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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체계의 역사들/현대 철학

샌델,『공정하다는 착각』

들어가며

2020년, COVID-19 팬데믹이 급습했다. 다른 많은 나라들처럼 미국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 이런 준비 부족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보건 자문위원들의 경고를 묵살해 버린 트럼프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던 초기 몇 주간 위기의 심각성을 평가절하했다. ··· 질병통제본부CDC는 처음에 문제 있는 진단 키트를 배포했고 이를 해결하는 데에도 늑장을 부렸고 미국 기업들이 지난 수십 년간 아웃소싱을 해온 결과, 덴탈 마스크와 의료기구를 중국 및 여러 외국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서로 뭉쳐야 하는 단결("우리는 모두 함께입니다."), 서로 떨어져야 하는 거리두기. 이 두 가지가 팬데믹 상황에서 묘하게 하나가 된 셈이다. ···· 분리를 통한 단결이라는 도덕적 모순은 "우리는 모두 함께입니다"라는 구호의 공허함에서 가장 돋보였다. 그것은 상호 간 책임을 실천하고 공통의 희생을 감수하며 나아가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예상을 뒤엎는 불평등과 정당 사이의 알력이 불거졌다. 이는 미국이 덴탈 마스크 등을 국내생산할 수 없게 만들었던 '시장 중심 세계화'가 급여 및 양질의 일자리를 수없이 빼앗아 버린 결과였다. 

그러는 동안 세계 시장과 국제 물류, 유동성 자본으로 쏠쏠한 이악을 챙긴 사람들은 갈수록 동료 시민들에게 덜 의존하게 되었으며, 그만큼 생산자 또는 소비자로서의 내국인들과 동떨어졌다. 그들의 경제 전망과 정체성은 더 이상 지역이나 국가와 무관했다. 패배자들을 밀어젖히고 우뚝 선 세계화의 승리자로서 그들은 그들만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화에서 비롯된 승패와 정치 분열 등의 문제는 더 이상 '좌냐 우냐'의 구분으로 따질 수 없게 되었다. 그보다는 '열려 있느냐 닫혀 있느냐'로 따져야 할 것이다. 열린 세계에서의 성공은 교육에, 즉 세계 경제 환경에서 경쟁하고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데 달려 있다. 그것은 각국 정부가 성공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교육 기회를 반드시 균등하게 관리해야 함을 뜻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정점에 선 사람들은 그럴 만한 노력의 결과로 성공을 얻었다'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정말로 교육 기회가 균등했다는 전제 하에, '뒤처진 사람들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말도 된다.  

이런 성공관을 가졌다면 "우리는 모두 함께입니다"라는 말을 믿기 어려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성공한 사람은 마땅히 받아야 할 노력의 대가를 받았을  뿐이라 여길 것이며, 실패한 사람은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을 업신여긴다고 여길 것이다. 세계화의 패자들이 왜 그토록 악에 바쳤는지, 그리고 왜 그토록 권위적인 포퓰리스트들에게 빠져들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포퓰리스트들은 엘리트들을 공격하며 "국경의 엄격함을 다시 확인하겠노라. 그리하여 패자들의 원한을 갚겠노라" 약속했다. 

오만과 분노의 유독한 혼합물은 트럼프를 백악관까지 밀어 올렸다. 하지만 이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단결의 원천이 될 수 없다. 우리의 도덕적, 시민적 삶을 새롭게 정립시키기 위해서는, 지난 40년간 우리의 사회적 결속력과 존중의 힘이 얼마나 약해졌는지를 제대로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그 과정을 살피면서, 공동선의 정치를 찾아 나서기 위해 생각을 모아보는 책이다. 

서론: 대학 입시와 능력주의

1. [윌리엄 싱어라는 미국 명문대 입시비리 브로커에 의해 저질러진 2019년 대규모 입시비리에 대한 서술] 그러나 이러한 분노는 단지 '특권층 부모들이 불법적 수단으로 자기 자녀들을 명문대에 합격시켰다'는 데 따른 분노보다 더한 무언가로부터 나왔다. 이 사건은 상징적인 스캔들이었다. '누가 앞서가고 잇으며 그것이 왜 허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이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게 분노하는 사람들의 주장이었다[28~9쪽]. 

2. 트럼프의 며느리인 라라 트럼프는 <폭스>와의 인터뷰에서 "이 헐리웃 엘리트들, 진보 엘리트들은 늘상 평등을 주장했죠. 모두가 공정한 몫을 받아야 한다면서요. 그런데 이야말로 사상 최대의 위선 아닌가요? [...] 그 학교에 갈 수 있는 진짜 자격을 가진 아이들을 희생시키면서 말입니다."라고 했다. 

3. 진보 쪽에서는 이 스캔들을 '보다 널리 퍼져 있는 부정의가 불거져 나온 꼬뚜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대학 입학 과정에 부와 특권이 끼치는 영향력은 심지어 부정이 없는 경우에도 심각하다는 것이다. 신문 사설과 칼럼을 쓰는 자들은 '돈은 그동안 계속 입시에서 한몫을 해왔다' 고. 특히 여러 미국 대학들이 동문의 자녀나 관대한 기부자의 자녀에게 혜택을 준다는 점을 지적했다. 

입시의 윤리

4. 그러나 공정성의 관점에서는 뒷문[거액 기부로 대학 입학을 하는 것]과 옆문[뇌물 건너기와 시험 성적 조작하기]을 구분하기 어렵다. 둘 다 부자 부모를 둔 청소년들이 더 나은 지원자가 되게끔 했으며, 능력보다 돈이 앞선 사례이기 때문이다. 능력에 근거한 입시제도는 '정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싱어의  현대로 정문은 '누구나 자신의 노력만큼 해낼 수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지원자는 그 부모가 가진 돈이 얼마든 상관없이 오직 능력, 실력으로만 입학할 수 있는 것이다(31쪽). 

5. 돈은 뒷문뿐만 아니라 정문 앞에도 떠돈다. 사실 실력은 경제적 우위와 구별해서 보기가 어렵다. SAT처럼 표준화된 시험은 그 자체로 능력주의를 의미하며, 따라서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배경을 가진 학생이라 할지라도 지적인 장래성을 보일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SAT 점수와 수험생 집안의 소득이 비례관계를 나타낸다. 더 부유한 집 학생일수록 더 높은 점수를 얻을 가능성이 크다(31~2쪽).

6. 부자 부모는 자녀를 SAT 모의 응시과정에만 넣는 것이 아니라, 사설 입시 카운슬러를 고용해 입시 스펙을 다듬어준다. [...] 그리고 해외 봉사활동도 알선해준다. [...] 이런 것들은 다 ㅏ부유한 부모가 자기 자녀에게 명문대 입학 자격을 따주기 위해 벌이는 '돈이 만이 드는 일들'이다. 학비 문제도 있다. 장학금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여유 있는 학생들은 그게 절실한 학생들에 비해서 합격할 가능성이 크다(32쪽). 

7. 이 모든 점을 따져 보면 아이비리그 대학생의 삼분의 이 이상이 소득 상위 20% 이상 가정의 출신임을 놀랄 일이 아니다. [...] 이 엄청난 입학 불평등은 일부 동문자녀 입학과 기여 입학제(뒷문) 때문이지만, 부잣집 학생들은 날개를 달고 정문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비판론자들은 이러한 불평등을 지적하며, 고등교육이 능력주의를 따르지 않음을 입증한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입시 부정 스캔들은 더 넓고 깊이 퍼져 있는 불공정의 고약한 실마리일 뿐이다. 그리고 불공정이란 고등교육 시스템이 능력주의를 따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다(32~3쪽). 

8. 두 종류의 사람들[입시 부정 스캔들을 일반적 입시 과정에서의 일탈로 보는 자/이미 대학 입시에 만연해 있던 현상의 극단적 예에 불과하다고 보는 자]의 추론의 공통 전제는 능력과 재능으로 대입이 이루어져야지, 학생 스스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다른 요인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모두 '대입은 실력에 따라야 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적어도 암묵적으로) 노력한 사람은 대입 관문을 통과해야 하고, 그에 따른 혜택을 누릴 자격을 갖는다고도 보고 있다(33쪽).

9. 능력주의의 문제는 원칙 자체보다 그 원칙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보수와 진보 사이의 정치 갈등이 그 점을 나타내준다. 우리 사회의 논쟁은 능력주의 자체를 따지지는 않고, 어떻게 그 원칙을 실현하느냐를 놓고 이뤄진다. 가령 보수주의자들은 [...] 소수집단 우대정책이 능력주의적 입학제도에 역행한다고 [...] 진보주의자들은 이러한 소수집단 우대정책이 계속되고 있는 불공정을 시정하는 방법이며, 참되 능력주의는 특권층과 취약계층 사이의 출발선을 고르게 하는 조치로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33쪽). 

10. 이 논쟁은 능력주의의 문제가 더 뿌리 깊은 것일 수 있음을 돌아보지 않는다. [...] 그렇나 불법 행위(입시 부정 스캔들)를 부추긴 태도다. 그 스캔들의 배경에 도사리고 있던 것은 하나의 가정이다. 즉 명문대 입시는 치열한 경쟁 대상이라는 가정 말이다. [...] 그들(명사들, 사모펀드 거부들)이 돈으로 얻으려 했던 입학 자격은 수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선망의 대상이었기에 그만큼 주목받은 것이다. [...] 명문대 입학은 왜 이처럼 치열해져서 특권층 부모들이 부정을 저질러서라도 자녀들을 입학시키게끔 만든 것일까? 부정까지는 아니어도 수만 달러를 들여 사설 입시 컨설턴트를 쓰고 모의 입시를 통해 자녀의 입학 기회를 높이는 일, 자녀들의 고고 시절을 고급 교과과정Advanced Placement classes [각주:1] 이수하느라, 이력서 잘 꾸미느라, 온갖 과외 활동의 부담을 지느라 인고의 시기로 만드는 일이 왜 필요해졌을까? (33~4쪽)  

11. 입시 문제에 사회가 목을 메는 현상은 최근 수십 년 동안 저점 불평등이 늘어난 데서 기원한다. [...] 가장 부유한 10%가 나머지의 몫을 빼앗아감에 따라, 명문대에 들어갈 경우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더 커졌다. 50년 전, 대학 입학은 그렇게 큰 의미를 갖지 않았다. 4년제 대학에 들어가는 미구긴은 다섯 명 가운데 한 명도 되지 않았고, 진학자들도 대체로 집에서가까운 대학을 선호했다. 오늘날에 비하면 대학 서열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평등이 늘어나면서, 또한 학사 학위 소지자와 비소지자 사이의 소득 격차가 벌어지면서 대학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어버렸다. 어느 대학에 들어가느냐 역시 중요해졌다. 오늘날 학생들은 너도 나도 소수의 주요 대학들만 선호한다. 부모의 행동방식 역시 달라졌다. 특히 전문직에 종사하는 부모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소득 격차가 벌어짐에 따라 인생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커졌다. 그런 두려움을 피하고자 부모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 적극적으로 자녀의 삶에 개입하게 되었다. 그들의 시간 사용을 간섭하고, 학점을 관리하며, 활동을 지시하는 등 희망 대학의 입맛에 맞도록 자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간섭하게 되어버린 것이다(34~5쪽). 

12. 갈수록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여유 있는 부모라면 그 자녀가 '적어도 중산층의 삶을 살았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이해할 만한 정서의 결과물이다. 좋은 대학의 졸업장은 그동안 함께 지내온 계층하고만 어울리고 싶어 하는 사회계층의 경직성에 대한 최상의 대응책으로 여겨진다(35쪽). 

능력 지표 따내기 

13. 불평등한 사회에서 꼭대기에 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공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능력주의가 원칙이 되는 사회에서는 승리자가 '나는 나 스스로의 재능과 노력으로 여기에 섰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이것이 바로 입시 부정 학부모들이 자녀에게 선물하려해 했던 것이다. [...] 명문대 간판이 줄 수 있는 '능력의 지표' 말이다. 싱어는 정문으로 들어가는 일이 "여러분 스스로 해내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 그의 입시 부정 계획은 차선책이다. 물론 SAT 점수 조작이나 가짜 특기생 자격증 등을 '스스로 해내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 옆문으로 대학에 들어가는 일은 그런 부정행위가 은폐될 때만 정문입장과 동급의 능력주의적 영예를 얻는다(36쪽). 

14. 능력주의적 대입이 갖는 특질은 뚜렷해 뵌다. 정당한 스펙으로 입학한 사람은 자신의 성취에 자부심을 가질 것이며, 이것은 자기 스스로해낸 결과라 여길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 역시 문제가 있다. 그러한 입학이 헌신과 노력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정말로 오직 '자기 스스로' 해낸 결과라고 볼 수 있을까? 그들이 스스로 해내도록 도와준 부모와 교사의 노력은 뭔가? 타고난 재능과 자질은 그들이 오직 노력으로만 성공하도록 했을까? 우연히 얻은 재능을 계발하고 보상해줄 수 있는 사회에 태어난 행운은? (37쪽)

15. 노력과 재능의 힘으로 능력 경쟁에서 앞서 가는 사람은 그 경쟁의 그림자에 가려 있는 요소들 덕을 보고 있다. 능력주의가 고조될수록 우리는 그런 요소들을 더더욱 못 보게 된다. 부정이나 뇌물, 부자들만의 특권 따위가 없는 공정한 능력주의 사회라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런 결과를 해냈다'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준다. [...] 그리고 만약 입시에 실패하면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닌 자기 자신의 잘못'이라는 인식도 심어주게 된다. [...] 우리가 스스로를 자수성가한 사람 또는 자기충족적인 사람으로 볼수록 감사와 겸손을 배우기가 어려워진다. 그리고 그런 감성이 없다면 공동선에 대한 배려도 힘들어지게 된다(37쪽).

16. 대학 입시가 능력주의의 유일 문제는 아니다. '누가 여기에 맞는 능력을 갖췄는가?'는 오늘날 정치권의 주요 화두다.  표면적으로 이 논쟁은 공정성 논쟁인 듯 보인다. '탐나는 물건이나 사회적 지위를 놓고 경쟁할 때, 모두가 정말로 공평한 기회를 갖고 있는가?" 그러나 능력주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의견 불일치는 공정성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성공과 실패 또는 승리와 패배를 어떻게 정의하는가도, 그리고 자신보다 덜 성공한 사람들에 대해 승리자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도 문제다. [...] 오늘날 양극화된 정치 환경을 넘어 길을 찾으려면 능력주의의 장단점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능력주의의 의미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어떻게 달라졌는가? [...] 세계화의 승리자들이 자신들은 '얻을 만한 걸 얻었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도록 그리고 '능력주의의 오만'에 빠지도록 바꾸지 않았던가? 엘리트층에 대한 분노가 민주주의를 위험 수준까지 밀어내게 될 때, 능력에 대한 의문은특별히 중대해진다. 우리는 우리의 갈등 지향적 정치에 필요한 해답이, 과연 능력을 원칙을 더 믿고 따르는 것인가 아니면 계층을 나누고 경쟁시키는 일을 넘어 공동선을 찾는 것인가에 대해 자문해 봐야 할 것이다(37~8쪽). 

제1장 승자와 패자

포퓰리즘적 불만에 대한 진단

1. 첫 번째 진단은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즘의 불만가 주로 인종적, 민족적, 성적 다양성의 꾸준한 증대에 대한 반동이라고 보고 있다. [···] 이러한 진단은 사회적 지위에 흠집이 난 사람들에게 주목하며, 포퓰리즘적 정서의 추한 면을 강조한다. 본토 출생자 우선주의나 여성혐오, 인종주의 등등 트럼프와 그 밖의 민족주의적 포퓰리스트들의 목소리에서 찾을 수 있는 과격 주장들을 증거로 내세우면서 말이다(43쪽). 

2. 두 번째 진단은 노동계급의 분노를 세계화와 기술혁신의 시대 변화가 너무 빠른 데 당황, 그리고 방향 상실의 결과라고 본다. [···] 이 노동자들은 이민자들, 자유주의 집권 엘리트에게 신경을 낸다. 그러나 그들의 분노는 대상을 잘못 고른 것이다(43~4쪽). 

3. 포퓰리즘을 충분히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포퓰리즘적 저항을 악의에서 나온 것으로 보든, 무지에서 나온 것으로 보든 논동의 존엄성을 깎아내리고 많은 이들을 무력하고 왜소하게 느끼도록 만든 집권 엘리트의 책임은 면제된다. [···] 트럼프와 다른 포퓰리즘적 권위주의자들의 민주주의 규범 위협에 직면해서, 지금 그 엘리트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데 이는 당연한 이들이지만 그들은 바로 자신들이 자아낸 분노가 포퓰리즘의 불을 댕겼음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소란이 역사적으로 유지해온 균형을 깨뜨린 정치적 실패에서 빚어졌다는 점을 모르고 있다(44쪽). 

'테크노크라시'와 시장 친화적 세계화

4. 이 프로젝트(두 주류 정당의 세계화 프로젝트)는 두 가지점에서 포퓰리즘의 반격에 단서 제공. 1) 이를 통해 공공선을 기술관료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 2) 승자와 패자를 능력주의적으로 정의 내리게 되었다는 점(44~5쪽). 

5. 기술관료적 정치 개념은 시장에 대한 믿음과 강하게 연관된다. [···] 하지만 시장경제야말로 공공선을 달성하는 데 기본적 도구라 여기는 것이며, 따라서 더 큰 범위에서 시장을 신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그것은 실질적인 도덕적 논쟁에 대한 공적 담론을 실종시켰으며, 논란이 있는 이념 문제를 마치 '경제 효율 문제'처럼 전문가가 독단적으로 처리할 문제인 듯 취급했다(45쪽). 

6. 시장 주도적 세계화는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그리고 국가적 정체성과 애국심도 약화시켰다. [···] 보호주의, 인종주의, 갈등 등이 갖는 협소하고 편파적이 정체성과 비교했다. 그들은 이제 '좌냐 우냐'의 기준이 아니라 '열려 있느냐 닫혀 있느냐'의 기준으로 정치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각주:2] 

7. 시장친화적이고 기술관료적인 세계화의 개념은 좌우 주요 정당들에게 고스란히 수용되었다. [···] 트럼프 당선 즈음 민주당은 기술관료적 자유주의 정당으로서 한때 그 지지기반이었던 노동자와 중산층 유권자 대신 전문직업인들에게 한껏 기울어져 있었다. 브렉시트 당시의 영국 노동당, 유럽의 사회 민주당들도 마찬가지였다. [···] 이런 변화는 1980년대부터시작되었다.[···] 시장 네커니즘이야말로 공공선을 달성하는 기본 수단이라는 전제였다. 이러한 믿음에 발맞춰 그들은 시장 중심적 세계화를 수용했고 경제가 갈수록 금융화되는 경향을 환영했다(46쪽). 

8. 이 모든 것은 버락 오바마바가 정치무대에 등장했을 때 달라지나 싶었다. [···] 그들의 권고에 따라, 오바마는 금융위기를 초래한 책임에 대해서는 불문에 붙이면서 은행들을 밀어주었다. [···] 좌파에서는 '윌가 점령' 운동과 샌더스의 대선 출마가, 우파에서는 티파티와 트럼프의 대선 출마 및 당선이 있었다. [···] 미국, 영국, 유럽에서 포퓰리즘의 발흥은 일반적으로 집권 엘리트에 대한 반작용이었지만 그 가장 두드러진 피해는 진보 및 중도 좌파 정당이 입었다. [···] 다시 대중의 지지를 바라기 전에, 이들 정당은 시장중심적 기술관료적인 통치 방식부터 점검해야 할 것이다. [···] 수십 년 동안 불평등이 증가하면서 생겨난, '성공과 실패에 대한 관점'이다. 그들은 새로운 경제 환경에서 빛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왜 '승자가 경멸적으로 깔보고 있다'고 느끼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47~8쪽).

빈부격차를 그럴싸하게 설명하는 법

9. 세계화는 그 과실을 불균등하게 배분. [···] 오늘날 가장 부유한 1%는 미국인이 하위 50%가 버는 것보다 더 많이 벌고 있다. 그러나 불평등의 폭발적 증가만으로는 포퓰리즘의 분노, 그 핵심을 설명할 수 없다. [···] 사회적 상승 가능성에 대한 이런 믿음에 응해 ,쥬류 정당과 정치인들은 기회의 평등을 늘림으로써 증가하는 불평등에 대응해왔다. 세계화와 기술 혁신으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을 억누르고, 고등교육 이수 기회를 확장(인종, 민족, 성의 장벽을 제거함으로써). '기회 균등'이라는 수사는 규칙을 지키면서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재능이 이끄는 만큼 높이 올라갈 수 있다"는 구호로 요약. 레이건에서부터 힐러리까지 모두 다 한결같은 구호로 일관했다. [···] 소득 기준 하위 5분위 가정 출신자는 스무 명 가운데 한 명만 상위 5분위에 이르렀고 ,대부분은 중산층에 이르지 못했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일은 미국보다 캐나다, [···] 그밖의 유럽 국가에서 더 많다(49~50쪽). 

10. 이는 불평등에 대해 미국이 오랫동안 변명해온 '계층 이동 가능성'이라는 말과 들어맞지 않는다. [···] 이런 사회적 이동성 관련 믿음("미국은 계급이 뚜렷한 유럽 사회에 비해 불평등 걱정을 덜 해도 돼. 우리 사회에서는 계층 상승이 가능하기 때문이지."라고 믿는 미국인이 70%로, 유럽의 35%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높다.)은 미국이 주요 유럽 국가들에 비해 왜 그처럼 복지제도에 소극적인지 설명해준다. [···] 최근 수 십 년 동안의 폭발적인 불평등 증가는 사회적 상승을 가속화시킨 게 아니라, 정반대로 상류층이 그 지위를 대물림해줄 힘만 키워주고 말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명문대학들은 한때 특권층 자녀들의 입학에 걸림돌이 되었던 인종, 종교, 성, 민족 등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 그러나 오늘날의 능력주의는 세습귀족제로 굳어져가고 있다. 하버드와 스탠포드 대학생 2/3는 소득 상위 5분위 가정 출신이다. [···] 하버드와 그 밖의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소득 상위 1%(연간 63만 달러 이상) 출신의 학생은 하위 50% 가정 출신 학생보다 많다. 노력과 재능 만으로 누구나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미국인의 믿음은 더 이상 사실과 맞지 않다. 기회 균등에 대한 담론이 과거와 같은 반응을 얻지 못하는 이유라고 보 수 있다. 사회적 이동성은 더 이상 불평등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없다. 빈부격차에 대한 진지한 대응은 무엇이든 부와 권력의 불평등을 직접 다루어야 하며,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을 돕는 방안으로 무마될 수 없다. 사다리 자체가 점점 오르지 못할 나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50~1쪽). 

능력주의 윤리

11. 도덕적으로 보자.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시장 중심 사회가 성공자에게 후하게 베풀기 마련인 어마어마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능력주의 윤리의 핵심은 '통제 불가능한 용인에 근거한 보상이나 박탈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 그런데 일정한 재능의 소유(또는 결여)를 순전히 각자의 몫으로 보아야 할까? 그렇지 않다면 재능 덕분에 상류층에 올라가는 사람이, 그와 똑같이 노력은 했지만 시장이 반기는 재능은 없는 탓에 뒤떨어져 버린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능력주의 이념에 찬성하며 그것을 자신들의 정치 신념으로 삼는 사람들은 이러한 도덕적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 [···] 능력주의 윤리는 승자들을 오만으로, 패자들은 굴육과 분노로 몰아간다. 이런 도덕 감정은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스트적 반항의 핵심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민자들이나 아웃소싱에 대한 반항 차원을 넘어, 포퓰리즘의 불만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향한다. 그리고 그 불만은 정당화된다(52쪽).

12. 능력주의적 오만은 승자들이 자기 성공을 지나치게 뻐기는 한편 그 버팀목이 된 우연과 타고난 행운은 잊어버리는 경향을 반영한다. 정상에 오른 사람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자격이 있는 것이고, 바닥에 있는 사람  역시 그 운명을 겪을 만하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기술관료적 정치의 도덕적 자세이기도하다(53쪽).  

굴욕의 정치

13. 능력주의 신앙은 그들이 입은 상처에 굴욕까지 보탠다. 자신의 곤경은 자신 탓이라는 말, "하면 된다"라는 말은 양날의검이다. 한편으로는 자신감을 불어넣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욕감을 준다. 승자에게 갈채하며 동시에 패자에게 조롱한다. · · ·  이런 점에서 굴욕의 정치politics of humility는 부정의 정치politics of injustice와는 다르다. 그것은 포퓰리즘의 반격에 기름을 붓는 분노와 울분을 언제든 일으킬 잠재력이 있다. · · · "기회" 운운하는 오바마, 클린턴과 달리 트럼프는그 말을 거의 안 썼다. 대신 그는 승자와 패자에 대해 거친 표현을 퍼부었다(사회민주주의 포퓰리스트인 버니 샌더스 역시 '기회'나 '사회적 이동성'은 거의 말하지 않는다. 대신 부와 권력의 불평등만 이야기한다). 집권 엘리트들은 지금껏 '대학 학위야말로 성공의 길이자 사회적 명망의 기반'이라고 가치를 부여해 왔기 때문에, 능력주의가 오만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그 때문에 대학에 못 간 사람들에게 고약한 낙인이 찍히게 됨을 나 몰라라 한다. 그러다 보니 포퓰리즘이 터져 나오고 트럼프가 승리할 수 있었다(53~4쪽). 

14. 민주당은 한때 특권층에 맞서 농민과 노동자의 편에 선 바 있다. 그러나 바야흐로 능력주의의 시대,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섰다가 패배한 사람(힐러리) "그래도 나는 미국의 부자와 고학력자들의 지지를 얻었다"라면서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 트럼프는 굴욕의 정치에 아주 능란했다. 경제정의라는 관점에서 그의 포퓰리즘은 가짜라고, '금권주의 포퓰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 미국이 파리 기후변화협약에서 탈퇴하기로 했을 때, 트럼프는 그것이 미국 국민의 일자리를 보호하기 위한 결정이라고 그럴 듯한 주장을 했다.  ··· 그러나 그 결정의 진짜 중요한 점이자 그의 정치이념의 핵심은 "언제부터 미국이 모욕을 당해야 했습니까? 언제부터 그들이 형편없는 나라라고 여겼습니까? 우리는 다른 국가와 정상들이 우리를 더 이상 깔보지 않기를 바랍니다."에 있다. 

기술관료적 능력과 조직적 판단

15. 사실 능력 있는 사람이 통치해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 시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와 관련된 능력은 부유함이나 좋은 가문이 아니라 시민적 미덕civic virtue과 실천지phronesis(공공선의 문제에 있어서 추론을 잘하는 실천적 지혜)의 탁월함이었다. ··· 이런 저런 차이가 있어도, 공자에서 미국 공화주의자들까지 이르는 이러한 전통적 능력주의는 통치에 적합한 능력에 도덕적, 시민적 미덕이 포함된다는 점에서 같다. 그들 모두 공동선이란 적어도 부분적이나마 시민의 도덕교육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56~7쪽). 

16. 우리가 겪고 있는 기술관료적 능력주의는 능력과 도덕적 판단의 사이의 끈을 끊어버렸다. 이는 경제 영역에서 공동선이란 GDP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간단히 정해 버렸으며, 어떤 사람의 가치는 그가 제공할 수 있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경제적 가치에 달려 있다고 못박아버렸다. 정부 영역에서는 능력이란 곧 기술관료적 전문성이라고 보았다. 

17. 능력과 공공선을 이처럼 도덕과 무관하게 보는 관점은 몇 가지 점에서 민주사회를 약화시킨다. (첫째) 능력주의 엘리트는 통치를 제대로 못한다. 1940년부터 1980년까지 미국을 다스렸던 엘리트는 성공적이었다. ··· 반면 그 뒤를 이은 집권 엘리트들은 40년 동안 노동자 임금 정체, 1920년대 이래 최대의 소득·재산 불평등,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재정 악화, 2008년 금융위기, 인프라 악화, 세계 최고의 인구 대비 구금자 비율, 선거자금 제한 철폐와 선거구의 게리맨더링에 따른 민주주의의 희화화 등을 이뤄냈다. 

18. 기술관료적 능력주의는 통치 차원에서만 맥을 못 추는 게 아니다. 민간 프로젝트 역시 그렇다. 오늘날 공동선이란 주로 경제적 차원에서 풀이 된다. 연대성을 높인다거나 시민들의 결속을 단단히 하는 일 따위는 GDP로 측정되는 소비자 선호 만족 위주의 일에 비하면 별관심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공적 담론은 갈수록 너절해져 간다. 오늘날 통용되는 정치적 참여, 그것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협소하고, 관리 위주이며, 기술관료적인 이야기 수준이다. ··· 그들은 건실한 공적 담론의 부재 현상이 '그만큼 중요한 정책상의 고민거리가 없기 때문'이 아님을 파악하고 있다. 왜 그런 걸까? 다만 그런 중요한 정책상 결정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대중의 눈과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즉 산업 분야에 휘둘리곤 하는 행정기구, 중앙은행, 주식시장, 선출직 관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기업 로비스트들 등등이 그런 결정의 주체인 것이다. ··· 공적 담론이 공허해지는 차원을 넘어서, 기술관료적 능력주의는 '사회적 인정'이라는 말의 의미를 뒤틀어놓았다. ··· 기술관료적 능력주의의 이러한 면은 분노와 양극화에 찌든 오늘날 우리의 정치 양상과 대부분 맞아 들어간다(58~9쪽). 

포퓰리즘의 준동 

19. 주류 정당과 엘리트들은 이러한 정치 차원을 놓치고 있다. 그들은 시장 주도적 세계화에는 단지 '분배의 정의' 문제만 따라온다고 여긴다. 세계 무역과 신기술, 경제의 금융화에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손해를 보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보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포퓰리즘의 불만과 기술관료적 통치의 실패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정치 담론을 이끌어갈 때 마치 시장에서 아웃소싱하듯 도덕과 정치 문제를 젖혀 버리거나, 전문가와 기술관료에게 온통 맡겨 버리면 되는 듯 해왔다. 결국 정책의 의미와 목표에 대한 민주적 합의는 사라져 버렸다. 공적 의미가 텅 비게 되면 한결같이 정체성과 생득성에 대한 거칠고 권위주의적인 형태, 가령 종교 근본주의나 적대적 민족주의 등이 그 공백을 메우기 마련이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현실이다. 시장 주도적 세계화는 40년 동안 계속되며 정치 담론의 장을 공동화했고, 보통 시민들을 무력하게 만들었으며, 포퓰리즘의 반격을 촉발했다. 그 반격이란 텅 비어버린 공론장에 무자비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민족주의를 채워 넣으려는 움직임이다(60~1쪽). 

제2장 '선량하니까 위대하다' 능력주의 도덕의 짧은 역사

우주적 능력주의

1. 성서 신학의 두 가지 면이 오늘날의 능력주의와 유사성을 드러낸다. 첫째, 인간의 능력에 대해 한껏 강조한다. 전자가 인간의 능력과 의지에, 후자가 모든 것을 신에게 돌린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말이다. 다음으로, 이러한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은 불운을 겪는 사람에게 냉혹한 태도를 부추긴다. 그 고통이 심할수록 '오죽 제대로 못했으면 저럴까' 하는 의심이 짙어진다. ··· (하지만) 마침내 신이 욥에게 말씀하실 때 그는 욥과 그 친구들이 가졌던 능력주의 가설을 부정함으로써, 희생자를 단죄하는 잔인한 논리를 부정한다. 발생하는 모든 일이 사람의 행동에 대한 보상이나 처벌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고 천명한다. 모든 빗방울이 선한 자의 곡식을 축복하려 내리는 것도 아니고, 모든 가뭄이 사악한 자를 징계하려 드는 것도아니다. ···· 우주는 인간중심적 시각으로 들여다보기에는 너무 크며, 신의 뜻 역시 인간의 이해력을 벗어나 있다. 신은 욥의 의로움을 인정하지만 신의 질서를 인간의 도덕 논리로 이해하려 했던 점에 대해서는 비난한다. <창세기>와 <출애굽기>에 나타난 능력주의의 신학에서 급격하게 이탈하는 것이다. 신에 대한 믿음은 창조의 위대함과 신비로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신이 각 개인의 능력이나 성과에 따라서 합당한 상이나 벌을 내리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69~70쪽). 

구원과 자기 구제

2. 능력주의 논쟁은 구원을 논의할 때 다시 기독교에서 등장한다. 신앙이 독실한 사람은 교리를 따르고 선행을 함으로써 구원을 얻어낼 수 있는가, 아니면 오직 신이 각자의 생활 태도와 상관없이 구원받을 사람을 자유롭게 선택하는가? ···그런데 신이 정의롭다면 그의 힘으로 방지할 수 있는 고통과 악이 왜 발생하도록 두는 것인가? 신이 전능함에도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정의롭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학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견해가 병립하기란 매우 어렵다. '신은 정의롭다, 신은 전능하다. 악은 존재한다(70~1쪽). 

3. 이 난제를 푸는 방법 하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로써 악의 존재에 대한 책임은 신에게서 우리에게로 옮겨진다. ··· 그의 고통은 악이 아니라 (옳은 것 대신 잘못된 것을 선택한 것이라는) 위반에 대한 징벌이다. 이러한 해답은 5세기 영국 수도승 펠라기우스가 있다. 그는 초기 기독교 신학에서 자유의지와 개인 책임을 내세운 대표적 인물로, 그야말로 자유주의 선구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주장은 당대 최고의 기독교 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저항에 부딪쳤다. 구원은 오직 은총으로만 이루어여져야 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행동은 다시 능력주의를 불러들였다. 교회의 예식과 절차들(세례, 기도, 미사 참석, 성사 참례 등등) 은 그것이 참여자들에게 일정한 효과를 주지 않는다면 계속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 신앙이 외적 행동으로 표현되고 교회의 복잡한 예식들로 전달 및 강화될 때 감사와 은총의 신학은 피치 못하게 자부심과 자기 구제의 신학으로 미끌어져 내린다. 이는 마르틴 루터가 자기 시대의 로마 교회를 보고 내린 결론이었다(71~2쪽). 

4.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능력주의에 대한 반론에서 피어났다. ··· (루터의 관념은) 구원이란 오직 신의 은총일 뿐이며, 선행이든 계율 준수이든 신의 마음에 들기 위한 개인의 노력과는 상관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 루터에게 있어 구원받을 자의 선택은 오로지 주어지는 것, 개인의 노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루터의 엄격한 은총론은 분명 반 능력주의적이었다.

5. ····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가 시작한 종교개혁은 청교도들 그리고 미국의 청교도 후계자들에게 치열한 능력주의 윤리의식을 가져왔다.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베버는 그렇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베버는 "내가 과연 선택 받았을까 하는 의문은 반드시 교인들의 다른 모든 관심사를 뒤로 돌려버리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과연 이 은총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떠오른다." 이 의문의 지속성과 절박성 때문에 칼뱅주의자들은 일종의 직업윤리의식을 만들어냈다. 모든 사람이 신에게서 직업을 소명으로 받았기에 그 직업에 매진하는 일은 구원의 징표가 된다는 것이다(베버, 같은 책, 110~5쪽). ··· 칼뱅주의는 근면과 금욕주의를 결부시켰다. 베버는 열심히 일하되 소비는 되도록 절제하는, 이런 규제된 접근이 부의 축적을 통한 자본주의의 발흥을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심지어 애초의 종교적 동기가 사라진 뒤에도,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와 금욕주의는 자본주의적인 축적의 배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에 충실해서 보면 이 드라마의 주요 포인트는 능력과 은총 사이의 고조된 긴장에 있다. 평생 묵묵히 힘들게 일한 삶, 그것은 분명 구원의 티켓이 도리 수 없지만 그 장본인이 이미 구원받았음을 나타내는 표시는 될 수 있다. 구원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증명한다(73~4쪽). 

6. 소명으로서 직업이라는 칼뱅주의적 관념이 청교도의 직업윤리에 녹아들면서, 그 능력주의적 함의는 더 이상 제어될 수 없었다. 즉 구원은 힘써 얻는 것이며, 직업은 그 수단이지 단순한 증표가 아니다. ··· 칼뱅의 예정설과 구언은 소명으로서의 직업을 통해 반드시 현시된다는 생각과 결함됨으로써, 세속적 성공은 구원받은 사람의 훌륭한 증표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 이는 노동 분업에 신성한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경제 질서가 섭리의 작용이라고 이해하려는' 접근을 지지해준다(베버, 160쪽). 세속적 활동으로 자신의 구원 여부를 증명하는 일을 통해 능력주의는 복귀한다. 중세 수도사들은 세속적 추구를 금욕적으로 외면함으로써 '영적 귀족주의'를 추구한 반면 칼뱅주의와 함께 기독교적 금욕주의는 '수도원의 문을 박차고 나와, 생활의 장바닥으로 발을 내디뎠다.' ··· 칼뱅주의는 "수도사들이 추구하는 세상 밖 영적 귀족주의를 대신해서, 세상 속에서 신의 예정된 성자들로 이루어지는 영적 귀족주의"를 수립했다(베버, 154/121쪽). 베버는 '능력주의적 오만의 초기판'을 제시한다. "선택된 자들과 성스러운 자들에게 주어진 은총을 알고 있다고 믿으면서, 이들은 그 이웃들의 죄에 대해서도 일정한 태도를 지닌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약한 자들'이라는 인식에서 나오는 동정적 이해가 아니다. 신의 적으로써 영원히 정죄받은 자들에 대한 증오와 혐오다"[베버, 121~2쪽). 프로테스탄트의 직업윤리는 자본주의정신의 배경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구제와 자기 운명에 대한 책임의 윤리, 능력주의적 사고 방식에 대한 적합한 윤리의식의 기반이 되었다. 이런 윤리의식은 큰 부를 축적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책임과 함께, 자수성가의 어두운 면이라할 수 있는 '불안하면서도 치열한 경쟁'을 초래한다. 은총 앞에서 느껴지는 무력감이 주었던 겸손함, 그것은 이제 자기 자신의 능력을 믿는 데서 나오는 오만으로 대체된다(75~6쪽). 

과거와 지금의 섭리론

7. 루터, 칼뱅, 청교도에게 능력주의 문제는 구원과 연관되어 있었다. ··· 한편 지금 우리에게 능력주의 논쟁은 세속적 성공과 연결된다. 성공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한 것인가? 아니면 통제 범위 밖의 요인들이 작용해 성공한 것인가? 자수성가론과 능력주의의 승리는 오늘날 세속 위주 경향의 결과라고 여기기 쉽다. ··· 그러나 오늘날 성공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우리가 종종 떠올리는 '섭리에 대한 믿음'과 무관하지 않다. ··· '성공한 사람은 그럴 만해서 성공했다'는 시념이 공통적으로 중요한 포인트다. 이러한 승리주의적 측면으로부터 승자들 사이의 오만, 패자들 사이의 굴욕이 나온다(77~8쪽).

8. 능력주의 폭정 중 일부는이러한 충동에서 비롯된다. 오늘날의 세속적 능력주의 질서는 이전의 섭리론 신앙처럼 성공에 도덕의 틀을 씌운다.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의 권력과 부를 통해 신의 섭리를 불러온 게 아니라고 해도, 성공은 그들의 탁월한 덕성을 반영한다. 부자는 가난한 자보다 부자일 만해서 부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주의의 승리주의적 측면은 '신 없는 섭리론'이고 할 수 있다. 문화역사학자자 잭슨 리어스는 칼뱅주의의 섭리론과 원조론이 사그라진 뒤에도 섭리주의적 사고의 존속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진보적 신학자들이 스스로를 구원할 인간 능력을 강조했을 때, 성공은 개인의 능력과 섭리적 계획의 일치를 나타내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의 섭리론은 때로는 지지부진하고 때로는 멈추기도 하면서, 그렇지만 확실하게 경제적 현상 유지를 정신적으로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섭리는 암암리에 부의 불평등을 지지했다."[something for nothing, 2003, 34).

9. 그는 미국의 공공 문화를 운의 윤리의식과, 보다 강력한 자수성가의 윤리의식이 벌이는 불공평한 각축장으로 보았다.  전자는 인간의 이해와 통찰력을 벗어나는 삶의 차원을 중시한다. 세상에 반드시 각자의 능력에 맞는 보상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인생에는 신비, 비극,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 반면 후자는 인간의 선택을 영적 질서의 중심에 놓는다. 신을 부정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 섭리적 질서에서의 역할을 뒤바꾼다는 뜻이다. 그는 자수성가와 자기통제의 윤리가 복음주의 걔신교에서 나왔음을 보여주면서, 결국 그 계열의 지배적 사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은총에 의한 구원'에서 루터가 매도했던 '일을 통한 구원'으로의 전환을 가져왔다. 18세기 중반까지, 일이란 성사가 아니라(전통 가톨릭에서처럼) 세속적인 도덕적 행위를 의미했다. "복음주의적 이성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섭리와, 전례 없이 유력한 인간의 노력 사이에 균형 잡힌 신앙적 태도를 마련했다."[리어스, 같은 책, 60쪽.]

10. 인간의 노력과 섭리에 따른 성스러운 구별을 하나로 엮는 일은 능력주의로의 발전에 결정적인 동력을 제공했다. 운과 언약의 윤리를 때려부수고, 세속적인 성공과 도덕적인 자격을 결합시켰다. 그는 도덕적, 그리고 시민적 손실을 뚜렷하게 지적한다. "자기 통제의 문화는 기독교적 섭리론을 뽐내며 저속하게 구는 형태로 지속되었고, 이것이 두 세기 동안 미국 도덕성의 근간이 되었다. 섭리론에서 세속적인 성공에 신성함을 부여하고, 우리가 신의(또는 '진화의') 계획 중 일부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경제적인 체제를 운영하는 우리 스스로의 계획 중 일부이기도 하다는 그럴듯한 설명을 하고, 그런 관점을 심지어 국제 분쟁에까지 적용하는 모든 태도에는 오만함이 깃들어 있다."[리어스, 같은 책, 22쪽.] 저마다 가질 만한 것을 갖는다는 섭리론적 관념은 지금의 공적 담론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 목소리는 두 종류다. 하나는 오만한 목소리, 또하나는 징벌의 목소리다. 두 가지 다 우리 스스로 운명을 책임질 것을 강조하며, 성공도 실패도 자기 탓이라고 본다. 2009년 금융위기는 섭리적 오만의 두드러진 예다. ··· 골드만삭스의 CEO 로이드 블랭크페인은 "(자신과 그의 동료 은행가들을 일컬어) 신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까요."고 대답했다. [각주:3] (한편) 섭리적 징벌론은 최근 일부 기독교 보수파에서 막대한 태풍 피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재난 이후에 들고 나왔다. [...] 큰 재난을 신의 징벌로 풀이하는 일은 기독교적 섭리론의 전유물은 아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에 사고가 났을 대, 유명 극우파 도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는 "일본이 물질주의에 빠진 데 대한 처벌"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일본 정신을 오랫동안 좀먹어온 이기주의를 씻어 내릴 쓰나미가 필요했습니다.라고 했다. 

부와 건강

11. 최근 수십 년 동안 미국 기독교는 '번영의 복음'이라고 불리는 떠들썩한 신종 섭리론을 내놓았다. TV 설교자들과 이 나라의 초대형 교회들의 전도사들 일부가 이끌었던 이 섭리론은 신이 믿는 자에게 부와 건강을 내리신다고 했다. ··· 미국 최대 교회 휴스턴 교회의 유명한 번영 전도사 조엘 오스틴은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유복한 삶을 살도록 돌아가신 겁니다."라고 했다. ··· 축복의 복음이란, 부와 건강이 유덕함의 증표라는 느역주의적 신념과는 달리 행운 앞에서의 겸손함을 불러일으킬 것도 같다. 그러나 바울러Bowler가 보듯, '축복받은'이란 은사와 보상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표현이다. "이는 순수하게 감사의 표현으로 읽힐 수 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저 스스로는 이렇게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도리 만해서 되었다는 뜻도 될 수 있다. "감사하다. 나 자신이여. 이로써 나는 될성부를 나무로 자라났다." 이야말로 행운이 아니라(bowler, death, the proseprity gosel and me, 뉴욕타임스, 2월 13일, 2016. 또한 그녀의 저서 blessed: a history of the american proserity gosel, 2013을 참조.)

12. 21세기 초, 번역 복음은 근면한 노동을 장려하고 사회적 상승, 적극적 사고 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아메리칸 드림 자체와 구별하기 얼여줬다. "번역 복음 운동은 미국인들에게 '자수성가한 국민의 나라'라는 자부심에 들어맞는 복음만 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개인 경제활동의 기반인 기본 경제구조의 정당성도 확인해주었다.", "시장이란 성공과 실패로 보상과 처벌을 구분해준다. 유덕한 사람은 풍족한 보상을 받고, 사악한 자는 파멸할 것이다."(케이트, blessed: a history of the american proserity gosel, 2013, 226쪽을 참조.)

13. 번역 복음적 사고의 거친 면은 건강보험 논쟁에서 드러난다. 트럼프/공화당 상원의원들이 오바마 케어를 비판했을 대 그들 대부분은 그들의 시장친화적 대안이 경쟁은 늘리고 비용은 줄일 것이며 사람들이 자기 통제 범위 밖의 조건을 면제받을 것이라고 여긴 반면, 앨라바마 출신 보수적인 공화당 하원의원 모 브룩스는 공화당의 계획이 '더 많은 지불과 더 많은 혜택'이라고 명시했다. ··· 더 높은 보험 요건을 가진 사람에게 더 많은 보험료를 부담시키는 보험회사의 시스템은 다만 비용-편입 분석상 타당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그의 주장은 청교도에서 번영 벅음으로 이어지는 혹독한 능력주의 논리를 재조명하는 것이다. 번영이 구원의 증표라면 고난은 죄의 증표다. ··· 이런 논리는 인간의 자유를 거침없는 의지로 설정하고, 인간이 기본적으로 자기 운명의 책임을 지는 주체라고 보는 모든 윤리 의식에 해당한다. ····2009년 오바마케어 논쟁이 한창일 때, 홀푸드 설립자인 존 매키는 <윌스트리트 저널>에 건강보험의정당성에 대해서 비판했다. 종교와는 무관한 자유방임주의에 기대고 있다. 번영 복음 전도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인의 책임을 꾸준히 강조하면서 건강을 지키는 일은 각자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6쪽). 

자유주의적 섭리론 

14. 부와 건강을 상과 벌의 문제로 보는 관점은 능력주의적 생활 방식라고 할 수 있다.  ··· 이런 사고방식은 자수성가와 자기 통제의 윤리를 확고히 찬양하며, 능력주의적 오만에 빠질 길을 열어준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이 '신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 희생자들이 겪는 재난을 자업자득이라고 여기고 희생자들을 업신여기게 된다(87쪽).

15. 그러한 오만은 번영 복음주의 보수파와 자유지상주의적 복지국가 반대론자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진보 정치계에서도 두드러진다. 미국의 힘과 번영을 섭리론 냄새가 물씬한 말로 칭송하며 그것은 '성스러운 숙명 또는 의로운 지위'라는 식으로 읊어대는 경우. 가령 2016년 민주당 대선후보 수락 연설에서의 힐러리는 "미국이 위대한 까닭, 그것은 미국이 선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 '미국은 선하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문구는 이제 우리가 그 섭리적 의미를 잊었기에 어색하지 않게 들린다. 이 말은 미국은 세계에서 뭔가 신성한 의무를 띠고 있다는, 즉 '하나의 대륙을 정복하거나 세계를 민주주의 실현에 안전한 곳으로 만들어야 할 명백한 운명'을 부여 받았다'는 오랜 묵은 신념과 짝을 이룬다(88쪽). 

역사의 옳은 편  

16. '미국은 선하기 때문에 위대하다'라는 주장은 밝고 기운찬 아이디어지만 그 이면에는 '허리케인이 죄의 대가'라는 어두움이 있다. 그것은 능력주의 신념을 국가에 적용한 것이다. ·····많은 진보파와 자유주의자들, 특히 평등 문제에 중점을 두는 사람들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부자일 만해서 부자라는 주장에 반대한다.  ·····풍요는 도덕적 우위의 표지라는 주장에 반대하면서, 평등지향적 진보파들은 운의 우발성을 강조한다. 그들은 시장 사회에서의 성공과 실패는 인성과 미덕만이 아니라 운과 상황에 따르 크게 좌우된다고 지적한다(90쪽). 

17. 그러나 '미국은 선하기 때문에 위대하다'라는 도덕론적이고 섭리론적인 아이디어를 받아내면서 동시에 부유한 개인은 자신의 미덕으로 부유해진 것이라는 도덕론적, 능력주의적 아이디어를 밀어내기란 쉽지 않다. '미국은 선하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섭리론에 내포된 능력주의적 색체는 사회적 단결, 개인의 책임, 복지국가에 등에 대한 국내적 논쟁들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80년대와 90년대 진보파들은 복지국가에 대한 보수적인 비판을 점점 더 많이 수용해갔다. 그 가운데에는 개인의 책임을 더욱 강조한다는 개념도 있었다(90~1쪽). 

18. 오늘나라 자유주의 진영의 섭리론적 태도는 국내외 정책을 모두 건드리는 또 다른 언어 표현의 변화에서도 나타난다. 자신의 정책/정치적 동맹자를 변호하며 '역사의 옳은 편에 서 있다'고 규정하는 것과 그 비판자들에 대해서 '역사의 잘못된 편에 서 있다'고 규정하는 것.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이르러서야 이 논쟁은 정치적으로 널리 통용. 대체로 민주당 사람들이 주도. ····· 클린턴과 오바마는 (조지 W. 부시/리처드 체니와 달리) 이 승리주의적 언어 표현을 다른 맥락으로 썼다. 이는 그들의 신념을 반여했다.즉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소련의 몰락 이후 역사는 의심할 수 없이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확산으로 이어져 왔다는 신념이었다(92~3쪽).

도덕 세계의 궤적

19. 소련의 몰락과 베를린 장벽 붕괴로, 많은 서구인들은 역사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자본주의로의 행로를 명백히 드러냈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런 가정에 힘입어서 그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비전을 실천에 옮겼다. 자유무역협정, 금융 규제 철폐를 비롯한 재화, 자본, 사람들의 국가 간 흐름을 쉽게 하는 여러 조치들. 그들을 글로벌 시장 확대가 글로벌 상호의존성을 높일 것이며, 국가 간 경쟁 가능성은 줄어들고 민족주의 정체성이 완화되며 인권에 대한 존중은 높아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글로벌 경제와 새로운 IT가 가져올 긍정 효과는 심지어 권위주의적 정권의 힘을 빼고 그들을 자유민주주의로 인도하기까지 하리라 여겨졌다. ··· 1980년대와 1990년대 시장친화적 세계화가 유력해질 때 이를 추진했던 엘리트들은 역사의 진행 방향을 의심하지 않았다. ··· 세계화 지지자들은 역사가 자기네 편이라고 굳게 믿었다. 클린턴은 1993년에 의회가 NAFTA를 지지하도록 설득하며, 이 협정이 미국 노동자들의 일자리 전망을 위협하리라는 우려를 무마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 자신이 가장 우려한 부분은 'NAFTA가 무산되면 세계화에 문제가 생기리라'는 것이었다. ··· 98년에 베를린에 방문한 클린턴은 "글로벌 경제로의 어려운 이행을 해낸 것", "그 혜택을 느끼지 못하 수도 잇지만", "분명 역사의 옳은 편에 서게 되었다"(독일의 세계화 수용)이라고 말했다(96~7쪽).

20. 진보파들에게 역사의 옳은 편에 서는 일은 ··· 그것은 외부에서는 글로벌 자본주의를 지지하면서 내부에서는 차별 철폐와 공평한 기회의 확대를 위해 애써야 한다는 뜻이었다. 건강보험 개혁, 가족의료 휴가법The Family and Medical Leave Act, 대학 등록금 관련 세액 공제, 연방정부 계약업체에 성소수자LGBT 차별을 금지하는 행정명령 등등은 클린턴과 오바가 종종 '역사의 옳은 편'이라는 문구와 함께 추진한 일들이었다. ··· 차별에 반대하고 기회를 확대하는 일은 가치 있는 일이다. 클린턴은 2016년 대선에서 이를 중심 주제로 삼았지만 그 당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소득과 재산의 불평등을 한껏 심화시키고 있었고 경제는 금융에 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정치는 시민보다 돈의 힘이 더 큰 목소리를 내는 상황이었다. 분노한 민족주의가 밀물처럼 일어나고, 기회 평등을 개선하려는 프로젝트는 당시 유명무실한, 대선 과정에서의 값싼 말잔치처럼 여겨지고 있었다(97~8쪽).

제3장 사회적 상승을 어떻게 말로 포장하는가

고된 노력과 정당한 자격

1. 먼저 나는 이 현상이 학생들의 성장 연령대가 레이건 시대이고 따라서 당시 유행한 개인주의 철하게 물 들었기 때문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학생들 대부분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지 않았다. 능력주의적 직관은 정치적 성향을 불문하고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 직관이란 대학 입학에서의 소수집단 우대정칙과 관련된 토론에서 특히 강하게 불거졌다. ···· 찬성하는 학생이든 반대하는 학생이든 나는 죽어라 노력해서 하버드에 왔으며 따라서 나의 지위는 능력으로 정당화된다고 여기고 있었다(107쪽). 

시장과 능력

2. 그러나 1980년대의 시장 승리주의는 제3의 담론 즉 능력주의적 담론을 촉발했다.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는 시스템 위에서 움직인다는 전제 아래, 시장은 개인에게 합당한 몫을 돌려준다고 여겨졌다. 모두가 경쟁에서 공평한 기회를 가지는 이상, 시장에서 결과는 능력주의적 보상을 받을 만했다. 능력주의적 윤리는 대처와 레이건의 자유시장 보수주의에도 슬쩍 손을 얹었지만 그들을 이어 집권한 중도좌파의 정권에서 활짝 피어났다.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중도좌파의 정치론이 갖는 특성 때문이었다. 블레어나 클린턴은 대처와 레이건이 말한 시장 신앙의 기본 전제를  문제 삼는 대신 받아들였으며, 다만 그 거친 부분을 슬슬 다듬기만 했다(110쪽). 

3. 그들은 시장 메커니즘이 공적 선을 이루는 기본 수단이라는 레이건-대처식 사고를 받아들였지만 시장이 공정하게 작동해야 함을 분명히 하려고 했다. 중도좌파 진보주의자들에게 기회의 평등은 단지 차별을 없애는 일 이상을 필요로 했다. 노동시장에서 개인이 효과적으로 경쟁할 수 있게 해줄 교육, 보건, 보육 등 여러 가지 서비스 역시 동등해질 필요가 있었다(110~1쪽). 

4. 이로써 다시 중도좌파이면서 시장친화적 자유주의 담론이 1990년대에서 2016년까지 시대를 풍미하게 된다. 이는 시장사회에만 맞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점에서는 그 저변에 깔린 원칙들을 실현하다는 의미도 있었다. 그 원칙이란 공정성과 생산성이었다. 차별을 없애고 기회를 늘리는 일은 시장을 보다 공장하게 만들고, 더 많은 재능이 유입되도록 함으로써 시장의 생산성을 높일 것이었다(클린턴은 종종 공정성 담론 밑에 생산성 담론을 깔고 말하곤 했다). [각주:4] 

5. 그러나 공정성과 생산성을 넘어, 진보주의자들은 제3의 담론도 내놓았다. 그것은 시장에 더 의미 있는 가치를 부여하는 담론이었다. 사람들이 오직 능력과 재능으로만 시장에 성과를 내밀 수 있다면 그것은 능력에 따른 자연스러운 서열화를 이루리라는 것이었다. 기회가 진실로 평등한 사회에서 시장은 개개인에게 그들에게 합당한 몫을 제공할 것이다. 지난 40년간 능력과 타당한 자격에 대한 담론은 공적 담론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능력주의로의 전환이 갖는 일부 측면은 그 부정적인 성격을 드러내 준다. 첫째, 책임을 특히 강조함으로써 복지국가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관련 리스크 부담을 정부와 기업에서 개인으로 옮기려는 태도(yascha mounk, the age of resposibility: luck, choice, and the welfare state, 2017; jacob s. hacker, the great risk shift, 2006). 둘째는 '사회적 상승에 대한 언어적 포장'이라는 표현. 열심히 일하고 규칙대로 행동하면 누구나 자기 재능과 희망이 허용하는 한 사회적 상승을 할 수 있으리라는 약속. 개인 책임의 담론과 사회적 상승의 담론은 지난 수십 년간 정치 논쟁에 불을 붙인 주역이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능력주의에 대한 포퓰리즘의 반격을 초래했다(111~2쪽). 

자기 책임의 담론

6. 80년대와 90년대, 사회적 책임은 개인에게 주어져야 마땅하다는 담론은 복지국가 관련 논쟁에서 두드러졌다.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복지국가를 둘러싼 논쟁은 연대soildarity와 관련되었다. ··· 그러나 1980년대부터 복지 국가 관련 논쟁의 중점은 연대보다 '불우한 사람들이 자신의 불우함에 얼마나 책임을 져야 하느냐'로 옮아갔다. ··· 복지국가에 대한 레이건-대처식 비판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복지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따라서 공동체는 단지 자기 책임이라 할 수 없는 불운에 대해서만 도움을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는 그 자신의 실수가 아닌 일로 힘겨워하는 삶을 결코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반드시 우리의 도움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그 자신의 실수가 아닌 일로'라는 문구는 그 배경 사상을 보여주며 마치 관대함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그 자신의 실수가 아닌 일로' 힘겨워하는 사람에게만 공동체의 도움을 주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112~3쪽). 

7. 정부의 역할을 줄이려고 했던 레이건은 이 문구를 그 어떤 선임 대통령들보다 많이 사용했다. 그러나 클린턴과 오바마는 레이건보다 두 배나 많이 사용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레이건처럼 은연중에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 가난한 사람과 그런 자격이 없는 가난한 사람을 구분했다. ···· 1992년, 클린턴은 대통령 공약으로, 그리고 취임사에서 "모두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 모두에게 그에 따른 더 많은 책임을 지도록 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정부나 서로에게 아무 근거 없이 뭔가를 요구하는 나쁜 버릇을 없앨 때입니다."Clinton, "inaugural address", january 20, 1993, the ameriacan presidency project, presidency.ucsb.edu/node/219347. 

8. 자기 책임의 담론과 사회적 상승 담론의 공통 요소. 둘 다 자립과 자수성가의 이상을 지향.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자기 책임이란 복지를 기피하고 일자리를 갖는 것이었다. 기회란 교육과 훈련을 받아 노동 시장에서 효과적으로 경쟁할 수 있께 해주는 것이었다. 기회가 평등하다면 누구나 각자의 노력과 재능에 따라 사회적 상승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성공은 그들의 능력 정도를 알려주는 지표가 될 것이다. ·· 클린턴은 "정부의 역할은, 경제적 기회를 만들어내는 일 그리고 그 자신의 실수가 아닌 일로 경제적 부담을 겪고 있는 사람을 돕는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1996년 그는 동료 민주당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인 책임 원칙'을 요구하는 복지제도 개혁법에 서명했다. 이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만 복지 혜택을 줄 것, 그리고 그들이 받는 복지 수혜 기간을 일정하게 한정할 것을 내용으로 했다.

9. 개인 책임을 강조하는 사회적 변화와 그것이 갖는 능력주의적 함의는 대서양을 가로질렀다. 클린턴이 개인 책임의 강조를 내세우는 복지 제도 개혁법을 승인했을 때, 곧 영국 수상이 될 예정이었던 토니 블레어는 "새로운 노동당은 능력주의를 당의 노선으로 삼아야 한다. 사람은 태생이나 특권에 따른 특혜가 아닌 스스로의 재능에 의해 사회적 상승을 이룰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다."라고 했다. 몇 년 뒤 게르하르트 슈뢰더 수상은 "이런 수단으로, 우리는 우리의 복지국가를 세계화 폭풍에 맞설 수 잇도록 개조할 것입니다. ··· 우리 스스로의 개인 책임도 늘려야 하며, 우리 자녀가 얻을 기회를 위한 공동의 책임도 늘려야 합니다. 사회정책적으로 이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모든 사람이 각자의 기회를 잡을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도 됩니다."라고 했다. 

10. 자기 책임의 담론은 이제 하도 익숙해져서 지난 수십 년간 그들이 띠었던 의미와, 여기에 연결된 능력주의적 성공론을 간과하기 쉽다. ··· 그러나 야스차 뭉크의 지적처럼, 이제 책임이란 "우리 스스로 자신을 돌봐야 한다는 책임이자, 그렇게 못할 경우 겪게 될 고난에 대한 책임"을 의미하게 되었다. 

재능과 노력이 허용되는 한도까지 

11. "누구나 자신의 재능과 노력이 허용되는 한도까지 출세할 수 있어야 한다" ··· 레이건은 이 구호를 정치 담론으로 제기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으로 · 그에게 사회적 상승의 담론은 단지 차별을 극복하는 것 이상. 그는 이를 여러 가지로 써먹을 수 있었는데, 가령 감세 논쟁. "감세는 모든 미국인이 각자의 노력, 기술, 상상, 창조성에 따라서 갈 수 있는 데까지 갈 장애물을 없애줄 것이다." ··· 2000년대에 사회적 상승 담론은 양당제의 틀에서 너끈히 자리 잡았다.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존 매케인, 마코 루비오는 모두 이를 열렬히 주장했다. 그러나 버락 오바마처럼 이 담론에 애착을 가진 미국 대통령은 달리 없었다. ··· '고등교육 문제에 있어' 그는 백악관에 교육관계자들을 모아 놓고서 "가장 중요한 점은 명석하고 동기부역 잘 된 청소년들에게, 그들의 재능이 그리고 그들의 직업윤리와 꿈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것입니다." 그는 대학교육을 사회적 상승의 기본 수단으로 여겼다(116~8쪽).

12. 오바마의 사회적 상승 담론은 레이건과 클린턴의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능력주의를 지향했다. 비차별을 강조하고, 열심히 노력할 것을 주장하고, '개인이 각자 책임을 지라'고 시민들에게 훈계했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사회적 상승 담론과 능력주의 윤리가 한 데 엮인다. 기회가 정말로 평등하다면 누구나 자신의 재능과 노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출세할 수 있고 그들의 성공은 그들 자신이 일궈낸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그에 대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118쪽). 

마땅히 받을 것을 받는다

13. 사회적 상승의 담론이 뚜렷해짐에 따라서 능려고가 정당한 자격에 대한 사회적 거론도 많아졌다. ··· 능력과 자격 담론이 일상생활에서 두드러지고 있을 때, 철학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 (1960/70년대와 달리) 80~90년대가 되자 영향력 있는 철학자 집단, 당시 정치계를 풍미하던 '자기 책임의 담론'을 반영하는 집단이 다시 능력주의를 들고 나왔다. '행운 평등주의자Luck-Egalitarians'라 불렸던 그들은 사회가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에 대한 의무를 따질 때, 자신의 불운에 책임져야 할 사람과 단지 운이 없었던 사람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곤경에 대한 책임이 없는 사람만이 정부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포퓰리즘의 반격

14. 사회적 상승에 관한 담론은 2016년 그 추진력을 잃어버렸다. 트럼프는 승자와 패자에 대한 거친 발언을 내놓으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노라"고 했지만, 그가 말한 위대함의 비전은 지난 40년간 미국에서 활발한 공적 담론을 일으켰던 능력주의적 기획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 트럼프와 브렉시트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포퓰리스트 정당들에 ㅍ표를 던진 많은 노동계급 사람들은 사회적 상승에 대한 약속보다는 국민 주권 원칙의 재확인, 국가 정체성과 국가적 자존심 등의 강조에 동조했던 거승로 보인다. 시장주도적 세계화를 환영하면서 그 이익 대부분을 챙기고 노동자들을 외국 노동자들과의 경쟁에 내몬 장본인들, 동료 시민들보다는 세계 각지의 엘리트들과 더 가까워 보이는 능력주의적 엘리트, 전문가, 전문직업인 계층에 대해 분노를 표출. 기존 질서에 대한 포퓰리점적 증오는 능력주의적 오만에 외국인혐오증, 인종주의, 다문화주의에 대한 적대감 등도 한몫했다. (그러나 능력주의적 오만에 기초한) 사회적 상승의 담론들은 그런 이들에게 있어 약속이라기보다는 조롱이었다. 

15. 능력주의 폭정은 사회적 상승 담론 그 이상의 것들에서 비롯되며 여러 가지의 태도와 상황을 포괄하느는데 그런 많은 것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면서 능력주의를 유해하게 만든다. 1) 노골적인 불평등이 이어지고 사회적 이동성이 가로막힌 상황에서는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에 대한 책임자이며, 우리가 얻는 것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라는 메시지가 사회적 연대를 약화하며, 세계화에 뒤처진 사람드르이 사기를 꺾는다. 2) '학력주의 편견'을 조성하며, 그로써 노동의 명예를  줄이고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의 위신을 떨어트린다. 3)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은 고도의 교육을 받고 가치중립적인 전문가들의 손에 맡길 때 가장 잘 풀릴 수 있다'(정치적 기술관료주의)는 생각은 민주주의를 타락시키고 일반 시민의 정치권력을 거세하는 상황을 초래한다(125~6쪽). 

과연 '하면 된다'가 맞나?

16. 그래서 '우리 스스로가 운명의 주인'이라는 믿음이 굳건한 미국은 사회민주주의의 유럽보다 덜 관대한 복지국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럽인들은 자신의 삶이 통제 밖의 변수에 더 많이 휘둘린다고 생각한다. 노력하고 열심히 일함으로써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면 , 정부는 '일자리와 기회가 모두에게 열려 있다'고 확인만 해주면 그만일 것이다. 미국의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 정치인들은 현재 정책이 기회의 평등 원칙에 부합하느냐에 이견을 보일 수도 있다.  ··· 달리 말해 그들은 사회적 이동성이 불평등의 해답이라고 본다. ··· 그러나 노력과 근성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미국적 믿음은 더 이상 현실과 맏지 않는다. 2차 세계대전 뒤 수십 년간 미국인들은 자기 자녀들이 자신들보다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기를 기대할 수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194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거의 전부(90%) 부모로부터 많은 수입을 올렸지만 1980년대 생은 겨우 절반이 부모보다 많이 벌어들인다(128~9쪽).

17. 사회적 상승에 대한 흔한 믿음에 반해서, 가난뱅이가 부자 되기도 훨씬 어렵다. 미국에서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은 상류층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거의 없다. (소득 수준을 다섯 단계로 구분할 때) 하층에서 태어난 사람은 겨우 4~7%만 최상층에 도달한다. 그리고 1/3 정도만이 중간층이나 그 이상까지 간다. 아메리칸 드림에서 찬미 받는 '자수성가한 부자'의 삶을 실현하는 미국인은 매우 드물다. 다른 많은 나라들보다 미국에서 사회적 이동성이 떨어지고 있다. 부나 가난의 대물림 현상은 ··· 미국에서 더 자주 일어난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부모의 부가 자녀에게 고스란히 이어지는 일이 거의 절반에 이르지만, 캐나다,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이동성이 가장 큰)에서 그 절반 정도일 뿐이다(129쪽).

보는 것과 믿는 것

18. 사회적 상승 담론이 야심적이며 아직 달성되지 못한 저 너머를 약속한다고 하지만, 결국에는 이미 이루어진 현실만을 축복하게 된다. "여기 미국에서는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출세할 수 있습니다." 호소력 강한 담론이 의레 그렇듯, 야심과 축복을 하나로 뒤섞는다. 희망은 긍정하되 현실에서 그 희망을 이룬 자들에게 한정된 축복을 보내는 것이다. 2012년라디오 연설에서 오바마는 "··· 저는 오늘날 제가 받은 교육 기회로 미국 대통령이 된 유일한 사람입니다. 저는 미국의 모든 아이들이 그런 기회를 갖기 바랍니다. 그것이 제가 반드시 이루고자 싸우고 있는 목표입니다."라고 말했다. 팩트에서 희망으로 넘어가고, 다시 팩트로 넘어가는 이러한 경향은 사회적 상승 담론에 관한 정치적 측면이 특별히 불거져 나온 것이다. 희망과 팩트를 뒤섞는 이러한 어법은 승리와 패배의 의미가 뭔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능력주의자가 나아갈 이상에 대한 야심을 나타내면, 패배자는 시스템을 비난하게 된다. 능력주의가 주어진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라면 패배자는 스스로를 비난하도록 요구받게 된다(134~5쪽).

제4장 최후의 면책적 편견, 학력주의

무기가 된 대학 간판

1. (2011년 오바마를 공격한 트럼프 및 그후 대통령이 된 트럼프의 사례, 1987/8년 첫 대통령 선거에서의 조 바이든의 사례, 그리고 2018년 트럼프의 미 연방법원 판사 지명자 브렛 커버노의 사례에서 보듯) 대학 학력의 무기화, 그것은 능력주의가 얼마나 폭정을 자행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세계화 시대는 노동계급에게 큰 폭의 불평등 확대를, 또한 임금의 정체를 안겨주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진보적, 자유주의적 정당들은 이 불평등을 직접 다루지 않았고, 경제의 구조적 개혁을 외면했다. 대신 그들은 시장 주도적 세계화를 받아들였으며, '기회의 평등을 늘리기 위한; 정책을 통해 불평등한 혜택을 조장했다(144~5쪽). 

2. 그것이 사회적 상승 담론의 포인트. 성공의 길에 놓인 장애물을 모두 제거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동등한 성공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인종이나 출신 계층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기 재능과 노력이 허락하는 한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기회가 정말로 평등하면 꼭대기에 선 사람은 그 성공과 관련된 보상을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 이것이 능력주의의 약속이었어다. 더 많은 평등의 약속이 아니라, 더 많고 더 공정한 사회적 이동 가능성의 약속 말이다. 이는 소득 사다리의 단 사이 거리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서로 먼저 사다리에 오르려 경쟁하는 과정에서만 공정함을 추구할 뿐이다(145쪽). 

불평등의 해답은 교육? 

3. 능력주의 체제를 수용하는 사람은, 진정한 기회의 평등을 위해선 차별을 뿌리 뽑는 것 이상이 요구됨을 알고 있다. 그것은 공평한 경쟁을 위한 '운동장 고르기'를 필요로 한다. 모든 사람들이 지식기반·글로벌 경제 무대에서 효과적으로 경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 결과 1990~2000년대의 주류 정당들은 불평등, 임금 정체, 제조업 일자리 감소 등에 대한 해답으로 일단 교육을 내세우게 되었다. ··· 클린턴은 "모든 사람이 대학에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뭘 얻을 수 있느냐는 우리가 뭘 배울 수 있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죠." 클린턴은 대통령 임기 동안 이런 표현을 30번 이상 했다. ···· 오마바도 미국 노동자들이 겪는 경제적 곤경의 해답을 고등교육에서 찾았다. ···글로벌 경쟁에 대한 이런 불편한 소식을 전한 그는 청중들에게 '더 많은 교육이 해답'이라고 확언했다(147쪽). 

4.  수십 년간 진보적, 자유주의적 정치권의 주된 담론은 이쪽을 맴돌았으며, 그 끝은 브렉시트, 트럼프, 그 외 포퓰리즘의 반격이었다. 글로벌 경제는 마치 자연법칙에 따르듯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 해답은 이랬다. 노동자들의 학력 수준을 높여 그들이 '글로벌 경제 환겨에서 경쟁하고 승리할 수 잇도록; 한다. 기회의 평등이 기본적인 도덕적, 정치적 프로젝트 과제였다면 고학력을 이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정책의 제1목표였다. 

5. 클린턴-오바마 시대가 끝나갈 무렵 일부 정치평론가들은 대체로 능력주의적 자유주의에 대한 민주당의 노선에 동조했다. 세계화를 수용하고, 대학 학위 취득을 응원하고, 재능 있고 학력이 좋은 사람은 최고의 위치에 올라갈 만하다고 믿는 것 등등을. 크리스토퍼 헤이즈는 최근 좌파가 "능력주의를 더욱 능력주의적이게 하는 이슈(인총차별과의 투쟁, 여성 고학력자 증대, 동성애자의 권리 증진 등)에서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소득 불평등 증가세를 완화하는 등 능력주의 관심 밖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실패했다고 했다(christopher hayes, the twilight of the elites: america after meritocracy, 2012, 48). 

6. 토머스 프랭크는 진보파들이 불평등의 해법으로 교육에 중점을 두는 시각을 비판했다. 그는 생산성은 1980~90년대에 증가했으나 임금은 그렇지 않았다. 과연 교육 실패가 불평등의 주된 원인일까? 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진짜 문제는 노동자의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것과 상관없으며, 노동자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한 데 있다.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생산한 것에서 자기 못을 요구할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들이 생산한 것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 사람들은 더, 더 많이 챙겨가고 있다.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민주당 사람들은 경제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 현실이란 독점산업에서 경제의 금융화, 그리고 노동 관리 시스템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들은 대신 그런 현실 모두를 방치하게 만드는 도덕적 환상에 젖어 있을 뿐이다."(thomas frank, listen, liberal-or what ever happened to the party of the people? 2016, 34~5. 

7. '스스로의 성공에 취한 승자들이 내린 도덕적 판단'이라는 그의 표현은 줜가 중요한 점을 꿰뚫고 있다. ···· 불평등과 수십 년 동안의 세계화로 노동자가 떠안게 된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오직 교육에만 집중하는 일은 심각한 역효과를 낳는다. 대학에 가지 않은 사람들의 사회적 명망이 추락하는 것이다. 역효과는 두 가지로 나타나지만 노동과 노동계급의 사회적 지위에 악영향을 준다. 첫째, 미국인 대부분은 대학 학위가 없다. ···· 능력주의 엘리트들은 성공과 실패의 문제를 대학 학력과 긴밀하게 엮음으로써,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이 글로벌 경제에서 힘든 상황을 겪는 것이 자업자득이라며 은연중 멸시하게 된다. 그들은 또한 대졸자의 임금 수준을 한껏 높이는 정책으로 인해 초래된 문제에서 스스로의 책임을 면제해준다. 둘째, 노동자들에게 '당신의 학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꼴이 된 것이다'라고 말해줌으로써 능력주의자들은 사람을 승자/패자로 나누는 일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부지불식간에 학력주의를 조장한다. 학력주의 편견은 능력주의적 오만의 한 증상이라고 할 수 있다. 수십 년 동안 능력주의에 더욱 물들게 되면서, 엘리트들은 출세하지 못한 사람들을 깔보는 버릇마저 들었다. 대학에 가서 자신의 조건을 향상시키라고 노동자들에게 골백번 되풀이하는 말은 아무리 의도가 좋을지라도 결국 학력주의를 조장하고 학력 떨어지는 사람들의 사회적 인식과 명망을 훼손한다(150~1쪽). 

최고의 인재들

8. 조너선 알터의 글에서처럼, "언젠가부터 오바마는 최고 지위의 전문직업인들은 공정한 '선별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빠져버렸다. 그 선별 과정은 그와 미셸이 아이비리그에 진학하도록 해준 과정이기도 하기에, 이는 곧 그런 과정을 거친 사람들의 높은 지위를 정당화해주는 것이었다."[the promise: president obama, year one, 2010, 64] ··· 학력이 뛰어난 사람이 정부를 이끈다는 것은 비교적 좋아 보인다. 그들이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노동계급의 생활을 동정적으로 이해한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 그러나 역사를 보면 뛰어난 학력과 실천적 지혜 또는 공동선 실현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가 서로 그다지 일치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9. 학력주의가 잘못된 가장 대표적인 사례 하나는 데이비드 할버스탐의 고전적 저작인 『최고의 인재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존 F. 케네디가 호화찬란한 학력의 소유자들로 내각을 꾸렷던 사례가 나와 있다. 그러나 그들의 뛰어난 전문성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늪에 뛰어들고 말았다. 알터는 케네디 내각과 오바마 내각의 비슷함에 주목한다. ··· 금융 위기를 맞이해서 윌스트리트의 편을 들어주도록 함으로써 그들은 은행들이 담보도 없이 거액의 구제금융을 받도록 했다. 덕분에 민주당은 많은 노동자들의 눈 밖에 났다. 그리고 트럼프는 백악관에 갈 꽃길을 얻었다. 

10. 이런 정치적 판단 착오는 능력주의적 오만과 무관하지 않다. 프랭크는 이를 두고서 "민주당 사람들과 윌스트리트 사람들이 널리 공유하고 있던 거대한 능력주의적 특권, 그것은 명문 대학원 학위와 직결되어 있었다"(Thomas Frank, Listen, Liberal-or What Ever Happened to the Party of the People? 2016, 40.]고 설명했다. 프랭크는 전 연방 검사로 은행 구제금융 감시관을 맡은 뒤 자신이 본 일에 대해서 냉엄한 르포 서적을 쓴 닐 배로프스키를 인용한다. 그 책은 바로  구제금융: 워싱턴은 어떻게 윌스트리트를 구하고 메인스트리트를 저버렸는가? 그것을 파해친다』(neil barofsky, new york, free press, 2012)인데, ··· 윌스트리트 간부들이 오바마 선거운동에 거액의 기부를 했음은 사실이지만, 그의 행정부가 금융업계에 관대하게 대한 것은 단지 정치적 보은 때문만은 아니었다. 배로프스크기가 지적하듯 더 심층적이고 능력주의적 풀이가 있다. 그것은 '정책결정자들 사이에서 학력이 뛰어나고 전문성이 돋보이는 투자은행가들은 그들이 실제로 받는 엄청난 보수가 아깝지 않은 인재들이다'는 믿음이 깔려 있는 게 문제라는 것이었다. 

"윌스트리트의 픽션, 즉 '금융업 간부들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닌 슈퍼맨들'이며 '어마어마한 봉급과 보너스를 받아도 전혀 아깝지 않은 나라의 보배들'이라는 픽션은 재무부 사람들이 뼛속까지 물들이고 있다. 금융 위기가 그들이 벌인 짓이 얼마나 어이없었는지 아무리 드러내 보여도, 재무부 사람들은 한 결 같이 그 헛된 믿음을 지켰다. 어떤 월스트리트 간부가 6,400만 달러의 '잔류 보너스'를 받는다고 하면 그들은 '그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어'라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배로프스키, 같은 책, 139쪽]

11. 정책 결정에서 작용한 효과를 넘어, 학력주의는 1990~2000년대 민주당 사람들의 정치적 표현 방식을 윤색했으며, 공적 담론에서 쓰는 용어조차 교모하게 변형시켰다. ··· 보통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 사이의 이분법적 대조를 많이 쓴다. ··· 지난 수십 년 동안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이 우세해지면서 그런 이분법적 가치 대조는 '스마트하냐 우둔하냐'가 대세로 자리를 잡았다. 

스마트해지기 위한 일

12. 정당 간 대결이 과열되는 시점에 '스마트하냐 우둔하냐'의 담론은 그럴듯한 호소력이 있다. 이로써 화자는 이념 전쟁에서 탈출구를 찾을 수 있으며, 뭐가 도덕적이냐에 대한 탁상공론보다 뭐가 스마트하고 센스 있으며 신중하냐에 대한 실용적인 토론으로 물러서는 자세를 보일 수 있다. 오바마도 이런 식으로 겉보기에는 초당파적이며 능력주의적인 사고방식과 발언 방식에 기댔다. 인종, 민족, 성 평등과 관련된 쟁점들에서 오마바는 유창하게 진짜배기의 도덕적 주장을 폈지만, 외교정책이나 경제정책으로 넘어가면 마치 본능인 것처럼 '스마트하냐 우둔하냐'의 비이념적인 언어를 사용했다(157~8쪽). 

대중을 내려다보는 엘리트

13.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즘의 반격에 힘을 실어준 이 불만은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다. 여론 조사는 다수 노동계급의 유권자가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알려준다.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가 지지받기 힘들 때, 학력주의는 최후의 면책 편견이 된다. 

14.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에서 실시된 일련의 설문조사에서 사회심리학자 연구팀은 ··· 대졸엘리트가 그보다 못한 교육 수준의 대중을 어떻게 낮춰 보는지를 넘어서, 몇 가지 흥미로운 결론을 이끌어냈다([각주:5]). 

첫째, 그들은 교육 받은 엘리트가 교육 수준이 낮은 대중보다 깨어 잇어서 더 관용적이라는 익숙한 생각이 어긋남을 포착했다. 전자는 후자보다 편견이 결코 적지 않다. 다만 편견의 대상이 다를 뿐. 또한 그에 대해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데 그들은 인종주의, 성차별주의에 반대할지 모르나, 저학력자에 대한 편견은 그 반대다. 

둘째, 대졸 엘리트들이 편견에 거리낌이 없는 까닭은 개인 책임을 중시하는 능력주의와 관련이 있다. 

셋째, 저학력자에 대한 이런 안 좋은 감정은 엘리트만의 것이 아니라 저학력자들 스스로도 그렇다. "저학력자들이 자신들에 대한 손가락질에 저항하는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반대로 그들은 그러하나 손가락질을 내면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저학력자들은 자신들의 상황이 자업자득이며 욕먹어도 싸다고 여기는 듯하다. 스스로에게도 말이다."[같은 논문, 444]

넷째, 연구자들은 능력주의적 사회에서 대학 진학이 계속 강조됨으로써 비대졸자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강화된다고 본다. "교육을 개인의 책임이라고 여기게 되면 교육 격차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 줄어들 것이다. 교육 성과는 대체로 개인 하기 나름이라 여겨지게 되고, 그에 따른 사회적 성공 및 실패 또한 그렇게 된다."[같은 논문, 441, 445]

학위가 있어야 통치도 한다 

15. 의회에 고학력자가 많기는 했지만 1960년대만 해도 상원의원 1/4과 하원의원 1/4이 비대졸자였다. 그리고 지난 50년 동안 의회는 인종, 민족, 성별에 잇어서 더 단원화되었지만 학력과 출신계층에서는 훨씬 일원화되었다.[각주:6] 이러한 현상의 한 가지 결과는 '노동계에서는 아주 극소수만 선출직에 몸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노동자 약 절반은 육체노동, 서비스직, 사무직에 종사하고 있지만 선출 전 그런 직업을 갖고 있던 연방의회 의원은 2%에 못 미친다. 주의회의 경우, 노동계급 출신자는 3%에 불과하다. 

16. 보다 학력이 낮은 사회 구성원들은 서유럽 전체적으로 의회에서 밀려나고 있다. 영국, 미국과 비슷한 패턴.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에서 대의정부는 고학력자들에게 점령. 부유한 나라들에서조차도 성인의 70% 가량은 비대조잘, 그러나 그 가운데 국회에 들어간 사람들은 극소수. 독일 연방의회는 83%가 대졸자, 2%도 안 되는 의원들만이 직업계 중학교(하우프트슐레)가 최고학력.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에서는 82~94% 국회의원이 대졸자. 메르켈의 2013년도 내각은 15명 장관 중 9명이 박사 학위 소지자, 나머지 6명 중 1명만 빼고 석사 학위 소지자. 

17. 어떤 이들은 고학력 대졸자들이 정부를 이끌어간다면 환영할 일이지 문제될 게 무엇이냐고 할지 모른다. ···최근의 역사적 경험은 도덕적 인성과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정치 판단 능력과 표준화된 시험에서 점수를 잘 따고 명문대에 들어가는 능력 사이에 별 다른 연관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최고의 인재들'이 저학력자 동료시민들보다 통치를 잘한다는 생각은 능력주의적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일 뿐이다(164~5쪽).

18. 하버드 졸업생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여러 배경을 지닌 자문단과 뉴딜 정책을 고안하고 실행했다. 그 자문위원들은 최근 민주당 대통령들의 자문위원들보다 더 유능했지만, 학력은 훨씬 떨어졌다. 1930년대에는 경제 관련 전문성이 최근 수십 년처럼 워싱턴의 정책에서 중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주:7] 

학력 간 균열

19. 2016년 미국 대졸자 백인의 2/3가 트럼프에게 투표했다. ··· 학력간 균열은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다. 대졸자 비중이 높은 50개 카운티 가운데 48개에서 클린턴은 4년 전 오바마가 얻은 표보다 많은 표를 얻었다. ··· 프라이머리 초기에 거둔 그의 승리를 자축하면서 트림프는 "난 덜 배운 사람들을 사랑한다!"라고 외쳤다.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좌파 정당들은 저학력자들의 지지를 얻고 우파 정당들은 고학력자들의 지지를 얻어왔다. . 능력주의 시대에 이 패턴은 뒤집혔다. 오늘날 고학력자들은 중도좌파 정당에, 저학력자들은 중도우파에 투표한다. 토마 피케티는 이러한 역전이 미국, 영국, 프랑스에 놀랄 만큼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 1980~90년대에 학력 간 균열은 크게 좁혀졌다. 그리고 2000~10년대에 좌파 정당들은 비대졸자의 지지를 잃어버렸다. ··· 2010년대가 되자 학력이 가장 결정적인 정치 균열 기준이 되었다. 한때 노동자들을 대변했던 정당들은 갈수록 능력주의 엘리트의 정당이 되고 있다(167~8쪽).

20. 민주당이 전문직업인의 정당으로 인식되어 가고 있는 미국에서 비대졸자 백인 유권자들은 민주당을 외면하고 있다. 2018년 총선에서는 비대졸자 백인 유권자의 61%가 공화당에, 민주당의 37%만이 표를 던졌다. ··· 영국에서는 노동당의 지지기반이 비슷하게 이동 중. ··· 올리버 히스에 따르면 노동계 출신 노동당 하원의원의 감소는 "이 정당이 노동계급 유권자들에게서 얻는 인기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점점 더 노동당을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대도시 엘리트들의 손에 넘어갔다'고 보고 있다." ··· 그런 불만은 저학력 유권자들의 투표 감소, 2016년에는 유럽연합 탈최 찬성표로 이어졋다. 저소득 유권자들은 고소득자들에 비해 대체로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편. 비대졸자 70%이상이 찬성, 대학원 학위자 70%이상은 반대(168~9쪽).

21. 프랑스에서는 ··· 1980년대부터 비대졸자는 사회당과 그 밖의 좌파 정당에 등을 돌렸으며 대신 고학력 엘르타가 그런 정당의 주 지지자들이 되었다.  50~60년대 좌파 정당이란 노동계그브이 정당이었다. 비대졸자가 좌파 정당에 투표하는 비율은 대졸자에 비해서 20% 정도 높았다. 80년대는 격차가 좁아졌고, 2010년대에는 역전. 대졸자가 좌파 정당 지지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비대졸자보다 10% 높음. 30%수가 역전된 것. 피케티는 좌파 정당들이 노동당 정당에서 지식계급, 전문직업인 정당으로 탈바꿈한 것이 왜 그들이 수십 년 동안의 불평등 증가에 대응하지를 않았는지를 설명해 준다고 본다. 낮은 학력을 지닌 사람들은 엘리트가 밀어붙이는 세계화에 반발하고 포퓰리스트,국수주의자 후보들에게 표를 던졌다. 트럼프, 마린 르펜 등과 같은 이들 말이다. 

22. 우리 시대 거침없는 학력주의는 노동계급 유권자들이노동계급 유권자들이 포퓰리즘 및 민족주의 정당으로 발길을 돌리도록 하며, 대학 학위의 유무 사람들의 사이 격차를 더욱 크게 벌리도록 하고 있다. 이는 능력주의의 가장 큰 상징인 고등 교육 제도에 대한 당파적 견해로 이어졌다. ··· 오늘날 59% 공화당원들이 대학이 이 나라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고, 33%만이 고학력을 좋게 보고 있다. 민주당원들은 대학이 긍정적 효과를 준다는 의견에 압도적으로 동의한다(67%, 반대 18%). ··· 능력주의의 승리에 따른 피해 중 하나로 '고학력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줄어든 것'을 들 수 있다. ···대학 학위가 품격 있는 직업과 사회적 명망의 조건이라는 생각을 근거로 정치를 하니 민주주의는 훼손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은 비대졸자의 사회적 기여를 폄하하며 사회의 저학력 구성원들에 대한 편견을 부추기고 노동계급 전체를 대의정부에서 효과적으로 배제한 결과 정치적 반격을 겪는다(171쪽).

기술관료적 담론

23. 이런 학력주의 병폐와 가깝게 이어진 것이 기술관료적인 공적 담론의 왜곡이다. 정책 결정이 '스마트하냐 우둔하냐'의 문제로 여겨질수록 '스마트한 사람(전문가나 엘리트)'이 결정하고, 일반 시민들이 토론과 결의를 하는 일은 배제하는 게 옳다고 여겨지기 마련이다. 능력주의 엘리트들에게 '스마트하냐 우둔하냐'의 담론은 도덕 및 이념적 반대에 대해 비장파적 대안을 제공하지만 그런 반대는 민주정치의 핵심에 속한 것이다. 정당정치의 갑론을박을 뿌리치고 정책을 관철하려는 의지가 너무 강하면 정의와 공동선에 대한 질문을 저버린 채 정치를 유명무실화하는 기술관료적 공적 담론으로 밀려갈 수밖에 없다(172쪽).

24.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Bully Pulpit'이라는 말은 100년 전에 처음 쓴 이후로 이 말은 대통령의 도덕적 모범, 국민 사기 진작자로서 이 위치를 가리키는 말로 쓰여 왔지만, 이제 그 말은 팩트와 데이터, 좋은 정보의 집합소라는 말로 의미가 변했다. 이야말로 기술관료적 정치관의 핵심이며 이는 단지 능력주의적 오만의 표현에 불과하다. 이 나라를 이루는 보통 사람들이 아무리 고상하더라도 그들이 정보를 판단할 전문가가 아니라면 진짜 전문가들이 그들 대신 정보를 판단하고 그들 입맛대로 팩트를 선별해서 전달해야 한다는 듯을 담고 있는 것이다

25. (오바마의) 이런 기술관료 신념에 찬 발언이 주로 기술산업 종사자들에게 어필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는 대통령 재임 중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런 정치 비전에 충실했다. 이런 식의 사고 방식 중 또 다른 사례는 기술관료 정치와 신자유주의 사이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그는 전임 대통령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대학의 경제학자들이나 기업 임원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많이 썼다. ··· 최근 경제학자들은 바람직한 행동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시장저거 인센티브를 주자는 주장을 해왔다. '인센티브제화하다incentivize'라는 새로운 동사까지 만들어졌다. 21세기 초 많은 사회과학자들, 경영 컨설턴트, 기업 임원들처럼 오바마는 시장 메커니즘이 바람직한 결과를 내도록 하는 방법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 인센티브제화는 당파주의나 이념 논쟁을 피하려는 그의 본능에 잘  들어맞는 기술관료적 개념이었다. 돈 욕심을 활용해서 공공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며, 정부의 강압이나 자유방임적 시장 선택 사이의 적절한 중용을 확보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바마는 이런 저런 일에 '인센티브제화하다incentivize'라는 말을 100번도 넘게 언급했다. 

26. 오바마는 그의 정치 언어 가운데 특히 '스마트'를 정책에 마구 붙여씀으로써 기술관료정치와 능력주의 사이의 연결고리를 조명해 주었다. 그에게 스마트하다는 것은 궁극적인 찬사였다. ···· 임기 중 오바마는 스마트 그리드나 스마트 그리드 기술에 대해서 찬양하는 말을 100번 이상 했다. 전체적으로 그는 '스마트하다'라는 형용사를 정책이나 프로그램에 900회 이상 붙여서 썼다. 기술 관료적 접근을 정책에 쓸 때의 문제점 중 하나는 정책결정권이 소수 엘리트에게 돌아가고 그만큼 일반 시민은 무력해진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정치적 설득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테크노크라시냐 데모크라시냐

27.이념 문제를 피하고 경제 쪽으로만 이야기하려는 능력주의 엘리트들의 담론은 공적 담론이 갈수록 거칠어지고 난폭해지는 추세와 우연히 겹친다. 기술관료적 담론과 고성 경쟁은 민주 시민을 움직이는 도덕적 신념의 실종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두 쪽 모두 정의와 공동선에 대한 경쟁적 개념들을 갖고 합리적으로 토론하려는 태도를 외면한다. ··· 2016년 포퓰리즘의 갑작스러운 상승(브렉시트/트럼프 승리)은 능력주의 엘리트와 신자유주의적, 기술관료적 정치 관행에 경종을 울린 것이다. ··· 2018년, 오바마는 "세계화 지지자들이 (그 흐름에) 뒤처지는 사람들의 존재 사실을 충분히 빠르게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피터 베이커는 "워싱턴 컨센서스는 지나치게 안이했다. 특히 냉전 이후 미국 사회 일부와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모든 걸 손에 쥐고 있다는 생각에 지나치게 뽐냈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28. 그러나 트럼프 시대에 양극화된 정치를 놓고 오바마는 대중이 기본 사실들에 대해 의견을 같이할 수 없음이 일차적 문제라고 분석했다. "왜 우리 정치에 그렇게 병목 현상과 독기, 양극화 현상이 많은가 하면, 부분적으로는 팩트와 정보의 공통 베이스가 없기 때문 ··· <폭스>를 보는 사람과 <뉴욕타임스>를 읽는 사람은 전혀 다른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것은 단지 의견의 차이에 그치지 않고 사실에 있어서 벌어지는 격차다. 인식론상의 차이와 같다."고 했다. 

29. (이러한 오바마의 '무엇보다 팩트가 먼저'라는 것의 즐겨 사용함은 대너얼 패트릭 모이니한 상원의원의 관용구인데, 샌델은 그러한 팩트 이전에 신념이 정치적 토론에서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정치 이전에, '우리 모두는 어떤 기본 사실에 전원 동의해야 하며, 그 이후에 우리 각자의 의견과 신념을 가지고 토론하면 된다'는 생각은 기술관료적 기만이다. 정치 토론은 종종 의제와 연관된 사시를 어떻게 잡아내고 정의할지에 대해 벌어진다. 어느 쪽이든 사실을 프레임화하는 데에 일단 성공하면, 그는 장기적으로 그 논쟁에서 이긴 셈이다. 모이니한 상원의원의 말과는 정반대로 우리의 의견은 우리의 인식을 사로잡는다. 의견이란 것은 사실이 명확히 규명되고 정립된 뒤에 비로소 생겨나는 게 아니다(178~9쪽). 

제5장 성공의 윤리

기술관료의 지배냐 귀족의 지배냐

1. 이 정보를 알면 아마도 두 번째 사회(능력주의 사회)가 첫 번째(귀족정 사회)보다 낫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 그러나 불평등 상황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정보를 바랄 수 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조차도 일부 최상위층은 '남다른 울발점에서의 유리함' 덕을 보지 않았을까 하고 의심하는 것이다. 능력주의 사회가 정의롭다고 판단하기 전에, 이 회의주의자들은 '모든 아이들에게 그 출신 가정과 무관한 교육, 문화적 기회를 최대 보장하는 정책'이 존재하는지 알고 싶어 한다(188쪽).

2. 과연 무엇이 그 사회를 정의롭게 하는가를 생각해 보는 하나의 방법이 있다. 자신이 부잣집에서 자라날지( 그 반대일지) 모른다는 전제 하에 어떤 사회를 선택하고 싶은가 따져보는 것이다. [···] 그러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제쳐 두고, 두 불평등 사회의 또 다른 실태부터 살펴보자. 처음부터 내가 최상위층이 될지 최하위층이 될지 알고 있다고 하자. 자신이 부자라면, 또는 가난한 사람이라면 둘 중 어느 사회에서 살고 싶겠는가? [···] 부자와 빈자의 차이가 두 사 모두에서 극심하므로, 어느 계층에 속할지를 미리 안다고 해서 어느 사회를 택할지 고르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88~9쪽). 

3. 소득과 재산만이 우리가 고려할 전부는 아니다. 내가 부자라고 할 때, 나는 나의 부와 특권을 내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사회를 선호할 수 있다. 그것과 그것의 반대의 상황에 따라 귀족제 사회를 선호하거나 능력주의 사회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정반대로 생각할 점이 있다. 부 또는 가난은 각각의 사회적 지위와 자부심을 상징한다는 점 말이다. 귀족정 체제에서 상류계급 지반에 태어났다면 자신의 특권이 큰 행운임을(스스로의 성취가 아니라) 인식할 것이지만 능력주의가 허용하는 최정상까지 스스로의 노력과 재능으로 치고 올라갔다면, 자신의 성공은 물려받은 게 아니라 쟁취한 것임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 능력주의 사회의 밑바닥에 놓인 상황을 생각해보자. 자신이 겪고 있는 불우함은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스스로의 탓이라고, 위로 올라가기 위한 재능과 야심이 부족했던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회적 상승을 허용하는 사회, 하물며 그런 상승을 찬양하는 사회에 산다는 것은 올라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혹독한 판결을 내리기 마련이다(189~90쪽).

능력주의의 어두운 면 

4. '능력주의'라는 용어는 그로 인한 부정적 상황을 염려하는 가운데 마이클 영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노동당과 뜻이 통하던 영국 사회학자로 1958년에 『능력주의의 등장』이라는 책을 썼다.  [···] 영은 능력주의의 어두운 면 또한 엿보았다. 영은 사라져 가고 있던 계급 중심 질서를 옹호하지는 않으며, 그 도덕적 자의성과 명백한 불공정성은 사라지는 게 바람직함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상류계급의 자만심을 부추기는 한편 노동계급이 스스로의 종속 상태를 개인 실패로 보지 않도록 해준다고 했다. 그는 "그 부모의 부와 영향력으로 저절로 상류층까지 올라가는 사람은 스스로 확신에 차서 '나는 이 일에 최적격인 사람이야'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그 자리를 공개경쟁으로 따낸 게 아님을 알고 있고, 만약 그가 정직하다면 자신의 하급자 가운데 그와 동등하거나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여럿임을 알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각주:8] 라고 말한다(191~2쪽). 

5. 비록 일부 '상류계급 사람'이 자신의 그런 위치에 걸맞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더라도 그의 아랫사람들은 그런 환상을 품지 않을 것이다. [···]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건 계급 체제의 자의성이 노동자들에게 주어진 낮은 사회적 지위를 본인들 스스로의 탓으로 돌리지 않게 해준다는 것이다(마이클 영, 같은 책, 105쪽). 그는 누군가의 사회적 지위가 우연한 이유로 정해짐을 성찰하는 것이 꽤 득이 된다고 보았다. 덕분에 승자와 패자 모두 자기 인생은 자업자득이라는 인식을 하지 않는다. 덕분에 현행 계급질서를 마냥 옹호하지 않게 되지만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역설적인 효과를 준다. 직업과 기회가 능력에 따라 배분되더라도  불평등은 줄어드맂 않는다. 불평등 구조를 능력에 따라서 재구축할 뿐이다. 이러한 재구축은 각자가 자기에게 맞는 자리를 가졌다는 생각을 굳힌다. 이런 생각은 부자와 빈자 사이의 격차를 더 벌려놓는다(102쪽). 

6. 그가 엘리트의 능력주의적 오만함을 예견한 건 아니다. 그는 그런 엘르트가 기술관료적 전문가와 친화적임을, 그들이 그럴듯한 학위가 없는 사람을 내려다볼 것임을, 그리고 이러한 태도가 공적 담론에 미칠 악영향까지 내다보았다. [···] 그들의 우월한 지성과 교육 수준 때문에 비대졸자와는 토론을 벌일 이유도 없고 그럴 일도 없다. 

"그들이 어찌 하층계급과 쌍방 대화를 벌일 수 있겠는가. 그들 엘리트는 다른, 더 풍부한, 더 정확한 언어를 쓰는 종족인데? 오늘나라 엘리트는 그들보다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의 사람들이 다른 두 가지 중요한 가치에 잇어서도 열등함을 알고 있다. 바로 '지성'과 '교육'이다. 이는 21세기에 더욱 확고부동한 가치체계로서, 가진 자들에겐 자부심의 원천이 된다(마이클 영, 같은 책, 106~7쪽). [···]

영은 "현대를 사는 우리 특유의 문제 중 하나는 일부 능력주의 구성원들이 스스로의 중요성에 취한 나머지 그들이 다스리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을 잊은 것이다.", "일부 능력주의자들의 경우 얼마나 안하무인인지, 낮은 지위의 사람들을 불필요하게 조롱하곤 한다."[193~4쪽]

엘리트에 대한 분노는, 능력주의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유발하는 자격지심과 합쳐진다. "오늘날 모든 이들은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자신에게 모든 기회가 주어져 있음을 안다. [···]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하층민이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근거가 사라져버린 것이다."[영, 108~9쪽] 그는 이러한 오만과 분노의 독소가 정치적 반동의 연료로 작용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는 2034년에는 저학력 계급이 능력주의 엘리트에 맞서 포퓰리즘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측하며 자신의 디스토피아 이야기를 끝맺는다. 2016년 영국에서의 브렉시트의 가결과 미국에서의 트럼프의 당선이 그것이다. 

능력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7. 적어도 원칙 수준에서, 정치 언어 차원에서 능력주의는 오늘날 패권을 쥐고 있다. 세계 전역의 민주국가에서 중도좌파와 중도우파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책에 대해서 '모든 시민이 그 인종, 성별, 계층 등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하며 그 노력과 재능이 허용하는 한 상승할 수 있도록 한다'고 주장한다. [···] 사람들이 능력주의에 대해서 불평하는 건 보통 그 이상에 대한 게 아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불평이다. 부유하고 유력한 사람들은 이 시스템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특권을 영구화하고, 전문직업인 계급은 자신들의 유리함을 자녀에게 물려줄 방법을 찾아낸다. 그리하여 능력주의를 세습귀족제로 탈바꿈한다. 대학들은 능력에 따라서 부자와 인매 좋은 사람들의 자녀를 유리하게 만들어준다. 이런 불평등에 따르면, 능력주의는 신화이며 아직 실현되지 못한 공허한 약속이다(195~^쪽)

8. 하지만 [···] 만약 능력주의의 현실적 문제들이 그 이상을 이루지 못한 결과가 아니라, 이상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라면?사회적 상승 담론이 더 이상 고무적이지 않다고 할 때, 단지 사회적 이동성의 정체 따문이리가보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 [···] 도덕적, 정치 프로젝트로서 능력주의에 대한 두 가지 반론을 검토해야 한다. 1) 첫 번째 반론은 설령 능력주의가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해도, 그리하여 각자의 직업과 보수가 능력과 재능에 완전 비례한다고 해도 그게 과연 정의로운 사회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2) 두 번째 반론은 만약 능력주의가 공정하다고 해도 과연 그것이 좋은 사회일지 의문을 제기하는데, 능력주의는 승자에게 오만과 불안을 자아낼 것이며 패자에게는 분노를 자아낼 것이기 때문이다(196쪽). 

완벽한 능력주의는 정의로운가?

9. 그러나 그 강력한 매력에도 불구하고 비록 완벽하게 실현된 능력주의라고 해도 정의로운 사회일 수가 없는 이유가 있다. [···] 먼저, 능력주의의 이상은 이동성에 있지 평등에 있지 않음을 주의해야 한다. (능력주의는) 부자의 자식과 빈자의 자식이 장기적으로, 능력에 근거해서 서로 자리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볼 뿐이다. 오르거나 떨어지거나 모두 그들의 노력과 재능의 소관이다. [···] 능력주의에서 중요한 건 '모두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 평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다리의 단과 단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문제가 안 된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려 한다. 이는 그 자체로는 능력주의의 반론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다. '능력주의의적 경쟁에서 비롯된 불평등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198~9쪽)

재능은 자신만의 것인가?

10. 우리의 재능이 우리 운명을 결정해야 하며, 따라서 그에 따른 보상은 당연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믿어야만 하는 것일까? 이 가정에 의문을 제기할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 첫째, 내가 이런 저런 재능을 갖게 된 것은 내 노력이 아닐 행운의 결과다. 그리고 행운에 따른 혜택(또는 부담)은 내게 당연히 보장된다고 할 수 없다. [···] 2) 두 번째로 , 내가 재능을 후하게 보상하는 사회에 산다면 그것 역시 우연이며, 내 능력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또한 행운의 결과이기 때문이다(200쪽).

11. 능력주의 신념의 매력 대부분은 '우리 성공은 우리 몫'이라는 생각으로 이뤄져 있다. [···] 그러나 우리의 재능이 노력의 결과가 아님을 인식하면 이러한 자수성가의 그림이 복잡해진다. 그것은 편견과 특권을 극복하는 것만으로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에 충분하다는 신념에 회의를 가져온다. 

노력이 가치를 창출하는가?

12.  능력주의의 이상이 재능의 우연성을 외면함으로써, 또한 노력의 중요성을 과장함으로써 도덕적 흠을 갖는다면 과연 다른 어떤 정의 개념이 대안일 수 있는지를 따져볼 때다. 

능력주의의 두 가지 대안

13. 두 가지 공공철학(자유시장 자유주의/복지국가 자유주의)은 능력주의와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둘 다 정의로운 사회는 소득과 재산을 각자의 자격에 맞게 배분해야 한다는 능력주의적 아이디어에 강력한 반론을 제기한다. [···] 그러나 실제로는 두 사상 모두 성공관에 있어 능력주의와 구별하기 어렵다. 어느 쪽도 능력주의들이 초래하기 쉬운 오만과 굴욕에 충분히 맞설 만한 공동선 이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1) 자유시장 자유주의

14. 1960년에 출간한 『자유헌정론』에서 하이에크는 자유와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평등은 '모든 시민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순수하고 형식적인 평등이라고 주장했다. [···] 그는 모두가 똑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해야 하며 똑같은 성공 전망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했다. [···] 그것은 하이에크가 보기에 어이없는, "자유와 정반대되는 계획"이다(하이에크, ,1960, p.92~3)

15. 하이에크는 능력과 가치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었다. 능력은 각자가 무엇을 얻을 자격이있는지에 대한 도덕적 판단과 관련된다. 가치는 단지 소비자가 이런 저런 상품에 얼마만큼의 대가를 지불할 의사가 있느냐에 대한 척도일 뿐이다. 그는 '받는 사람의 능력과 보상은 비례한다'고 여기며 경제적 보상에 지나친 도덕적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잘못이라고 본다. 그가 이런 도덕적 과장의 김을 빼려는 이유 중 하나는, 고삐 풀린 시장이 초래하게 될 소득과 부의 불평등에 대한 전형적 비판을 무력화하려는 것이다.  [···] '시장의 보상을 듬뿍 받은 사람에게 그럴 만한 도덕적 이유가 있다'고 주장하기보다, 애당초 경제적 보상과 개인의 능력, 도덕적 자격은 전혀 무관하다고 봐야 한다.  [···] 나의 능력이나 미덕, 또는 내가 기여하는 것의 도덕적 중요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206~7쪽). 

16. 하이에크의 핵심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예를 하나 들어 보자. [···] 반면 자유시장 옹호론자는  [···] 그러므로 그들의 (헤지펀드 메니저) 일(매니저가 소방대원이나 교사의 연금 또는 대학 기금 등을 제대로 투자할 책임을 다하는 일)이 갖는 도덕적 중요성은 그들이 얻는 많은 보수를 정당화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이에크는 그런 식의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의 주장은 더 날카롭다. 사람들이 버는 돈이 각자의 자격과 비례한다는 생각 자체가 틀려먹었다고 한다. 하이에크는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가 가진 재능이 우연히 사회에서 높은 가치를 쳐주는재능인 것은 나의 노력의 결과가아니며 도덕적 문제도 아니다. 단지 행운의 결과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태어날 때부터 있었거나 우연히 갖게 된 재능은 분명 다른 이들에게 어떤 가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 자신의 노력의 결과는 아니다. [···] 이 모든 경우에 개인이 가진 능력이나 서비스의 가치는,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의 정도는 도덕적 능력이나 자격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이렇듯) 그는 경제적 보상이 능력의 문제임을 부정함으로써 재분배에 대한 옹호론을 차단했다. [···] 그는 우리가 비록 교사의 직분이 돈 관리하는 일보다 더 찬양할 만한다 여길지라도, 봉급과 임금은 좋은 인격이나 칭찬할 만한 업적의 보상이 아니며, 시장참여자들이 내놓는 재화와 용역의 경제적 가치에 따른 보수일 뿐이라고 답변한다. 

2) 복지국가 자유주의

17. 가장 완전한 철학적 기반을 존 롤스의 저작에서 찾는다. 71년에 출간된 고전적 저작 『정의론』에서 "비록 공정한 기회를 보장하며 계층 차이에 따른 불이익을 완전히 보상해 주는 체제라고 해도 정의로운 사회로 부르기에는 불충분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만약 정말로 평평한 운동장에서 경쟁이 벌어진다면, 승자는 가장 큰 재능의 소유자일 것이다. 그러나 재능의 차이는 계층의 차이만큼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우연적 요소다." 이 책에서 그는 "비록 사회적 우연성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완벽하게 이뤄지더라도, 공정한 능력주의는 여전히 능력과 재능의 자연 배분에 따라 소득과 부가 분배되는 것을 허용한다."[롤스, 같은 책, p. 73~4.]

자연적 재능에 따른 소득 불평등은 계층 차이에 따른 불평등보다 전혀 더 정의롭지 않다. "도적적 차원에서 두 가지는 똑같이 자의적이다." 참된 기회평등을 달성한 사회라고 해도 반드시 정의로운 사회는 아니다. 그에 더해 각자의 타고난 능력차에 따라 빚어진 불평등까지 살펴보아야 한다. 

18. 일부 능력주의자들은 기회 평등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결과 평등'이며, 그것은 유능한 사람이 유리하지 못하게끔 핸디캡을 지움으로써 억지로 평등을 만드는 것이라고 우려한다. [···] 롤스는 재능 있는 사람에게 핸디캡을 주는 대안이 아닌, 승자가 남들보다 불운한 사람들과 승리의 과실을 나누는 방법을 제시했다. . [···] 재능 있는 이들이 그 재능을 한껏 갈고 닦도록 하라. 그러나 그들이 받는 보상이 시장에서 부풀려지면, 그것은 공동체 전체와 나눠가져야 한다. 그는 독특한 재능을 이런 식으로 다루는 것을 '차등의 원칙'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재능 있는 사람들이 재능을 펼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재능이 시장 사회에서 거둔 성과를 능력이나 자격을 내세워 독점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써 능력주의와 구별된다. 그는 "차등의 원칙은 '자연적 재능의 분배 상태가 공동 자산이며, 그 분배에서 비롯되는 편익은 무엇이든 공동체적으로 향유되어야 한다'는 합의를 나타낸다." [···] 사회는 반드시 "우연한 배분이 가장 불운한 사람들에게 이롭도록"(롤스, p. 101~2)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209~10쪽). 

19. 이에 능력주의자들은 "우리의 자연적 재능이 행운의 산물이라고 해도, 우리의 노력은 순전히 우리에게 달린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노력과 수고를 통해 얻은 것을 온전히 가질 자격이 있다."라고 대답할 것인데, 이에 롤스는 "노력 하려는 의지 자체도, 그러한 시도도, 그리고 흔히 말하는 자격이라는 것도 행복한 가정과 사회 환경에 근거한 것이다." 이는 노력조차도 '시장의 보상이 도덕적 자격을 반영한다'는 생각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210쪽).

20. 롤스도 하이에크처럼 도덕적 재능의 자의성을 강조하며, "시장에서의 결과가 능력이나 자격을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을 배격한다. 롤스의 입장은 세금에 의한 소득 재분배를 찬성하는 쪽이지, 반대하는 쪽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 [···]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나의 재능에 시장이 부여한 혜택을 내가 온전히 누릴 자격이 없다 할지라도, 그런 혜택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는 또 다른 문제라고 말이다. 사회가 그런 혜택을 공동체 전체에 배분해야 하는지, 아니면 사회의 가장 불우한 구성원에게 배분해야 하는지, 또는 (하이에크의 생각처럼) 단지 그것을 잡은 사람에게 온전히 넘겨야 하는지 등을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롤스에 따르면 도덕적 관점에서 자의적인 시장 소득은 매우 중대하면서도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는 부자가 그들이 번 돈을 향유할 자격이 있다는 능력주의적 주장과 충돌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공동체가 그러한 소득에 대해 정당한 도덕적 주장을 (심지어 그 일부에 대해서라도) 할 근거는 자동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 이를 위해선 '우리가 성공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공동체에 빚을 지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 공동선에 일정한 기여를 해야 한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211~2쪽). 

21. 복지국가 자유주의는 철학적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성공한 개인이 어느 정도는 공동체에 빚지고 있다'는 식의 긍정적인 주장을 표현하기보다, 개인이 그 성공의 대가를 통째로 향유하는 데 더한 부정적 주장을 더 잘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2012년 재선 유세에서 오바마는 시민의 상호의존성과 상호책임에 대해 주장했다. "여러분이 성공을 거두었다면, 여러분은 "혼자 힘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 [···] 만약 여러분이 사업을 한다면, 혼자서 그 사업을 창조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누군가가 그런 사업이 가능하도록 환경을 만들었겠죠". [···] 오바마가 "성공한 사람은 동료 시민에게 빚이 있다"고 어색하게 말한 것은 단지 말실수 차원이 아니며, 복지국가 자유주의 철학의 약점을 나타내준다. 그것이 반드시 필요로 하는 '연대에 적합한 공동체'를 제대로 인식시키는 데에 실패한 것이다. 이는 아마도 최근 수십 년 동안 복지국가의 정당성이 미국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흔들린 까닭을 말해준다. 또한 최근 수십 년 동안 불평등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정치판과 대중 사이에서 능력주의가 판을 치는 일을 자유민주주의가 막지 못한 데 대한 설명도 될 것이다. 

능력주의에 대한 거부

22. 하이에크와 롤스 모두 정의의 기반으로서 능력이나 자격을 거부한다. 전자가 능력 차원에서 경제적 보상을 해주는 일을 부정한 것은 '재분배 요구를 차단'하기 위함이었고, 후자가 능력이나 자격 차원에서 경제적 보상을 해주는 일을 부정한 것은 정반대의 정치적 입장, 즉 '재분배 요구를 옹호'하기 위해서였다. . [···] 그들이 정의의 기반으로서 능력을 거부한 것은 두 가지 철학적인 고려에서 그들이 함께함을 잘 보여준다. 1) 하나는 다원적 사회에서 어떤 미덕이나 인성의 성질이 보상받을 만한가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기 어렵다는 점이다. 2) 다른 하나는 자유의 문제다. [···] (하이에크는) "개인의 위치가 도덕적 능력에 대한 관념에 기준하여 정해지는 사회는, 자유 사회의 정반대 사회다."라고 주장한다. [···] 롤스 역시 능력과 자격에 대한 의견 불일치가 널리 존재함을 지적한다. 그리고 자격을 정의의 기반으로 삼는 일은 자유와 불일치하게 된다고 우려한다. 하지만 롤스는 그와 달리 자유를 시장 차원에서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자유란 좋은 삶에 대한 각자의 개념을 추구하되 다른 이들의 추구할 권리 또한 존중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특수한 이해관계와 유불리를 초월해서 모든 동료 시민이 동의하는 정의 원칙을 마련해서 그것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정의를 보면 어떤 식으로든 시장에 근거해 소득을 분배하는 일을 용인할 수는 없다. 반대로 우리는 사회의 가장 불우한 사람들에게 득이 되는 불평등만은 받아들 일 수 있을 것이다(214~5쪽). 

23. 하이에크와 롤스 모두 '경제적 보상이 개인의 자격에 근거하면 안 된다'고 본 것이다. [···] 롤는 소득과 부가 도덕적 자격에 따라 분배되어야 한다는 '상식적인 가정'에 대해 언급했고, 하이에크는 자신의 능력 거부론이 '처음에는 이상하게, 심지어 충격적이게 들릴 수 있음'을 인정했다. [···] (이 두 입장이) 지난 50년 동안 공적 담론을 지배했다고 하더라도, '각자가 자신에게 맞는 것을 가져야 한다'는 일반적 신념을 뒤집지는 못했다(216쪽). 

시장과 능력

24. 두 자유주의 모두 공정한 경쟁 체제에서는 부자가 빈자보다 더 많은 자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능력주의적 관념을 부정했음에도 그들이 대신 내놓은 대안은 능력주의적 사회에 친화적이었다. 승자는 오만을, 불우한 자는 분노를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25. 도덕적 그리고 심리적으로 능력과 가치의 구별은 좀처럼 쉽지 않다. 돈이 거의 모든 것의 척도가 되는 시장 사회에서는 더우 그렇다. 그런 사회에서 부자에게 "당신의 부는 당신이 사회에 기여한 탁월한 가치덕분이다"라고 말해준다면?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의 가난은 당신이 기여한 것의 가치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면? 가치 판단이 쉽다면 그것은 능력 판단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어떤 사람의 시장 가치는 그의 사회 기여도를 따지는 좋은 척도'라는 친숙하지만 의문의 여지가 있는 명제를 받아들이면 그것은 곧 가치와 능력의 등치 쪽으로 흐른다. 하이에크는 이 가정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우리의 시장 가치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에 좌우되며, 우리 능력의 척도일 수 없다고 지적했지만 그는 어떤 사람의 사회 기여 가치가 그 자신의 시장 가치 이외의 것이 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218~9쪽). 

26. 일단 시장 가치가 사회적 기여도를 나타내는 지표로  여겨지면, 정의의 차원에서 각 개인은 그 시장 가치 또는 경제 용어로 '한계생산물'에 따라 소득을 얻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표준 경제 분석에 따르면 완전 경쟁 시장은 노동자 개인에게 그의 한계 생산물, 즉 노동자가 창출한 가치에 해당하는 보수를 지급한다. [···] 부시의 경제고문인 멘큐는 이러한 주장의 최신판이다. [···] 멘큐는 이런 논리를 경쟁적 시장경제의 모든 소득에 적용한다. 도덕성은 경쟁적 시장이 산출하는 성과물을 돌봄노동자에게나 헤지펀드 매니저에게나 똑같이 적용토록 해야 한다. "각 개인의 소득은 그가 이 사회에 내놓은 재화와 용역의 가치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러한 이상적 조건에서 모든 개인은 자신의 정당한 몫을 받는다."라고 주장한다. 경쟁적 자유시장이 어떤 소득을 주든 도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은 신고전주의 경제학의 초기로 돌아가는 모양새다. [···] 하이에크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게 아닌 생득적 능력에 따라 소득을 얻는다는 관념에 반대했다. 그것은 수요와 공급의 우연성에 의존한다고도 했다. 내가 가진 재능이 희귀한지 흔해빠졌는지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시장에서 갖는 위치에 따라 나의 소득은 결정된다. 맨큐의 '정당한 자격'이론은 그러한 우연성을 간과하고 있다(219~20쪽). 

쟁취한 자격인가, 권리된 안정된 자격인가?

27. 사람들은 시장이 부여하는 경제적 보상을 각각 받을 도덕적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는데, 왜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역시 능력주의적 오만을 부추기는 걸까. 롤스가 정의의 기반으로서 자격을 부정한 의미부터 명확히 해보자. [···] 롤스는 도덕적 자격과 그가 '정당한 기대에 대한 권리 인정'이라고 부르는 것 사이에 미묘하지만 차이를 둔다. 자격desert은 주체가 무언가를 주장하는 것이지만, 권리 인정entitlement은 일정한 경쟁 규칙을 준수했을 때 부여되는 것이다. 어떻게 규칙을 정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일단 알 수 없다. 롤스의 요점은 우리가 먼저 정의의 원칙(경쟁 규칙의 상위 원칙이 되며, 보다 넓게는 사회의 기본 구조를 규정하는 원칙)을 정립하기 전에, 누가 권리를 인정받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 여기서 이런 구별이 능력주의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도덕적 자격 위에 정의를 세운다면 '미덕과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 보상한다'는 규칙을 세우는 셈이다. 롤스는 이를 부정했다. 그는 경제 시스템을(또는 그런 점에서 사회적 기여를) 미덕에 대한 표창이나 좋은 인성을 배양하는 데 쓴다면 잘못이라고 여겼다. 정의에 대한 고려는 능력과 미덕에 대한 고려보다 앞서야만 한다(225~6쪽). 

28. 이게 롤스의 반능력주의론의 핵심이다. 정의로운 사회에서 부유해지거나 명예로운 지위에 오른 사람은 그런 성공의 혜택을 향유할 권리를 인정받는다. 그것이 그들의 탁월한 능력을 증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런 혜택이 모든 이(그 사회의 가장 불우한 사람을 포함하는)에게 공정한 시스템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의로운 구조는 각자 인정받은 권리에 부응한다. [···] 각자의 의무와 권리를 정해주는 정의의 원칙은 도덕적 자격을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에 부응하는 배분도 있을 수 없다."[정의론, p. 311]

29. 롤스가 능력을 배제함으로써 두 가지  쟁점이 떠오르게 된다. 하나는 정치적, 또 하나는 철학적 쟁점이다. 1) 정치적으로 롤스는 부자들이 '이 부는 내가 쌓은 것이다. 도덕적 자격에 따라 내것이다'라며 재분배 목적의 징세에 항의하는 일을 차단하고 싶었다. 이는 재능과 그 밖의 여러 우연성이 성공에 기여하는 것을 긍정하는, 도덕적 해이라는 것이다. 2) 철학적으로 정의의 원칙이 능력, 미덕, 도덕적 자격 등을 고려하지 않고 정립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롤스 자유주의의 보다 일반적 주장의 일환이다. 즉 "옳음right(사회 전체를 다스리는 의무와 권리의 틀)이 좋음good(그 틀 안에서 사람들이 각자 따르는 미덕과 좋은 삶의 다양한 개념들)에 앞서야 한다"는 주장이다. 특정한 미덕, 능력, 도덕적 자격 등을 인정하는 정의의 원칙은 그와는 다른 '좋은 삶'의 개념 주장들에 대해 중립적일 수가 없다(227~8쪽). 

성공에 대한 태도

30. 경제적 성공에 대한 롤스의 반능력주의적 사고방식은 성공산 사람을 낮추고 불우한 사람을 위로하는 듯하다. [···] 나의 성공은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운이 좋았기 대문이라고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런 행운을 남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마음도 들지 않겠는가. 요즘은 이러한 마음이 드물다. 성공한 사람들의 겸손은 오늘날 사회 경제적 삶에서 통 드러나지 않는다. [···] 그것 하나만 보자면 오늘날 복지국가는 롤스의 정의사회와 크게 동떨어져 있는 셈이다. 또는 평등주의적 자유주의가 애초에 엘리트의 자기만족에 위협적이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229쪽).

31. 오늘날의 복지국가(특히 미국)가 롤스식의 정의사회와 맞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소득과 권력의 불평등은 기회를 공정하게 평준화한 사회, 또는 가장 불우한 사람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는 사회 시스템에서는 대체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자유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의 엘리트에 갖는 적대감을 부정의에 대한 불만으로 해석해석하도록 했다. [···] 그러나 이는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즘의 반격을 해석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 살펴보자면, 완벽하게 정의로운 사회(롤스의 정의론에 따라)라도 불평등이 없지는 않다. 기회의 공정한 평준화가 가장 불우한 사람들에 대한 이익 고려가 완벽하다고 해도 말이다(229~30쪽).  

운수와 선택

32. '행운 평등주의Luck Egalitarian 철학' [각주:9] 

33. 하지만 이들 철학자들은 능력과 자격의 정확한 판단을 요구한다. ··· 그들은 공적 부조(복지, 의료보험 등)를 하기 전에 대상자인 불우한 사람들이 불운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 아니면 잘못된 선택으로 그렇게 되었는지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정책결정자들이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누가 피치 못할 희생자인지, 따라서 구제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아니면 스스로 빈곤의 책임자이며 따라서 그런 자격이 없는 사람인지) 가려낼 필요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34. 엘리자베스 앤더슨(행운 평등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자)은 유자격/무자격 빈자를 구분하는 것을 가리켜서 '구빈법적 사고가 부활했다'고 꼬집었다. ··· 이런 '책임의 분해 관찰'은 민주 시민이 서로에게 져야 할 책임을 받아들이기에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 방법인데, 그 이유는 두 가지다. 1) 이는 우리의 시민적 상호책임 근거를 동정이나 연대성이 아니라 '대체 그들은 어쩌다 저 꼴이 되었대?' 하고 먼저 따지는 것에 둔다. ··· 일하지 않기로 선택했다면 그는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지만 일부 행운 평등주의자들은 이보다 훨신 책임 관념을 확장한다. 그들은 여러 가능한 위험에 대비해서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선택조차도 '그에게 벌어진 불운이 온전히 그의 책임이게끔 한다'고 주장한다. 2) 행운 평등주의는 공적 부조의 적격 대상자에게도 굴욕을 안기는데, 그런 사람들을 '대책 없는 희생자'로 못 박음으로써 말이다. 그들은 개인의 선택 능력에 큰 도덕적 무게를 싣는다. ··· 공적 부조의 자격 요건을 갖추려면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외부적 힘의 희생자라는 것을 제시해야 하며, 스스로도 그렇게 믿어야 한다. [각주:10] 

35. 이 이상야릇한 인센티브는 청원자의 자아상을 망쳐 놓을 뿐만 아니라, 공적 담론까지 비틀어버린다. 행운 평등주의에 근거해서 복지국가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들은 거의 필연적으로 복지 수혜자들을 무능력자들로,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로 묘사하게 된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의 희생자라는 이유로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 일은 큰 도덕적, 시민적 대가를 치르게끔 한다. '복지 수혜자들은 사회적 기여는 없으면서 스스로 책임 있는 행동도 못하는 존재'라는 경멸적 견해를 뒷받침한다. 앤더슨이 제대로 짚었듯 '공적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은 스스로 의미 있는 선택을 못한다'는 생각은 그들을 동등한 시민이나 자치에 참여할 능력이 있는 존재로 대우하기 힘들게 한다. 

36. 앤더슨은 행운 평등주의가 "무책임하다는 낙인을 찍힌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으며, 근본적으로 열등하다는 낙인을 찍힌 사람들에게는 굴욕감을 준다"고 주장한다. ··· 다른 형태의 자유주의들과 마찬가지로, 행운 평등주의 철학도 정의의 기반으로서 능력과 자격을 거부하면서 시작했지만 다시금 능력주의적 태도와 규범을 받아들이면서 끝났다. 롤스에게, 이런 규범은 정당한 기대에 대한 권리 인정이라는 가면을 쓰고 되돌와왔다면, 행운 평등주의자들에게는, 개인의 선택과 책임을 강조하다 보니 어느새 되돌아와 있었다. 

37. 행운 평등주의자는 모험을 선택하는 사람은 운이 나빴을 때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는 스스로 초래하지 않은 불운의 희생자(유성에 맞은 사람)만 돕는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내기에서 진 사람은 승자의 자비를 바랄 수 없다. 로널드 드워킨은 '눈먼 운(유성에 맞은 사람)'과 '선택 운(도박사가 판돈을 잃은 것)'의 구별로써 적시한다. ··· 사람들이 자유롭게 그런 리스크를 걸머지는 한(가령 도박사가 판돈을 거는 것과 그것을 잃는 것), 행운 평등주의자들은 그들이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본다. 그들은 자기 운명을 책임져야 마땅하다. 적어도 그런 일에 아무도 그에게 도움을 줘야 할 의무가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236~7쪽). 

38. 운수와 선택의 구분은 보험의 가능성에 대한 고려 때문에 모호해진다. 화재 자체는 '눈먼 운'이라고 해도, 보험을 들지 않은 나의 선택은 나의 불운을 '선택 운'으로 바꿔놓는다. 보험에 들지 않기로 선택함으로써 나는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며 납세자들에게 내 집의 손실을 보상해 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어진다. ··· 드워킨은 보험의 개념을 확장하면 이런 우연들도 다룰 수 있게 되라고 보았다(뛰어난 재능을 갖고 태어난 사람, 태생적으로 장애나 능력을 갖지 않고 태어고 태어나는 사람). 그는 재능 없이 태어날 경우 필요할 비용의 평균치를 추산해서 그만큼의 금액을 재능 보유자에게서 재능 결여자로서의 소득 재분배 액수로 정하자고 제안. 즉 태생적 능력의 불평등한 분배를 유권자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보정하자는 의미. ··· 그런 제도가 이뤄진다면 그리고 재능 보유자가 세금을 내고 재능 결여자가 그에 따른 원조를 받는다면, 나아가서 모든 사람들이 일자리와 교육 기회에 공정하게 접근할 수 있다면 행운 평등주의자가 꿈꾸는 정의로운 사회는 실현될 것이다. ··· 그밖에 남은 모든 불평등은 우리가 스스로 책임져야 할 요소들, 가령 노력과 선택 등의 결과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사고와 불운의 효과를 없애려는 행운 평등주의자들의 시도는 능력주의적 이상으로 수렴되기에, 소득 분배는 도덕적으로 자의적인 우연적 요소들과는 무관하면서 각 개인의 자격에 맞추어 이루어질 것이다(237~8쪽). 

39. 행운 평등주의는 노력과 선택에 따른 불평등을 옹호한다. 자유시장 자유주의와 겹치는 점을 부각시켜 준다. 둘 다 개인 책임을 강조하며 불우한 사람을 도울 사회의 의무는 해당자가 스스로의 실수가 없는지 다져야 하는 조건부라고 강조. 행운 평등주의자는 그 나름대로 복지국가를 자유시장 자유주의에서 지키고자 했다. "반평등주의의 무기고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 즉 선택과 책임이라는 아이디어"를  받아들임으로써 말이다. 

재능 계산하기

40. 자유시장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모두 능력을 정의의 제일조건으로 배제하고 있지만, 둘 다 결국에는 능력주의로 기운다. ··· 그들이 개인의 천부적 재능은 행운의 산물이며 따라서 도덕적 관점에서 자의적이라고 주장하기는 해도, 재능 특히 천부적이거나 내재적인 재능을 놀랍도록 중시한다. 소득 불평등을 대체로 '유권자 복권 당첨 결과'로 여기는 행운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도 마찬가지. 드워킨의 가설적 보험체계 같은 정교한 수단을 고안해서 '자연적인', '내재적인', '천부적인' 재능 차이를 계산하고 보정하고자 한다. ··· 그들은 재능을 생물학적 개념으로 보고 재분배를 논하는데 즉 사회적 영향을 받기 전에 유전적으로 정해진 팩트라는 것이다. 그러나 천부적 탁월성으로 재능을 이해하면 오만으로 이어지게 된다.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로서도 스마트한 사람/우둔한 사람의 큰 정의를 보정하려고 하는데 전자를 칭송하고 후자를 매도하는 셈이다(240~1쪽).

41. 능력주의가 각자 개인이 '신이 부여한 재능이 허락하는 한 성공할 수 있게 해준다'면, 가장 성공한 사람은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추장하기 쉽지만 사실과 다르다. 천부적 재능차이를 소득 불평등의 주원인으로 놓음으로써,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그 역할을 과장하며 부지불식간 그 명예까지 과장하고 있다(241쪽). 

제6장 '인재 선별기'가 되어버린 대학

1. 능력주의가 문제라면 해답은? [···] 대신 그것은 성공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바꾸고, '정상에 오르는 사람은 스스로 잘나서 그런 것'이라는 능력주의적 오만에 의문을 제기함을 뜻한다. 그리고 능력이라는 말로 옹호되어 온, 그러나 분노를 퍼뜨리고 정치에 해를 끼치며 사회를 갈라놓는 부와 명망의 불평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러한 생각 바꾸기는 능력주의적 성공의 핵심인 두 가지 인생 영역, 즉 교육과 일에 대한 집중을 필요로 한다. 

능력주의의 쿠데타 

2. 미국 고등교육의 능력주의화는 상대적으로 뒤늦은 1950~60년대에 시작되었다. [···] 명문대를 능력주의적 기관으로 보고, 그 목표는 '가장 재능 있는 학생을 배경 불문 모집하고 훈련시켜 사회 지도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라는 시각을 담은 가장 영향력 있는 글은 1940년대 제임스 브라이언트 코넌트에게서 나왔다. 하버드 총장/2차 세계대전 중 화학자로서 맨해튼 프로젝트에 과학고문으로 참여하기도 했던 그는 하버드와 미국 사회 전체적으로 세습 상류층이 득세하는 현상을 못 마땅해 했다. [···] 그는 세습 엘리트 체제를 뒤집어엎고 능력주의적 체제로 대체하려고 했다. 그의 최종 목표는 니콜라스 르만의 다음의 말로 정리된다. "기존의 비민주적 미국 엘리트들을 쫓아내고 좋은 머리, 정교한 훈련, 공적 정신으로 찬 새로운 엘르타가 배경을 불문하고 충원되어 그들을 대신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이 나라를 이끌어갈 것이다. 그들은 20세기 말 미국이 창출해낸 대규모의 기술 조직을 관리할 것이며, 그런 조직을 통해서 처음으로 모든 미국인들에게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르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나라의 리더십 집단과 사회 구조에 대한 대담한 변혁을 가져오려는 공학적 시도, 즉 조용한 쿠데타 계획'이었다(248~50쪽). 

3. (코넌트는) 이런 능력주의 쿠데타를 이루기 위해 가장 전도유망한 고교생들을 찾아낼 필요가 있었다. [···] 그가 장학생을 뽑기 위해서 마련한 테스트는 제1차세계대전 때 미 육군이 시행한 IQ테스트와 비슷했는데, 수학능력 평가SAT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 르만은 이 시험을 "하버드에 몇 명의 장학생을 보내는 방법 차원이 아니게 되었다. 미국 국민을 유능자와 무능자로 판별하는 인재 선별기가 되었다." 하버드를 능력주의적 기관으로 탈바꿈시키려는 그의 시도는 미국 사회 전체를 능력주의 원칙으로 규율하려는 더 큰 야심의 일환이었는데 자신의 비전을 '계급 없는 사회를 위한 교육'이라고 제시했다. 

4. (그의 이상은 프레드릭 잭슨 터너의 것을 현실화하는 것이었다.) 터너에 따르면 미국 초기 민주주의의 "가장 뚜렷한 사실"은, "사회적 이동성이 보장된 상태에서 개인이 얼마든지 위로 올라갈 수 있었던 자유"였다. 터너는 '사회적 이동성'social mobility라는 표현을 사용한 첫 번째 사람이다. 코넌트는 이 개념을 '내 주장의 핵심'이라고 했으며, 이를 무계급 사회의 이상을 정의내리는 데 사용했다. "높은 수준의 사회적 이동성은 '무계급 사회'라는 미국의 이상의 핵심입니다. 만약 다수의젊은이들이 그 부모의 경제 여건에 무관하게 자기 능력을 계발할 수 있다면, 그들은 사회적 이동성은 높아질 것입니다. 반대로 젊은이들의 미래가 물려받은 특권이 있냐 없느냐로 좌유된다면 사회적 이동성이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코넌트는 그 도구를 '교육'으로 보았다(251~2쪽).

5. 모든 세대에서 고등교육과 공적 리더십에 가장 적합한 인재를 거둬들인다는 그의 이상을 뒷받침하고자 코넌트는 막강한 동맹자들을 소환했는데 그 중에는 토머스 제퍼슨이 있다. 코넌트와 마찬가지로 그도 부와 태생에 따른 귀족제를 반대했으며, 대신 미덕과 재능에 근거한 귀족제를 희망했다. [···] 제퍼슨의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코넌트에게 그것은 그가 선호하는 평등 지향적, 사회적 이동 지향적 고등교육 시스템의 의미심장한 전례였다. 제퍼슨은 이 두 가지 용어대신에, '자연귀족정'을 이야기했고, 그런 체제가 '부와출생에 근거한 인위적 귀족정'을 압도하기를 바랐다. 

능력주의의 폭정,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다

6. 제퍼슨의 부적절한 표현은 우리 표현으로 사회적 이동성과 기회의 평등이라고 하면서 모호하게 가리는, 능력주의 시스템의 부정적 측면 두 가지를 조명해준다. 1) 능력에 기준한 유동적 사회는 비록 세습적 위계질서와는 상반되지만 불평등과 상반되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출생 대신 능력에 근거한 불평등을 정당화한다. 2) '최고의 천재'를 예찬하고 보상하는 시스템은 그 나머지를 격하시키며, 의식적으로든 그렇지 않든 '비천한 자들'이라고 멸시하기 쉽다. 

7. 코넌트는 이 두 가지 부정적 측면에 대해 인지했다. 첫 번째가 두 번째보다 더 직접적. 불평등에 대해 그는 자신의 무계급 사회 이상이 소득과 부의 보다 평등한 분배를 지향하지는 않는다고 솔직히 썼는데, 더 유동적인 사회를 원하지, 보다 평평한 사회를 원하지는 않았다. 그는 "적어도 한 세대, 아니면 두 세대 만에 새로운 계급을 형성하는 일 없이 극적인 고용 분화와 현저한 경제 지위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권력과 특권은 불균등할 수 있는데, 매 세대가 끝날 때마다 자동적으로 재분배될 것이다."라고 했다. 

8. 코넌트는 두 가지 모두에서 너무 낙관했다. 고학력 능력주의의 계발은 무계급사회를 가져오지도 않았고, 재능없다고 배제된 사람들에 대한 혐오를 방지하지도 못했다. [···] 그의 능력주의 비전은 그가 하버드와 다른 명문들을 이 나라에서 가장 재능 있는 학생들에게 열고 싶어 했다는 점에서 등주의적이었다. [···] 그가 총장을 맡은 20년간 하버드의 입학 정책은 그가 추구한 능력주의 이상에는 못 미쳤다. 

돈따라가는 SAT 점수

9. SAT는 수학능력이나 사회경제적 배경과 무관하게 타고난 지능을 측정하는 시험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SAT 점수는 응시자 집안의부와 매우 연관도가 높다. 소득 사다리의 단이 하나씩 높아질수록, SAT 평균 점수는 올라간다(259쪽).

10. 고등학교 내신 성적도 어느 정도는 집안 소득 수준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SAT 점수는  그 연관성이 더욱 크다. [···] SAT 점수는 과외를 통해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점수를 높일 편법과 꼼수를 고등학생에게 가르쳐 주는 사업은 큰 호황을 누리고 있다. 

불평등의 토대를 더욱 다지는 능력주의

11. 둘째, 코넌트가 밀었던 능력주의 입시제도는 그의 희망처럼 무계급 사회를 만들어재 못했다. 소득과 부의 불평등은 1940~50년대 이후 커져왔고, 코넌트가 계층화된 사회를 치유할 수 있다고 여긴 사회적 이동성은 도출되지 않았다(261쪽). 

12. 더 중요한 점이 뭔가 하면, 능력주의 시대의 고등교육은 사회적 이동성의 엔진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반대로 특권층 부모가 자녀에게 특권을 물려줄 좋은 기회만 제공한다. (코넌트의 이상 및 그 이상의 실현 및 업적에 대해) [···] 이는 부정할 수없는 업적이다. 그렇지만고등교육에서의 능력주의 혁명은 그 초기 지지자들이 기대했던, 그리고 교육계 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이 지금도 계속 약속하고 있는 사회적 이동성과 기회의 확대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과거 미국의 유수 대학들이 '거들먹거리는 기득권 세습 엘리트'를 구축했다면, 이는 이제 능력주의 엘리트층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그들은 지금 그들이 내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특권을 갖고, 이를 확고부동하게 하려 못질을 해댄다(261~3쪽). 

13. 성별, 인종, 민족적 차이에 대해 훨씬 관용적인 태도를 보임에도 이런 능력주의 엘리트는 유동적이며 계층 이동이 활발한 사회를 못 만들어냈다. 대신 오늘날의 학력주의적, 전문직업인 위주 계층은 그들의 특권을 어떻게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을지 감을 잡고 있다. [···] '기회의 조정자'와 '사회적 상승 엔진'이라는 새로 얻은 역할에 아랑곳없이, 고등교육은 최근 확대된 불평등에 대해 어떠한 제동 기능도 하지 못했다(263쪽).

14. 지난 20년 동안 엘리트 사립대학들은 전보다 후한 장학금을 제시했고, 연방정부는 불우 가정 출신 대학생들에게 장학 혜택을 늘렸다. [···]  그러나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명문대에서 저소득층 출신자의 비율은 2000년대 이후 그대로이며 일부 경우에는 오히려 떨어졌다. 제롬 캐러벨(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입시 정책 연구서의 저자)은 "노동계급과 빈민층 자녀들은 1954년에 비해서 오늘날 빅3에 진학할 가능성이 나아지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진학 자체가 거의 없다."고 썼다. 

명문대가 사회적 이동성의 엔진이 되지 못하는 이유

15. 경제학자 라지체티는 대학이 사회적 이동성에 기여하는 정도에 대해 포괄 연구를 수행. 1999년부터 2013년까지 대학생 3,000만 명 생애 추이 조사.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상위 20%에 들 만한 소득자로 성공한 학생들의 비율을 각 대학별로 조사. 오늘날 고등교육은 사회적 상승에 놀랄 만큼 거의 영향을 못 미치고 있음. 명문 사립대에서 더한데, [···] 하버드 출신들 가운데 1.8퍼센트만이 소득 기준 최하위에서 최상위로 올라갔다. 주요 공립대에서는 사정이 다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다. [···] 미시간의 빈곤층 출신 재학생은 심지어 하버드에서보다 적었다(4%이하). 버지니아주립대에서도 비슷했는데, 사회적 상승률은 1.5%에 그쳤다. 대체로 재학생의 겨우  3%만이 빈곤층 출신인 이유가 컸다. 
 
16. 체티와 그 동료들은 일부 덜 유명한 대학/주립대학들에서는 더 높은 사회적 이동성을 찾아냈다. 저소득층 자녀들의 입학이나 그들을 성공으로 나아가게 돕는 일에 모두 성공적. UCLA,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는 거의 10% 정도의 학생을 최하위 소득층에서 뽑아 취상위까지 올려 보내고 있었다. [···] 그러나 이는 예외적 경우다. 통틀어 보면 그가 조사한 총 1800개 대학들(공립, 사립, 명/비명문)이 소득 하위 5분위 출신 학생을 받는 비율은 상위 5분위 학생에 비해 2%미만이었다. [···] 명문사립대에서 열 명 중 한 명만이 소득 사다리에서 겨우 두 계단(5분위로 따져보았을 때)을 올라갈 수 있었다. 

17. 미국 대학은 놀랄 만큼 소수의 학생들에게만 사회적 상승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 실제로 대부분의 대학들은 기회를 늘리기보다 특권을 공고히 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 이는 오늘날 정치에 금과옥조처럼 받들어지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바로 불평등 증가의 해법이 사회 이동성의 증가이며, 사회적 이동성을 늘리는 방법은 더 많은 사람들을 대학에 보내는 것이라는 주장말이다. [···] 학력주의적 계츠아회에서 우리 동료 시민 다수는 대학 학위가 없음을 잊어버리기 쉽다. 그들에게 더 나은 생활을 바란다면 대학에 들어가라고 끊임없이 닦달하는 일은 고무적이라기보다는 모욕적이다(266~7쪽). 

능력주의를 더 공평하게 만들기

18. 표면적으로 이는 적절해보인다. [···] 그러나 저소득층 학생 비율은 별로 늘지 않았다. 사실 소수 인종이나 민족들을 포함하는 소수집단 우대정책에 대해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대학들은 그 우대정책을 은근히 부유층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가령 유수 대학들의 동문 자녀에 대한 입학 우대('기여 입학'이라는 명목하에 공동체 의식 증대 및 기부금 유도 근거), 명문대의 경우 동문 자녀는 다른 수험생보다 여섯 배나 입학 가능성이 높고, 하버드는 비동문 자녀를 20명 중 한 명만, 동문 자녀는 3명 중 한 명 꼴로 받고 있다. 

19. 일부대학들은 동문이 아니더라도 거액의 기부금을 낸 사람들의 자녀에게 우대 조치를 하는데 '학업 능력이 약간 떨어지는' 학생을 받는 대신에 새 도서관이나 장학기금을 마련한다는 취지. [···] 최근 하버드 입시 관련 고발 사건으로 밝혀진 바로는 거의 10%의 학생들이 기부금 덕에 입학하고 있다. [···] 체육 특기생 선발도 부유한 집 자녀들의 또 다른 돌파구다. [···] 명문대들이 특기생 제도들을 두는 종목들은 대부분은 부유한 집 자녀들이 선호는 종목들이다. 

20. 대학들은 이런 불공평함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시정할 수 있다. [···] 실제로 시카고대와 그 밖의 대학들이 최근 그런 결정을 내렸다. 연구 결과를 보면 SAT 점수는 고교 내신성적보다도 사회경제적 배경이 개인의 학업 능력에 전망을 끼치는 영향을 배제하지 못하는 정도가 심하다. 이런 것들은 대학들이 스스로 취할 수 있는 정책이다. 정부도 대학 입시에 개입해서 특권층에게 편향되어 있는 현실을 바로 잡을 수 있다. [···] 예일대 법학 교수이며 능력주의적 불평등의 비판자인 대니얼 마코비츠는 한 걸음 더 나간다. 사립대학들이 적어도 절반 이상의 신입생을 소득 하위 2/3 출신자로 받지 않으면(이상적으로는 입학 정원을 늘리면서) 면세 혜택을 없애버리자는 것이다. 

21. 대학 스스로 취하든 정부의 간섭으로 실시하든, 이런 정책들은 지금 고등교육이 사회적 이동성의 엔진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뒤집고 불평등 완화에 도움을 줄 것이다. 비기득권 자녀가 더 많이 대학에 진학할 수 잇도록 해서, 이 체제의 불공정성이 감소될 것이다. [···] 그러나 오직 현행 시스템의 공정성에만 집중한다면 코넌트의 능력주의의 혁명의 핵심에 놓인 더 큰 질문을 놓치게 된다. '대학은 누가 인생의 승자가 될지에 대해 재능을 근거로 사람들을 선별하는 역할을 맡아야 하는가?' 그래야 한다는 주장에 적어도 두 가지 의문점이 있다. 1) 의문은 그런 선별 결과 걸러진 사람에 대해 암울한 낙인을 찍게 되고, 그것은 곧 공동체적 시민 생활에 유해하지 않은가라는 의문이다. 2) 능력주의적 경쟁이 인재 선별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미치는 피해, 그리고 인재 선별 임무가 너무 과부하됨으로써 대학의 교육 임무마적 경시될 위험성이다. 즉 고등교육을 초고도 경쟁을 거친 선별도구로 삼는 것은 민주주의와 교육 모두에 건전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인재 선별 작업과 사회적 명망 배분

22. 코넌트는 [···] 교육적 선별이 사회적 우위나 명성을 창출하면서 구체제에서 특권을 대물림하듯 되리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개인을 선별하되, 심판하지 않는 게 가능하다'는 그의 믿음은 그가 수립하려고 애쓴 능력주의적 체제가 갖는 도덕 논리와 심리적 매력을 도외시하고 있다. 세습 귀족제에 맞선 대표적인 능력주의 옹호론 중 하나는 '자수성가로 성공한 사람은 자기 능력만으로 성취했으니 그 능력에 따른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능력주의적 선별은 성취와 자격에 대한 심판과 결부되어 있고 이는 필연적으로 재능 있고 성공한 사람은 명예와 인정을 받아 마땅하다는 공적 심판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271~2쪽).

23. 그의 확신처럼 '세습 상류층에게서 권력을 빼앗는 역할'과 '유능한 과학자와 지식인을 양성하는 역할'이 고등교육이 갖춰야 할 사회적 역할의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또한 기술적으로 발전된 현대 사회가 어느 수준의 지성과 인성의 소유자에게 가치를 부여하고 보상할 것인가의 문제와도 관련된다. 따라서 새로운 인재 선별 체계가 곧 사회적 지위와 명망을 배분하는 체계도 된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272쪽). 

24. 코넌트의 뒤를 이어 고등교육의 능력주의 체제화에 힘쓴 사람들은 선별과 심판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잘 인지하고 있었다. 1961년 출간된 『탁월함』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재단 이사장이며 훗날 린든 존슨 행정부 보건교육복지부 장관을 맡게 되는 존 가드너는 새로운 능력주의에 대해서 "우리는 높은 역량과 앞선 훈련을 갖춘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태도의 혁명을 목격하고 있다. 사상 처음으로 그런 사람들은 아주 열렬하게, 아주 광범위하게 환영받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사회가 각자의 재능에 따라 사람들을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선별하면, 루저들은 자신들의 낮은 지위가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남보다 못하기 때문임을 절감할 것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입에 쓴 약이다."라고 말한다.  [···] 코넌트는 그가 추구하던 능력주의 사회가 교육적 성취와 사회적 명망 사이에 구별의 여지를 별로 안 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대학 교육이 대중에 개인적 성취, 사회적 상승, 시장 가치와 자부심의 향상으로 확고히 인식되고 있음은 단순한 사실이다. '존경과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대학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대다수의 미국 국민이 동의하게 되면, 그러한 국민 의견의 일치가 사실의 일반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Gardener, Excellence: Can we be equal and excellent too? 1961, p. 82)라고 말한다(272~4쪽). 

25. 능력주의 입시제도로의 전환은 뛰어난 학생들 대부분을 끌어들일 수 있는 대학의 명예를 최고로 높여주었다. 명예는 대개 그 대학에 합격한 학생의 평균 SAT 점수로 측정되며, 대학이 떨어트린 입학 희망자 숫자로 측정된다. 갈수록 대학들은 얼마나 경쟁률이 높으냐에 다라서 서열이 나눠지며, 경쟁률은 대체로 학생들의 선택에 좌우된다. 1960년대까지, 대학에 등록한 재학생들은 대체로 집에서 가까운 대학을 선호한 결과 학업 능력은 전국 대학에 비교적 고르게 분포되었다. 그러나 고등교육이 능력주의적으로 탈바꿈하면서 대학 선택은 보다 전략적인 선택이 되었다. 고소득 가정의 학생들을 비롯한 많은 학생들은 가장 경쟁률이 높은 대학을 찾기 시작했다(275쪽).

26. 고등교육 분야를 연구한 경제학자 캐롤라인 혹스비는 이런 추세를 '고등교육의 재선별'이라고 불렀다. SAT 고득점 학생은 몇 안 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대학입시는 '승자독식 게임'이 된다.  [···] 경쟁률 높은 인기 대학들은 떠오르는 능력 위계질서의 정점에 있으므로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갖게 되었다.  [···] 아무나 들어가기 힘든 대학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단지 뽐낼 수 있는 근거가 될 뿐이 아니며, 졸업 후 좋은 직업을 얻을 근거도 되었다. 이는 고용주들이 명문대 졸업생을 비명문대 졸업생들보다 더 많이 매운인재로 판단해서라보다는, 대학들의 인재 선별 역할을 믿고 그들이 부여하는 능력주의적 영예를 높이 치기 때문이다(276~7쪽). 

상처 입은 승리자들

27. 고등교육의 승자독식형 재선별은 두 가지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첫째,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그것은 승자들에게도 피해를 남긴다. 새로운 능력주의 엘리트는 힘겨운 투쟁을 거듭해야 높이 올라설 수 있다. 새로운 엘리트가 세습 위치까지 차지하기는 하였지만,능력주의적 특권의 되물림은 확정될 수없다. 들어가기에 성공하느냐에 달려 있다.  [···] 이런 경쟁의 승자들은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이를 쟁취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믿음은 력주의적 오만의 일환으로 비판받을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의 분투 이상의 것을 요구하며, 대가로 주어져야 할 성공 이상을 강요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277~8쪽).

28. 그러나 그러한 믿음의 강점도 있다. 그것이 고통 속에 담금질되었고 혼을 파괴할 정도의 압박 속에서 젊은이들에게 부과된 능력주의적 고난을 뚫고 왔다는 데서 비롯되는 강점이다. 부유한 부몰들은 자제들에게 명문대 입학을 위한 강력한 뒷받침을 해준다. [···] 이러한 능력주의적 군비 경쟁은 부유한 집안 쪽으로 전세를 기울인다. 그리고 부자 부모들이 스스로의 특권을 대물림하기 쉽게 해준다. 이런 식의 특권 대물림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런 판에서 유리한 고지를 찾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매우 불공평하며, 이판에 자식들이 뛰어들어 있는 상황에서는 지나친 압박이 된다. 능력주의적 경쟁은 침략적이고 성취만 쫓으며 과도한 부모의 압박을 불러온다. 극성 학부모의 등장은 능력주의적 경쟁이 과열된 시기와 일치한다. 사실 '부모 노릇하다parant'라는 단어는 1970년대에 와서야 동사로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자녀가 공부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부모의 책임 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여겨지게 되던 때이다(278~9쪽).

29. 어느 흥미로운 연구에서 경제학자인 마티아스 되브케와 파브리치오 질리보티는 과보호 학부모의 등장을 경제학적으로 설명했다.  [···] 비록 여러 사회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결 같이 부모의 개입이 심해지긴 했으나, 가장 심했던 곳은 불평등이 가장 크게 두드러진 곳이었다. 가령 미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였다. 그리고 스웨덴이나 일본처럼 불평등이 비교적 덜 불거진 나라에서는 그러한 극성 부모들도 덜 나타났다(doepke and zilibotti, love, money & parenting, 53, 54~7, 67, 104). 

30. 이해할 만하기는 하지만, 자녀의 인생을 능력주의적 성공으로 몰고가려는 부모들의 집착은 심리학적으로 따져봐야 할 문제다. 심리학자 매들린 레빈은 "사소한 문제에 흥분하며, 그들 다수는 우울하고, 불안하고, 분노에 차 있었다. 그들은 부모, 교사, 코치, 동료의 말에 지나치게 복종적이었으며 어려운 일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문제까지도 남들의 말에 무조건 따르는 모습을 보였다." 매들린은 이들이 '풍요로움과 지나칠 정도의 부모 간섭 때문에 불행하고 깨져 버리기 쉬운 인간이 되었음'을 차차 알게 되었다.  [···] <<물질적 풍요로부터 내 아이를 지키는 법The Price of Privilege>>이라는 책에서 레빈은 그녀가 "특권층 젊은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정신질환증후군"이라고 부르는 문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레빈은 "미국에서 나타난 새로운 일촉즉발의 젊은이 집단은 부유하고 잘 교육받은 집안의 아이들"이라고 지적했다. "그들은 사회적, 경제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격은 경험은 이 나라 동연령대에서 최고 수준의 절망, 약물 의존, 불안 장애, 신체적 호소, 불행감 등이었다. 연구자들이 사회경제적 스페그럼을 통틀어 동 연령대 아동들을 살펴본 결과, 가장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가진 아동들이 부유한 가정 출신임을 알 수 있었다."[madeline levin, 같은 책, 16~7) [···] 그들은 동년배 10대보다 높은 감정적 스트레스를 겪으며, 그것은 그들이 대학에 합격한 뒤에도 계속된다. "보통 사람들과 비교할 때 풀타임 등록 대학생들은 2.5배나 높은 약물 의존증을 나타낸다(23%, 보통 사람들은 9%)." 그리고 풀타임 대학생들의 절반은 과도한 음주를 하며 불법적이거나 처방 약물을 사용하고 있다(280~2).

31. 부유한 출신 젊은이들이 과도하게 감정적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까닭은? 해답은 능력주의적 사명에서 찾을 수 있다.  [···] 능력의 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승리자다. 그러나 상처 입은 승리자다.  [···] 생각하고, 타구하고,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해야 가치 있게 살아갈 것인가 숙고하면서 대학 생활을 보내지 못하고, 싸우고 또 싸운다.  [···] 최근 100개 이상 미국 대학의 학부생 6만 7,000명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조사에서는 대학생들이 전례없는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 젊은이(20~4)의 자살율은 2000~7년 사에에 36%나 늘었다. 지금 그들은 살인보다 자살로 더 많이 죽어간다.  

32. 이런 병리학적 상황을 넘어 심리학자들은 이 세대 대학생들의 보다 미묘한 정신적 문제점을 찾아냈다. '완벽주의라는 숨은 전염병'이다. 4만 명 이상의 미국, 캐나다, 영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물의 공저자 토머스 쿠란과 앤드류 힐은 "실적과 지위와 이미지만이 한 사람의 쓸모와 가치를 정할 수 있는 세계에서, '완벽한 자신'이라는 비이성적 생각이 의미 있는 게 되고 말았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89년부터 2016년까지 완벽주의가 가파르게 증가하는 것을 보았다. 사회적인 그리고 부모의 기대에 매인 완벽주의의 증가세는 32%에 달했다.  완벽주의는 능력주의의 대표적인 병폐다. "젊은이들이 끝도 없이 학교, 대학, 직장에 의해 선별되고, 구분되고, 등급이 매겨지는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는 현대 생활의 한복판에서 싸우고, 실적을 내고, 업적을 이루도록 강요한다."[curran/hill, perfection is increasing over time, 413.]

또 하나의 불타는 고리를 넘어라 

33. 선별하고 경쟁하는 본능은 대학 생활에도 뿌리 깊게 참투했다. 대학생들은 받아들이거나 내쫓는 의식을 자기들끼리 만들어낸다. 하버드에는 400개 이상의 비교과 동아리와 조직이 있다.  [···] 오늘날, 특별한 기술이 있든 없든 '캄핑'이라 불리는 경쟁 시험을 치르는 일은 학생 조직에서 일반적이다..  [···] '하버드대 컨설팅 그룹'은 자신들을 가리켜 "입단률이 12%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한다. .  [···] 그러나 재능이 필요하다는 말보다는 그들이 과거 능력주의 경쟁을 벌이면서 겪은 트라우마와 승리감을 다시 느껴 보고 싶어서 그런다는 게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하버드의 1학년생은 <하버드 크림슨> 인터뷰에서 "우리는 불타는 고리를 뛰어넘어 하버들에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뛰어넘어 보는 거예요. 아드레날린이 다시 넘쳐 나오도록요."라고 말한다. 

34. 캄핑 문화의 등장은 대학이 경쟁적 능력주의의 기초훈련장과 같아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학력을 부여하는 일은 이제 너무 커져서 고육을 수행하는 역할을 덮어버렸다. 선별하고 분투하는 일이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넘어버렸다. 대학총장/학장들은 "우리 학생들은 우리 캠퍼스에서보다 밖에서 더 많이 배웁니다."라고 말하면서 학생이 비공식적이고 지속적인 친구들과의 토론을 통해 배운다는 뜻인과 동시에, 점점 '네트워크에서 배운다'는 뜻으로 말하면서 공공연하게 자랑스럽다는 듯이 이런 경향을 부추긴다. 

오만과 굴욕

35. 인재 선별기를 뜽어 고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면, 능력주의 체제가 그 폭력적 지배를 동시에 두 방향으로 뻗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정상에 올라서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불안증, 강박적 완벽주의, 취약한 자부심을 감추기 위한 몸부림으로서 능력주의적 오만 등을 심는다. 한편 바닥에 떨어진 사람들에게는 극심한 사기 저하와 함께, '나는 실패자야'라는 굴욕감마저 심는다. 이 쌍방향 폭력은 하나의 도덕적 원인을 공유한다. 능력주의의 금과옥조인 '우리는 개인으로서 우리 운명의 책임자다'라는 도덕률이다. 개인 책임에 대한 집요한 강조는 우리 시대의 불평등 상승 추세에 대응할 연대 의식이나 연대 책임을 떠올리기 어렵게 한다(286~7쪽). 

36.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소득과 사회적 명망의 불평등의 책임이 고등교육 하나에만 있다고 보면 잘못이다. 시장 중심적 세계화 프로젝트, 현대 정치의 기술관료화, 민주 제도들의 과두제화 등에 모두 이런 상황을 초래한 책임이 있다(287쪽).

유능력자 제비봅기

37. 개혁에 대한 한 가지 접근법은 SAT 의존돌르 줄이고 동문 자녀, 체육 특기자, 기부금 입학자에 대해 혜택을 없앰으로써 명문대에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ㄷ록 하는 것. 비록 그런 개혁이 시스템을 좀 덜 불공평하게 만들겠지만, 고등교육을 인재 선별기로 보는, 즉 재능을 찾아내고 그 보유자에게 기회와 보상을 배분하는 역할을 맡는다는 개념을 뒤집지는 못한다. 문제는 인재 선별에 있다. 그것을 더 능력주의적으로 완벽하게 만든다는 것은 그 입지를 더욱 굳힌다는 뜻이다.  

38. 매년 4만 명 이상이 학생들이 하버드와 스텐포다가 제시하는 신입생 정원 약 2,000명 안에 들기 위해 몰려든다.  [···] 4만 명의 지원자들 가운데 이 대학들에 다니기 힘들어 보이는 일부와, 동료 학생들과 잘 해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일부만 솎아낸다. 3만, 2만 500명, 2만 명의 지원자가 남으며 [···] 그러면 그들을 두고서 극도로 어렵고 불확실한 선별 작업을 다시 할 것이 아니라 제비뽑기 식으로 최종 합격자를 뽀는다. 즉  그들의 지원 서류를 집어 전져 버리고 아무나 2,000명을 골라잡는 것이다. 이 대안은 능력주의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능력이 있느 사람만 합격 가능하다. 그러나 능력을 극대화되어야 할 이상으로 복보다는 일정 관문을 넘어설 수 잇는 조건으로만 본다. 이 대안이 의미 있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현실적 타당성이 있다는 데에 있다.  [···] 유능자를 제비뽑기로 뽑자는 대안의 가장 유력한 증거는 그렇게 함으로써 능력의 폭정과 맞설 수 있다는 점이다. 일정 관문을 넘는 조건으로만 능력을 보고, 나머지는 운이 결정토록 하는 일은 고등학교 시절의 건강함을 오느 정도 되찾아줄 것이다. 적어도 어느 정도는 영혼까지 끌어 모아 스펙을 채우고 강박적으로 완벽을 추구하는 경험에서 해방시켜줄 것이다. 또한 능력주의적 오만에서 바람을 뺄 것이다. 결국 어찌되었든 정상에 오른 사람은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가 아니라 운이 좋았던 것이며, 탈락한 사람이나 자신이나 엇비슷한 가정환경과 천부적 재능, 그리고 도덕적 자격을 갖추고 있음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288~290쪽). 

39. 이 대안에 대한 네 가지 반론들. 1) 학업능력의 저하는? 그것은 얼마나 적절히 1차 관문을 세우느냐에 달려 있다. 최상위 60~80개 대학들은 수업 중 토론이나 학업 능력 수준이 서로 크게 차이가 나지 않으리라 본다. 기존 시스템대로 클래스를 절반으로 충원하고, 나머지 절반은 추첨식으로 충원해서 졸업시 이들이 성적 차이를 비교.  2) 다양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 능력주의적 입시 결과 명문대 학력의 대물림이 일어나고 잇는 상황에서, 대학들이 먼저 비대졸자 부모가 있는 유자격 지원자 다수에서 선추첨권을 주는 것. 3) 동문 자녀 우대 입학과 기부금 입학? 둘은 사라져야 하지만 전자에 대해서는 추첨권을 더 주거나, 후자에 대해서는 입학정원 판매권을 값비싸게 판매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 4) 입시가 경쟁이 아니라 추첨이 되면 그 가치는 보다 떨어질테고, 그러면 지금의 명문대가 누리는 명예는 추락하지 않겠는가?[···] 성적 좋은 학생들을 전국에 널리 분포시키지 않고 얼마 안 되는 경쟁률 높은 대학들로 몰아넣은 결과, 불평등은 심화된 반면 교육 수준은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 [···] 인재 선별과 명예 추구 관행을 없애는 일, 그것은 추첨제의 미덕이지 결함이 아니다. 

인재 선별기 부숴버리기

40. 이에 적절한 대답은 야심적인 프로젝트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최고 명문대들의 경쟁적 입시를 완화시킴으로써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기의 전원을 뽑아버려야 한다.' 보다 넓게는 4년제 대학 학위가 없어도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 일에 영예를 부여하려면 그런 일을 맡을 사람들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학습과 훈련 프로그램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공립 고등교육의 퇴조 현상을 역전시키고, 기술 및 직업교육에 대한 무시 경향을 극복하며, 4년제 대학과 그 밖의 중등 이후 교육기관 간 심한 격차를 없애는 것 등을 포함한다. (293~4쪽). 

41. 고등교육에서 능력주의적 선별 역할을 줄이려는 시도에 대한 한 가지 장애물은 적어도 미국에서는 그 역할의 대부분을 사립대에서 수행중이라는 점이다. 그렇지만 이들 기관은 비록 사립이기는 해도 상당 수준의 연방 지원금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런 수단만으로 적어도 한 명문대가 쥐고 있는 입시 기득권을 놓게 하기는 역부족일 듯하다. 더 중요한 수단은 4년제 공립대의 정원을 늘리고 지역사회 대학들, 기술 및 직업교육기관, 직업훈련소 등등에 더 많은 지원을 하는 것이다. 이들은 어쨌거나 미국민 대다수가 좋은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기술 교육을 제공할 수 있다. 주립대학들에 대한 정부의 자금지원은 최급 수십 년 동안 줄었고 등록금은 올랐다. 그런 기관들의 '공립' 성격이 의문시될 정도까지 말이다. 1987년 공립대학들은 주정부나 기타 지역정부들로부터 학생 1인당 등록금의 세 배에 이르는 지원금을 받고 있었다. 정부 지원액이 줄어들면서 등록금은 오를 수밖에 없었다. 2013년 공립 고등교육기관들은 주정부 및 기타 지역정부의 지원금과 거의 비슷한 액수를 등록금으로 벌어들인다. 여러 주요 공립대학은 이제 이름만 공립대학이다. 매디슨 위스콘신주립대의 경우 예산의 14%만 주정부에서 얻는다. 공적 지원금이 퇴족하고 등록금이 오르면서 학생들이 지는 부채 액수도 치솟아 올랐다. 오늘날 대학생 세대는 산더미 같은 빚을 짊어진 채 사회에 나가야 한다. 지난 15년 동안 학자금 대출 총액은 다섯 배 이상 증가햇다. 2020년 이는 1조 5,000억 달러를 돌파했다(294~5쪽).

42. 대학 재정이 능력주의적으로 기울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지표는 연방정부의 고등교육 지원금 액수와 기술 및 직업 훈련 지원액수의 격차다.  "2014~5학년에 대학 쪽으로 총 1,620억 달러가 들어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교육부가 경력 및 직업 교육을 위해 쓴 지원액은 11억 달러 정도였다."(isable sawhill, the forgotten americans: an economic agenda for a divided nation, yale university, 2018, 114) 미국 정부가 노동자 훈련과 재훈련을 위해 쓰는 돈의 액수는 고등교육 관련 지출액수와 비교할 때만 약소한 게 아니다. 다른 나라가 쓰는 비용과 비교해도 그렇다. [...] 소힐은 경제 선진국들이 평균 GDP의 0.5%를 능동적 노동시장 프로그램에 투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프랑스, 핀란드, 스웨덴, 덴카크는 GDP 1% 이상을 쓰는 반면, 미국은 겨우 0.1%만을 쓴다. 그것은 교도소 유지에 쓰는 비용보다도 적다(소힐, 111~3). 소힐은 "미국이 고용과 훈련을 모른 체하는 이유 하나는 고등교육 지원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기 때문일 수 잇다. 모든 사람이 대학에 갈 필요가 있다는 따위의 생각 등에서 말이다."(소힐, 113)

명망의 위계질서

43. 인재 선별기가 끼친 폐해를 바로잡으려면 직업 훈련에 예산을 더 많이 투입하는 것 이상이 필요하다. 이를 시작하는 한 가지 방법은 명품 브랜드 대학에 등록한 학생들의 명예를 드높이고 지역사회 대학이나 기술 및 직업훈련학교 등록자의 명예는 별로 쳐주지 않는 명망의 위계질서를 뒤엎어 버리는 것이다. 배관공이나 전기기술자, 치위생사 등이 되는 법을 배우는 일은 공동선에 기여하는 훌륭한 과정으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 그들이 도덕적인 인간이자 민주적인 시민으로서 공동선에 대해 숙고할 수 있는 사람이게끔 준비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을 가르쳐온 나는 도덕교육 및 시민교육의 중요성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왜 4년제 대학들이 그런 임무를 도맡아야 하는가? 시민의 민주주의 교육에 대한 보다 포용력 있는 생각은 대학의 시민교육에만 한정하는 입장에 반대할 것이다. 또한 학생들이 공공 문제에 대해 좀 더 현실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도와줄 역사 과목 등도 중시하지 않는다. 대신 '가치중립적'인 사회과학 과목들이 앞서나가는 한편, 좁은 범위에다 고도로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는 강좌들이 늘고 있다. 덕분에 도덕 및 정치철학에 관련된 큰 문제들을 따져볼 기회, 그리고 도덕 및 고정관념들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갖게 해줄 기회는 줄어들고 있다(297~8쪽).

44. 고무적 사례 하나는 미국 최초 노동조합 중 하나인 '나이츠 오브 레이버'다. 이들은 공장에 독서실을 만들고 노동자들이 공공문제에 대해 스스로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쪽의 수요는 시민 교육을 직업 세계에 녹아든 것으로 보았던 공화주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문화역사학자 크리스토퍼 래시가 본 대로, 19세기에 미국을 찾은 외국인 방문자들은 삶의 구석구석에 배어 있던 평등에 놀랐다. 그 평등이란 부의 평등한 분배도, 심지어 출세의 기회가 평등하다는 것도 아니었다. 모든 시민이 거의 똑같은 기반에서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이에 대해서는 Christopher lasch, the revolt of the elites and the betrayal of democray, 1995, 59~60를 참조). 래시는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볼 때, 19세기 미국 사회의 평등주의적 성격은 사회적 이동성이 아니라 지성과 교육이 모든 계층과 직업에 널리 펴져 있던 데서 나온다고 보았다. 이는 능력주의적 선별이 망쳐버린 평등의 유형이다. 이는 능력주의는 지성과 교육을 고등교육의 상아탑에 온통 몰아넣어 두고서, 누구에게나 그 상아탑에 들어올 공평한 경쟁이 보장되리라고만 약속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접근권 배분은 노동의 존엄을 떨어뜨리며 공동선을 오염시킨다. 시민교육은 담쟁이나 넝쿨진 캠퍼스 못지않게 지역사회 대학, 직업훈련소, 노조에서 잘될 수 잇다. 향상심 있는 간호사와 배관공들이 야심적인 경영 컨설턴트보다 민주적 논쟁에서 뒤떨어질 까닭은 없다(299~300쪽).

능력에 따른 오만 혼내주기

45. 능력의 가장 유력한 라이벌, '우리는 우리 운명의 주인이며 뭐든 우리가 얻은 것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생각의 라이벌은 '우리 운명은 우리가 전부 통제할 수 없고 우리의 성공과 실패는 다른 누군가에게, 가령 신이거나, 운명의 장난이거나, 순간의 선택에 따른 예상 밖의 결과 등에 좌우된다'는 생각이다. 

제7장 일의 존엄성

1. 세계화 시대가 고학력자에게는 많은 보상을 해주었지만, 일반 노동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79년에서 2016년까지 미국 제조업 일자리의 수는 1,950만에서 1,200만까지 줄었다. 생산성은 올랐지만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산품 가격에서 갈수록 더 적은 몫을 차지하게 되었던 반면 경영자와 주주의 몫은 점점 더 많아졌다. 70년대 말 주요 미국 기업 CEO는 일반 노동자들보다 30배 정도 많은 보수를 받았다. 2014년 그것은 300배로 늘었다. 

2. 능력주의 시대는 노동자들에게 더 악랄한 상처를 입히고 있다. 그들이 하는 일의 존엄성을 깍아내리고 있는 것이다. 시험 점수를 잘 따고 대입 시험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브레인'을 칭송하면서, 인재 선별기는 능력주의적 학력이 없는 사람들은/을 시궁창에 빠뜨렸다. "당신이 하는 일은 돈 잘 버는 전문직업인들의 일에 비해서 시장에서 별 가치가 없어요. 공동선에도 별 기여를 하지 않죠. 당연히 사회적 인정이나 명망도 별로 따라붙지 않아요." 그것은 시장이 승자에게 퍼붓는 과도한 보상을 정당화함과 동시에 비대졸자 노동자에게 던져 주는 쥐꼬리 만한 보상도 당연시했다. 

3. 누가 뭘 가지는 게 정당한가에 대한 이런 식의 사고는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 [...]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 사회에는 '우리가 버는 돈이 우리의 사회적 기여도를 반영한다'는 생각이 뿌리 깊네 내려버렸다. 능력주의적 선별은 이런 아이디어를 더욱 굳힌다. 1980년 이래 중도 우파 또는 중도 좌파 주류 정당들의 힘을 빌린 신자유주의적 또는 시장중심적 세계화 역시 그렇다. 세계화가 극심한 불평등을 초래했어도, 이 두 가지 세계관(능력주의와 신자유주의)은 그에 대한 저항력의 핵심을 분쇄했다. 이들은 또한 노동의 존엄성도 깎아내려, 엘리트에 대한 분노와 정치적 반격에 불을 지폈다. 2016년 이후 시사평론가와 학자들은 포퓰리즘의 불만에 대해 논쟁해왔다. 그것은 일자리 감소와 임금 정체 때문인가 아니면 문화적 변동 때문인가. 일은 경제적인 동시에 문화인 것이다. 그것은 생계를 꾸려나기기 위한 방법이자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얻는 원천이다. 그래서 세계화가 일으킨 불평등이 왜 그토록 강력한 분노로 이어졌는지 설명된다. 세계화에 뒤처진 사람들은 다른 이들은 번영하는 동안 경제적 곤경에 처했을 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종사하는 일이 더이상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함을 깨달았다. 사회의 눈에, 그리고 아마 스스로의 눈으로도 그들의 일은 더이상 공동선에 대한 가치 있는 기여라고 비쳐지지 않는다. [...] 능력주의적 학력이 없는 사람들의 직무 환경이 열악해지면서, 노동 연령의 사람들이 아예 일을 손에서 높아 버리는 일이 많아진 것이다. 71년에는 백인 노동계급의 93%가 고용되어 있었다. 2016년에 그 수치는 80%트로 떨어졌다. 일자리가 없는 20% 가운데 아주 소수만이 구직 활동을 하고 있었다. 구직 포기는 비대졸자 가운데서 특히 심했다. 2017년에는 최고 학력이 고졸이 미국인 가운데 겨우 68%만이 취업 상태였다. 

절망 끝의 죽음

4. 미국 노동계급의 마음의상처로 빚어진 현상은 구직 포기뿐만이 아니다. 다수가 삶 그 자체를 포기한다. 최악의 비극적 지표는 '절망 끝의 죽음Deaths of Despair'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표현은 프린스턴대의 경제학자 앤 케이스/앵거스 디튼이 만들었다. 그들은 사망률의 증가가 자살, 약물 복용, 알코올성 간질환의 만연에 따른 것임을 알아냈다. 그들은 이 만연 현상을 절망 끝의 죽음이라고 불렀다. 지난 10년간 계속 늘어난 이러한 죽음은 특히 중념 백인 남성 사이에서 많았는데 45세에서 54사이의 백인 남성과 여성에게 절망 끝의 죽음은 1990년에서 2017년 사이 세배로 늘었다. 2014년 처음으로 이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이 심장마비보다 알코올, 약물, 자살로 숨지는 경우가 많게 나타났다(Deaths of Despair and the future of capitalism, 143)

5. 이런 음울한 전염병이 생긴 이유는? "절망 끝의 죽음Deaths of Despair" 사례의 증가는 학사학위가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거의 예외 없이 발생하고 있다. 4년제 대학 학위가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사례에서 제외된다.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들이 가장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같은 책, 3). 중년(45~54) 백인 남성과 여성의 전반 사망률은 지난 20년 동안 별 변화가 없었지만 교육을 기준으로 보면 사망률에는 큰 차이가 난다. 1990년대 이후 대학 졸업자의 사망률은 40% 감소했지만 비대졸자의 경우는 25%나 늘었다. 학사학위가 있는 중년이라면 그렇지 않은 동년배들에 비해서 사망 확률이 1/4밖에 되지 않는다."(같은 책, 57쪽)

6. 2017년 비대졸자는 대졸자보다 절망 끝의 죽음Deaths of Despair에 희생되는 경우가 세 배내 많았다(같은 책, 57~8쪽). 이는 빈곤에 따른 불행이며, 학력 간 균열에 따른 사망률의 차이는 단지 저학력자가 가난할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볼 수도 있겠다. 그들도 이러한 가능성을 고려하였지만 그것은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함을 발견했다. 또한 주 별로 조사했을 때 자살, 약물 과용, 알코올에 의한 죽음과 빈곤률 상승 사이에는 이렇다 할 상관관계가 나타나지 않았다. 물질적 빈곤보다 더한 뭔가가 죽음에 이르는 절망을 이끌어낸다. 학력이 모자란 사람이 능력주의 사회에서 특별히 겪는 고통이 있다면 명예와 보상의 문제다. "절망 끝의 죽음Deaths of Despair"이란 저학력 백인 노동자에게 장기적이고 완만한 삶의 방향 상실을 나타낸다(같은 책, 133/146쪽.)

분노의 원인

7. 트럼프는 절망 끝의 죽음Deaths of Despair"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에서 최고의 성과를 거두었다. 카운티별로 선거 분석을 해본 결과 소득 변수를 통제한 상태에서도 중년 백인의 사망률이 높은 지역일수록 그에 대한 지지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비대졸자 비율이 높은 지역 역시 마찬가지였다. 트럼프 당선에 주류 평론가들과 정치인들이 깜짝 놀랐던 까닭 중 하나는, 상당 기간 진행된 '엘리트층의 거들먹거린 문화'의 문제점을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심지어 동참했기 때문이다. [...] 미디어학자들은 TV 속 블루컬러 아버지들은 무능하고 우둔하며 놀림감이 되기 일쑤고, 대개 더 유능하고 센스 있는 아내에게 휘둘리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분석한다. 상류 및 중류 그리고 전문직업인은 보다 호의적으로 묘사된다.

8. 노동계급에 대한 엘리트의 경멸은 일상 언어에서도 느낄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 헤이스팅스 법과대학에서 교수를 맡고 있는 존 윌리엄스 진보파들이 '계층 인지 감수성이 없다'며 비판했다. "다른 곳에서는 점잖게 행동하는 엘리트들(대체로 진보 성향)은 자신도 모르게 노동계급 백인을 낮춰 보는 태도를 취한다. 우리는 '배관공의 헛짓거리'에 짜증나서 '촌동네 출신'인 판잣집 쓰레기들trailer trash'을 욕하는 말을 종종 듣는다. 농담이라는 명목 아래 대놓고 특정 계층을 비하하는 표현들이다. 이런 거들먹거림은 정치 캠페인에도 영향을 준다. 힐러리 클린턴이 '닥한 사람들'이라고 언급한 것이나, 오바마가 '총과 종교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라고 한 것 등을 들 수 있다(Joan C. Williamns, white working class, harvard business review press, 2017; 'The Dumb politics of elite condescension, new york times, may 27, 2017, nytimes.come/2017/05/27/opinion/sunday/the-dumb-poltics-of elite-condescension.html).


그는 "경제 관련 분노는 인종 관련 불만에 기름을 부었으며, 이는 일부 트럼프 지지자들(트럼프 본인)의 경우 공공연한 인종주의적 폭언으로 불거졌다. 그러나 백인 노동계급의 분노를단지 인종주의에 불과하다고 본다면 그건 지식 계급의 안일한 분석이다. 이러한 분석은 위험하다."(윌리엄스, what so many people don't get about the us working class. hbr.org/2016/11/what-so-many-people-dont-get-about-the-u-s-working-class.

9. 노동계급의 불만에 대해서 가장 설득력 있는 연대기를 집필한 버클리캘리포니아 주립대 사회학 교수, 앨리 러셀 혹실드는 [...] 보수적인 남부의 노동자들과의 '주방 테이블 수다'에서 · · ·연방정부를 혐오하고 불시낳는지(그들 지역에 환경 재앙을 가져온 석유 화학 기업들보다도 더) 이해해 보려고 했다. 그녀가 깨달은 내용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한 그것은 "그녀가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의 희망, 공포, 자부심, 수치심, 분노, 불안" 등을 두루두로 묘사하고 있다. 그녀의 이야기는 경제적 박탈과 문화적 소외의 복합물이다. · · ·  동시에 그들 90%는 백인 대 유색인종 사이의 증폭된 경쟁(일자리, 인정, 정부 지원금 등등)에 휘말려야 했다.  · · ·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메리칸 드림의 차례를 참을성 잇게 기다렸다고 여긴 사람들이 흑인, 여성, 이민자, 난민 들 등등에게 '새치기를 당했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들은 이런 상황에 분개했고,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정치지도자들에게도 분노했다(anger and mourning on the amerian right, 2016, 135.) 이 사람들은 이 새채기쟁이들뿐만 아니라, 본인들은 인종주의자, 보수꼴통red-neck, 백인쓰레기 등이라고 비하하는 엘리트들에게 불만이었다. 

일의 존엄성 되살리기

10. 최근 불평등이 증가하면서, 그리고 노동계급의 분노가 힘을 모으면서 일부 정치인들은 일의 존엄성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 · · 주로 부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2017년의 법인세 삭감 법안을 옹호하면서 트럼프는 그의 목표가 "모든 미국인들이 일의 존엄성을, 봉급을 받을 때의 자부심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들의 입장에서 자유주의자들은liberal 때때로 사회안전망을 모색하거나 강화하는 일에, 노동계급의 구매력을 높이는 일(최저임금 인상, 의료보험 강화, 육아휴직, 주간아동보호, 저소득층에 대한 세액 공제 등등)에 '일의 존엄성을 들먹인다. 이러저러한 표피적 정책을 뒷받치마려는 이런 언변은 2016년 트럼프의 승리로 이어진 노동계급의 분개와 분노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한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그 사실에 당황했다. 즉 많은 사람들이 그런 조치 덕에 경제적 혜택을 보고 있으면서도 그에 반대하는 입장인 후보자(트럼프)에게 표를 던질 수 있다는 말인가? 

11. 한 가지 친숙한 해답은 문화적 변동에 두려움을 느낀 백인 노동계급이 그들의 경제적 손익을 미처 따지지 못한 채 "가운뎃손가락으로 투표했다"는 것이다. · · · 40년 동안의 세계화 과정에서 뒤처지고 불평등가지 심화된 가운데, 고통은 단지 봉급 수준의 정체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오랜 두려움, 즉 '내가 고물이 되어버린다'는 두려움의 현실화에 직면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술이 더이상 별 쓸모가 없어진 세상에 살고 있다. 68년 민주당 대선후보 지명을 바라던 로버트 케네디는 이 점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실직자의 고통은 다만 소득이 없다는 데에서 나오지 않으며, 그들이 공동선에 기여할 길이 막혔다는 데서도 비롯된다. 사람들의 불만에 대해 케네디가 통찰한 내용은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노동계급과 중산층 유권자들에게 분배적 정의를 더 강화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경제성장의 과실에 대해서 더 공정하고 더 적극적인 접근을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권자들이 그보다 더 원하는 것은 그들이 정의에 더 기여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얻고, 다른 이들이 필요로 하고 가치를 두는 일을 할 기회를 달라는 것이다. 

12. 자유주의자들이 분배적 정의에 찍은 방점은 오직 GDP를 늘리는 게 최선이라는 입장에 적절한 균형추가 된다. 그것은 정의로운 사회는 전반적인 번영의 수준을 높이는 것으로 불충분하다는 생각을 반영한다. 그리고 소득과 부의 공정한 분배도 염두에 둔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GDP 증대를 위한 정책들(자유무역협정, 저임 국가로의 노동 아웃소싱 등등)은 승자가 패자에게 적절히 보상을 해줄 때만 정당하다. 가령 세계화의 이득을 본 기업과 개인의 증대된 이익은 세금을 통해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고 실직 노동자들의 직업 훈련 지원비로 쓰여야 한다. 이런 접근은 미국과 유럽의 주류중도좌파(일부 중도우파) 정당들이 1980년대 이래 취해 오던 접근이다. 세계화와 그것이 초래한 번영을 받아들이되 그 수익으로 국내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위로하겠다는 것이었지만 포퓰리즘적 반격은 그런 프로젝트를 부정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위로는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다. 대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불평등을 걷잡을 수 없이 늘리기만 했다. 경제 성장에 따른 거의 모든 수익은 최상층에게 돌아갔고, 대다수 노동계급의 사정은 거의 내지는 전혀 개선되지 못했다. 세그에 따른 조정 뒤에도 말이다. 이 프로젝트의 재분배 전망은 망가져 버렸는데, 부분적으로 금권정치 성향이 증대했기 때문이다. 민주적 기구들이 '과두제적 장악'을 당한 것이다. 

13. GDP 증대에 중점을 두는 정책은 비록 뒤처진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동반되더라도, 생산보다 소비를 강조하게끔 했다. 따라서 우리는 생산자보다 소비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재정립했다. · · · 소비자로서 우리는 우리가 버는 돈의 거의 전부로 가능한 한 싸게, 원하는 재화와 용역을 구입하기 바란다. 그런 것들이 해외의 저임금노동자의 손으로 만들어졌든, 고임금 미국 노동자의 손으로 만들어졌든 말이다. 그리고 생산자로서 우리는 만족스럽고 수입이 좋은 일자리를 바란다. 소비자로서 자기 정체성과 생산자로서 자기 정체성 사이를 조화시키는 일은 정치의 몫이다. 그러나 경제성장에 올인하는 세계화 프로젝트는, 그리고 소비자 복지 우선주의 아웃소싱, 이민, 생산자 복지를 금전적 의미로만 풀이하는 방식이 가져오는 악영향에 눈을 감는다. 세계화를 주도하는 엘리트는 그것이 초래한 불평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일의 존업성에 끼치는 악영향을 직시하지 못했다. 

사회적 인정으로서의 일

14. 노동계급과 중산층 가정의 구매력을 높여주는 것으로 그들의 곤경을 보상하려는 정책 대안, 또는 사회적 안전망 강화를 도모하는 정책 대안 등은 한창 불붙고 있는 분개와 분노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 · · 구매력 저하도 분명 문제지만, 노동계급의 분노를 직접 촉발한 상처는 그들이 생산자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는 사실이다. 이 상처는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과 시장주도적 세계화가 주는 효과와 맞물린다(322~3쪽). 

15.  이 상처를 인식하고 일의 존엄성을 복구해 줄 유일한 정치 어젠다는 정치를 통해서 그들의 불만을 제대로 다루는 것이다. 그러한 어젠다는 분배적 정의만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기여도에 대한 배려를 포함해야만 한다. 이 분노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사회적 인정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로서의 역할에서 공동선에 기여하고 그에 따라 인저을 받는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것이다. 

16. 소비자와 생산자 정체성의 대조는 공동선에 대한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이해 방법에 주목하게 한다. 1) 경제정책 결정자들에게 익숙한 접근법은 '공동선이란 모든 사람의 선호와 이해관계의 집합'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소비자 복지를 극대화함으로써 공동선을 달성할 수 있다. 그 첩경은 경제성장의 극대화다. 가장 많은 돈을 버는 사람이 공동선에 가장 많이 기여하는 사람이리라. 그는 소비자가 가장 원하는 재화와 용역을 제공함으로써 그런 돈을 벌었기 대문이다. 2) 이 접근법은 이러한 소비자 중심적 공동선론을 기각하고, '시민적 개념'이라고 불릴 만한 대안을 선호하는 것이다. 시민적 공동선은 단지 여러 선호를 합산하거나 소비자 복지를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선호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것, 즉 이상적으로는 그것을 한 단계 위로 올리고 개선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보람 있고 번영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는 경제 활동 자체만으로는 수립될 수 없다. 우리 동료 시민들과 어떻게 정의롭고 좋은 사회를 구현할지 논의해야 한다. 각자 시민덕을 배양하고, 정치 공동체에서 가치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 합리적으로 도출할 수 있어야 한다(323~4쪽). 

17. 공동선의 시민적 개념은 일정한 유형의 정치를 요구하며, 그것은 공적 숙의의 영역고 사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는 또한 일에 대한 생각을 어느 정도 달리할 것도 요구한다. 시민적 개념의 관점에서 우리가 경제적으로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소비자보다는 생산자로서의 역할이다. 생산자로서 우리는 우리 동료 시민들이 필요로 하는 재화와 용역을 만들면서, 사회적 명망을 얻을 수 있는 역량을 계발하고 실행해야 한다. 우리가 기여하는 것의 진짜 가치는 우리가 받는 급여액으로 판단할 수 없다. · · · 경제 정책이 궁극적으로 소비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은 오늘날 하도 익숙해져서 그런 생각을 넘어서기가 어려울 정도다.  『국부론』에서 스미스는 "소비는 모든 생산의 유일한 목표이자 의미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생산자의 이익 추구는 오로지 소비자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데 있어야 한다." 케인스는 "소비란 모든 경제 활동의 유일한 목표이자 대상이다"라고 말했다. 

18. 그러나 더 오래된 전통적 도덕사상과 정치사상은 생각이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번영이 '우리의 본질을 우리 역량의 배양과 실행을 통해 실현하는 데에 있다'고 보았다. · · · 20세기 공화주의 전통의 생산자 윤리는 소비자 중심자 자유 윤리와 경제 성장 위주의 정치경제학에 밀려났다. 그러나 복잡한 사회에서도 '일은 시민들을 기여와 상호 인정의 틀 안에 묶어 주는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 · · 일부 세속 철학자들도 같은 목소리를 냈다. 악셀 호네트는 오늘날 소득과 부의 분배에 대한 논쟁은 인정과 명망에 대한 갈등으로 이해하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보았다. 가령 팬들이 한 선수에게 "이미 수백만 달러를 받고 있으면서 더 달라고 하느냐"고 불평하면 그 선수는 거의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존중받느냐가 문제죠."라는 것이다. 이것이 '인정 투쟁'이라는 용어를 통해 헤겔이 말하려던 것이었다. 수요를 효율적으로 충족시키는 시스템을 넘어, 노동 시장은 인정을 부여하는 시세팀이라는 게 헤겔의 생각이다. 그것은 단지 소득만으로 노동에 보상하는 게 아니며, 각 개인의 일을 공동선에 대한 기여로 공적 인정을 해준다. 시장 자체는 노동자들에게 기술이나 인정을 부여하지 않으며, 그래서 헤겔은 노동조합이나 길드 같은 기구를 제안한다. · · · 헤겔은 그의 시대에 등장한 자본주의적 노동 기구는 오직 두 가지 조건에서 윤리적으로 정당하다고 보았다. 1) 최저 임금을 보장해야 한다. 2) 모든 근로 활동에 있어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도록 구조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뒤르켐은 헤겔 노동론을 토대로 "노동분업은 사회적 연대의 원천이 되어야 하며, 모든 이들은 공동체에 기여한 실제 가치에 근거해 보상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헤겔과 뒤르켐은 '일은 그 최선에 있어 사회적 통합 활동이며 인정의 장이고, 공동선에 기여해야 한다는 우리의 책임을 명예롭게 수행하는 방식'이라고 보았다. 

기여적 정의

19. 왜 주된 정치 어젠다는 정의의 기여적 측면을 거부하며, 그 기봔이 되는 생산자 중심 윤리를 외면하는 것일까? 해답은 단지 우리가 소비를 너무 사랑한다는 데 있을지 모른다. 또한 '경제성장이 최고'라는 믿음 역시 한몫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 · · 따라서 분배 정의에 대한 논쟁은 필요하다. 그러나 '경제 파이를 키우는 게 작아지는 것보다는 낫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라 여겨진다. 이와 달리 기여적 정의는 인간의 좋은 삶이나 최선의 인생 방식에 대해 중립적이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미국 공화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헤겔에서 가톨릭 사회교육에 이르기까지 기여적 정의의 이론은 '우리는 공동선에 기여할 때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며, 우리가 한 기여로부터 우리 동료 시민들의 존경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이 전통에 따르면 근본적인 인간 욕구는 우리가 공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일의 존엄성은 그런 필요에 부응하는 우리 역량의 발휘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좋은 삶을 사는 것이라면 소비를 '모든 경제활동의 유일 목표이자 대상'이라고 보는 것을 잘못이다(327~8쪽). 

20. GDP의 규모와 분배에만 관심이 있는 정치경제학은 일의 존엄성을 떨어트리며, 시민 생활을 황량하게 만든다.  · · · 로버트 케네디 이후 수시 년이 지나자 진보파는 공동체, 애국심, 일의 존엄성 같은 것을 대체로 내버렸으며 대신 사회적 상승의 담론만 주구장창 늘어놓고 있다. 임금 정체, 아웃소싱, 불평등, 이민자와 로봇의 일자리 빼앗기 등을 걱정하는 이들에게, 통치 엘리트들은 엄청 기운이 나는 조언을 해준다. "대학에 가세요! 재무장을 하고 글로벌 경제전쟁에서 승리하세요!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건 당신이 배운 것에 달려 있답니다. 하면 됩니다!" 이것이 글로벌, 능력주의적, 시장 주도적 시대의 관념론이다. 승자에게 아첨을, 패자에게는 모욕을 던지는 관념론. 2016년 그 환상은 끝장났다. 브렉시트 가결과 트펌프 당선을 맞이하여, 그리고 유럽의 초극우민족주의, 반이민 정당들을 보며 그 프로젝트는 완전히 너덜너덜해졌음을 고해야 한다. 문제는 그 대안적인 정치 프레젝트가 어떤 것이냐다(328~9쪽). 

일의 존엄성에 대해 논쟁하자

21. 공동선은 불가피하게 논란의 여지를 포함한다. 그러나 일의 존엄에 대한 새로운 논쟁은 우리의 당파적 경향을 무너뜨릴 것이고, 우리의 정치 담론을 도덕적으로 활성화할 것이며, 우리가 40년 동안 시장의 신앙과 능력주의적 오만에 빠져든 탓에 양극화된 정치 현실을 넘어설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거칠게나마 두 가지 형태의 정치 어젠다를 고려해 보자. 이 어젠다들은 둘 다 일의 존엄성에 중점을 두며 그것을 시장적 결과가 승인하는 것에 의문을 던진다. 하나는 보수적 입장에서, 다른 하나는 보수적 입장에서 출발한다(331쪽).

'열린 어젠다'의 오만

22. 공화당 대통령 후보 미트 롬니의 저책 보좌관이자 젊은 보수적 사상가인 오렌 카스에게서 나왔다. 그는 『한때, 그리고 미래의 노동자』에서 미국에서 노동의 존엄을 일신하려면 공화당이 자유시장에 대한 전통적 선호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 기업의 법인세를 줄이고 자유무역을 진흥해서 GDP를 끌어올릴 생각하지 말고, 노동자들이 가족을 부양하고 지역사회에 기여하기에 충분한 급여를 받는 일자리를 찾도록 돕는 데 공화당이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경제성장보다 좋은 사회를 중시하는 방식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가 제안한 정책 중 하나는 저소득 노동자들에게 임금 보전을 해주는 것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정부가 시간당 임금으로 따질 때 저임금으로 분류되는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에게 정부가 시간당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급여세의 정반대 개념이었다. 노동자 개인 수입에서 얼마씩 빼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얼마씩 보태주는 것이다. 저소득 노동자들이 당장 상당한 시장 임금을 받을 기술이 없더라도 수준 있는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332쪽). 

23. 극적인 형태의 임금 보전 정책은 2020년 COVID-19 사태로 경제가 무너진 여러 유럽 국가들에서 실행에 옮겨졌다. 영국, 덴마크, 네덜란드는 노동자를 해고하지 않은 기업들에게 해당 노동자 급여의 75~90%를 지급해 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해고되고 실업 보험에 의존해서 살게 된다. 반면 미국의 접근법은 노동자가 사라진 임금을 벌충할 수 있게는 하되, 그들이 일자리를 유지함으로써 자기 일의 존엄성을 확신하도록 할 수는 없다. 그(카스)의 다른 정책 제안들은 보수파들에게 좀 더 어필할 만했다. · · · 우리의 주 관심사가 비숙련 내지 중급 숙력 미국 노동자들에게 수준 있는 삶을 살고 가족을 부양하며 지역사회에 공헌할 만한 수입을 제공할 노동 시장을 만드는 데 있다면, 무역과 아웃소싱, 이민 등에 ㅇ느 정도의 규제를 두는 편이 정당할 것이다. 그의 개별 제안들의 가치를 논하기 전에, 흥미로운 점은 그것이 우리의 주된 관심을 'GDP 극대화'에서 '일의 존엄과 사회적 응집에 친화적인 노동 시장 조성'으로 옮기도록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1990년대 이래 핵심적 정치 균열은 더이상 좌우가 아닌 '개방 대 폐쇄'라고 역설해 온 세계화 주창자들에게 크게 한 방을 먹인다. 그는 "기술 수준이 높고, 대졸자이며, '현대 경제의 승리자'인 사람들은 '개방'편으로, 그 반대자들을 폐쇄 편으로 줄 세우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카스는 "다수가 뒤떨어졌다고 여겨질 때 '열린 어젠다'[각주:11] 는 민주주의에서 지속가능하지 않다. 그 주장들은 힘을 잃고 있다.", "문제는 열린 어젠다가 실패할 것인지가 아니다. 그것의 대안이 무엇이냐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333~4쪽). 

금융, 투기, 그리고 공동선 

24. 일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두 번째 접근법, [···] 종종 주류 정치인들이 간과해온 세계화 어젠다의 한 측면에 조명을 비춘다. 금융의 역할이 증대하고 있다는 사실. 2008년 금융위기 때 극적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금융업계인데, 촉발 논쟁은 '세금으로 구제금융을 제공해야 되느냐'와 '어떻게 윌스트리트를 개혁해서 앞으로의 위기 가능성을 줄이느냐'를 두고 벌어졌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금융이 경제를 재구성했으며 교묘하게 능력과 성공의 의미 또한 뜯어고쳤다'는 사실은 덜 주목받았다. 무역과 이민은 금융에 비해서 포퓰리즘의 반 세계화 공격에서 덜 주목 받았다. 그런 것들이 노동계급의 일자리와 자위에 미친 영향은 보다 분명하고 확실해보였지만 경제의 금융화야말로 아마도 일의 존엄 감소에 더 큰 영향을 미쳤으며, 노동자들의 사기 저하에도 더 큰 역할을 했으리라 여겨진다. 그것이 현대 경제에서 시장의 보상과 실제 공동선에의 기여도 사이에 아마도 가장 큰 격차 사례를 제공했기 때문이다(334~5쪽). 

25.모든 금융 활동이 생산적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가치 있는 재화와 용역을 생산할 경제 능력을 증진시켜 준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최선을 다 한다고 해도 금융은 그 자체가 생산적일 수가 없다. 그 역할은 자본을 사회적으로 유영한 목적벌(신생 기업, 공장, 도로, 공항, 학교, 병원, 가정 등등) 배당함으로써 경제활동을 돕는 것이지만 금융이 미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최근 몇 십 년동안 폭발적으로 증가함으로써 그 투자는 점점 실물경제와 유리되었다. 점점 더 관계자들에게 큰 수익을 창출하는 복합 금융공학과 연계되고 있는데, 이 금융공학이란 경제를 보다 생산적이게 하는 일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335~6쪽).

26. 영국 금융서비스국 국장 어데어 터너는 "지난 20~30년 동안 부유한 선진국들에서 금융 시스템의 규모와 복잡성이 증대했는데, 그것이 성장이나 경제 안정에 보탬이 되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리고 금융 활동이 경제적 가치를 높이기보다는 실물경제에서 지대(부당한 불로소득)를 끌어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러한 절제된 판단은 1990년대에 클린턴 행정부와 영국 정부가 믿고 있던 지혜, 그에 따라 금융업 규제를 철폐하도록 했던 지헤에 사형선고를 내린다. 즉, 간단히 볼 때 월스트리트에서 최근 수십 년 동안 고안해 낸 파생상품들과 기타 금융상품들은 실제로는 경제를 돕기보다 해치기만 했다는 뜻이다(336쪽). 

27. 1984년 ··· 예일대 경제학 교수인 제임스 토빈은 '금융시장의 카지노적인 성격'에 대해서 직감에 따른 경고를 했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뛰어난 젊은이들을 포함해 우리가 가진 자원을 점점 더 많이 금융계로, 재화와 용역 생산과는 동떨어진 분야로 집어넣고 있다. 그런 금융 활동은 사회적 생산과는 전혀 비례하지 않는 높은 사적 수익을 창출하는 활동이다."라고 말했다. 어데어 터너는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선진경제에서 금융은 15%만이 생산성 있는 신생 기업으로 투자되고 나머지는 기존 자산이나 인기 있는 파생상품 등에 투기된다고 추산한다. 그 영향은 경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도덕과 정치에도 영향을 준다(337쪽).

28. 경제적으로 그것은 경제성장을 돕기보다 방해하는 데 금융활동이 많이 이뤄지고 있다는 의미다. 도덕 및 정치적으로 그것은 '시장이 금융계에 주는 막대한 보상'과 '그것이 실제 공동선에 거의 기여하지 않은 것' 사이의 큰 불일치가 있다는 의미다. 여기에다 금융 종사자들이 투기 활동을 하면서도 분에 넘치는 명성을 누리는 현실은 실물경제에서 유용한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존엄을 조롱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나의 관심사는 그 도덕적, 정치적 영향이다. 일의 존엄을 살리려는 정치 어젠다는 세금 제도를 써서 명망의 경제를 재구성해야 할 것이다. 즉 투기자본을 억누르고 생산적인 노동을 상찬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이는 세금 부담을 일에서 소비로, 그리고 투기로 옮긴다는 뜻이다. 이를 급진적으로 추진하려면 급여세를 대폭 인하하거나 아예 없애버리고 대신 소비세, 부유세, 금융거래세를 통해 세입 부족분을 메워야 할 것이다. 보다 온건하게 가려면 급여세(고용주나 고용자 모두에게 일 관련 비용을 늘리고 있는)를 줄이고 그만큼 줄어드는 세입은 단태 거래(실물경제에 아무 보탬이 안 되는)에 한해 금융거래세를 매겨 충당한다(338쪽).

만드는 자와 가져가는 자 

29. (세금 문제와 관련해서) 종종 겉으로는 가치중립적인 듯한 정책 속에 도덕적 판단이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 세금이 일과 연관될 때, 그리고 돈을 버는 다양한 방식과 연관될 때 특히 그렇다. 자본소득에 대한 과세는 왜 근로소득에 대한 과세보다 세율이 낮을까? 워렌 버핏은 억만장자 투자가인 자신이 그의 비서보다 낮은 세율로 세금을 낸다는 사실을 알고 이러한 의문을 제기했다. 일부는 그 까닭이 국가는 근로 장려보다 투자 활동 장려에 더 무게를 두며, 그에 따라 경제성장이 진작되기를 의도하기 때문이라 보았다. ··· 정치적으로 볼 때 이 겉보기에는 실용적인 주장은 그 설득력 일부를 수면 아래에 있는 도덕적 가정, 즉 능력주의적 가정에서 넌지시 가져오고 있다. 그 가정이란 투자자는 '일자리를 만드는 자'이며 따라서 낮은 세율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대놓고 펼친 자는 공화당 하원의원 폴 라이언으로, 미하원 의장을 지낸 사람이다. 그는 자유지상주의 작가인 아인 랜드의 열성팬이기도 하다. 라이언은 복지국가를 비판하면서 그는 '만드는 자(경제에 기여하는 바가 많은 사람)'와 '가져가는 자'(납세액보다 정부에서 받는 액수가 많은 사람)을 구분했다. 그는 복지국가가 성장하면 소위 '가져가는 자'가 '만드는 자'를 훨씬 넘어서게 될 것을 우려했다(340쪽). 

30. (하지만) <파이낸셜타임스>와 CNN의 비지니스 칼럼니스트인 라나 포루사는 『메이커스 앤드 테이커스: 경제를 성장시키는 자, 경제를 망가뜨리는 자』라는 책에서 라이언이 이 둘을 구분한 것을 받아들이면서 그가 그들을 잘못 판정하고 있다고 여겼다. 어데어 터너, 워렌 버핏을 비롯한 비생산적 금융화 비판자들을 인용하면서 그는 오늘날 경제의 가장 큰 '가져가는 자'는 거액의 불로소득을 노린 투기를 일삼으며 실물경제에는 기여가 전혀 없는 금융업계 종사자들이라고 주장했다. 포루하는 앞서 제시된 '만드는 자'란 실제로는 '사회에서 가져가는 일만 하는 자들. 소득 대비해서 최소한의 세그만 내며, 경제의 파이를 말도 안 되게 많이 움켜쥐고, 종종 경제성장을 방해하는 비지니스 모델을 돌리는 자들'이라고 풀이했다. 진짜 '만드는 자'란? 그녀는 실물경제에서 노동을 통해 유용한 재화와 용역을 공급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런 생산적 활동에 투자하는 사람들이라 보았다(341쪽). 

31. 오늘날 경제에서 누가 만드는 자이고 누가 가져가는 자인지에 대한 논쟁은 결국 기여적 정의론으로 귀착된다. 어떤 경제 역할이 명예와 인정을 받을 가치가 있느냐에 대한 생각이다. 이런 사고 과정은 무엇이 공동선에 대한 가치 있는 기여인가를 따지는 공적 토론을 필요로 한다. 나는 제안한다. 급여세의 전부 또는 일부를 없애는 대신 금융거래세를 일종의 '죄악세'로 신설해서 카지노나 다름없고 실물경제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투기 행위를 억제하는 방안을 토론의 주제로 삼을 것을. 나는 넓게 보아 일의 존엄을 회복하려는 것이고, 그러려면 우리 경제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도덕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기술관료적 정치가 숨겨 왔던 질문 말이다. 그런 질문 중 하나는 어떤 종류의 일이 인정과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느냐다. 또 다른 것은 우리는 시민으로서 서로에게 어떤 책임이 있느냐다. 이 질문들은 상호연관되어 있다. 무엇이 긍정적인 기여인지 따져보려면 우리 공동의 생활에서 목표와 수단이 무엇인지부터 가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소속이라는 의식없이 우리 스스로를 우리가 빚지고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라는 인식 없이 공동의 목표와 수단에 대해 숙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시민들이 "우리는 모두 함께입니다"라는 말을 위기 때에 건성으로 내뱉는 말로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믿고 할 만큼 건실한 공동체 의식을 필요로 한다. 그런 말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대한 믿음이 가는 묘사여야 한다. 지난 40년 동안, 시장주도적 세계화와 능력주의적 성공관은 힘을 합쳐서 이런 도덕적 유대관계를 뜽어내 버렸다. 그들이 뿌려 놓은 글로벌 보급 체인, 자본의 흐름, 코스모폴리탄적인 정체성은 우리가 동료 시민들에게 덜 의존적이 되고, 서로의 일에 덜 감사하게 되고, 연대하자는 주장에 덜 호응하게 되도록 했다.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은 우리 성공은 오로지 우리가 이룬 것이라고 가르쳤고, 그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느낌을잃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유대관계의 상실로 빚어진 분노의 회오리 속에 있다. 일의 존엄성을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능력의 시대가 풀어버린 사회적 연대의 끈을 다시 매도록 해야 한다(342~3쪽). 

결론: 능력, 그리고 공동선

1. 행크 애런 이야기의 모럴은 우리가 능력주의를 애호해야 한다는 게 아니며, 오직 홈론을 때려야만 벗어날 수 있는 인종주의의 부정의한 시스템을 혐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회의 평등은 부정의를 교정하는 데 필요한 도덕이다. 그러나 그것은 교정적 원칙이며, 좋은 사회를 만드는 적절한 이상은 아니다(348쪽). 

기회의 평등을 넘어서

2. 사회적 상승에만 집중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사회적 연대와 시민의식의 강화에 거의 기여하지 못한다. 심지어 우리보다 사회적 상승에 보다 성공적인 나라라도 상승에 실패한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만족할 수 있도록, 그리고 스스로를 공동체 구성원으로 여길 수 있도록 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데에 실패함으로써 능력주의적 학력이 없는 사람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소속이 어디인지 정체성을 의심하게 되었다(348~9쪽). 

3. 종종 기회의 평등의 유일 대안은 냉혹하고 억압적인 결과의 평등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또 다른 대안이 있다.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안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이다. 그것은 사회적 존경을 받는 일에서 역량을 계발하고 발휘하며, 널리 보급된 학습 문화를 공유하고, 동료 시민들과 공적 문제에 대해 숙의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진다. 조건의 평등의 두 가지 뛰어난 설명은 대공황 중에 나왔는데 1931년 <평등>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영국의 경제사학자, 사회비평가인 토니는 기회의 평등이란 기껏해야 부분적인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성공할 기회는 거시적으로 본 실질적 평등을 대체할 수 없다. 소득과 사회적 조건의 극심한 불평등을 없는 것처럼 만들어버릴 수도 없다."[R. H. Tawney, Equality, 1964). 

"사회적 복지는 응집과 연대에 달려 있다. 그것은 단지 사회적으로 상승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 높은 수준의 일반 문화, 그리고 강력한 공동 이해관계 의식의 존재를 내포한다. 개인의 행복은 각자가 자유롭게 새로운 안락과 명성의 자리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존엄과 문화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함도 요구한다. 후자는 반드시 출세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토니, 같은 책]

4. 제임스 애덤스는 <미국의 서사시>the epic of america라는 책에서 미국은 "인류에게 내려진 독특하고 유일한 선물"이라고 쓴다. 그 이유는 그 꿈이 "그 땅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더 낫고, 더 부유하고, 더 온전한 삶을 살아갈 기회가 누구에게나 자신의 역량이나 성취에 따라 주어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아담스, 같은 책, 404). 애덤스가 말하는 꿈은 단지 사회적 상승만이 아니라 더 폭넓고 민주주의적인 조건적 평등을 말하고 있다. 그는 그 예로 미국 의회도서관을 가리켜 "민주주의가 그스스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상징"이라고 말한다. 

민주주의와 겸손

5.  우리는 오늘날 조건의 평등을 별로 많이 갖고 있지 않다. ···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기가 일을 마치면, 꼭대기에 오른 사람은 자신이 그 성공의 대가를 온전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여기고, 밑바닥에 떨어진 사람도 다 자업자득이라고 여긴다. ···우리가 중요한 공적 문제에 대해서 서로 합리적으로 토론하거나 심지어 서로의 의견을 경청할 힘조차 잃어버리고 만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능력주의는 처음에 매우 고무적인 주장으로 출발햇다. ····이런 생각(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믿으면 신의 은총을 우리 편으로 끌어올 수 있다는 주장)의 세속판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유쾌한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 운명은 우리 손에 잇고, 하면 된다"라는 약속 말이다(351~2쪽). 

6. 그러나 이런 자유의 비전은 공동의 민주적 프로젝트에 대한 우리의 책임에서 눈을 돌리도록 했다. ··· 소비자주의적 민주주의의 개념(공동선의 두 가지 개념 중에서 소비주의적인 공동선을 지칭)에 따르면 우리가 활기찬 공동의 삶을 영위하든, 우리와 같은 사람끼리만 모여 각자의 소굴에서 사적인 삶을 살든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공동선이 오직 우리 동료 시민들이 우리 정치공동체는 어떤 목적과 수단이 필요한지 숙려하는 데에서 비롯된다면, 민주주의는 공동의 삶의 성격에 무관심해질 수 없다. 그것은 완벽한 평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서 온 시민들이 서로 공동의 공간과 공공장소에 만날 것을 요구한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다른 의견에 관해 타협하며 우리의 다름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공동선을 기르는 방법이다(352~3쪽).

7. '사람들은 시장이 각자의 재능에 따라 뭐든 주는 대로 받을 자격이 있다'는 능력주의적 신념은, 연대를 거의 불가능한 프로젝트로 만든다. 대체 왜 성공한 사람들이 보다 덜 성공한 사회구성원들에게 뭔가를 해줘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설령 죽도록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자수성가적 존재나 자기충족적 존재가 아님을 깨닫느냐에 달려 있다.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 "신의 은총인지, 어쩌다 이렇게 태어난 때문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 서 있다." 그런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덜 악의적이고 보다 더 관대하나 공적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353쪽).

  1.  미국 대학입시 위원회에서 주관하는 대학과정 인증시험 및 고급 교과과정  [본문으로]
  2. 그들은 아웃소싱, 자유무역 협정, 무제한적 자본 이동성에 대한 비판을 '꽉 막힌 생각'으로 주장한다. [본문으로]
  3.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원흉인 월스리트 금융가에게 금융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정책으로 막대한 양의 구제금융이 지급되었음에도 그들으 얼마 뒤 스스로에게 수백어 달러의 보너스를 지급했는데, 이게 대중의 분노를 샀다. [본문으로]
  4. 샌델의 주석 2) "우리는 그 어떤 아니 단지 가난한 집 출신이라고, 저소득층 거주지 출신이라고, 또는 소수인종이거나 그 밖의 우연한 결과로 그 기회를 잃고 뒤처지게 해서는 안 되도록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라도 버려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고도 경쟁의 세상이며, 맨파워로 움직이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모든 인적 자원을 활용해야 합니다."(Clinton, remarks in san jose, california, august 7, 1996, the ameriacan presidency project, presidency.ucsb.edu/node/223422. [본문으로]
  5.  (Toon kuppens, et, al. "educationism and the irony of meritocracy: negative attitudes of higher educated people towards the less educated, journal of experimental social psychology 76(may 20188), 429~47. 연구자들은 무슬림, 터키 출신 유럽 거주민, 빈곤층, 비만인, 시각장애인, 저학력자 등 전형적인 차별 대상 집단들에 대한 연구에서 다른 집단들보다 저학력자에 대해 고학력 유럽인들이 가장 기피 대상이 된다는 것을 증명했다. 미국에서 실시된 비슷한 조사에서, 연구자들은 유럽과 다른 차별 댓집단들을 예시했는데 가령 흑인들, 노동계급, 빈곤층, 저학력자 등이었다. 미국인들은 이 가운데 저학력자들에 대해 가장 낮은 평가를 했다. 이 논문의 441~2를 참조. [본문으로]
  6. 200년대 미국에서 의회에서 하원의 95% , 상원의 100%가 대졸자 출신. 소수의 대졸자가 다수의 비대졸자를 통치하고 있다는 뜻. 미국 성인의 2/3가 비대졸자이지만, 그 가운데 연방의회에 자리를 갖고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본문으로]
  7. 가령 토머스 프랭크는 뉴딜 정책의 입안자들의 다양한 배경에 대해 설명. 해리 홉킨스는 아이오와 주 사회복지사. 법무장관/대법원 판사 로버트 잭슨은 법학 학위 없는 변호사. 루스벨트의 구제금융정 정책을 추진한 제시 존스는 텍사스 주 사업가.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이사장에 선임한 매리너 에클스는 유타주 작은 마을의 은행원, 비대졸자. 농무장관인 헨리 월리스는 아이오와주립대 졸업. [본문으로]
  8. The Rise of the Meritocracy, 1958, p.104. [본문으로]
  9. 샌델에 따르면, 복지국가 자유주의의 태도가 오만과 굴욕의 정치에 기름을 붓는 모습은 80/90년대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철학자들의 글에서 더 잘 나타난다고 하는데 이는 "재능의 배분이 도덕적 관점에서 자의적이라는 롤스의 주장에 근거한다. '정의로운 사회는 모든 종류의 개인적 불운에 보상해야 한다(장애인이거나, 재능이 부족하거나, 살다가 사고 또는 재난을 겪었거나 등등)'고 한다. 이런 철학자들 중 어떤 이는 '분배 정의는 행운의 주인공이 행운의 결과로 얻은 것의 일부/전부를 불운한 사람에게 넘겨야 함을 명백히 한다.'는 말한다. [본문으로]
  10. 여기서 샌델은 '행운 평등주의'를 비판하는 엘리자베스 앤더슨의 논의를 빌리고 있다. Elizabeth S. Anderson, "What Is the Point of Equality?", Ethics 109, no. 2(January 1999), 287~337; 앤더슨, 302~11. [본문으로]
  11. 여기서는 아마도 '개방 대 폐쇄'라는 프레임을 역설한 세계화론자들을 지칭하는 것 같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