 가장 높은 능력의로서의 권력의지의 증거를 제공한다. 권력은 이처럼 의지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의지 속에서 원하는 자, 곧 디오니소스인 것이다.

비로가 그의 글에서 니체의 원근법주의perpectivisme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 즉 우리가 그 무엇을 위에서 아래로 본냐 또는 아래에서 위로 보느냐에 따라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야기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위에서 아래로 볼 경우, 권력의지는 곧 긍정, 차이의 긍정, 놀이, 기쁨, 주기, 거리의 창조를 가리키게 되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이 지점에서 비로와 푸코의 입장이 일치한다. 왜냐하면 푸코는 우리가 해석의 운동으로 시작할 경우 니체에게 있어서 올바른 모든 운동은 위에서 아래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이미 보여준 바 있기 때문이다. 좋은 모든 것, 고상한 모든 것은 머리를 앞으로 내밀고 하강하는 독수리의 비행의 특징을 갖는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이번 논문 발표 및 토론회의 세 번째 논의 주제에로, 즉 앞의 토론들에서 [...] 니체에게 있어서의 긍정과 부정의 관계에 관한 논의에로 우리를 안내한다. 뢰비트는 [...] 니체주의에 대한 그의 모든 해석을 '세계의 회복'이라는 관념 속에서 요약했다. [...] 사실 니체에게 있어서 아니오와 예, 부정과 긍정이 지니는 각각의 역할은 다수의 문제를 제기한다. [...] 차라투스트라에서 당나귀는 이아, 이아, 하면서 예를 말하는 동물임이 틀림없지만, 그의 예는 차라투스트라의 예가 아니다. [...] 당나귀는 긍정한다는 것은 곧 짐을 지는 것이라고 믿으며, 이때 그는 자기가 하는 긍정의 가치를 자신이 지고 있는 것의 무게를 따라서 평가한다. [...] 우리는 여기에서 니체가 말하는 허무주의의 세 단계인 신과 관련된 허무주의, 인간과 관련된 허무주의, 인간의 최후와 관련된 허무주의를 보게 된다 - 말하자면 누군가가 우리의 등 위에 올려놓은 무게와 관련된 허무주의,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져야 할 것이 더 이상 없게 되었을 때에 남겨진 피곤에 지친 우리 근육의 무게와 관련된 허무주의를 보게 되는 것이다. [...] 결과적으로 당나귀에게 있어서 긍정이란 긍정에 대한 환상에 불과한 것이며, 따라서 부정적인 것만이 유일한 실재로 남게 된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예는 이것과 완전히 다르다. 왜냐하면 차라투스트라가 긍정함은 짐을 지거나 떠맡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 여기서 차라투스트라는 긍정함이란 당나귀의 그것과 반대로 가볍게 하는 것, 살아 잇는 것의 짐을 덜어주는 것, 춤추는 것, 창조하는 것임을 안다.

그러나 디오니소스적인 예Oui의 근본 의미를 영원회귀의 수준에서 밝히는 작업은 [...] 분명히 영원회귀는 시간의 부정도 아니요, 시간의 제거도 아니며, 또 시간을 초월한 비시간적인 영원성도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영원회귀가 순환이면서 동시에 순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즉 한편으로 [순환적인] 계속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순간적인] 되풀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한편으로 세계를 구성하는[순환적인] 생성 과정의 계속성으 가리키지만, 다른 한편으로 바로 이러한 생성 또는 과정을 탈환하는 것이요, 또 그것에 대한 [순간적인] 번쩍임이자 신비스러운 관점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말하자면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 물리적인 해석과 천문학적인 해석 사이에서 왔다 갔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의 사유는 이 두 해석 중 어느 것에도 대응하지 않는다. 니체가 그의 관념은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이라고 판단할 때, 우리가 [그이 새로운 영원회귀 관념의 반대되는 경우로서] 고대인을 염두에 두는 것은 확실히 잘못된 일이 아니다. 실제로 니체는 그가  영원회귀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를 지금까지는 전혀 탐구되지 않은 차원 속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즉 외연적인 양이나 지엽적인 운동이 아니요 또는 물리학적인 질도 아닌 그런 순수 강도의 영역 속으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존재는 더하거나 덜한 어떤 것이 아닌가? 특히 존재는 그 자체가 더함과 덜함이 아닌가? 존재 속에서의 강도의 차이로 이해되어야 할 이 같은 더함과 덜함, 수준의 차이로 이해되어야 할 이 같은 존재가 바로 니체에게 있어서의 근본적인 문제의 대상인 것이다. [...] 실제로 니체는 강도와 관련된 양에 대한 학으로서의 물리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또 그는 더 나아가 '강도상'의 원리로서의 권력의지, 순수 강도의 원리로서의 권력의지를 겨냥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잇어서 권력의지란 권력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무엇은 원하든 상관없이 원하는 것을 최후의 역능에 이르기까지 또는 n제곱에 이르기까지 끌어올리는 것, 간단히 말해 존재의 모든것의 최상의 형식(강도의 형식)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클로소프스키가 그의 글에서 권력의지 속에서 일어나는 강렬한 변동의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 클로소프스키에 따르면 이러한 변동의 세계는 기호들의 세계이자 의미들의 세계이다. 즉 변동의 세계가 보여주는 강도의 차이 속에서 기호들이 세워지기 때문에 이 변동의 세계는 기호들의 세계인 것이며, 또 이렇게 세워진 기호들이 최초의 차이 속에 포함된 다른 차이들을 겨냥하고 이 다른 차이들을 거쳐 다시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한에 있어서 그 기호들 자체가 곧 의미들이 되기 때문에 이 변동의 세계는 의미들의 세계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니체에게 있어서 신의 죽음과 자아의 소멸 또는 신의 죽음과 개별적인 동일성의 상실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 관계를 드러낸 것은 클로소프스키의 힘이었다. [...] 결국 간단히 말하자면 영원회귀의 세계는 강도로 이루어진 세계, 차이의 세계로서, 그것은 일자l'Un나 동일자le Même를 가정하는 세계가 아니라 반대로 동일한 자아의 폐허 위에서, 유일신의 무덤 위에서 건설되는 세계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영원회귀 그 자체는 되돌아옴으로써만 존재하는 세계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합치요, 반복을 통해서만 같은 것을 지니는 세계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동일성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 자신에 의해 출판된 텍스트들 속에서  영원회귀는 결코 공식적인 또는 최종적인 발표의 대상이 아니다.  영원회귀는 단지 두려움 또는 도취감과 더불어 예고되고 예측될 뿐이다.  영원회귀의와 관련된 차라투스트라의 주요 텍스트인 <비전과 수수께끼에 관하여>와 <회복기의 환자>를 고려하더라도, 여기에서 우린ㄴ 예고와 예측이 언제나 드라마틱한 조건들 속에서 행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 예고와 예측이 최상의 사유[ 영원회귀]의  깊은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표현하고 있지 않음을 본다. [...] 결국 우리는 니체가 그의 출판된 저술들에서 단지  영원회귀를 밝히기 위한 준비만을 하였을 뿐, 그것을 밝히지는 않았으며 또 그것을 밝히기 위한 시간이 그에게는 없었다고 간주할 권리가 있다. [...] 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한편으로 차라투스트라의 텍스트들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1881년에서 1882년에 걸친 그의 노트들이 최소한 니체에 따를 경우  영원회귀가 무엇이 아닌지는 말해주고 있다.  영원회귀는 순환이 아니다. 그것은 일자, 동일한, 동등한 것 또는 균형을 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체의 회귀가 아니며, 또 동일자의 회귀도, 동일자로의 회귀도 아니다. 따라서  영원회귀의는 고대의 [순환]을 가리키는 것으로 가정된 사유와는 전혀 공통점을 지니지 않고 있다. [...] 실제로  영원회귀의 진정한 이유는 동등하지 않은 것,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것'이 되돌아오는 이유는 그 어떤 것도 동등하지 않으며 그 어떤 것도 같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영원회귀는 오로지 생성을 통해서만, 오로지 다수를 통해서만 이야기된다. 그것은 존재, 합치, 동일성이 배제된 세계의  법칙인 것이다. 일자나 동일자를 가정하는 것과는 반대로,  영원회귀는 그 모습 그대로의 다수와 유일한 합치를 이루며, 차이를 낳는 것과 유일한 동일성을 구성한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되돌오기만이 생성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로서의  영원회귀가 하는 기능은 결코 동일시하는identifier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성, 다수, 차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영원회귀가 지니는 선별적인 의미는 이중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영원회귀는 우선 사유 속에서 선별적이다. [...] 왜냐하면  영원회귀는 언제나 최상의 형식들을 창조한느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회귀가 곧 권력의지의 도구요 표현인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영원회귀는 각각의 것을 그들 자신의 최상의 형식에로, 즉 n제곱에로 올려놓는다. 그런데 이러한 창조적 선별은  영원회귀의 사유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 속에서도 이루어진다. 즉 존재가 선별적이되며, 또 존재 그 자체가 선별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영원회귀는 시련을 감당해내지 못하는 모든 것을 제거해버린다. [...] 결국  영원회귀가 낳는 것,  영원회귀가 권력의지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되돌아오게 하는 것,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최상의 형식으로 정의된 초인Surhomme이다. [...] 즉  영원회귀는 같은 것을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들을, 가면들과 역할들을, 형식들과 역능들을 증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로가 그의 글에서, 니체에 따르면, 극단적인 형식들과 중간의 형식들 사이에 일종의 본성의 차이가 존재하다고 상기시킨 것은 옳았다. 그리고 이러한 본성의 차이는 새로운 가치들의 창조와 기존의 가치들에 대한 인정 사이에 대해서 니체가 행한 구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 왜냐하면 이미 인정된 기존의 가치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 고유의 시기에는 그들 또한 새로운 가치들이었을 터이고, 마찬가지로 지금의 새로운 가치들 역시 언젠가는 기존의 가치들로 불리게 될 것 것이기 때문이다. [...] 이 본질적인 것과 관련해서 우리는 이미 권력의지의 차원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본 바 있다. 통용되고 있는 가치들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것과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하는 것 사이에는 본성의 차이가 존재한다. 이 본성의 차이가 바로  영원회귀의 차이 자체이며,  영원회귀의 본질을 구성하는 바로 그 차이다. 결국 우리는 새로운 가치들이란 정확히 말해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의 최상의 형식들과 다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이미 세워진 기존의 상태로 태어나는 가치들, 그리고 비록 실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유리한 역사적 조건들을 기다려야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인정의 질서를 추구함으로써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가치들이 존재한다. 그러나이와 반대로 영원히 새롭고 영원히 반시대적이며 그드르이 창조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인 가치들, 그리고 겉으로 보아 한 사회에 의해 인정되고 동화된 것처럼 보이는 그때마저도 실제로는 다른 힘들을이야기하면서 바로 그 사회 자체 속에서 또 다른 본성의 아나키적 역능들을 추구하는 가치들 또한 존재한다. 오로지 이러한 새로운 가치들만이 역사를 넘어선trans-historique 가치들이자 역사-상부적인supra-historique 가치들이며, 오로지 이러한 새로운 가치들만이 기막힌 혼동들을 증명하고 도 그 어떤 질서로도 환원이 불가능한 창조적인 무질서를 증명한다. 니체가 그것은 영원회귀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회귀 그 자체라고 말한 것, 그것이 바로 이 혼돈이었다. 이처럼 위대한 창조들은 역사-상부적인 바탕으로부터, 반시대적인 혼돈으로부터 시작하며, 도 이렇게 시작된 위대한 창조들은 우리가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영역의 그 한계에 이를 때까지 나아간다. [...] 하지만 우리는 이에 대해서 구체적인 증거들을 제시해야만 했으며, 또 이러한 역사-상부적인 바탕 또는 혼돈스러운 깊이의 차원 속에서 어떻게 예술가들이나 사상가들이 서로를 만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어야만 했다. [...] 푸코는 무의식적인 것에 대한 발견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어떤 것[역사-상부적인 바탕 또는 혼돈ㅅ러운 깊이]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즉 그는 해서의 요구 속에 자리를 잡은 근본적인 변화에, 세계와 인간의 광기에 대한 평가를 함축하는 그 어떤 근본적인 변화에, 세계와 인간의 광기에 대한 평가를 함축하느는 그 어떤 근본적인 변화에 오히려 뮈이식적인 것에 대한 발견이 의존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 이런 과정을 통해 음악가로서의 니체는 과연 어떤 종류의 가면이었을까라는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 사실 우린ㄴ 얼마나 많은 니체의 경구가 그것이 마치 연극 연출가의 원칙이나 평가인 것처럼 이해되어야 하는지 모른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 전체를 구상하는 것은 철학 속에서뿐만 아니라 연극 무대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는 바그너식의 연극에 대해서 조로응을 계획하면서, 비제의 음악으로 공연중인 차라투스트라를 ㄹ 꿈꾼다. 그 자체가 아미 잔인함의 연극이자 권력의지의 연극이요 영원회귀의 연극이 자기 자신의 철학적인 연극을 위하여 마치 가면을 꿈구듯이 니체는 연극의 음악을 꿈꾸는 것이다.

아리아드네의 비밀

Deleuze, Gilles, Mystère d'Ariane, Philosopie no. 17, 1987, pp. 67~72.  [박정태 역, <아리아드네의 비밀>,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이학사, 2008, 246~56.] [...] 니체에게 있어서 우월한 인간의 이론은 휴머니즘에 대해 행해진 가장 깊고 위험한 기만을 고발하기 위해서 제안된 일종의 비판을 의미한다. 우월한 인간은 인류를 완벽함과 완성에로 이끌 것을 주장한다. 그는 인간의 모든 속성을 회복할 것을, 자기 상실을 극복할 것을, 인간 전체를 실현할 것을, 인간이 신의 자리를 차지할 것을, 인간의 긍정하고 긍정되는 그 어떤 능력으로 만들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을 보자면 인간은 그가 아무리 우월하다 할지라도 긍정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른다. [...] 숭고하거나 우월한 인간은 긍정한다는 것은 짐을 짊어지는 것도 아니요 멍에를 쓰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 그것은 그와는 반대로 멍에를 벗기는 것이요 해방을 시키는 것이자 사는 것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말하자면 그는 긍정함이란 우월한 가치들 또는 영웅적인 가치들의 무개 아래에서 삶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의 가치들인 새로운 가치들, 즉 삶을 가벼운 것 또는 긍정적인 것으로 만드는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하는 것임을 모른다. [...] 니체에 따르면 권력의지는 긍정과 부정이라는 두 음조를 지니며, 힘은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두 질을 지닌다. 우월한 인간이 긍정이라고 제시하는 것은 물론 이간의 가장 깊은 존재이다. 하지만 이렇게 제시된 존재는 부정과 반작용 간의, 부정적인 의지와 반응적 힘간의, 허무주의와 허위의식 또는 허무주의와 원한 간의 극단적 결합에 불과하다. 이때 짊어지게 되는 짐은 허무주의의 결과물이며, 이 짐을 짊어지는 것은 반응적인 힘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제 거짓된 긍정이라는 환각이 생겨난다. 우월한 인간은 인식을 내세우며, 인식의 미로 또는  인식의 숲을 탐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도덕성을 달리 가장한 것에 불과하다. 도덕은 그 자체가 하나의 미로이다. 즉 도덕은 금욕주의적이고 종교적인 이상을 달리 가장한 것이다. 실제로 금욕주의적  이상으로부터 도덕적 이상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도덕적 이상으로부터 인식의 이상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똑같은 시도가 추구되어왔다. 황소를 죽이는 시도, 즉 삶을 부정하고, 삶을 무게로 짓누르며, 삶을 그의 반응적 힘에로 환원시켜비리는 시도말이다. 이제 숭고한 인간은 인간에게 멍에를 싀우기 위해 더 이상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인간은 이제 신을 휴머니즘으로대체했으며, 금욕주의적 이상을 도덕적 이상과 인식의 이상으로 대체한 것이다.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를 사랑하는 동안에는 삶을 부정하는 이 같은 시도에 참여한다. 긍정의 거짓된 겉모습 아래에서 테세우스는 곧 부정의 능력puissance이며 부정의 정신이다. 그리고 아리아드네는 이때 아니마요 영혼이기는 하지만, 반응적인 영혼 또는 원한의 힘이다. [...] 아리아드네는 결국 자신의 오빠인 황소에 대해 원한을 품는 누이이며, 따라서 니체의 모든 작품속에는 누이를 경멸하라는 비상한 호소가 등장한다. 아리아드네는 미로 속의 실, 즉 도덕성의 실을 쥐고 있다. [...] 그렇다면 테세우스로부터 버림받은 아리아드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실 부정적인 의지와 반작용이라는 형식 간의 결합, 부정의 정신과 반응적인 영혼 간의 결합이 허무주의의 최종적인 결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부정의 의지가 반작용의 힘과 맺은 결합 관게를 파기하는 순간, 부정의 의지가 반작용의 힘을 포기하며 심지어는 그것에게 맞서기까지 하는 순간이 도래하기 때문이다. 아리아드네는 자신의 목을 매달고 죽기를 원한다. 그러나 아리아드네가 죽기를 원하는 이 순간은, 마치 허무주의가 완성되면서 허무주의 자신이 오히려 자기의 반대자에게 자기 자리를 내주는 것과 같은 그 어떤 이중의 변환을 예고하는그런 근본적인 순간(자정)이기도 하다. 이제 반응적인 힘은 그 자체가 부정되면서 적극적으로 된다. [...] 우리의 목적은 단지 아리아드네 신화가 어떻게 도대체 허무주의의 이 같은 변환을 표현해주는지를 아는 데에 있다. 테세우스로부터 버림받은 아리아드네는 디오니소스가 접근해옴을 느낀다. ㄷ디오니소스-황소는 다수의 순수 긍정이자 참된 긍정이요 긍정적인 의지이다. [...] 그는 오로지 초인에게서만, 초-영웅에게서만, 인간과는 다른 것에게서만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결국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로부터 버림을 받아야만 했다. [...] 디오니소스의 어루만짐을 통해 아리아드네의 영혼은 적극적이 된다. [...] 하지만 아리아드네이 문제로 더 이상 근심하지 않게 되는 순간, 즉 참된 그리스인인 디오니소스가 자신게 접근하는 순간 자신의 실망을 이해하기에 이른다. 영혼은 이제 적극적으로 되며, 동시에 정신은 긍정의 참된 분성을 드러낸다. 아리아드네의 노래는 이렇게 자신의 모든 의미를 취하게 된다. 즉 디오니소스가 다가오자 일어난 아리아드네의 변환을 취하며, 또 예를 말하는 정신과 지금 이 순간 일치하는 아니마로서의 아리아드네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디오니소스는 왜 아리아드네를 필요로 했을까? 또는 디오니소스는 왜 사랑받기를 원했을까? 분명 디오니소스는 긍정의 신이다. 하지만 긍정 그 자체가 긍정되기 위해서는 그 어떤 제2의 긍정이 요구된다. 또는 긍정은 긍정 그 자신을 배가할 수 있도록 그 그스로가 둘러 나우어져야만 한다. 여기에서 디오니소스가 존재의 긍정이라면, 아리아드네는 이 긍정에 대한 긍정, 제2의 긍정 또는 적극적인 생성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이제  아리아드네의 모든 상징은 그 상징들이 테세우스에 의해서 흐트러지는 대신에 디오니소스와 관계될 때, 그들의 모든 의미를 바꾸게 된다. 디오니소스는 긍정의 신이다. 그리고 아리아드네는 바로 이 긍정 그 자체를 긍정해야만 한다. 따라서 아리아드네는 디오시소스적 긍정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 디오니소스의 귀와 같은 귀를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이와 동시에 디오시소스의 귀에 대고 긍정에 대한 응답 또한 하여야 한다. [...] 디오시소스는 순수 긍정이다. 아리아드네는 아니마이자, 둘로 나누어진 긍정이며, 예에 응답하는 예이다. 하지만 둘로 나우어진 이 긍정은 디오니소스에게 배가하는 긍정으로서 되돌아온다. 영원회귀가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 간으 결합의 산물인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 영원회귀는 반드시 변환을 동반한다. 생성의 존재 또는 영원회귀는 이중 긍정의 산물이며, 이때 이 이 이중 긍정은 스스로 긍정하는 것을 되돌아오게 하고 오로지 적극적인 것만 생성되도록 한다. 반응적인 힘도 부정의 의지도 결코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변환에 의해서, 즉 선별하는 영원회귀에 의해서 제거되어버리기 때문이다. [...] 영원회귀는 이처럼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또 그것은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 간의 결합이다.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 간의 결합의 산물, 그것은 곧 초인 또는 초-영웅이며, 우얼한 인간의 반대자이다. 초인은 동굴과 꼭대기에 살아 잇는 자, 귀를 통해 성장하는 유일한 아이, 아리아드네와 황소의 아들인 것이다.

유목적 사유

Deleuze, Gilles, Pensée Nomade, In Nietzsche aujourd'hui, tome 1: Intensités, Paris, UGE, 10/18, 1973, pp. 159~74; L'îile Déserte et Autres Textes. textes et entretiens 1953-1974, edition préparée par David Lapoujade, Paris: Les Editions de Minuit. 2002, 351~64. [박정태 역, <유목적 사유>,『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이학사, 2008, 257~77.]

오늘날에 있어서의 니체는 무엇인지 또는 무엇이 되었는지를 물을 때, 우리는 이 물음과 관련하여 누구에게 말을 건네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즉 지금 이 순간 니체를 읽고 있으며 니체를 발견하는 젊은이들에게 말을 건네야 하는 것이다. [...] 일단 이들 젊은이들을 바깥에서 바라보면서 엄격한 의미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니체가 그 자신을 위해 그리고 현재와 미래의 그의 독자를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 그 어떤 이면 읽기의 권리droit au contresens를 선언했다는 사실이다. [...] 오늘날 니체적 젊은이란 누구일까? [...] 예를 들어 내가 알기에, 가장 뛰어나고, 가장 심도 있게 니체적인 최근의 글들 중에, 드사이Richard Deshayes가 시위 도중 유탄을 맞기 바로 전에 쓴 <산다는 것, 그것은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라는 글이 있다. 아마도 위의 두 경우가 오늘날의 니체적 젊은이라는 범주에서 배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니체적 젊은이는 니체에 관하여 글을 쓸 수도 있고, 또 경험의 흐름 속에서 니체적 진술을 할 수도 있다. 오늘날의 니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 속에는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 하지만 우리는 특별히 그 어떤 가증스러운 종합의 위험, 즉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 세 사람을 우리 근대 문화의 여명처럼 여기는 종합의 위험을 지적해야만 한다. 많은 사람이 이 같은 종합을 비판 과정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맑스와 프로이트는 아마도 우리 문화의 여명일 수 있다. 그러나 니체는 이들과 완전히 다른, 일종의 저항 문화contre-culture의 여명이다. 근대사회가 코드들에 근거하여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근대사회는 코드들과는 다른 기반 위에서 작동하는 사회이다. 하지만 우리가 맑스와 프로이트의 글이 아닌 맑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의 생성을 고려할 경우, 우리는 그것들이 역설적이게도 그 어떤 재코드화recodage의 시도 속으로 나아갔음을 보게 된다. 즉 맑스주의에 있어서의 국가에 의한 재코드화 [...] 와 [프로이트주의의] 가정에 의한 재코드화 [...] 를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문화라는 차원에서 볼 때,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을 진정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재코드화의 시도이다. 즉 스스로를 끊임없이 탈코드화하는 것을 그럭저럭 재코드화하는 일을 자신들의 목적으로 지니되, 하나는 공적이며 다른 하나는 사적인, 근본적인 두 관료주의와도 같은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을 진정으로 구성하는 것이 바로 이 재코드화의 시도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니체의 작업은 결코 재코드화에 있지 않다. 그의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즉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코드를 넘어서, 스스로를 코드화하지 않으며 또 코드화하지 않을 어떤 것을 작용토록 하는 일, 이 어떤 것으로 하여금 새로운 신체 위에서 작용토록 하는 일, 그리고 이 어떤 것이 그 위에서 작용하고 흐를 수 있는 신체, 즉 우리 자신의신체, 대지의 신체, 쓰여진 글의 신체 [...] 가 가 될 그런 신체를 발명하는 일, 바로 이것이 니체의 관심사요 문제인 것이다. 사람들은 코드화codage의 주요 도구들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 주요한 세 가지 도구란 법loi, 계약contrat 그리고 제도institution이다. [...] 한편 우리는 책의 예와는 완전히 다른 광기의 예를 가지고서도 코드화codage의 세 가지 도구를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광기를 코드화하려는 시도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식 아래 행해져왔기 때문이다. 우선 법의 형식들, 말하자면 병원 또는 정신병원이라는 형식들이 있다 ― 이러한 형식들은 그 자체가 곧 억압적인 코드화이자 감금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소위 정신분석학의 묘책이라는 기막힌 묘책이 있다.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의학에서 부르주아 계약 관계를 벗어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계약 당사자를 형성할 수 없었고 따라서 법적으로 보아 무능력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광인들로 취급되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의 천재적인 묘책이 등장한다. 그이 묘책이란 광기라는 말을 가장 넓은 의미로 적용할 경우에 광인들의 일부를 이루게 되는 신경쇠약증 환자들을 [의학에서 부르주아] 계약 관계 아래에 작용토록 하는 것, 그리고 이들과는 특별한 계약을 맺을 수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정신분석학적 새로움이란 그 이전까지는 광인들과 무관했던 [의학에서] 부르주아 계약 관계를 [신경쇠약증 환자들을 광인들에 포함시킨 후 이들  신경쇠약증 광인들과 특별한 계약을 맺음으로써]  결국 정신병학 속에 들여온 일이었다. 한편 최근에 이르러 행해지는 이른바 제도적인 시도들이 있다. 즉 [광기를 코드화하는 일과 관련하여] 정치적인 함의가 명백한 시도들, 때로는 혁명적인 야심이 보다 분명히 드러나는 시도들이 있다. 우리 사회가 탈코드화하는 방식 그리고 모든 말달에 이르기까지 코드들이 빠져나가는 방식과 관련하여 니체는 결코 재코드화를 시도하지 않는다. [...] 그가 글로 쓰고 사유한 것의 차원에서 볼 때, 니체가 추구하는 탈코드화는 옛날과 현재 또는 미래의 코드들을 풀어내느 상대적인 의미의 탈코드화가 아니다. 그것은 코드화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작용토록 하고 또 모든 코드를 휘젓는 그런 절대적인 의미의 탈코드화이다. [...] 실제로 나는 카프카가 프라하에 거주하는 유태인들의 언어 상황에 따라서 독일어로 구사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니체가 추구하는 탈코드화와] 비슷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카프카는 독일어에 맞서는 전쟁 기계를 독일어 속에서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비결정과 절제의 힘을 통해서, 그 이전에는 결코 알려진 적이 없었던 어떤 것이 독일어라는 코드 밑에서 작용토록 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 자신 또한 독일인보다는 폴란드인으로서 살거나 또는 그러기를 원한다. 즉 니체 또한 코드화가 불가능한 어떤 것을 독일어 속에서 작용시킬 전쟁 기계를 구축할 목적으로 독일어를 취한 것이다. 니체엑 있어서 정치로서의 문체란 바로 이것을 말한다. [...] 더 이상 환상으로 해석하는 일과 관계 없으며 더 이상 기의나 기표로 번역하는 일과 관계가 없는 순간이 존재한다. 함께 나누어야만 하는 순간, 즉 환자와 더불어 충격 속으로 스스로를 내어넣고 그 충격으로 나아가서 그의 상태를 그와 함께 누나우어야만 하는 그런 순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 우리가 느끼기에 그것은 차라리 법적이지도 않고 계약적이지도 않으며 제도적이지도 않을 어떤 관계의 필연성을 가리킨다. 우리가 니체에게서 보게 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 니체의 텍스트는 새로운 유형의 책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 니체의 경구가 지니는 특징들은 무엇인가? [...] 모리스 블량쇼가 『끝없는 대담L'Entretient infini』에서 특별히 밝힌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은 외부와의 관계relation avec le dehors이다. 실제로 사람들이 우연히 니체의 한 텍스트를 펼칠 때, 그들은 더 이상 내부성에 의하지 않은 첫 순간들 중의 하나를 보내게 된다. 말하자면 영혼이나 의식의 내부성에 의하지 않은 순간, 본질이나 개념의 내부성에 의하지 않은 순간, 즉 언제나 철학의 원리를 이루어왔던 것에 의하지 않은 한 순간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철학에 있어서 문체를 이루어온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철학에서는 바깥/외부extérieur에로의 관계가 언제나 내부성에 의해 병합되면서 그 내부성 속으로 녹아들어간다는 점이다. 하지만 니체는 반대로 외부와의 직접적인 관계 위에서 사유를 하며 글을 쓴다. 매우 멋진 그림 또는 매우 멋진 데생이란 과연 무엇인가? 거기에는 우선 하나의 틀cadre이 있다. 경구 또한 틀에 넗어짐은 물론이다. 그러나 틀 속에 있는 것은 어느 순간에서부터 멋진 것이 되는가? 그것은 틀에 넣어진 운동 또는 선이 다른 곳으로부터 온다는 사실, 그리하여 운동 또는 선이 틀의 한계 속에서 시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느끼는 순간에서부터이다. 즉 선이 틀 위 또는 틀 옆에서 시작하고 곧 틀을 가로지르는 것이다. 고다르의 영화예서 보듯이 우리는 벽과 더불어 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틀은 영상적 표면이라는 경계가 아니라 거의 그 반대의 것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외부와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 들어감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철학자들은 이처럼 외부 위에 사유를 연결하는 일을 결코 하지 않았다. <[...] 그 어떤 원인도, [...] 그리고 너무나도 다르게 거기에 있다. [...]> 이것은 국가의 설립자에 관한 니체의 유명한 텍스트 <청동에 비추어 본 예술가들>[『도덕의 계보』, Ⅱ, 17)의 한 구절이다. 또 카프카의 『중국의 벽』에는 <국경으로부터 [...] 육식동물이다.> 지금 외부로부터 오는 운동이 이 두 텍스트를 가로지르고 있다. 즉 책의 한 페이지나 그에 앞선 페이지들 속에서 시작하지 않는 운동이, 책의 틀 속에 머물지 않는 운동이, 독자들이 머리속에서 단어들을 생각하며 습관적으로 행하는 개념의 추상적인 운동이나 재현의 상상적인 운동과는 완전히 다른 운동이 이 두 텍스트를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 어떤 것이 책으로부터 튀어나와 순수 외부와의 접촉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 내가 믿기에, 니체의 모든 작품에 있어서 이면 읽기의 권리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한다. 경구, 그것은 힘들의 놀이이자, 언제나 서로 간에 외적인 힘들의 상태이다. 경구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의도 지니지 않고, 기표도 지니지 않는다. 기의와 기표는 그것들 자체가 텍스트의 내부성을 회복하는 방식이다. 경구는 힘들의 상태이며,  이때 힘들 중에서 최후의 힘, 즉 가장 최근의 힘이며 가장 현실적인 힘이자 잠정적으로 가장 최종적인 힘은 언제나 가장 외부적이다. 이렇게 해서 니체에 대한 해석의 문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단지 기계화machination의 문제만이 남게 된다. 즉 니체의 텍스트를 기계화하는 일만이, 그리고 기계화된 니체의 텍스트가 과연 어떤 외부적이고 현실적인 힘을 가지고서 그 무엇인가를 작용케 하며 에너지의 흐름을 작용케 하는지를 탐구하는 일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 따라서 우리는 니체가 젊은 파시스트들에게 자양분을 공급해왔으며 또 지금도 여전히 공급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 우리의 싸움은 텍스트의 수준에 관계하기보다는, 차라리 니체의 이러저러한 문장에다가 그 문장의 자유 구현의 의미와 그 문장의 외부성의 의미를 부여하는 외적인 힘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지정하며 재결합하는 일에 관계한다. 이렇게 볼 때, 니체의 혁명적 성격에 대해 질문이 제기되는 것은 [텍스트의 수준에서가 아니라 ] 방법의 수준에서이다. 니체적 방법은 니체의 텍스를 <그것이 파시스트적인가, 부르주아적인가, 그 자체로 혁명적인가?>라고 자문해보아야 할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 파시스트적 힘들, 부르주아적 힘들,  혁명적인 힘들이 맞부딪치는 외부성의 장으로 만든다. 그리고 우리가 문제를 이런 식으로 제기할 때, 이 같은 니체적 방법에 필연적으로 딱 들어맞는 답변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혁명적 힘(혁명적 힘이란 초인이 아닐까?)을 발견하라. 외부로부터 오는 새로운 힘들에, 경구의 틀 속에서 니체의 텍스트를 가로지르며 교차하는 새로운 힘들에 언제나 호소하라. 따라서 이제 경구에 대한 정당한 이면 읽기란 [...] 현상은 현상을 사로잡기 위하여 또는 현상을 작용토록 하기 위하여 또는 현상을 폭발토록 하기 위하여 도래하는 새로운 힘들을 기다린다. 그런데 경구를 다름 아니라 바로 이러한 현상으로 다루는 것, 이것이 곧 [경구에 대한] 정당한 이면 읽기인 것이다. 그런데 경구는 외부와의 관계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경구는 강도 상의 것l'intensif과의 관계를 그의 두 번째 특징으로 지닌다. 사실 외부와의 관계와 강도상의 그것과의 관계는 같은 것이다. 나는 앞에서 체험된 상태들을 언급했는데, 그것은 체험된 상태들을 재현이나 환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 법이나 계약 또는 제도라는 코드를 통해서 작용토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일률적인 화폐로 주조해서는 안 된다는 것, 반대로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보다 멀리, 언제나 보다 멀리, 언제나 보다 바깥으로 향하도록 만드는 그런 흐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이 체험된 상태들이 곧 강도요 강도들이다. 따라서 체험된 상태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다. 또는 체험된 상태가 반드시 주관적인 것은 아니다. 즉 체험된 상태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흐름이자 흐름의 단절이다. 왜냐하면 각각의 강도는 어떤 것이 작용함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다른 강도와 관계를 맺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체험된 상태들을  또는 강도 또는 흐름이 앞에서 언급한 코드들 아래에 있는 것이자, 그 코드들을 벗어나는 것이요, 또 코드들이 자기식대로 해석하고 바꾸며 화폐로 주조하듯 일률적을으로 만들기를 원하는 바로 그런 것들이다. [...] 그렇다면 탈 코드화의 동인이면서 동시에 그 대상과도 같은 이 강도는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니체에게 있어서 가장 신비스러운 것이 바로 이 부분들이다. 강도는 고유명사들과 더불어 보아야 하는데, 이때의 고유명사들은 사물들의 (또는 사람들의) 재현도 아니요 어휘들의 재현도 아니다. [...] 나는 역사에 나타나나는 모든 이름이다. [...] 라는 구절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이렇게 하여 여기에 일종의 유목주의nomadisme가 있게 된다. 즉 고유명사들에 의해 지칭되는 강도들이 그 어떤 충만하게 꽉 찬 신체 위에서 살아짐과 동시에 이 강도에서 저 강들로 서로서로 침투하는, 강도들의 계속적인 자리 이동이 있게 되는 것이다. 강도는 이처럼 하나의 신체 위에 강도 자신이 동적으로 옮겨 앉게 되는 관계를 통해서만, 한 고유명사가 지니는 동적인 외부성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살아질 수가 있는 것이다.니체 에게서 잇어서 고유명사가 언제나 하나의 가면, 즉 작용자의 가면인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경구와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세번째 특징은 경구가 갖는 해학과 아이러니와의 관계이다. 웃음 없이, 많이 웃음 없이, 자주 웃음 없이, 아울러 때로는 미친 듯한 웃음 없이 니체를 읽는 것은 니체를 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 그것은 정확히 우리의 저항 문화의 지평을 만드는 모든 작가에게도 해당된다. 우리의 쇠퇴와 퇴화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일, 그것은 곧 우리로 하여금 불안과 고독, 죄의식과 소통의 참극, 내부성의 모든 비극적인 것을 제기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 실제로 위대한 작품이 낳는 것은 우리의 작은 나르시시즘으로부터 비롯된 불안이나 우리의 죄의식으로부터 비롯된 두려움이 아니라, 차라리 분열적인 웃음 또한 혁명적인 기쁨이다. 우리는 이것을 초인의 희극, 또는 신의 어릿 광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실제로 우리들이 사유를 외부와의 관계 속에 놓을 때, 곧바로 디오니소스적 웃음의 순간이 태동한다. 말하자면 자유로운 공기에서의 사유가 시작되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니체는 그가 허위의식mauvaise conscience이라고 부르는 것을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고려하며 다룬다. 그러나 언제나 헤겔주의적 해석가들과 내부성에 근거한 해석가들은 이 같은 웃음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들은 말한다. 니체가 허위의식을 심각하게 취하고 있으며, 또 이렇게 취한 허위의식을 정신성의 정신생성 속에서 하나의 계기로 만들고 이쓴 것이 당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냐고 말이다. 하지만 이들은 위험을 감지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니체가 정신성을 가지고서 행하는 것에 관해서는 서둘러 무시하고 넘어가버린다. [...] 클로소프스키와 리오타르가 밝힌 바 있듯이, 니체에게 있어서 웃음은 언제나 해학과 아이러니의 외부적인 운동을 가리키며, 이때 이 외부적인 운동은 강도들의 운동, 강도에 있어서의 양들의 운동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강도들의 운동을 따라서 낮은 강도와 높은 강도들의 놀이가 행해진다. 즉 강도이 서로 뒤섞이게 됨에 따라서 낮은 강도가 가장 높은 강도를 파고 들어갈 수 있으며 더나아가 가장 높은 강도와 동일한 강도를 파고 들어갈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가장 높은 강도와 동일한 강도를 이룰 수 잇는 놀이, 그리고 이와 반대의 일 또한 있을 수 있는 놀이가 행해지는 것이다. 강도상의 높낮이들이 이루는 이 놀이, 정호가하게 이 놀이가 니체에게서 아이러니의 상승과 해학의 하강을 불어일으키는 것이며, 바깥과의 관계 속에서 체험된 것의 내용이나 질로서 스스로를 전개하는 것이다. 경구는 이처럼 웃음과 기쁨의 순수 질료이다. 아직 마지막으로 지적해야 할 특징이 있다. 이를 위해 위대한 텍스트  『도덕의 계보』에 언급된 국가와 제국의 설립자에 관한 구절로 돌아가보자. <[...] 그 어떤 원인도, 이유도 [...] 없이 마치 숙명처럼 그들이 다가온다. 우선 사람들은 이 구절을 통해 소위 아시아적 생산을 하는 인간들을 인식할 수 있다. 즉 원시 농경 사회의 기반 위에서 거대한 사업을 조직하며 잉여노동을 착취하는 관료 집단과 행정조직을 통해 전제군주가 모든 것을 초코드화하는 그런 제국 기계의 건설을 인식할 수 있다. [...] 하지만 우리는 또한 이 텍스트가 이와는 다른 측면에서 서로 구분되는 두 힘을 ―  [...] 왜냐하면  『도덕의 계보』제2부에 서 니체가 제기한 질문, 즉 원시적인 부분 공동체들이 어떻게 해서 다른 지배 권력 집단들에게 자신들의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는지를 연구할 때, 우리는 그곳에서 엄격하게 상관적인 그러나 완전히 다른 두 개의 현상이 발생함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먼저 중앙에서는 농촌공동체들이 전제군주의 관료 기계 속에서 율법 학사들, 사제들, 관리들에 의해 점령되고 고정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또한 변방에서는 공동체들이 다른 종류의 모험 속으로, 즉 유목적인 다른 종류의 단위 속으로, 유목적인 전쟁 기계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스스로를 초코드화되도록 놔두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스스스로를 탈코드화하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말하자면 전체 집단들이 떠나 유목생활을 하는 것이다. [...] 하지만 이러한 고고학적 견해와는 달리 본원적으로 유목민은 행정기계를 갖춘 전제군주에 맞서서 자기의 전쟁 기계를 가지고서 대립한다. 즉 외부적인 유목적 단위가 내부적인 전제군주적 단위에 대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양자는 너무나도 상관적이며 너무나도 상호 침투적이기 때문에, 전제군주는 유목적 전쟁 기계를 자신 속에 편입시키고 내부화하는 일을 자기의 관심사로 하는 반면, 유목적민은 자기가 정복한 제국과 관련하여서 행정조직을 발명하는 일을 자기의 관심사로 한다. 물론 이 양자는 그들이 서로 섞이는 바로 그 지점에서도 대립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철학적 담론은 제국의 형성에서부터 그리스 도시국가에 이르는 이런저런 변모와 동일한 변모를 거치면서 제국의 단위로부터 탄생한다. 하지만 철학적 담론은 그리스 도시국가를 거친 후에도 여전히 전제군주와의, 전제군주적 그늘과의, 제국주의와의, 사물과 사람에 대한 행정조직과의 본질적 관계 속에 머문다. [...] 언제나 철학적 담론은 통치권의 문제를 구성하는 법, 제도, 계약과의 본질적인 관계속에 있었으며, 전제군주의 형성에서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정착민의 역사를 관통하는 법, 제도, 계약과의 본질적인 관계 속에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기표는 진정으로 전제군주의 마지막 철학적 변모에 해당한다. 그런데 만약 니체가 철학에 속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것은 니체가 반-철학이라는 도다른 유형의 담론을 최초로 지각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그는 행정적인 합리 기계에 의해 또는 순수 이성의 관료들인 철학자들에 의해 진술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동적인 전쟁 기계에 의해 진술이 생산되게 되는 담론,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유목적인 담론을 지각한 것이다. 니체가 자신과 더불어 새로운 정치[자기 고유의 계급에 맞서 대항하는 모의라고 클로소프시키가 부른 것.]가 시작된다고 전한는 것은 [...] 우리의 체제 속에서 유목민들이 불행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그들을 정착시키기 위한 그 어떤 수단도 결코 약화되지 않기 때문에, 유목민이 불행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 하지만 유목민이 꼭 공간적으로 이동하는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장소 위에서의 여행이 잇는 것과 마찬가지로 강도 속에서의 여행 또한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역사적으로 보면, 유목민들은 이주민의 방식으로 공간적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와 반대로 이동하지 않는 사람들, 즉 코드들을 벗어나되 같은 장소에 머물기 위해 유목에 스스로 뛰어든 사람들을 말한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에 잇어서의 혁명의 문제라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 또는 국가 장치의 전제군주적이고 관료적인 조직 속에 결코 다시 빠지지 않는 엄격한투쟁의 단위를 발견하는 일이다. 즉 국가 장치르 다시는 만들지 않을 전쟁 기게를 발견하는 일,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내부적인 전제군주적 단위를 다시는 만들지 않을 유목의 단위를 발견하는 일이다. 사유를 이처럼 전쟁 기계로 만들고 유목적인 역능으로 만드는 것, 아마도 이것이 니체에게서 보이는 가장 심오한 것일 것이며, 아마도 이것이 경구 속에 나타난 그 모습 그대로의 철학과의 결별이 함축하는 진수일 것이다. 비록 여행이 부동적이라 할지라도, 또 비록 여행이 감지되지 않은 채 불시에 숨겨진 상태로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유목민들이란 무엇을 읨하는지, 누가 진정으로 우리의 니체주의자들인지 물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