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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들의 포월경들/사회 과학

김홍중, 『사회학적 파상력』, 문학동네, 2016.

프롤로그 

1. 파상이란 기왕의 가치와 열망의 체계들이 충격적으로 와해되는 체험을 가리킨다. [...] 나는 파상력이라는 말로, 연구자 자신이 이런 상황을 탐구할 때 요청되는 인식론적, 윤리적, 존재론적 스탠스이자 그 스탠스에 함축되어 있는 여러 힘들의 총체를 지시하고자 했다. 파상력의 반대편에는, 부재하는 대상을 허구적으로 현존시키는 능력인 상상력이 있다. 상상력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구성해내고, 차이 속에서 동일성을 간파하는 도식화의 능력이다. 파상력은 구성이 아니라 파괴의 방향으로, 질서가 아니라 카오스의 방향으로 활동한다. 전자의 최고치가 꿈이라면, 파상력은 깨어남, 즉 각성의 순간에 발휘된다. 꿈에서 깨어날 때, 우리는 몽상세계의 난잡한 이미지들이 깨지고 흩어져 부서져내리며 다른 세계(현실)가 열리는 충격을 경험한다. 이 충격은 새로운 인식가능성의 확장을 가져다준다. 파상력은 '행위력'이라기보다는 수동저 '감수력'에 가깝다. 파상력의 주체는 행위자agent가 아니라 겪는 자patient이다. 우리는 자발적인 의지를 가지고 꿈에서 깰 수 없으며 깨어남은 우리의 의지를 초월하여 도래하는 사건적 성격을 갖는다. 

2. 파상력에는 이런 수동적 겪음의 힘을 넘어서는 능동적 요소 또한 내포되어 있다. 각성 이후의 체험을 중시했던 벤야민과 달리 나는 각성 직전의 체험을 더 중시하고 싶다.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 종종 체험하는 '가위눌림'이다. [...] 그것은 깨어남의 과정이기도 하고,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것 같은 불안의 시간, 이대로 꿈의 암흑 속으로 떨어져내려갈지 모르겠다는 두려움의 시간이기도 하다. 파상력은 이때 솟구치는, 미약하기는 하지만 필사적인 힘의 총체, 이 마비적 몽환의 장을 벗어나겠다는 몸부림이다. 그리고 깨어나 우리는 식은땀을 닦고, 부서져내리는 꿈의 잔해와 가위눌림의 파편들을 바라본다. 

3. 파상의 시대는 꿈과 깨어남 사이에 여러 형태의 '가위눌림'이다. [...] 그것은 깨어남의 과정이기도 하고,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것 같은 불안의 시간, 이대로 꿈의 암흑 속으로 떨어져내려갈지 모르겠다는 두려움의 시간이기도 하다. 파상력은 이때 솟구치는, 미약하지만 필사적인 힘의 총체, 이 마비적 몽환의 장을 벗어나겠다는 몸부림이다. 그리고 깨어나 우리는 식은 땀을 닦고, 부서져내리는 꿈의 잔해와 가위눌림의 파편들을 바라본다.  파상의 시대는 꿈과 깨어남 사이에 여러 형태의 '가위눌림'이 전개되고, 과거의 꿈과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새로운 꿈 사이에 긴 '환멸'이 전개되는 시기이다. 꿈과 꿈 사이에 펼쳐진 이 가위눌림과 환멸을 있는 그대로 겪어내는 힘, 그리고 희망의 근거를 그 파편들 속에서 찾아내려는 자세, 그것이 바로 파상력의 핵심이다. 

4. 『사회학적 상상력』(1959)에서 밀스가 주장했던 바와 큰 차이를 갖는다. [...] 사회학적 상상력은 사회적인 것의 미래를, 구조와 생활세계 사이의 원활한 번역가능성에서 발견하고자 했다. 사회학자의 일일 뿐만 아니라 시민 전체가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되었던 사회학적 리터러시literacy의 문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21세기는 사회적인 것이 약화되었고, 사회적 상상계로 기능했던 시장, 공론장, 주권적 인민의 위기가 동시에 심화되어가는 시대이다. [...] 우리 시대의 상상력은 기업에서 훈련시키고, 자기계발 속에서 육성되고 실현되는 목적합리적 행위의 한 유형으로 전락하여, '측정가능한 측정' 시스템 내부에 포섭되었다. [...] 상상력을 예찬하면서, 상상력을 강조하고, 거기에 내포된 인간의 창조력을 중시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미래를 장밋빛으로 물들인다. 그러나 그런 상상은 21세기적 리얼리티의 고통과 비참을 가리는, 스크린에 투사된 허상인 경우가 더 많다. 

5. 밀스가 말하는 사회학적 상상력은 미래를 약속하는 힘이지만, 파상력은 어떤 미래도 약속하지 못한다. 예언하지도, 계몽하지도, 도덕적 훈계도 가하지 못한다. 파상력은 상상력의 한계지점에서 나타나는, 능력과 무능력의 미분화된 체험 형식이다. 그것을 가지고, 혹은 그것 속에서 우리는, 파괴되어가는 것들과 새로이 생성되는 것들을 사회적 가시권과 가청권으로 끌어내어, 고뇌의 공통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다. [...] 사회학적 파상력은 일반화되고 물화된 총체성이 아니라 파편들의 몽타주를 통해 만화경처럼 변전하는 총체성을 추구한다.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지식이 아니라, 미소한 단위 속에서 전개되는 파괴와 생성의 드라마에 내포된 보편성과 특이성의 분리할 수 없는 결합을 추구한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것들은 우리 시대라는 모자이크화를 구성하는 중요한 '파편'들이다. 사회학자는 거기 '역사의 천사'처럼, 날개가 꺾이고 눈이 휘등그레진 채, 마음이 부셔지거나 다소 얼이 빠진 채, 사태의 진실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채, 상황의 힘에 말려들어, 그것이 발휘하는 몽상의 '가위눌림'을 벗어나려고 애쓰면서,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파상의 체험 속에서 수행된 이 연구들은 기본적으로 현장증언의 성격을 띤다.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동시대의 증인이다. 모든 증인들이 그러하듯이, 그 또한 증언의 말들이 누군가의 삶에, 어떤 순간에, 결정적인 힘이 되기를 희망한다. 

1부 몽상과 각성

제1장 미래의 미래

Ⅱ. 탄생, 잉태, 죽음의 불가능

1.1.1.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탄생성의 세계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후에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아렌트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 요컨대 방사성 물질이 허물어뜨리고 있는 것은, 아렌트가 탄생성의 개념으로 포착했던 인간 생명 고유의 가능성 혹은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다[김홍중, 30쪽.]

1.1.2. 삶의 불가능. 사랑의 불가능. 잉태의 불가능. 이 세 가지의 불가능은 탄생성의 불가능, 미래의 불가능, 미래를 인간의 것으로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 즉 꿈의 불가능이다[같은 쪽, 32쪽. 후쿠시마 1주기 <이제는 탈핵이다>에 참석한 소녀 아베 유리카의 편지. www.hyanglin.org/bbs/mok01_10/304286]

1.1.3. 주목해야 하는 것은, 탄생성의 이런 훼손이 인간에게 고유한 죽음의 형식, 즉 사멸성의 훼손을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삶, 사랑, 잉태가 불가능해진다는 초유의 사태는, 인간의 죽음 또한 불가능 속으로 던져넣는 결과를 야기한다. [...] 태어나지도, 낳지도, 그리고 죽지도 못하는 존재, 그것을 우리는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런 존재의 새로운 삶과 죽음의 조건은 무엇인가? 이 물음을 아렌트는 왜 던지지 않았을까?"[32~33쪽.]

Ⅳ. 깨어남

1.4.1. 대개의 묵시록이 상정하는 종말은 문자 그대로의 종말이 아니라 특정 역사적 국면에서의 구조적 변화(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를 '은유'하는 것으로 읽혀왔다. 묵시록이 창궐하는 시대는 사회가 불안한 혁명과 혁신과 파괴의 준동으로 끓어오르는 대격변의 시기이다. [...] 종말의 이런 비유적 성격이, 후쿠시마가 보여준, 임박한 지구의 생명거주 불가능성의 실현 앞에서 내파된다. 실제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지구와 생명의 파산이다. 종말은 이제 결코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실재의 표징이다. 더이상 무언가의 은유가 아니라 그 자체를 가리키기 시작한 이 '종말'은 인류에게 닥친 지구 환경의 문제를 하나의 '절대적'[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보편적이라거나, 어떤 관점에서도 타당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문제로 재구성하고 있다. 지구의 보존, 생명의 지속, 인류의 생존, 즉 미래가 '절대적'  문제인 것은 지구, 생명, 인류, 미래가 다른 모든 문제들이 그 위에, 그 이후에, 그것 위에서만 존재하며 의미를 가질 수 있는 토대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다면 다른 것도 없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절대적' 토대이기 때문이다. 절대의 개념은 미래의 미래이다(47쪽). 

제2장 마음의 부서짐

Ⅱ. 무엇이 데모스의 마음을 부수었는가? 

2.2.1. 세월호가 야기한 충격의 핵심에는 죽은 자들에 대한 비탄을 넘어서는, 국가 신화의 파상이 발생했음을 추측하게 한다. 이때 파괴된 신화 속의 국가는 다음 세 가지의 중첩된 의미를 갖는다[70~1쪽.] 

1) 개발독재를 통해 형성된 발전국가의 이미지를 파괴하고, 그 환상의 장막 너머로 침몰해가는 거대 여객선과 속수무책으로 허둥지둥하는 국가의 진면목을 드러냄. 

2) '87년체제'의 성취에 뿌리내린, 주권재민을 원칙으로 하는, 권력과 권력의 정당성성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민주공화국'.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주권자의 생명이 포기될 수 있다는 기민화 가능성을 실제로 상연하여 국가가 자신의 정당성의 원칙(국민)을 스스로 파괴하는 역설적 사태를 실연. 

3) 다른 모든 신화들의 너머에 존재하는 본원적이고 근원적인 기속감. 

Ⅲ. 통감의 해석학

2.3.1. 거기 뒤틀리지 않은 언어, 흔들리지 않은 언어는 거짓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악한 것으로 보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담론들을 생산한 규칙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규칙이 어떻게 파괴되고 있는가에 대한 탐구이다. 담론 그 자체의 자율성과 자기 입법성의 환상이 깨져버린 상황에서 부각되어오는 것은, 담론 내부로 파고들어와 규칙의 작동을 교란하고 자신의 존재를 감정적 격렬함 속에서각인시키며 준동하는, 파손된 리얼리티 그 자체다. [...]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담론의 위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모호해져갔다. 그 담론들은 현실에 생겨난 의미의 구멍을 집오하게 가리키는 손가락들과도 같다. 그들의 기능은 현실의 재현, 분석, 해석이 아니라 그런 담론들을 읽는 사람과 쓴 사람, 그리고 담론의 대상이 된 사람들 사이에 기묘하고 순간적인 공통감각의 영역, 일종의 고통스런 감정의 '연결감을 형성하는 것에 머무는 것처럼 보인다(파머, 2012: 34; 김홍중, 같은 쪽, 77~8쪽.]

2.3.2. 이 고통스런 연결감과 그 안에서 주체에게 밀려드는 세계의 고통을 감각하는  사태를 통감이라고 부른다면, 통감을 통해 수행되는 이해는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다. [...] 통감의 해석학이라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통감에 '대한' 해석학, 즉 타자의 통감을 대상으로 하는 해석학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통감 속에서 사호학자에 의해 수행된, 무언간에 대한 해석이다. 이때 통감은 '고통스럽게' 타인의 감정을 느끼는 것, 타인의 감정에 피할 수 없이 연루되어 고통을 받는 것이다. 통감은 주체가 대상의 내부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대상들이 형성하는 집합적 마음의 흐름에 인식 주체가 휩쓸려 그 안에 빠져드는 마음의 다이내믹스를 동반한다[79~80쪽.] 

Ⅳ. 우울의 분석

1. 애도의 불가능성

2.4.1. 프로이트의 1917년 논문 <애도와 멜랑콜리>는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우울형성의 기본논리를 해명하는 초석적 논문이다. [...] 증상의 관점에서 보다면 둘은 거의 흡사하다(같은 책, 244~5쪽.) 그러나 양자는 리비도의 경제학(욕망의 등가교환)의 맥락에서 차이를 보인다. 애도는 상실된 애정의 대상에 투자되었던 심적 에너지가 포기되고, 새로운 대상에 재투입되는 노동과정이다.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할지라도, 애도를 통해 마음이 부서졌던 자는 삶으로 회귀한다. 

그러나 멜랑콜리는, 애도가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채, 주체의 심리 내부로 회수되어(자기애적 동일시) 가학적으로 자아에 충당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이때 멜랑콜리의 주체는 명확한 상실의 대상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쓸모없고, 무능력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아"에 대한 비하감에 시달리게 된다(같은 책, 247쪽.]

2.4.2. 이처럼 멜랑콜리의 주체는 자신이 무엇을 상실했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애도의 주체와 구분된다. "이런 경우는 환자가 자신이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의식적으로 인지하지 못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환자가 자신의 멜랑콜리를 불러일으킨 상실에 대해 잘 알고 있더라도 그렇게 될 수 있다. 가령, 잃어버린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지만 그의 어떤 것을 상실했는지 모를 경우, 우리는 환자가 상실을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 것이다. 이런 설명을 통해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멜랑콜리란 의식에서 떠난 (무의식의) 대상 상실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지만, 반대로 애도의 경우는 상실에 관한 그 어떤 것도 무의식적이 아니라는 점이다."[같은 책, 246~7쪽.] 멜랑콜리의 주체는 자신이 상실한 것의 '정체'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모른다. 상실한 대상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상실한 사람과 자신의 관계가 무엇인지, 상실한 대상의 어떤 속성으로 인해서 이토록 큰 상실함에 시달려야 하는지를 스스로 명료하게 해명할 수 없을 때, 그 상실은 멜랑콜리로 귀결된다.

2.4.3. 흥미로운 것은, 다소 추상적으로 들리는 이 통찰을 정치적 맥락에서 사고해보면 그 적실성이 확연히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대표적 실례가 바로 국가폭력에 의한 '의문사'의 문제다. 유가족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죽었는지는 알 수 있지만, 그 죽음의 '어떤 것'이 그것을 죽음으로 구성하는 지가 미지의 것으로 남게 된다.  "이렇듯 '누구'를 잃어버렸는가 아니라 '무엇을' 잃어버렸는가에 대한 앎과 모름이 애도와 우울증을 낳는 원인이라고 한다. [...] 요컨대 유가족이 우울증적 주체일 수밖에 없는 것은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으로 인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무엇을 괴로워하고 아파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무지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정원옥, 2014a: 30). 

2.4.4. 망각에의 두려움은 세월호의 진실이 매장될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다. 세월호의 진실을 밝혀, 그것에 대해 사회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를 구성해내기 전에는 어떤 위로나 애도도 '들뢰지 않는 목소리'로 남게 될 것이다. [...] 의미를 부여받은 죽음은 애도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그 명확한 의미가 공개되지 않은 죽음, 그리하여 천도되지 못하고, 상징화되지 못하는 그런 죽음은 애도될 수 없다. 그것은 버틀러가 말하는 '아직 매장되지 않은 것으로서의 죽음'(버틀러, 2008: 65)이며, '살아있는 죽음', '해명되어야 할 죽음'"이다[정근식, 2013: 29~30).  세월호가 야기한 우울감의 한편에는 주권자들의 주권적 요구(진상규명)가 민주적으로 수용되지 못하고 좌절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멜랑콜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Ⅴ. 주권적 우울

2.5.1. 피에르 로장발롱이 지적하고 있듯, 근대 정치공간에서 데모스는 '발견될 수 없는' 존재로 인지되었다(1998: 20). 주권자인 동시에 사회공학적 통치대상인 데모스는 폭동, 혁명, 축제, 봉기와 같은 '인민-사건'을 통해서만 간헐적으로 가시화될 수 있었다(1998: 53~5쪽.) [...] 2008년의 촛불집회는 대한국민의 출현이라는 한국 현대 정치사의 간헐적 운동의 한 모멘트로 이해될 수 있으며, "자신들을 국가의 주권자로 선포하고, 집합의지를 표현하는" 대한국민들이 헌법을 수행했던 현장이다(한보희, 2009: 262쪽; 김홍중, 98~9쪽). 

2.5.2. 세월호 사건이 야기한 우울. 이 우울은, 멀게는 1987년을 기점으로, 더 가깝게는 2000년대 접어들어 한국사회가 스스로의 목소리와 언설과 실천 속에서 확인한 '대한국민'이라는 제헌권력(민주적 제도와 교육을 통해 자신의 주권을 인지하고 욕망하며, 민주적 운동과 연대의 체험과 기억 속에서 주체화된 존재들)의 상실감과 학습된 무기력을 핵심으로 한다. 이것이 바로 주권적 우울이다. 

주권적 우울은  세가지 형식적 구성요소를 갖는다. 제도적, 상황적, 주체적 조건이다. 주권적 우울은 1) 법적, 정치적 수준에서 민주주의의 형식적 절차가 구비되고, 민주적 시민성이 사회적 정당성으을 획득한 사회에서 2)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되는 위기와 문제들이 민주적 절차, 소통, 운동을 통해 해결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3) 자신을 주권자로 간주하는 데모스가 체험하는 마음의 부서짐을 의미한다.  

2.5.3. 결국  세월호 사건이 야기한 우울은 87년 체제의 성립이라는 제도적 조건하에서, 97 외환위기로 촉발된 신자유주의화와 2008년 이후 보수정권 집권이 야기해온 민주주의의 쇠퇴와 파행의 점진적 과정이 세월호 참사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 비상적 상황을 맞이하여, 주권자라는 정체성을 강화시켜온 시민들에 의해 체험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김홍중, 100쪽.)

제4장 리스크 토템

Ⅲ. 계산가능성과 계산불가능성

4.3.1. 정식화하면, 유괴영화의 서사적 문법은 납치된 아이를 '계산가능한 것'인 동시에 '계산불가능한 것'으로 구성한다. 아이는 철저하게 값이 매겨진 존재인 동시에, 값을 매길 수 없이 소중한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부모에게) 아이가 계산불가능한 것일 때 비로소 그 아이는 (유괴범에게는) 계산가능한 것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아이가 계산가능한 것으로 나타나는 순간(유괴의 순간)에 비로소 그 아이의 계산할 수 없는 소중함이 자각된다. 이처럼 합리성/감정, 성/속, 교환가치/숭배가치의 기묘한 복합체를 이루는 아이의 의미론적 이중코드를 '리스크-토템'이라 부르기를 제안한다. 유괴영화에서 아이는 한편으로 리스크(합리적 관리의 대상)으로 정립되는 다른 한편으로 뒤르켐이 말하는 토템(숭배 대상)의 의미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납치된 아이는 리스크이면서 토템이다. 양자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얽혀 있다. 그는 리스크이기 때문에 토템이며, 토템이기 때문에 리스크이다. 우리 시대 '아이'는 정서적으로 가장 소중한 존재이며 사랑과 심지어 숭배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그를 잉태하고, 출산하고, 양육하고, 교육시키는 총체적 과정의 합리적 통치성이 점점 더 강화되는 경향을 띠고 있다. 아이에 대한 합리적 관리는 사랑과 구분되지 않은 채, 아이에 대한 막대한 정서적 에너지와 경제적 자원의 투하를 요청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규범'이 되어 사회적 구속력을 갖는다(김홍중, 152~3쪽.)

Ⅳ. 보험

4.4.1. 보험은 본질적이고 소중하고 대체불가능한 가치를 지닌 것을 합리적 관리와 통치의 대상으로 구성해내는 전형적인 통치 테크놀로지이다. 보험에 구현된 통치성이 대상을 구성하는 방식은, 유괴영화에서 '아이'의 의미가 구성되는 방식과 매우 흡사하다. 그것은 보험이 전형적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순수한 가치를 산술적 리스크의 논리에 의해 번역하여, 보장의 대상을 일종의 '리스크-토템'으로 창출해내기 때문이다. 미첼 딘이 말하듯 "계산불가능한 것을 계산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에 다름아닌 보험은 생명, 건강, 질병, 신체, 심지어 영혼 등과 같이 계산적 합리성 너머에 존재하는 가치에 대한 잠재적 위협들을 계산가능성의 장으로 퍼섭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Dean, 1999: 138). 

"일상언어에서 '리스크'라는 용어는 위험이나 위난, 즉 누군가에게 일어날 수 있는 불행한 사건과 동의어로 이해된다. 이는 객관적 위협을 지칭한다. 반면 보험에서 리스크는 특정한 사건이나 현실에서 일어나는 (불행한) 사건 일반이 아니라 일군의 사람들 , 더 정확히 말해 어떤 개인의 집단(즉, 하나의 인구집단)이 대표하고 소유한 가치 또는 자본에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사건을 다루는 특정한 방식을 지칭한다. 그 자체로 리스크인 것은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어떤 것도 리스크가 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위험을 어떻게 분석하고 사건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칸트 식으로 말하면 리스크의 범주는 오성의 범주이며, 감성이나 직관에서 나올 수 없다. 리스크의 테크놀로지로서의 보험은 무엇보다 합리성의 도식, 즉 현실의 어떤 요소들을 분해하고 재배열하고 질서짓는 방식이다"[Ewald, 1991: 199). 

4.4.2. 에발드가 지적하고 있듯 '리스크'는 경험적 현실 그 자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특정 방식으로 구성하는 인식의 격자이다. [...] 이는 신체뿐만 아니라 존재 전반으로, 더 나아가서 타자들과의 관계로도 확장된다. 즉,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것처럼 보이던 타인들과의 인연 속에서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사건들도 리스크의 문법에 포섭될 수 있다. 연애, 사랑, 결혼, 이혼, 양육, 출산, 노화의 전 과정도 리스크에 이미 포섭되었거나 포섭되어가고 있다. '위험사회'란 위험요소가 증가한 사회가 아니라, '리스크'라는 관점과 인식의 프레임워크가 사람들을 움직이고,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으로 작용하고, 공적 의사결정이나 여론, 그리고 사회적 현상들의 발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그런 사회를 가리킨다. 위험사회의 간판 통치기술은 바로 보험이다. 

4.4.3. 보험이 중요한 것은, 과거에는 신의 의지나 운명의 영역으로 일컬어지던, 위에서 말한 인간의 존재론적 실체들(신체, 관계, 정신) 그리고 인간사의 잠재적 비극들(사고)을 합리적으로 관리하는 '리스크의 기술"을 제공하기 때문이다(에발드, 1991: 198). 보험은 사회적 행위자로 하여금 자신의 계산능력에 따라 우연한 불행에 대비하도록 함으로써 생활세계의 합리화를 심화시킨다(Beck-Gernsheim, 1996: 142). 반대로, 그러한 보험기술은 삶의 계산될 수 없는 측면들의 가치를 부각시키는,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보험을 통해 합리적으로 지켜지는 것들은 신체의 일부, 생명 자체, 아이 등과 같이, 일단 상실되는 경우 결코 다시 복구될 수 없는 것들이다. [...] 값을 매길 수 없는 존재에 값을 매기려는 합리적 계산 테크놀로지를 보여주는 보험의 논리는 위험사회에서 행위자들이 자신에게 소중한 가치와 대상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통치하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다이어그램인 것이다(Ewald, 1986). 

Ⅴ. 리스크-토템

4.5.1. '위험사회'는  1990년대 후반에 소개되어 당대 한국사호를 비판적으로 진단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기능했다. 한국적 맥락에서 위험사회 담론은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풍성하게 펼쳐졌는데, 주로 당시 발생했던 참사들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된다. [...] 이런 진단들은 한국의 근대화가 서구의 그것과 비교해보았을 때 소위 '정상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판단을 공유한다.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기술적 효율성에 기초한, 실질적 근대성을 성취해야 한다는 처방이 내려지게 된다(김홍중, 157~8쪽). 

4.5.2. 여기에 당시의 위험사회 담론이 갖는 특이성이 존재한다. 벡, 에발드, 루만 등의 리스크 개념과의 차이. 그들의 리스크 개념은 근대성을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원인으로 간주한다. 이는 위험사회가 정상적 근대성의 결여가 아니라 그것의 역사적이고 재귀적인 과정에 기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그들에게 리스크란 실생활의 사고나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일들이 사회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어떤 해석의 형식을 가리키는 성격이 간하다. 벡이나 루만이 말하는 '위험사회'는 '위험한' 사회와는 관계가 없으며, 합리적 위난 관리에 기초한 위험 범주를 통해 잠재적 문제들을 인지하는 특정 사회 유형을 가리킨다. 한국의 위험사회 담론은 일차 근대의 성공이 후기 근대의 위험으로 돌아오는 역설보다는 파생 근대성을 더 강조하고 있고, 리스크를 선험적 방식으로 기능하는 구성주의적 틀로 이해하기보다는 경험적이고 현상적 세계에서 발생하는 현실적 위협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인다(김홍중, 158~9쪽). 

4.5.3. 2000년대 접어들면서 1990년대 중반과 같은 거대참사의 발발이 잦아들면서 위험사회 담론의 현실 준거 자체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고, 이는 위험사회론이 파악한 것처럼 실질 합리성과 안전장치의 확보를 통해서 문제가 해결되어가는 양상으로 진단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 같은 시기 비록 거대재난은 잦아들었지만, 위험감수성, 위험을 인지하는 사회적 프레임, 리스크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시민사회의 불안공동체와 운동의 촉발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한국사회가 유럽적 의미의 '위험사회'로 전환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가 다양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개인, 가족, 사회의 안전에 대한 관심의 제고, 음식, 공기, 물 등 환경 문제에 대한 염려, 사랑, 우정, 섹슈얼리티, 결혼, 이혼, 임신, 출산, 양육, 노화 등의 친밀성 영역이 빠르게 '리스크'의 관점에 포섭되고 있었다. 

제6장 꿈과 사회

Ⅲ. 꿈의 개념화

6.3.1. 사회적 실천이론의 맥락에서 보면 꿈은 1) 욕망과 희망의 작용을 통해 구성/교섭/변형되며 2) 실천의 흐름에 방향과 의미를 부여하는 3) 미래의 소망표상으로 정의될 수 있다. 

6.3.2. 첫째, (명사로 표시되는) 꿈은 미래에 투사된 개인적이거나 집합적인 '소망표상'이다. (동사적 형태로) 꿈을 꾼다는 것은 소망하는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다. 꿈의 능력은 상상력이다(Lynch, 1965: 22~5). [...] 중요한 것은 꿈이 현실을 얼마나 충실히 반영하느냐를 판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표상시스템으로서 꿈이 내장하고 있는 의미발생 메커니즘과 구조, 그리고 그것이 개인적-집합적 행위자에게 발휘하는 심리-사회-문화-정치적 효과들을 분석하는 것이다. 

6.3.3. 둘째, 미래의 소망표상은 실천의 흐름에 방향과 의미를 부여한다. [...] 행위의 진행은 미래를 향하는 것이지만, 의미의 진행은 미래로부터 현재를 향한다. 양자의 교차점에서 사회적 실천들이 창발한다. 이처럼 실천에 의미를 부여하는 꿈의 지평은 시간의 전개 속에서 개인 또는 집합 행위자들을 특정한(이념적, 정치적, 미학적, 종교적, 경제적, 도덕적)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꿈은 수행성을 발휘한다. 그것은 개인 행위자들을 움직이며, 그들의 잠재적 행위능력을 가동시킨다. [...] 문제는 이러한 서사와 의미론적 프레임이 '비전'으로서의 행위를 지도하는 동시에 왜곡된 인식틀로 기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Needleman, 2005: 23). 꿈은 현실을 조형하는 동시에 현실에 대한 왜상을 야기하는 환몽이기도 하다. 

6.3.4. 셋째, 꿈은 희망과 욕망의 작용을 통해 구성/교섭/변형된다. 소망은 꿈 자체에 표상된 기대이며, 욕망은 특정 대상을 향해 충당된 심적 에너지(리비도)이며, 희망은 그런 욕망을 지원하는 감정 에너지이다(Lazarus, 1999: 663~5). 욕망이 발동해서 희망의 지원 속에서 형성된 소망 이미지가 꿈인 것이다. 

6.3.5. 욕망/희망의 작용을 통해 구성된 꿈은 동일한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교섭과 변형의 대상이 된다. 모두가 꿈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며, 꿈이 단일하거나 동일하게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꿈을 둘러싼 다양한 입장 사이에는 각축이 있을 수 있고, 내적 욕망과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가능성 사이에서 복잡한 교섭이 발생한다. [...] 희망/욕망의 작용을 통해 구성되고 교섭되고 변형되는 이 꿈의 생성/변형공간은 꿈에 대한 심층 탐구대상을 이룬다. 꿈은 권력의 가장 중요한 통치대상이면서 동시에 통치불가능성의 원천이 된다. 권력은 행위자들의 능력에 개입해서 그것을 육성, 통제, 전유하고자 한다. 권력은 꿈을 꾸게 한다. 꿈을 통해서 특정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욕망과 희망을 증여한다. 이를 통해서 행위자들의 '행동을 통솔conduire la conduite'하고자 한다. 문제는 꿈이 언제나 교섭의 대상이라는 것, 꿈에는 권력의 욕망뿐만 아니라 저항의 욕망도 깃들 수 있다는 것, 욕망의 방향과 대상을 완벽하게 통치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꿈은 권력이 의도하지 않은 효과와 결과를 언제든지 산출할 수 있다. 

Ⅳ. 부르디외와 꿈의 테마 

6.4.1. 행위능력으로 기능하며 실천과 유기적으로 연관되는 꿈꾸는 능력을 '꿈-자본'이라고 부르기를 제안한다. 꿈-자본은 행위자 자신의 존재를 생산하고 이를 증강시켜가는 축적 프로세스를 구성하는 핵심요소다. 꿈을 우발적이고 덧없는 환상이 아니라, 실천과의 관계 속에서 육성, 고무, 관리, 축적, 추구, 통치되는 '자본'으로 개념화하기 이해서 나는 부르디외를 원용하고자 한다. 

1. 일루지오illusio

6.4.2. 부르디외의 사회적 행위자는 '스콜라적 이성'으로 세계를 관조하는 사변이 아니라, "실천적 위급함의 한계 속에서" 활로를 뚫어나가는 문제해결자다(부르디오, 1980: 53). 몸에 체화된 성향habitus과 즉각적 감각을 통해 민활하게 움직여가면서, 자원의 배분공간이자 위치경쟁 장소인 장에 뿌리내리고 삶의 의미를 구성해나가는 이런 전투적 행위자는, 자신의 존재 역량을 지속적으로 축적함으로써 실존가능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는 장에서 도태되지 않고 존재를 유지하고 강화시켜 더 높은 위치로 전진하기 위해 '자본'을 맹렬히 축적해나가야 할 사회학적 운명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6.4.3. 부르디외가 범주화한 자본의 세 형식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돈으로 변환되며 재산권의 형태로 제도화될 수 있는 경제자본, 특정 조건하에서는 경제자본으로 변환되며 교육적 자질의 형태로 제도화되어 있는 문화자본, 특정한 조건하에서는 경제자본의로 변환되며 사회적 의무(연결)로 구성되어 있고 고상함을 나타내는 신분의 호칭과 같은 형태로 제도화되는 사회자본"이 그것이다(부르디외, 2003: 65). 상징자본은 사실 이런 여러 형태의 자본들이 합법적인 것으로서 사회적 인정을 획득했을 때 나타나는 자본 형식에 붙여진 이름이다(부르디외, 2003: 345). [...] 측정된 자본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본에 대한 사회적 판단과 평가가 상징자본 구성의 핵심 메커니즘인 것이다. 자본에 대한 이런 관점은 경제학자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급진적으로 사회세계의 모세혈관에까지 뻗어나갈 수 있었으며, 동시에 경제학 모델이 의미로 구성된 사회세계에 정량적인 방식으로 적용될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봉쇄해버린다(부르디오, 1987: 129~31/24; Lebaron, 2005: 96~9; Jourdain/Naulin, 2012: 101). 

6.4.4. 행위자들이 내기물인 자본에 투여하는 관심, 열정, 믿음을 그는 일루지오라고 부른다(1994: 151). 일루지오에 사로잡힌 존재로 표상되는 부르디외의 행위자는 꿈꾸는 존재다. 그가 이 맥락에서 참조하는 것은 모스가 수행했던 마술에 대한 고전적 연구이다. [...] 마술의 매혹과 현혼적인 힘의 원천은 마술을 대한 집단이 그것에 부여한 집합 믿음으로부터 온다. '사회'가 마술에 대한 믿음을 창조한 작인이다(모스, 1995: 84~90). 장이 '사회적 마술' 또는 '사회적 연금술'의 공간으로 간주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부르디외, 1992: 282~3/16/246). [...] "사회적 마술은 거의 모든 것을 흥밀운 것으로 구성하고 그것을 투쟁의 내기물로 설립"시키기 때문이다(부르디외, 1987: 126). 

6.4.5. 일루지오는 개인들이 갖고 있는 개별 믿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공유된 믿음이다. 일루지오가 그것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 자들의 눈에는 하나의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문제다(부르디외, 1994: 153). 이것이 바로 일루지오가 "모두에 의해 만장일치로 인정되고 공유된 환상" 또는 "현실의 환상"이라고 불리는 이유다(부르디외, 1992: 36). [...] 장 내부에 형성되어 있는 일루지오는 외부에서 보면 그저 하나의 환상적 가치부여에 불과하다. 일루지오 개념은 푸코가 말하는 '광기'를 장으로 끌고 들어간 형태이다. 장은 '현실적 환상'과 더불어 '허용된 광기'가 실천되는 공간이다. 꿈과 광기의 공간으로서 장, 이것이 바로 그가 보는 사회세계다. 그에게 사회는 하나의 꿈과 같은 현실을 이루고 있고, 분화된 수많은 장들마다 각이한 꿈의 세계들이 형성되어 있으며, 그래서 전체 사회란 이처럼 수많은 몽상들의 복합우주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부르디외 사회학은 사회세계ㅇ이 근원적 꿈결, 꿈과 같은 성격을 폭로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2. 꿈-자본 

6.4.6. 근대적 사회공간은 공정 경쟁을 통해 더 우월한 위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존재론적 상승의 꿈과, 이를 추구하는 삶이 합당하고 매력적인 것이라는 도덕적-미학적 정당성이 복합적으로 빚어내는 꿈이라는 공적 자원을 생산하여 분배하는 시스템이다. 행위자와 사회 모두가 공유한 이 정당성의 환상인 일루지오는 일종의 공공재다. 부르디외의 일루지오 개념은 개인들의 꿈의 원천에 사회적 재화로서의 집합적 믿음의 에너지가 저수지처럼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사회세계에서 진행되는 게임에 대한 믿음인 일루지오를 체화함으로써 행위자는 미래의 꿈을 지향하는 방향성을 획득하고, 거기에서 주관적인 행복, 사회적 미션, 그리고 실존의 의미를 발견해낸다. 일루지오를 개인화함으로써 부르디외의 사회적 행위자는 '자본의 담지자'의 위치를 넘어서(부르디외/바캉, 2015: 190), 자본의 소유를 열망하는 자, 자본의 소유로부터 기쁨과 자존감을 얻는 자, 그래서 자본 획득의 미래의 가능성을 '미리 보고 예견할 수 있는 능력'을 체득한 자로 나타난다(Chauvire/Fontaine, 2003: 73). 

6.4.7. 부르디외의 행위자는  자본에 대한 욕망과 희망에 불타는 코나투스적 행위자conatic agent다. 그의 노력은 미래를 향해 감각적으로 수행되어나간다. 그는 '투사된 미래에 대한 전망적 목표설정'(1972: 378). '장래에 대한 전망'(1995: 80), '모든 합리적 행위의 조건이 되는, 미래 속으로 자신을 투사할 능력'(1998: 97), '미래와 적극적으로 대결하는 데 필요한 성향들'(2001: 322),  또는 '기획된 미래에 대한 선호 속에서 현재를 변화시키려는, 합리적 야심'(1998: 97)이라고 명명한다. 

6.4.8. 부르디외가 다양하게 명명하는 이 마음의 힘들은 결국 행위자가 경제자본, 사회자본, 문화자본을 축적하고 이에 대한 인정을 욕망하도록 하는 원형 동기를 이룬다. 그 자체로는 아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자본의 획득된 형태로 실현되지 않은 이 역량을 '꿈-자본'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꿈-자본은 꿈을 꿀 수 있는 힘, 꿈을 통해 자신이 미래에 향유하고자 하는 세계와 자아의 영상을 선취해낼 수 있는 힘, (불)가능한 꿈에 대한 감각, 합리적 실천을 추동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모두 포괄한다. 욕망과 희망의 힘이자, 실천을 향해 존재를 떠미는 내적 힘이다. [...] 꿈-자본은 일루지오와 하비투스 수준에서 형성되는 자본이다. 꿈-자본은 이미 물질화된 자본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자본들(경제, 사회, 문화)을 축적하여 사회공간에서의 위치상승과 더 나은 삶을 위한 활동에 돌입하게 하는 실천동기를 이루는, 일종의 '씨앗-자본'이다. 

6.4.9. 상징자본은 하나의 독자적 자본 유형이 아니라, 사회가 자본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꿈-자본은 다른 자본들과 마찬가지로, 상징자본이 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자체로 상징자본과는 무관한 영역에서 구성되는 역량이다. 꿈-자본은 하나의 변수로서의 지위를 갖는 독자적 차원으로 간주되고 개념화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꿈-자본은 종속 변수로 취급될 수 있다. 개인이 소유하는 꿈-자본의 양과 내용은 다른 변수들(그의 경제/문화/사회자본, 그의 부모의 자본, 그가 속한 사회의 꿈 생산능력, 꿈의 배분구조 등)에 의해 설명되어야 하는 피설명함이다. 

둘째, 꿈-자본은 독립변수이기도 하다. 사회자본, 문화자본, 경제자본을 '자본화한 자본'이라고 한다면, 꿈-자본은 이들을 자본으로 구성하는 행위에 돌입하게 하는 자본이라는 의미에서 '자본화하는 자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독립변수로서의 꿈-자본 즉 '자본화하는 자본'은 '자본화도니 자본'이 갖고 있는 구체적인 물적 형태들을 띠기 이전의 역능이며 자본추구, 자본축적, 자본활용과 같은 '자본화'의 과정에 요청되는 일루지오(욕망/희망)와 하비투스(상상/실천)의 결합물이다. 

3. 사몽, 공몽共夢, 공몽公夢

6.4.10. 부르디외의 시각에 의하면 개인의 꿈-자본의 원천은 사회(장)이다. 그러나 실제로 꿈-자본을 반드시 장의 수준에서만 논의할 필요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 장은 주로 전문직과 공적 활동을 포괄할 수 있을 뿐, 사회적 삶의 다양한 다른 양상들은 포착하지 못한다(LAHIRE, 1999: 35). 꿈의 형성과 실천은 공적公的 수준(국가, 사회, 민족), 공적共的 수준(조직, 장, 모임, 단체, 상호작용), 사적 수준(가족과 자아)에서 모두 가능한 것이며, 각각 사몽, 공몽, 공몽으로 구분할 수 있다. 

6.4.11. 공몽共夢은 장이나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적 시스템들(루만), 또는 다양한 조직체가 생산하고 그 구성원들에게 분배되는 꿈을 가리킨다. 부르디외의 일루지오. 이는 집단 구성원들에게는 꿈-자본으로 기능. 이 자본은 집단이나 조직 또는 장의 역사적 변천과정에 종속되며, 그 부침은 장/시스템이 겪게 되는 흥망성쇠와 궤를 같이한다. [...] 특정 사회공간은 꿈-자본을 생산하고 분배하며, 이는 직장, 학교, 도서관, 노동조합, 정당, 종교단체, 시민단체, 동호회와 같은 중범위의 구성체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박영숙, 2014). 

6.4.12. 공몽公夢은 국가가 공싲거으로 생산하는 꿈을 가리킨다. 테일러에 의하면 세계-체계에서 헤게모니를 차지했던 세 국가인 네델란드, 영국, 미국은 단순히 군사-경제-외교를 주도했던 리더였던 것이 아니라 '집합적 자기확신',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헤게모니적 기분', '캔-두 스피릿'을 창조해서 이를 모델로 우월성을 인정받은, 꿈의 리더들이었다(Taylor, 1996, 85~9). [...] 하지만 비단 헤게모니 국가가 아니라 할지라도 개인 수준의 꿈이나 조직 수준의 꿈을 넘어서는 정치공동체의 꿈이 존재하며, 이 꿈이 국민을 동원하여 특정 사업을 실행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5. 벤야민과 꿈의 테마

벤야민은 꿈을 집합적이고 역사적인 체험으로 다루고자 했다(GS V-2: 1214). 나는 이를'몽상구성체'라는 개념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리얼리티를 조형하는 힘으로 작용하면서 그 안에 삼투되어 구현되어 있는 집합적 소망표상의 앙상블을 지칭한다. 

1. 모더니티의 기원사

6.5.1. 꿈에 대한 이론적 성찰에서 벤야민이 차지하는 위치는 독보적이다. [...] 꿈은 이런 점에서 소위 '범속한 각성'(벤야민, GS 2: 297~8), 즉 일상적 사물들이 그 사용가치를 찢고 나와 새로운 이미지로서 낯설게 나타나는 체험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파세젠베르크>는 서유럽 모더니티를 집합적 꿈과 깨어남이라는 시각으로 접근했던 기념비적 저작이다. 꿈을 사회/역사공간의 구성원리로 파악하려는 우리의 시도에 강력한 영감을 주는 텍스트로 남아 있다. 

6.5.2. 벤야민이 겨냥하고 있던 것은, 실증주의와 목적론적 시각을 벗어나 '역사의 가시성Anschaulichkeit'에 기초한 유물론적 역사서술을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벤야민, GS V/1: 575). '19세기의 기원사' 기획이다. '기원'이란 여기에서 연대기적 시간의 처음 또는 시초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망각된 과거의 편린이 의도하지 않은 계기에 불현듯 나타나는, 지난 것의 재귀에 붙여진 이름이다(김홍중, 2012: 340~8). 기원사에서 과거는 고정된 불변의 사실들이 아니라, 과거를 바라보는 시선과 맺는 성좌구조Konstellation에 묶인 만화경적 이미지들의 지평이다. 19세기의 기원사를 탐구한다는 것은 그리하여 19세기를 실증적으로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파시즘과 전쟁이 파국적으로 몰아닥친 1930년대의 관점에서 지난 세기를 바라볼 때 열리는, 두 시대의 '관계'를 포착하는 것이다(Gagnebi, 1994: 17~51). 

6.5.3. 상호교차하는 엇갈린 두 가지 시간성의 내포. 하나는 과거의 인간들이 자신들의 미래에 투사한 유토피아적 소망의 '전지하는' 시간성. 몽상의 역사. 다른 하나는 이 꿈들이 악몽으로 전환된 현재의 폐허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는 '회괴적' 시간. 각성의 역사. 몽상사의 관점에서 보면 지난 꿈들은 유토피아로 나타나는 반면, 각성사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들은 자본주의적 상품물신의 환등상, 진보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집요한 믿음, 영겁회귀에 대한 신화적 절망의 잔해들이 흩어져 있는 폐허의 풍경으로 나타난다. 벤야민에게 꿈은 환상(신화)과 유토피아의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최성만, 2014: 350). 유토피아로서의 꿈은 수행성을 갖는다. [...] 테크놀로지에 의해 개방된 생산력을 특정 방향으로 이끌어 자연과 세계를 변형시키는, 집합역량을 실어나르는 일종의 운하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신화 또는 환몽으로서 꿈이 깨어졌을 때 비로소 인식될 수 있는 비참과 하위를 은폐하는 기능을 한다. 

6.5.4. 두 상이한 시선의 충돌이 변증법적 이미지공간을 만들어낸다(벤야민, GS V-1: 576~7). 꿈에서 깨어나, 엄습하는 현실의 충격 앞에서 빠르게 사라지는 꿈의 잔해들을 건져내는 사람처럼, 역사의 신화세계로부터 눈을 비비며 깨어나는 주체는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기억' 또는 '위험의 순간에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과거의 이미지'와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벤야민, GS 1/2: 695). 과거의 꿈들이 '자신들의 진정한 초현실주의적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벤야민, GS V-1: 579), 역사가는 이 이미지들을 읽어 꿈의 가상을 폭로하고 '억압받은 과거를 위한 투쟁에서 나타나는 혁명적 기회의 신화를 인식'해야 하는 책무를 부여받는다(GS 1-2: 703). 

2. 몽상구성체

6.5.5. 벤야민은 사회심리학적 시각과 영상이론의 독특한 결합을 통해서 집합적 꿈에 역사적 구성능력을 부여하고 있다. 역사란 꿈의 공간이다. [...] 그는 근대를 빚어낸 역사의 동력을 역사이성(헤겔)과 같은 관념론적 실체에서 찾지 않으며, 또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마르크스)이라는 사적 유물론의 관점을 그대로 차용하지 않는다. 대신 19세기의 지배집단인 부르주아 계급의 집합적 상상의 힘, 미래를 꿈꾸는 힘, 즉 '몽상력'에 대한 지대한 의미를 부여한다(벅-모스, 2004: 163). 

6.5.6. 벤야민은 마르크스주의적 사적 유물론의 기본 도식을 비튼다.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의 단순 반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표현이다. 하부구조는 상부구조를 인과적으로 결정하지 않는다(벤야민, GS V-1: 495). 상부구조를 이루는 문화의 영역은 생산력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기술적 혁신을 나름의 방식으로 매개(상징화)하는, 독특한 꿈의 구성물들과 각성의 가능성들을 만들어내는데 가령 '건축'이다. 19세기 유럽에는 푸리에의 유토피아적 공상 속에 등장하는 건물들처럼 개인적 삶을 허무는 집단주의적 공간들(잿빛 건물, 시장, 백화점, 박람회장, 파사주)이 나타났고, 19세기 수도 파리는 꿈의 도시'로 구상되었고, 거기에는 온실, 파노라마, 고장, 박물관, 카지노, 역, 휴양지와 같은 비단의 꿈의 집들이 들어선다(GS V-1: 493, 511, 520~1). 상대적인 자율성을 부여받고 있는 상부구조는 다양한 집단의 꿈Kollektivtraumem들이 출몰하는 공간이다. 

6.5.7. 벤야민은 신화적이고 주술적인 힘이 모더니티의 핵심부에 얼마나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통찰하고 있다. 모더니티는 단순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기원의 시간과 미증유의 시간의 기묘한 결합이다. 역사의 추동력으로 작용하는 유토피아에의 꿈은 기원적 과거(신화)를 다시 불러낸다. 모더니티는 진보의 첨단에서 가장 오래된 고대를 부활시킨다. 미래와 과거를 시대착오적 방식으로 결합시키는 소망상은 그 자체로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해방과 행복을 향한 인간집단의 영원한 꿈을 표상한다. 벤야민은 자본주의의 발생에 종교윤리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본 베버와 달리 자본주의 자체를 종교로 파악하고 있으며, 그러한 한에서 자본주의를 합리적 경제시스템이 아닌 하나의 잠에 비유한다(GS V-1: 494). [...] 1930년대 이전의 벤야민이 '신화'를 계몽주의적 관점에서 진리의 대립항으로 설정하고 그 '마법의 해체'를 추구했다면(GS 2-1: 213), <파사젠베르크> 시기에 이르면 그는 몽상구성체에 오히려 '유토피아적 역능'을 부여하여, 꿈과 신화의 부정적 성격을 계몽주의적으로 교정하려는 시도와 그것의 변증법적 역할에 대한 긍정적 해석가능성 사이에서 나름의 중심을 획득하고, 몽상구성체를 역사공간의 조형적 힘으로 '구제한다(Menninghaus, 1986: 557). 

6.5.8. 몽상구성체는 단순한 집합교상이 아니라, 꿈의 에너지와 리얼리티의 물질적 양태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꿈-현실의 혼합물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남는 건축물에서 시작해서 신속히 지나가버리는 유행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삶의 형상들 속에 그 흔적'을 남기는 유토피아다. 현실과 꿈, 각성과 꿈의 경계는 생각보다 분명하지 않다. [...] 이처럼 소망상 또는 유토피아는 몽환적 영상들이 지배하는 '몽상세계'로서의 문화를 구성한다(벅-모스, 2008). 벤야민에게 역사의 동력은 꿈이며, 역사의 전개는 몽상구성체들의 투쟁적 전개과정이다. 꿈이 '19세기의 기원사에 대해 증언해줄 발굴이 이루어질 대지'라는 그의 언명은 바로 이를 의미한다(GS V-1: 140). 몽상구성체는 자신에 고유한 유토피아, 신화, 담론, 열정의 형식, 이상적 주체, 도시풍경, 일상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집합적 꿈의 체계이며, 역사에 활력을 부여하며 동시에 거기에 가상의 베일을 씌운다. 비전인 동시에 환상이다. 19세기의 역사를 증언하는 것은 그 시대가 꾼 꿈과 신화의 시스템인 몽상구성체들이기 때문이다. 

3. 몽상사의 쟁점들

6.5.9. 벤야민에게 각성은 역사인식의 모델인 동시에 정치적 행동 모델의 의미를 갖고 있다(최성만, 2014: 344). 깨어남의 주체는, "역사철학 테제'의 12번 태제에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투쟁하는, 억압받는 계급 자신", 즉 프롤레타리아트이다(GS 1-2: 700). 35년에 쓴 초안 <파리, 19세기의 수도>에는 자본주의적 환등상이 내적으로 균열을 일으키면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집합적으로 각성해서 혁명적 해방을 이루게 될 가능성에 대한 그의 희망이 명확히 표명되어 있다. 

6.5.10. 그러나 모든 시대가, 꿈속에서 꿈으로부터의 깨어남을 간절히 기다린다는 저 전율적 희망의 전언은 39년 3월에 불어로 쓴 두번째 초안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무정부주의적 혁명론자 블랑키의 우울하고 절망적인 우주적 사변인 영겁회귀의 신화가 등장한다. [...] 35년과 39년 사이에 겪어야 했던 암울한 실존적 상황, 전쟁의 발발, 심화되어가던 파시즘의 광기, 파사주 기획에 대한 심각한 비판의 수용, 그 상황에서 38년 2월에 블랑키의 텍스트를 재발견하고 감격적으로 독해했다는 사실 등은 모두, 초고와 두 번째 원고사이에 나타나는 단절적 변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비테는 유럽이 파시즘 앞에 굴복당하고 프랑스의 인민전선도 패배당한 당시의 상황에서 벤야민이 혁명의 주체를 발견할 수 없었으며, 바로 이러한 이유로 꿈에서의 각성이라는 기획이 결국 "역사의 집단적 주체에서 홀로 떨어져나온 한 개인의 소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냉정한 평가를 내린다(비테, 1994: 181). 

6.5.11. 중요한 것은 벤야민의 지적 기획이 성공했는지 아니면 실패했는지를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통찰을 생산적인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 일반적으로 벤야민의 '깨어남'은 꿈의 세계로부터의 파국적 각성, 꿈을 부서뜨리고 그 이데올로기적 효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해방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양자를 이렇게 분리시켜 파악하면, 꿈으로부터 자유로운 어떤 세계가 있고 깨어남이 그 세계로의 이전을 가능하게 한다는 도식적이고 안이한 인식을 야기할 수 있다. "깨어남은 많은 사람들에게 오늘날 탈신화화와 동의어로 여겨진다. [...] 벤야민이 하고 있던 것에 비추어 말하자면,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에 대한 내 생각에 비추어 말하자면, 깨어남은 업고 가는 것Piggy-backing, 즉 꿈세계와 같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은 신화와 리얼리티를 구분하라는 계몽의 부르짖음이 아니다. 그것은 무기력의 시기에서 행위의 시기로의 깨어남이 아니다. 그것은 절망의 시기에서 희망의 시기로의 깨어남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그의 작업을, 당신이 말하는 희망의 불꽃이 아마도 감전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그와 같은 탈신화화와 재마법화로 이해해왔다"(zournazi, 2003: 54) 각성은 꿈의 외부로 나아감이 아니라 꿈의 파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꿈의 완전한 종식이 아니라, 재구성 또는 대체과정이다. 파상에 내포된 충격적 상황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며, 언젠가는 또다른 몽황에 의해 봉합된다. 

6.5.12. 우리는 벤야민의 <꿈->각성>의 도식을 두 가지 관점에서 변형시켜 사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첫째 특정 시대의 문화를 지배적 꿈(자본주의적 판타스마고리아)과 그것으로부터 깨어나는 집합주체의 '각성능력'을 중심으로 파악하는 관점 대신, 몽상구성체의 복수성과 그들 사이의 각축, 경쟁, 충돌과정으로서 문화공간을 사고하는, 좀더 구조적인 시각을 채택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파세젠베르크>는 다수의 몽상구성체들의 생태계를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 이들 19세기 몽상우주의 만화경을 몽타주하는 것이 바로 벤야민 기획의 요체였다. 이 텍스트를 꿈과 그것으로부터의 깨어남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여러 꿈들의 병존과 융합 또는 갈등의 역사에 대한 탐구로 읽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동시대의 몽상구성체들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상징권력을 둘러싼 항상적 투쟁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젠더, 계급, 인종, 세대, 지역, 종교 간의 투쟁이란 결국 꿈의 투쟁이 아닐까? 

둘째는 각성을 정치적 혁명과 곧바로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가 심대하게 변화하는 시기에 동반되는 집합감수성의 변혁으로 이해하는 길이 있다. [...] 기왕의 꿈이 붕괴한 이후 새로운 몽상구성체가 나타나기까지의 공백기에 발생하는 꿈의 아노미 상황이 어쩌면 벤야민이 말하는 각성과 가까운 것일 수도 있다. 이런 각성의 순간 광범위한 기억의 재구축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미래와 현재의 관계 또한 근본적인 수정을 겪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집합적 현상이지만, 그 현상을 기록, 증언, 전달할 인간주체가 필요하다. 누군가가 이처럼 고양된 '인식가능성의 지금에 머물면서(벤야민, GS, V-1: 577), 글쓰기 속에서 파상의 폐허를 응시하고, 거기에서 희망의 흔적들을 찾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체험한 것은 <꿈->각성>의 행복한 스토리가 아니라 <꿈1->각성->꿈2 [...] >의 끝없는 연쇄에 더 가까운 것이다. 

보론1. 사회라는 꿈

타르드는 <모방의 법칙>에서 사회를 문자 그대로의 '집합적 꿈' 또는 '집합적 악몽'이라고 부르고 있다(타르드, 2012: 19). 사회를 이루는 것은 믿음과 욕망이며, 그것은 모방되고 확산된다(타르드, 같은 책, 31쪽).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상태란 최면상태와 마찬가지로 꿈의 한 형식에 불과하다. 즉 조종받음 꿈이며 활동하고 있는 꿈이다. 암시된 관념들을 갖고 있는 것에 불과한데도 그것들을 자발적이라고 믿는 것, 이것은 몽유상태에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인간에게도 잇는 고유한 착각이다."[같은 책, 120~1쪽.)


제7장 서바이벌, 생존주의, 그리고 청년세대 

Ⅰ. 새로운 청년들

7.1.1. 주지하듯 청춘/청년은 역사적으로 발명된 하나의 '개념'이다. [...] 그러나 21세기의 청년들은 불확실한 미래와 가혹한 경쟁에 노출된 채, 선배들이 누렸던 '영웅적' 청춘을 더이상 구가하지 못하는 것으로 관철되고 있다. 저항, 반항, 유희, 자유, 도전, 모험, 정치적 열정은 이들의 리얼리티와는 무관한 것이 되었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survival'이다((김홍중, 『사회학적 파상력』, 문학동네, 2016, 257쪽). 청년들은 삶의 경쟁상황에서 토대되지 않고 각자도생하기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켜나가고 있다. 생존이 급선무가 된 상황에서 생존에 최우선의 가치를 부여하는 '생존주의'를 마음으로부터 구성해나가는 것은 합당한 선택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 그것은 생존에의 불안과 강박 그리고 의지와 욕망의 형식으로 작용하면서 행위자들을 구체적으로 움직이는 '마음'의 구성체이다."[김홍중, 같은 책, 같은 쪽.]

Ⅱ. 세대심

7.2.1. 이런 맥락에서 이 연구는 세대'의식'이 아닌 세대'심'을 탐구대상으로 설정하는 관점을 제안한다. [...] 이때 마음이란 인간 행위자의 총체적이고 심층적인 심적 능력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파스칼, 루소, 토크빌, 그리고 뒤르켐으로 이어지는 프랑스 근대 사상에서 이성이나 정신과 구별되는 의지와 감정의 기관이자,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정초하는 토대로 이해되어온 바 있다. 마음의 사회학은 특정 구조의 작용하에서, 일군의 행위자들의 실천원리로 기능하는 집합심리가 어떤 구조로 발생해서 진화하는지를 탐구하고, 그로부터 생성되는 실천의 가능 양태들을 포착하는 것을 주요 과제로 설정한다. 마음은, :사회적 실천들을 발생시키며, 그 실천을 통해 작동(생산, 표현, 사용, 소통)하며, 실천의 효과들을 통해 상상적으로 재구성되는, 인지적/정서적/의지적 행위능력의 원천"으로 조작되어 정의된다(김홍중, 2014a: 184; 김홍중, 2016, 262쪽). 

Ⅲ. 문제공간의 변동-생존주의의 형성

7.3.1. 한국 청년/청춘세대에게 있어 생존주의의 형성은, <서바이벌>이라는 특권적 기표를 통해 청년세대의 객관적 현실이 표상되어 재구성되고, 그 과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적합한 마음의 레짐을 구성하여 실천들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가능했던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87년체제의 20대 행위자들은 생존주의 세대와는 매우 다른 문제공간을 체험했다. 그들에게 가장 중대한 문제들로 '구성'되었던 것은, 민주화에 대한 시대적 열망과 권위주의적 군사정권의 억압이 충돌하면서 야기한 다양한 사건들과, 청년세대에게 부여된 정치적 도덕적인 과제들이었다."[이희영, 2006; 김홍중, 같은 책, 267쪽에서 재인용.] 

7.3.2. 97년 이후 한국사회의 구조변동은 청년들이 해결해야 하는 다양한 문제들의 위계, 배치, 중요성에 심대한 영향을 미침으로써, 새로운 문제공간을 발생시켰다. 문제들의 위계는 전도되고, 과거에는 문제화되지 않던 새로운 문제들이 형성되어 지각되고,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자원의 동원, 마음가짐의 형성, 그리고 전략적 행위들이 창발한 것이다. 우선, 높은 청년 실업률과 '학업-직업'의 연계고리의 파괴가 야기한 취업의 문제, 그리고대학 등록금과 대출 그리고 주택자금의 문제, 즉 경제적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부상했다. 안정적인 직장을 얻기 위해,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실업이라는 '실패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요구되는 '스펙'을 축적하는 것이 청년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로 인지되기 시작했으며, 연애, 결혼, 임신, 출산, 육아로 구성되는 친밀성 영역이 합리적으로 관리되어야 하는 문제영역(리스크)로 전환되어, 결혼과 출산이 삶의 필수적 과정으로부터 선택의 대상으로 전환되는 양상이 강화되기 시작했다(KIM, 2014: 324~5; 김홍중, 268쪽.] 

7.3.3. "'생존/낙오'는 청년/청춘들의 마음 작동의 기초코드가 됩니다. 그리고 경쟁은 생존과 낙오를 가르는 상황의 전형"[김홍중, 269쪽]. 

Ⅳ. '서바이벌'의 의미론

7.4.1. 가족, 학교, 공공기관 등에서 경쟁은 하나의 '사회문화적 분위기' 또는 '시대정신'으로 자리잡았고, 한국 청년세대는 이를 깊이 내면화해온 것으로 보인다(류웅재-박진우, 2012: 142). 자기계발 담론, 경영 담론, TV에서 방영되는 각종 리얼리티 서바이벌 포맷 프로그램들의 답도적 인기와 영향력은 이를 방증한다. 웹툰, 드라마, 문학작품 등에서 '배틀 로얄'로 상징되는 서바이벌 상황과 알레고리 똔느 상징들이 등장하여 광범위하게 수용되는 현상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김홍중, 2009d). 

7.4.2. 루만에 의하면, 매스미디어와 학문, 예술이 생산하는 다양한 담론들과 문화적 산물들은, 고도로 분화되고 복잡한 현대사회가 스스로를 (자기)관찰하는 대표 형식들이다(Luhmann, 1997: 1139). 사회는 이런 자기관찰을 통해 작동하며, 작동의 고유 원리인 의미를 지속적으로 생산하면서 소통을 이어간다. 루만은 이와 같은 사회의 작동(자기관찰)의 개연성을 높여주는 기대구조를, 코젤렉을 따라서 의미론이라고 부른다. 의미론은 의사소통과정에서 더 높은 이해와 수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능한 테마들의 온축"이다(Luhmann, 1995: 163).  자기관찰을 통해 작동하는 시스템으로 사회를 이해하는 루만의 이런 입장은, 어떤 사회적 그룹(가령 세대)이 담론적 관차들의 외부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오직 자기 관찰 속에서, 그리고 그런 관찰을 통해서 생성되는 대상이라는 '구성주의적'파악을 가능하게 한다. 즉 매스미디어를 통해 생산되고 소비되는 프로그램과 방송들 그리고 공론장에 유통되는 학문적 언설들과 연구들, 자기계발서들, 소설, 영화, 드라마, 연극, 웹툰 등 사회의 자기관찰의 형식들은 단순한 이차적 재현물들이 아닌, '서바이벌'이라는 문제구성의 틀을 통해 '생존주의 세대'를 생사하는 중요 심급지이자자료들이다(김홍중, 271~2쪽). 

7.4.3. 이러한 생존/서바이벌의 핵심적 특성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김홍중, 272~9쪽]. 

첫째, 새로운 생존 개념이 지시하는 사태는 삶의 거의 모든 영역 또는 생애과정 전체에 걸쳐 진행되는 경쟁상황에서 토대되거나 낙오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둘째, 생존은 경쟁에서 이겨 그 외부로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상황을 한번 더 미래로 연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경쟁상황에서의 서바이벌을 위해서 개인은 자신이 모든 잠재적 역량을 가시적 자원(자본)으로 전환하는 자기통치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넷째, 새로운 생존은 특별한 성공이나 대단한 성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평범한 안정을 위한 분투일 뿐이다. 

다섯째, 새로운 생존의 의미론은 자아표현과 사회적 적응의 접합, 즉 자아가 스스로를 차별화하는 하는 것과 자시을 사회적 규범에 맞추어 정상화하는 것의 기묘한 접합으로 구성된다.

Ⅴ. 마음의 분화

7.5.1. 이러한 논의를 통해 김홍중은 청년세대의 마음을 지배하는 네 가지 삶의 좌표축을 각각 생존주의, 독존주의(초식남, 나홀로족, 니트족 또는 싱글족), 공존주의(시위, 집회, 세미나, 공연, 학습을 통해 생존주의에 맞서는 다양한 공공적이고 집합적이며 대안적인 삶의 형태를 추구), 그리고 탈존주의(공유된 비관주의라고 지칭할 수 있으며, 이러한 비관주의가 개인적 삶의 해결할 수 없는 난관을 만나 병리적 증상들인 자살, 디프레션, 정신적 장애들, 범죄, 절망 등으로 가시화될 때 나타남)로 정리한다(279~83쪽).  

7.5.2. 생존, 독존, 공존, 탈존은 청년세대의 마음을 지배하는 네 가지 삶의 좌표축이다. 각각의 마음의 레짐들은 청년들이 만들어내는 문화적 산물들, 그들의 상상력의 표상들 속에서 선명하게 표현되고 있으며, 다양한 조직과 활동들을 통해 구현된다. 각 레짐은 서로 다른 형태의 하비투스의 형식으로 체현되고, 상이한 믿음의 체계를 갖게 될 것이며, 결국, 다른 인간 유형을 만들어낼 것이다. 앞서 제시된 네 가지 개념들은 이런 의미에서 모두 이념형적 수준에서 포착된 유형들로서 현실에 실재하는 경혐적 내용들을 발견술적으로 포착해내기 위한 이론적 구성물로 이해할 수 있다. 

Ⅵ. 생존주의의 역사성

7.6.1. 21세기 청년세대의 마음을 지배하는 생존주의적 경향은 선배세대로부터 상당히 비판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386세대에 부여되는 일반적인 인상(정치 참여, 인습에 대한 저항, 강렬했던 문화 정체성, 민주화를 이끌었던 운동주체로서 그들이 보여준 적극적 세대의식)과의 대비는 젊은 세대의 소위 '반 청춘적' 또는 '비청춘적' 속성을 더욱 두드러진 모습으로 부각시켰다. 그러나  사실 생존주의 문화는 청년세대에만 국한되어 발견되는 것이라고 보기에는 매우 어렵다. 이들을 그런 방식으로 주체화시키는 것은 앞선 세대가 만든 제도들과 장치들을 통해서이며, 부모세대가 체득한 삶의 진리들이 훈육과 소통을 매개로 이들에게 재생산되는 과정을 통해서이며, 한국사회의 전반적 분위기와 가치의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학습을 통해서인 것이다. 청년들만이 생존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전 세대적으로 확산된 한국사회의 생존주의가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약한 고리가 바로 청년세대라고 보는 것이 더 사태의 진실에 부합할 것이다(284~5쪽). 

7.6.2. 역사적 조감을 통해 살펴보면, 생존 문제야말로  근대 한국인의 집합기억, 집합표상, 집합심리의 가장 중요한 테마 중의 하나였다. [...] 이 세 가지  중요한 국면들[1894년 체제(만국공법의 세계), 1950년 체제(분단/냉전 구조), 1997년 체제(민주화 이후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구조)]을 통과하면서, 민족-국가의 형성 그 자체가 '생존'의 프레임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민중의 삶은 노골적 생존의 투쟁으로 인지되었고, 국민의 기초적 안전과 먹고사는 것을 보장해주는 소위 '생존의 정치'가 한국정치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자 가치로 설정되었다(권태준, 2006: 17~20쪽; 김홍중, 286쪽에서 재인용). 

7.6.3. 모든 인간이 생존을 위하여 고투한다는 사실과, 어떤 사회가 특정 역사적 조건하에서 '생존'을 절대가치로 설정한다는 것은 엄밀히 구별되어야 하는 상이한 사태들이다. 한국의 근대성은 전방위적 생존의 위기를 겪은 동시에 그 체험을 '생존'이라는 문제틀로 적극적으로 구성함으로써 '생존주의'라고 불릴 수 있는 마음의 레짐을 중층적으로 형성해왔다. 21세기 청년세대의 생준조의는 그와 같이 역사적으로 이미 형성되어 있던 생존주의적 태도, 가치, 지향, 즉 마음가짐들이 사회적으로 선행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강력하고 전일적인 방식으로 한국 청년들의 마음을 강박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역사의 힘은 행위자의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존주의의 역사성에 대한 관심은 구한말, 냉전, 그리고 세계화시대의 세 가지 상이한 생존의 의미론들에 대한 정치한 분석과, 이들을 관통하는 공통성에 대한 탐구를 동시에 요청한다(290쪽). 

12장 사회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12.1.1. '사회적인 것'은 근대적 통치성의 대상영역으로 구축된, 시민사회의 조직, 원리, 가치를 지칭한다. 그것은, 자본주의 시장의 파괴적 효과로부터 인간 삶의 기초를 이루는 기본조건들을 보장받기 위해 19세기 이후 근대화된 국가들이 창출했던 사회 보험, 연대, 공화주의, 인간적 교제/관계의 모든형식들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요컨대 사회적인 것은 복지국가의 가치이자 원리로 기능했던 현실-담론의 복합적 구성물이다. 사회적인 것이 종언을 고했다는 것은, 복지국가와 조직자본주의가 제공했던 직업안정성, 삶의 서사의 연속성, 각종 리스크에 대한 집합적 안정망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또한 이념적으로 그런 삶이 바람직한 것이라는 생각도 소멸했다는 것을 암시한다(424쪽. )

12.1.2. 투렌은 인간이 이제 '사회적' 존재로 사정의되어야 하는 역사적 상황이 끝났다고 보며, 사회학의 대상으로서의 사회라는 것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대, 즉 '사회 없는 사회학'의 시대를 선포한다. 로장발롱은, 사회적인 것의 제도적 토대인 복지국가의 위기가 '사회적 상상력'의 좌초에 기인함을 지적한다. '사회적인 것의 해체'의 원인이 되는 사회적 상상력의 약화는 진보된 미래를 표상할 수 있는 집합 능력의 위기다. 로즈는, 푸코가 70년대 후반에 시도했던 '사회적인 것의 계보학'을 확장시키면서,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핵심을 '사회의 통치 없이 통치하기"로 파악한다. 8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통치성은 사회적인 것의 실재와 가치를 부정하면서(대처리즘), 가족과 공동체 그리고 개인화된 자기통치를 통해 사회를 통치하는 일련의 테크닉과 이데올로기를 창출하고 있다고 본다. 이런 '통치의 탈사회화'가 결국 '탈사회적 시대'의 도래로 연결된다(Rose, 1996: 328; 김홍중 424~5쪽.)

12.1.3. 아렌트는 '사회'라는 명사 대신, 형용사에 정관를 붙인 '사회적인 것'이라는 용어를, 단순한 어감상의 수사학적 효과(명사와 형용사의 차이)를 넘어서, 개념적 함의와 전략적 의도를 가지고 일관적인 방식으로 사용했던 최초의 사상가이다[짐멜은 "가장 다양한 충돌들로부터 솟아나오고, 가장 다양한 대상들을 지향하며, 가장 다양한 목적들을 겨냥하는 것으로서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라클라우와 무페는 사회적인 것을 사회라는 형식화된 패턴의 에너지적 질료로 파악하는 관점을 주장한다.]

Ⅱ. 사회적인 것의 의미론

12.2.1. 아렌트에게 '사회적인 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흔히 '사회'라고 부르는 것이 의미하는 바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은 근대 사회공간에 출현한 새로운 '영역'이자, 근대사회의 새로운 '통치대상'이자, 근대 대중사회에 지배적인 '삶의 형식'이라는 세 가지 의미로 구성된 복합체이다.

1. 영역으로서의 사회적인 것

12.2.2. 인간의 집합적 삶에 대한 이중구조를 통한 파악. 한편에는 이성/언어logos를 중심으로 구성되는 공적 영역인 폴리스, 즉 자유의 공간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생물학적 생산/재생산이 이루어지는 사적 영역oikia, 즉 필연의 공간이 있다. 단순한 생물학적 목숨인 조에zoē는 사적 영역에 뿌리내린 삶의 형태를 지칭하고, 정치적 삶을 의미하는 비오스bios는 공적 영역에서 획득되는 생명의 양태를 가리켰다[427쪽.]

12.2.3. 인간에게 인간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은 조에가 아닌 비오스의 원리였으며, 그런 점에서 인간본성은 '사회적인 것'이 아닌 '정치적인 것'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는 현실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근대적 의미의 '사회', 또는 '사회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치적인 것과 의미론적으로 구분되는 사회는 16세기 이후 근대성이 실현되는 점진적 과정에서 발생한 개념사적 사건으로 등장한다. 오랜 기간 인간의 활동공간의 기본 위상학을 규정하던 공/사 영역의 이분법은 새로운 제3영역의 발생에 의해 불가피한 재구조화를 겪는다. 아렌트는 이 새로운 영역을 '사회적인 것'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가족과 국가 사이에 펼쳐지는 국민경제Volkswirtschaft의 영역이다. 국민경제는, 인간 필연성의 충족기능을 수행하던 경제(가족경영)가 공통적 삶의 공간인 네이션으로 확장된 형태를 가리킨다. 경제라는 점에서는 사적인 것이지만, 그 규모와 범위에 있어서는 공적인 것이라는 복합성을 갖는 이 사회적인 것(국민경제)은 과거의 사적/공적 영역 구분으로  포착되지 않는, 양자가 혼융되고 뒤섞인 새로운 공간으로 출현하게 된다.

아렌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적인 영역도 공적인 영역도 아닌 사회적 영역의 출현은 엄격히 말하자면 비교적 새로운 현상이다. [...] 이런 발전에 사응하는 과학 사상은 더이상 정치학이 아니며 '국민경제', '사회경제' 또는 민족경제이다. 이 모든 표현들은 일종의 '집단적 살림'collective housekeeping을 지시한다. 경제적으로 조직되어 하나의 거대한 인간가족의 복제물이 된 가족 집합체를 우리는 '사회'라고 부르며 사회적 정치적 형태로 조직화된 것을 '네이션'이라고 부른다(아렌트, 1996a: 80~1)

결국 사회적인 것은 서유럽의 근대화과정에서 등장하여, 국가에 의해 규제되고,  분업시스템에 의해 조절되는, 근대 초기의 ㅈ본주의적 시장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427~9쪽.]

12.2.4. 아렌트가 분석하는, 사회공간의 위상학은 헤겔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립된 '시민사회론'과 그 맥을 같이 한다. 그에게서 인륜성Sittlichkeit의 두 원천은 가족과 국가이다. 시민사회는 두 가지 영역의 차이로서 등장하는데, 권력과 교회로부터 해방된  개인이 자유롭게 자신의 욕구(이해관계)를 추구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타인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분업) 독특한 공간이다. 시민사회의 이런 이중성을 헤겔은 '욕구의 체계'라는 용어로 집약한다(헤겔, <법철학>, 2008: 357쪽.] [...] 근대 시민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욕구는 오직 체계 안에서, 상호의존적인 방식으로, 더 정확히 말해 '사회적'인 방식으로만 충족될 수 있다는 것이다. 헤겔의 이 개념에 암시된 시민사회적 주체의 이미지는, 자유로우며 의존적이고, 독립된 개체로서 노동하지만 타인의 노동을 필요로 하고, 특수 존재인 동시에 공동성을 갖고 있는 이중체의 형상을 하고 있다. 헤겔은 개인의 이기심과 공동체의 욕구충족 사이의 조화가능성이 시민사회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역설하는 것이다[헤겔, 같은 책, 376쪽; 김홍중, 429~31쪽.]

2. 통치대상으로서의 사회적인 것
12.2.5. 아렌트에 의하면, 사회적인 것은 어떤 특정한 주관, 즉 '누군가'에 의해 통치되지 않는다. 사회적인 것을 지배하는 주체는 '아무도 아닌 자'이며, 사회적인 것의 통치는 '아무도 아닌 자에 의한 지배'에 다름아니다(아렌트, 1999: 66~7). (그것은) 개별적인 행위자들을 넘어서는 익명 시스템에 의해 사회적인 것 전체가 생산/재생산 될 때, 우리는 그 질서를 유지하는 통치의 인격 주체를 식별할 수 없다.

12.2.6. 사회적인 것의 통치는 '주체 없는 과정'으로 사회적인 것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통치한다. 사회는 자기조절의 체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사회적인 것의 통치주체는 가시화되지 않는다. 자기생산적autopoietic이고 자기 조직적self-organizaing이다[김홍중, 433쪽.]

12.2.7. 위의 인용문에 언급된 '공산주의적 픽션'[아렌트, 1996a: 97]이라는 표현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이 경제적인 것의 논리에 결정성을 부여하면서, 정치적인 것의 역할, 기능, 가능성을 축소시켰왔던 경향에 대한 비판이다. 그런데 경제적인 것을 통치성의 중심기제로 삼아서 정치적인 것을 소거하려는 야망의 기원은 자유주의 고전경제학자들이었다[아렌트, 1996a: 96~7) 로장발롱에 의하면 마르크스는 애덤 스미스의 비판자인 동시에 사실상의 계승자였다. 애덤 스미스의 자유주의 유토피아는 마르크스주이가 이론적으로 정립했던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와 심오한 상응관계를 맺고 있었다[푸코 1978: 95; 로장발롱, 유토피아적 자본주의, 1979: 223, 226]. [...] 아렌트가 '국가나 정부가 행정에 의해 대체된다'고 주장할 때, 근대사회가 스스로를 통치하는 방식에 매우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으며, 이것이 자신이 말하는 '사회적인 것'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시한다. 시장을 통한 통치, 즉 자유주의적 통치를 의미한다.

12.2.8. 푸코에 따르면 자유주의 통치성은"어떻게 지나치게 통치하지 않을 것인가"의 문제를 중심으로 회전한다[푸코, 1978/9: 15] 통치에 잇어서 최소한의 통치를 통해 최대한의 효과를 발휘한다는 전략은 개입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새로운 영역의 발견과 동시에 이루어졌다[푸코, 같은 책: 112]

12.2.9. 18세기 정치경제학자들에 의해 소묘된 이런 시장의 개념은, 인위적 개입 없이도 질서가 형성되고 조화가 이루어지는 이상적 사회상을 제공했다. [...] 질서는 '보이지 않는 손'의 조정력[아렌트의 '아무도 아닌 자의 지배'], 사회의 자기조직능력을 통해 자연스럽게 달성된다. 사회의 설립과 유지는 행위자들의 행위(정치적 행위)로 환원되지 않는 시스템의 논리에 의해 자동적으로 실현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자유주의 통치성이 시장사회 개념을 중심으로 새로운 통치기획을 제시할 때 붕괴하는 것은 '정치적인 것'의 역할과 기능 그리고 존재가치다. 마키아벨리에 의해 열린 근대의 '정치적' 상상력은 스미스에 의해 폐쇄된다. 가장 강력한 반마키아벨리주의자라고 불려도 무방한 것이다[로장발롱, 1979: 57]

3. 삶의 형식으로서의 사회적인 것.

12.2.10. 아렌트는 자신의 첫 저서 <라헬 파른하겐>에서 '사회' 또는 '사회적인 것'이라는 용어를, 상류사회와 그에 고유한 사회성의 내용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사회적인 것은 "인간 상호작용의 패턴들, 의복, 식사, 레저, 시민적 매너와 외양에서의 차이들, 결혼, 우정, 지인 관계들 그리고 상업적 교환을 형성하는 패턴들"을 모두 포함하는 소위 '삶의 형식' 일반을 가리키게 된다[벤하비브, 2000: 28] 문화적 의미로 이해되는 사회적인 것의 기원은 엘리아스 연구에서 잘 나타나듯, 18세기 프랑스 상류사회가 창조하고 전파한 '매너의 체계'이다. 아렌트는 루소가 혐오했던 상류사회의 위선적 분위기와 아도르노가 비판한 대중문화의 천박하고 텅 빈 속성을 모두 '사회적인 것'의 개념으로 묶고 이를 부정적으로 응시한다[아렌트, 1996a: 93; 2005: 264] 이는 실존주의적인 철학 전통[하이데거, 야스퍼스, 후설]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인간의 실존은 세인의 일상에서 그 본성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죄, 운명, 우연' 등의 한계 상황에서, 그런 상황이 야기하는 절대 고독 속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개방한다. 진리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인지된다(아렌트, <이해의 에세이>, 1999: 91, 289, 290]

12.2.11. 두 가지 상이한 삶의 형식들이 거기 대립하고 있다. 단지 '사라져가는 것'으로서 인지되는 무의미한 일상이 있다. 일상에서 행위자는 자신에게 부과되는 '사회적인 것'의 규범에 충실하며, 사회가 요구하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산다. 그러나 이와 대립하는 순간, 즉 진정한 자아를 경험하고 인간의 상황 그 자체의 불안정성을 인식하는 몇몇 순간'이 존재한다. 이때 행위자는 타자와의 관계로 환원되지 않는 단독자로 스스로를 정리하면서,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의 진정한 실존을 체험한다. 아렌트에게 사회적인 것은 진정성과 대립하는 범주다. 진정한 삶을 살고자 하는 자는 사회와 싸워야 하고, 사회와 충돌해야 하며, 사회를 넘어서야 한다. 진정성은 나를 주어로 사유하게 하는 힘이다. 사회적인 것의 문법은 나라는 주어를 알지 못한다.

Ⅲ. 사회라는 신과 행위하는 메시아

1. 사회적 상상

12.3.1.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공적인 것)의 구별이 단순한 개념적 수준의 차이가 아니라 '사회적 상상'의 차이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사회적 상상'이란 '동시대인들이, 그들이 그 안에서 살면서 유지하는 사회들을 상상하는 방식'이자 사회에 대한 심층의 규범적 개념과 이미지들의 총체를 가리킨다[테일러, 2010: 17, 43]

12.3.2.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사회풍경과 '말하는 입'들이 토론하는 사회풍경의 차이. [...] 전자의 경우 신은 '사회적인 것'을 감싸고 들어와 그 안에 새로운 세속적 세계 구성원리로 변신해 있다. '사회신학'의 구현. 신은 이제 사회 그 자체가 되거나, 또는 사회의 질서와 조화를 유지하는 은밀한 원리로 변화한다. 반면에 말하는 입들의 사회풍경의 경우, 신은 추상적인 통치원리, 영역, 삶의 형식에 머물지 않는다. 신은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다. 신은 구체적 인간의 행위에, 언어에, 공적 활동에 메시아의 형상으로 깃들여온다. 아렌트는 독일 사회학의 건조한 행위 개념을 신학화하여, 인간 행위의 탄생성, 새로운 세계를 열어낼 수 있는 잠재력에 주목한다. '사회신학'에 대응하는 '행위신학'이라는 전략.

2. 사회로 변한 신-사회신학의 논리

12.3.3. 아렌트가 분석하는 사회풍경의 핵심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근본은유가 존재한다. 통치성의 한 형식으로 이해되는 사회적인 것의 개념을 분석할 때 드러난 것처럼, 사회적인 것의 통치는 인간 주체에 의한 개입을 넘어선 곳에서 자기생산적으로(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것처럼) 수행된다. [...] 이들은 특히 다음의 두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첫째, '질서'의 문제이다. 즉 '세계 혹은 사회에 어떻게 해서 질서가 가능한가?' 둘째, '악'의 문제이다. 즉 '세계 혹은 사회에 왜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답은 보이지 않는 행위자(신)의 존재에 의해 제공된다. 전능하고 전지한 존재인 보이지 않는 행위자가 선험적으로 가정되면, 그 존재를 알지 못하는 무지의 시선에는 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날 현상계의 카오스는 세계 또는 사회의 전체적 선(질서)에 기여하는 질료로 이해될 수 잇는 것이다[442~3쪽.]

12.3.4. 18세기 중, 후반 이후 등장하는 자유주의 전통은 사회질서의 구성에 있어서 이런 정치적인 것(주권적인 것)의 필요성을 과감하게 제거하는 새로운 사회적 상상을 창안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자유주의적 사유가 해결해야 했던 과제는, 정부(리바이어던)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고 사회에 내재하는 요소들 속에서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질서형성의 원리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포프, 몽테스키외, 맨더빌, 파스칼, 비코, 칸트 등은 문제를 '욕망과 조화의 변증법'[개체의 자기애가 공동체의 구성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발상, 좋은 공동체가 구성되기 위해서는 차이나 갈등과 같은, 특정한 반공동체적 질료들이 요청된다는 역설절 사고)이라는 해답을 통해 풀어내고자 했다[445~6쪽.]

12.3.5. 가령 포프는 "자기애와 사회적인 것은 동일한 것이다"고 말했다. [...] 칸트 역시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에서 '반사회적 사회성'ungesellige Geselligkeit 개념을 제출한다. 폭력, 전쟁, 범죄 등의 반사회성을 내용으로 하는 행위들이, 사회적 수준에서 바람직한 것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칸트, 1992: 29쪽.]

12.3.6.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개인들의 도덕적 능력을 제고하는 것, 개인들이 더 훌륭한 덕성을 갖춘 인간이 되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네이션, 즉 사회는 시장에서 자기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기심을 동력으로 부를 축적한다. 우리가 매일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가 추구하는 이해관계, 즉 이기심 때문이다(스미스, 2007: 17). 네이션을 가득 채운 이 이기심들의 총화를 이뤄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다. [...] 보이지 않는 손은 사회적인 것을 경제적인 것으로 치환, 번역, 대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사회적인 것은 더이상 정치적인 것이나 법의 논리가 작용하여 산출되는 상태가 아니다. 폴라니와 정확하게 반대의 의미에서, 스미스의 사회(네이션)는 '시장'에 배태되어 있다. 사회적인 것을 조절하는 시장의 법칙은 개인들의 의도, 지식, 희망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유사 자연적' 법칙이 된다. 시장은 인위가 개입하지 못하는 섭리공간으로 탈바꿈한다(Latour/Lepinay, 2008: 112~7).

12.3.7. 애덤 스미스는 사회적 상상의 중심에 시장을 배치하고, 그 안에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강력한 메타포를 장착시킴으로써, 기왕의 자유주의적 사유 속에서 맹아적이고 파편적인 형태로 잔존해온 사회변신론sociodicee의 흐름들을 종합한다. 스미스 이후, 호모에코노미쿠스들이 구성하는 사회적인 것은 '인간들의 공유된 실존에 고유한 자연성', 즉 자연법칙으로 기능하는 수많은 법칙들이 작용하는 공간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푸코, 1977~8: 357). 보이지 않는 손은 시장을 넘어서 정치와 시민사회를 조직하는 원리로 파악되기도 하며(karlson, 2002), 생명현상, 공간형상, 도시 현상 등에서도 논의되고 있다(크루그먼, 2002; 김홍중, 450쪽.]

12.3.8.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비유의 힘이 단지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의 사회적 상상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시장이 야기하는 문제들을 '사회보험'을 통해 통제하려는 집합적 시도의 결과로 등장한 서구의 복지국가, 사회국가, 또는 보호국가 또한 이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에 의존하고 있다. 복지국가의 기초에는 19세기 후반 서유럽에 등장하는 사회보험의 논리가 존재한다. 사회보험은, 사회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사고들을 리스크로 파악함으로써, 자신과 타자에게 일어날지도 모르는 불은, 비극, 사고, 우연에 대한 대비책을 집합적으로 확보하는 테크놀로지이다. [...] 시민사회가 '욕구의 체계'였다면, 사회보험이 재구성하는 사회는 일종의 '리스크의 체계'를 이룬다(Ewald, 1986; 1991: 227).

12.3.9. 리스크를 개인들의 신중함을 통해 통치하는 자유주의적 경향을 근본적으로 수정하면서 등장한 이 연대한 원리는, 인간에게 닥치는 악을 '사회로 변신한 신'이 예방하고 보상해주는 집단 섭리시스템을 창출하게 되는데, 프랑스에서 이러한 복지국가를 섭리 국가라고 부른다. 사회의 이름으로 규합된 시민들의 실존적  불행을 '신=사회'가 책임지는 것이다[Ewald 1991: 208).  복지국가도 '보이지 않는 손'이다. 시장처럼 개인들 사이의 거대한 인터페이스로 존재한다. 결국 근대는 두 개의 유사한 보이지 않는 손을 발명한 것이다. '섭리-시장'과 '섭리국가'가 그것이다(rosanvallon, 1981: 21). 아렌트가 '사회적인 것'의 대표제도로 파악한 시장과 복지국가는 모두 ' 사회로 변신한 신'에 다름아니었다. 그녀가 공적인 것의 범주를 통해서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사회신학의 진면목이다. 마술처럼 스스로를 통치하는 비가시적 초월성의 사회적 육화를 이루는 근대 시장과 복지국가에 대한 비판의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다.

3. 행위자의 가면을 쓴 메시아-행위신학의 논리

12.3.1. 아렌트에게 중요한 질뭉는 '개인의 악이 어떻게 사회의 선으로 변환도는가?'가 아니었다. 아렌트는 "어떻게 선한(적어도 평범한) 개인이 특정한 사회적 상황, 조직 환경, 속에서 악의 구현자로 변환되는가?" 이 질문에는 인종대학살과 같은 근본악의 현상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악의 평범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내포되어 있다.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에 대한 유명한 리포트에서 아렌트는 사회신학의 역설(개인의 악덕이 사회의 행복)을 통렬하게 전도시킨다. [...] 아이히만은 평범하고 소박한 인간이었다. 그는 내적 갈등 없이 주어진 명령을 실행했고, 자신에게 부여된 사회적 기능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다만 나치 이데 올로기, 나치 조직, 나치의 명령체계에 저항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는 무사유성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악의 뿌리는 개인의 마음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시스템에 내재하고 있다. 그는 평범하다. 악은 '사회화에 저항할 도덕적 책임'의 부재 또는 사회적인 부과하는 공인된 규범과의 윤리적 대결의부재에서 발생한다(아렌트, 2006; 바우만, 2013: 298).

12.3.2. 아이히만의 경우, 보이지 않는 손은 '항상 선을 욕망하면서도 결국 악을 창조하는 힘'으로 움직인다. 20세기 유럽 사회사상에는 보이지 않는 손의 이런  전토된 형태들이 다수 존재한다. 베버의 합리화 테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 벡의 위험사회론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역사철학적 지평에서, 어떻게 특정 시대의 성공(선)이 다음 세대에게 고통, 위기, 리스크 등의 악의 형식으로,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서' 되돌아오는가에 주목한다. 하지만 아렌트는 이와 같은 역사적 힘을 사회, 역사, 세계를 움직이는 '섭리'로 상상하는 것을 거부한다. 즉 '사회적인 것'의 고유한 상상계에 내포된 자기조직적 세계의 이미지를 부정한다. 대신 '내적 대화'로서의 사유의 공간, 사유로부터 솟아나오는 의지의 공간, 그리고 이를 통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행위의 공간에 주목한다. 인간이 '행위'를 통해서 자신들의 운명을 책임지고 세계를 재구성하는 '공적' 공간의 창출이 '정치'라고 한다면, 아이히만의 '악의 본질은 공적인 것(정치적인 것)의 부재와 교란으로 규정된다(Parekh, 1979: 76).

12.3.3. 아렌트는 이런 방식으로 상상계를 가동시킨다. 악을 선으로  전환시키는 변환자는 인가 행위를 초월한 시스템적 자기조절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변환자를 상정하는 것은 오직, 역사, 사회, 세계가 제작되는 것이라는 특수 관념이 존재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 아렌트에 의하면, 다수 인간들이 참여항 형성해가는 역사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제작자의 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아렌트, 1996a: 247). 사회신학이 가정하는 신의 고유한 자리 즉, 현상계 너머의 초월적 영역을 아렌트는 이론적으로 단호하게 봉쇄한다. 그녀에게 사회는, 인간들이 스스로 참여하여, 담화하고, 숙의하여, 만들어나가는 공통의 열린 공간으로 나타난다. 사회적인 것의 은폐성과 대립하는 이 공적인 것의 개방성은 "누구나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그러므로 가능한 가장 폭넓은 공개성"을 함축한다(아렌트, 같은 책, 102~3쪽.). 공적 공간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 앞에 나타나는 현상 공간이다. 공적 공간에 나타나지 못하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존재는 현상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아렌트, 2004b: 38; Fuss, 1979: 164). 공적인 것의 핵심에는 가시성의 요청이 인각되어 있다(한센, 2007: 126; Lefort, 1985: 72).

12.3.4.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것은, 특정 목적이나 내면에 숨겨진 동기를 넘어서 공적 공간의 중요한 가치들을 자기목적ㅇ로 추구하는 행위를 통해서다(아렌트, 2005: 209). 아렌트에게 행위는 목적합리성의 문법을 훨씬 벗어난 신학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행위는 일어날 가망이 별로 없어 보이는 것들이 구성하는 세계, 즉 자연의 세계, 즉 '무한한 비개연성'에 지배되는 세계의 내부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새로움을 창발시킨다(같은 책, 231쪽.] 인간은 자연법칙의 숙명적 권능을 뚫고서 새로운 것을 세계에 도래하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데, 아이히만에게 결여되어 있던 것이 바로 이 행위능력이다. 아렌트의 사회사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만나서 '사회신학'을 해체하는 '행위신학'으로 전환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인간이 세계에 등장하는 것, 그가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우주가 창조되는 것과 비견할 만한 중대한 사건이다.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 세계 속에 하나의 새로움으로, 가능성으로 등장한다는 것, 이 탄생의 사실은 모든 행위에 내포된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의 원천이 된다(아렌트, 2005: 228쪽.) 인간은 무엇보다도 '도래하는 존재'이며, 태어남으로써 시작할 수 있는 존재이다.

12.3.5. 아렌트의 메시아는 아직 아무것도 수행하지 않은 자, 미래밖에는 갖고 있는 것이 없는 '아이'이다[아렌트, 1996a: 312쪽.] [...] 아렌트의 메시아는 특정 초인이나 계급이나 젠더나 사회적 집합체가 아니다. 반대로 태어나는 '나'는 모두가 메시아다. 아렌트의 행위이론에 전제되어 있는 메시아주의는 벤야민의 그것과 깊은 친근성을 갖는다. "행복의 관념 속에는 불가피하게 구원의 관념이 내포되어 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세대와 희미한 메시아적 힘eine schwache messianische Kraft이 함께 주어져 있는 것이고, 과거는 이 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Benjamin, GS 1-2" 693~4]. 

12.3.6. 벤야민과 아렌트가 공휴하고 있는 저 유대교적 메시아주의는, 인간 행위자를 제외한 어떤 존재도 이 세계를 변화시킬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아렌트의 행위신학이 자유주의적 사회신학의 극단적 대척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은 '나'의 자리가 없는 사회의 상상이다. 그것은 사회 그 자체의 끊임없는 전개와 연속의 섭리에 집중한다. 그러나 말하는 입들은 '내'가 메시아로 태어난 세계, 세계가 '나'를 메시아로 인지하고, '나'에게서 어떤 공적 행위를 기대하는 바로 그런 사회, '내'가 말하고, 행위하고, 참여해야 하는 '나'의 행위에 이 사회의 명운이 걸려 있을 수도 있는, 그런 사회의  상상이다. 보이지 않는 신(운명)과 내 안에 깃들여 있는 미약하지만 생생한 신(행위) 사이의 싸움이다. 사회로 변신한 신과 행위자의 가면을 쓴 메시아 사이의 전쟁이다.

Ⅳ. 남아있는 질문들

12.4.1. 아렌트의 사회산학에 대한 대한 비판과 그 대안으로서의 행위 신학은 어떤 현실적 함의가 있는가?

1) 아렌트의 사회적인 것에 대한 비판이 신자유주의적 맥락에서 갖는 적실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 이 시대의 고통(사회적인 것의 살해를 시도하던 68혁명 세대 이후에 1980년대에 전개된 신자유주의적 사회의 도래에 의해서 사회적인 것 자체가 부재한 그런 사회가 도래한 것으로부터 비롯하는 고통)은 사회적인 것이 발휘하는 억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 자체의 부재에서 온다는 것이 세넷의 고민이다. 세넷은 '새로운 자본주의'가 녹여 소멸시킨 사회적인 것이 과연, 70년대의 저항문화 속에서 흔히 그렇게 생각되듯, '악마적인' 것이었냐고 반문한다. [...] 세넷은 20세기의'사회적인 것'의 제도적 장치들(복지국가들이나 관료제 등이 사회적 존재의 심리적 안식처를 제공한다는 것), 특히 사회적 자본주의의 힘을 재평가하고 있다(세넷, 2009: 44).

2) 행위신학의 대안적 가능성. 아렌트의 행위신학도, 사회신학처럼 노골적으로 변신론적 관점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 역사의 행로에 대한 '낙관론'의 함정에 빠져 있다. 20세기 후반 '미래'의 개념은 '진보'나 '꿈'이나 '발전'과 같은 개념들과 더불어 그 적실성을 상실하기에 이른다. 미래가 더 나은 세상이 아닐지 모르기 때문에, 태어나는 아이는 메시아가 될 가능성도 있지만, 종의 종말을 목격하고 증언해야 하는 '최후의 인간'이 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서 아렌트의 행위신학에도 사회신학과 동일한 문제점이 존재한다.

보론 1. 사회적인 것과 소셜적인 것

칸트가 1784년 <세계 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에서 제시한 것은 '반사회적 사회성'이다. 이러한 논리적 조합 외에 이를 다음과 같이 변형해서 다양한 가능범주들을 사유할 수 있다.

1) 반사회적 반사회성
2) 사회적 사회성
3) 사회적 반사회성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사회적 반사회성이다. 이를 우리는 '쇼설적인 것'이락고 부를 수 있다. 그것은 사회적인 것이 약화된 세계에 나타난, 사회적인 것의 대리보충이다. "사회적인 것이 없는 세계에서 사회적인 것"의  역할을 대리하는 것이다(카스텔, 1981: 178). [...] 우리 시대는 시장과 주권적 인민과 공론장이라는 세 가지 주요한 사회적 상상이 모두 위기에 처해 있다. 시장의 상상과 나머지 두 형태의 상상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전자는 자기통치하는 시스템으로 상상되는 반면, 공론장과 주권적 인민은 '공통의 행위주체성'을 가진  것으로 상상된다(테일러, 2010: 148쪽.) 사회적 반사회성은 이 세 가지 사회적 상상히 파상된 자리에 나타난다.


제13장 사회적인 것의 합정성

Ⅰ. 감정적 전환


13.1.1. 이 연구는 현대 사회이론이 지난 30여 년에 걸쳐 수행해온 '감정적 전환'의 핵심논리를 '합정성'의  재발견으로 규정하고, 이에 사용된 합정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472쪽.]

13.1.2. 합정성은 네 가지 상이한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 행위의 합정성. 둘째, 규칙/규범의 합정성. 셋째, 상호작용의 합정성. 넷째, 시스템의 합정성[472~3쪽.]

Ⅱ. 고전사회학에서 발견되는 감정의 중심성

1. 사회계약론


13.2.1. 데카르트 이래 근대적 사유는 이성(정신)과 감정(신체) 사이에 심연을 설정하고, 감정을 이성에 의해 지도되어야 하는 비합리적 충동의 영역에 위치시켰다. 그런데 17세기 이래 사회사상은 도리어 이런 감정의 영역에서 '사회적인 것'의 구성가능성을 발견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다. 사회적인 것의 합정적 정립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런 시도는 사회계약론자들의 '사회적 상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 초월적인 원리를 부여하는 신이 아니라면, 이 자유로운 동시에 사적 욕망에 사로잡힌 개인들의 무질서하고 상호 적대적인 군집에 질서를 부여하는, '사회 내재적' 원리는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 퍼즐을 풀기 위해 발명된 모델이 발 '사회계약'이었다. 해방된 개인들이 계약을 맺어 주권자에게 권리를 양도하고, 그 결과 형성된 정치적 실체가 사회를 정립, 통치, 조절하는 사회에 대한 상상이었다. 사회가 질서 잡힌 전체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행위자들의 계약을 통해서라는 그림은 그렇게 등장한다[473~4쪽.]

13.2.2. 사회계약론은 '사회적인 것'을 상상하는 과정에서 '정념의 산술학'을 수행했다(로장발롱, 1979: 11). [...] 이들은 모두 근대 사회공간이 합리적 이해관계의 추구에 의해 유지,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은 수준에서 작용하는 정념들에 의해 구성되고 있다고 보았다. 이 정념은 단순히 이성의 작용을 교란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자신보다 더 큰 유기적 전체인 '사회' 또는 '인류'에 소속된 존재로 느끼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그로 인해 차이들을 극복하고 하나로 결합할 수 있는 '도덕적' 또는 '규범적' 원천을 제공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474~5쪽.]

13.2.3.  고전사회 사상과 사회이론은 사회적인 것의 합정적 근거에 대한 이론적 탐색에 결코 인색하지 않았다. 합정성은 사회적 상상의 중요한 한 갈래를 이루고 있었고, 이는 인간 행위, 상호작용, 규칙, 다양한 시스템 또는 전체 사회의 '합정적' 발생, 작동, 재생산에 대한 이론적 관점을 유도했다. 합리성은 도리어 합정성이라는 거대하고 미분화된, 사회적인 것의 바다 위에 떠 있는 빙산과도 같은 것이다. 감정에 대한 이러한 관심이 사회이론의 지평에서 퇴조하게 되는 것은 파슨스 이후의 일이다. 그는 사회적 행위의 규범적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행위자의 감정요소를 주변화시켰고, 제도의 작동에서 '감정 중립성'을 중시함으로써, 감정을 1차적 제도인 사적 친밀성의 관계로 유폐시킨다(파슨스, 1951).

2. 뒤르켐

13.2.4. 사회온에서 합정성을 가장 깊고 넓게 탐구한 이론가는 뒤르켐이다. 그는 1895년에 출간된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뒤르켐, 2005b: 5)에서 '사회적 사실'이라는 사리에 대해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사회적 사실은 우선 개인들의 행위를 규제하는 특수한 '행동규칙들'을 가리킨다. 그는 사고, 행위, 감정 등 세 가지 상이한 유형의 행동을 제시한다. 사회적 사실에는 '기호체계, 화폐제도, 신용도구' 등과 같이 객관적 실재, 사회조직처럼 고정된 형태를 가진 것들이 포함된다. 여기에는 그가 '사회적 흐름들'이라고 부른 무형의 비감감적 트렌드, 유행, 미묘한 사회적 분위기, "군중의 열정적 운동, 분노, 연민'도 포함된다[뒤르켐, 같은 책, 406쪽.] 집합감정, 집합표상, 집합의식, 연대, 도덕 등은 모두 감정적 특성을 가진 개념들이다. <분업> 1권 5장에서 기계적 연대와 유기적 연대의 징후로 나타나는 법형식의 차이를 설명할 때, <자살> 2권 6장에서 자살의 원인을 설명할 때, 뒤르켐에게 가장 중요한 원리로 인지되는 것은 역시 감정이다(실링, 2009: 38~42; Fisher/Chon, 1980; Fish, 2002; 2005).

13.2.5. 이런 경향은 <종교 생활의 원초적 형태들> 제2권 7장에서 나타난다. 그는 의례를 통해 나타나는 집합 열광이 성스러운 토템에 고착되어 사회가 발생하는 과정을 탐구하면서, 집합 흥분, 열에 들뜬 몸짓, 비명, 강렬하게 촉발된 감정을 영속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하는 상징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프로세스를 묘사하고 있다(뒤르켐, 1992: 294쪽 이하). 물리적 공현존이 밀도 높은 상호작용을 낳고, 이 과정에서 강력한 감정적 체험들이 창발하고, 이 체험들이 다시 상징화되는 일련의 과정에 대한 뒤르켐의 발견은 '상호작용 합정성'의 개념으로 집약한 사회적 상호작용의 감정연관성을 가장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탐구해들어간 사회학적 성과를 이룬다. 이렇게 합정적으로 발생한 상호작용은 이제 다시 '감정양식'의 실정 규칙이 되어 개인 행위자들의 감정행위를 합정적으로 규정한다(뒤르케임, 1992: 546~7쪽 참조).

13.2.6. 감정은 순수 주관성, 내면성, 그리고 마음의 깊은 어둠 속에서, 타자들에게 도달되지 않는 사적 체험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종교 생활의 원초적 형태들>의 제2판 서문에서 제안하는 개념에 따르자면, 감정은 하나의 '제도'이다. 감정의 생산, 표출, 이해는 영혼의 자연스러운 분출이 아닌 '집합체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신념과 행위의 양식'에 다름아닌 '제도의 함수인 것이다[뒤르켐, 2005b: 22쪽.] 뒤르켐에 따르면 우리가 자신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현상으로 간주하는 많은 것들은 사실 우리 안에 스며들어와 있는 '사회적인 것'이 작용한 결과다(뒤르켐, 1992: 300). 뒤르켐의 실증주의는 인간의 내적 영역, 그의 마음, 혹은 그의 영혼까지도 외재적이고 강제적인 사회적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요컨대 '내부에 존재하는 외부'로 뒤바꾸어놓는다(Keck/Plouviez, 2008: 39) 그에게 있어 '내면적'이라는 것과 '객관적'이라는 것은 반드시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인간 내면이 이렇게 사회적 사실로 재편되는 한에서, 인간 내면을 우리는 '하나의 사물처럼' 다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3.2.7. 뒤르켐은 '규칙/규범 합정성'[사회적 삶에서 감정 행위들이 결코 자발적, 우연적, 충동적 속성만을 띠는 것이 아니라 규칙에 의해 규제되는 경향을 지칭)이라고 부르는 합정성의 특정 유형 또한 선구적으로 정립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의 감정적 자발성은 감정규칙의 강제성과 배치되지 않는데, 감정과 규칙 사이에 상합의 사회적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뒤르켐 사회학이 사회를 신과 동일시해서, 사회적인 것을 성스러운 것과 일치시키려는 이론적 시도를 보여주는 과정에서 또다른 의미의 규칙/규범 합정성의 강력한 맹아가 발견되는 것이다. 특정 규칙들은 단순히 그것이 규제를 동반한 의무이기 때문에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그 규칙들이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감정 요소들(성스러움, 일체감, 연대감)과의 유기적 조응 속에서 막대한 사징적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정당화되며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3. 베버
13.2.8. 베버는 <경제사회학>에서 사회적 행위를 목적합리적, 가치합리적 행위, 감정적 행위, 전통적 행위로 나누고 있다. 감정적 행위는 '주관적으로 생각된 의미'에 의해서 구성된 행위가 아니라 즉각적이고 성찰 없는 생리적 반응에 더 가까운 것으로 인지되고 있다(베버, 1997: 146~7).

13.2.9. 종교사회학적 탐구에서 감정에 대한 베버의 관점.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베버는  세속적 금욕주의로 특징지어지는 근대 자본주의 정신이 특정 개신교 윤리에서 비롯되었는지를 해명하고 있다. 그는 "종교적 신앙과 종교적 삶의 실천을 통해 형성되어 생활양식에 방향을 제시하고 개인을 거기에 확고히 붙잡아두는 심리학적 동인"을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다(베버, 2010: 172쪽/183쪽.]

13.2.10. 이 책을 이렇게 읽었을 때 두드러지는 것은 감정의 행위능력agency 또는 수행성이다. 감정은 단순히 외적 자극이 주체에게 가해질 때 발생하는 수동 체험이 아니다. 감정은 행위를 촉발한다. 무언가를 수행하며, 사람들을 움직여 현실을 변화시킨다. 의미 있는 사회적 행위는 합정적으로 촉발되고, 창발되고, 실행된다. 감정의 힘과 논리가 행위자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베버에게 감정은 '행위의 창조성의 원리로 기능한다.

13.2.11. 베버에게서 '합리성'의 옹호자로서의 이미지만이 부각되었던 것은, 그가 신교윤리와 자본주의 정신하에서 살아가는 호모에코노미쿠스의 행위패턴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그 기원의 '합정성' 대신 그 결과의 '합리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생활양식, 에토스, 정신, 윤리는 '감정'으로부터 왔지만 그렇게 도래한 자본주의적 쇠우리 안에서 감정 분출과 표현공간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청교도 윤리는 '자각적이고 의식적이며 명철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을 목표로 했고, '감정적 측면 일체를 억제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베버, 2010: 207, 212쪽.) [...] 우리는 합리화의 근저에 비합리적 감정의 역동이 발생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그의 통찰을 통해서 베버가 '감정'을 단순 잔여범주로 취급하는 대신 매우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행위이론과 합리성이론이 합정성 개념의 조명하에서 새롭게 조망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Ⅲ. 사회적인 것의 합정성을 찾아서

1. 합정성의 유형와 근거


13.3.1. 합정성의 네 가지 유형은 각각 행위 합정성, 규칙/규범 합정성, 상호작용 합정성, 시스템 합정성으로 제시했다. 제시된 네 항목들은 각각 행위, 상호작용, 규칙/규범, 시스템이다. 이는 사회이론의 전통에서 '사회적인 것'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단위로 간주되어온 것들이다.  '사회적인 것'의 단위란, 사회를 사회로서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수준 또는 차원을 가리킨다.

13.3.2. 이에 대해 근대 사회이론은 다음의 네 가지 큰 단위들을 제시한다.

1)  '사회적인 것'의 기초단위는 인간의 사회적 행위라는 관점이 존재한다. 베버 사회학에서  '사회적인 것'은 사회적 총체성(사회나 국가)이 아닌 '사회적 행위'에 놓여진다. 사회를 구성하는 기초원리로서  '사회적인 것'은 사회적 행위자가 '의미'를 부과함으로써, 구성한, 타인에게 지향되어 있는 행위다. 이는 파슨스의 단위 행위 개념으로 이어진다(파슨스, 1937: 43~51쪽.]

2)  '사회적인 것'은 상호작용을 그 기초단위로 한다. 짐멜에게 사회는 언제나 상호작용의 형식이었다(김덕영, 2004: 104쪽 이하). 이는 엘리아스의 결합태 개념이나 네트워크 개념으로 심화, 연결된다.  '사회적인 것'이 개인과 개인의 복합적 관계망을 기본단위로 형성되는 것이라는 관점이다.

3)  '사회적인 것'이 행위 규칙들과  도덕적 규범이 구성하는 구조를 기본단위로 한다는 관점이다. 뒤르켐 사회학. 레비-스트로스 이래의 구조주의적 입장.  '사회적인 것'은 언제나 행위의 선험적 준거틀인 규범과 규칙을 그 기초단위로 한다.

4) 시스템을 기본단위로 하는 관점. 파슨스로부터 루만의 거대이론에 이르는 사회이론의 중심관점 중 하나는 시스템 이론. 루만의 시스템이론은, 자신과 환경 사이의 차이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구성하는 시스템의 작동에 초점을 맞춘다. 시스템은 분화를 통해 환경과의 차이를 반복한다. 현대사회는 기능적으로 분화된 하위시스템들(과학, 경제, 정치, 법, 교육, 예술, 종교)이 구성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사회적인 것'의 중요 단위는 독립된 코드를 갖고서 작동하는 사회적 시스템이다(루만, 2013).

2 행위 합정성

13.3.3. 합리성 개념은 고전적 의미의 이성 개념을 대신해서 인간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근대에 접어들면서 사용된 보다 좁은 개념이다(부동, 2009; 2007).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최적의 수단을 사고와 추론을 통해서 찾아낼 수 있는 능력으로 포괄적으로 정의된다. 콜먼과 페라로는 합리적 행위자는 효용극대화와 비용최소화로 특징지어지는 최적화를 추구한다. 게리 베커의 용어를 말하자면, 자신의 선호의 실현을 극대화하고자 한다(coleman/fararo, 1992: xi; becker, 1986: 110; 실링-멜러, 2013: 361~2쪽.) 근대적 행위자들의 자기이해에 부합. 합리적 행위자는 효용, 이득, 소득, 쾌락 등을 최적화/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을 찾는 '공리주의'적 존재로 표상된다. 합리성은 의사결정의 가장 중요한 원리로 이해되며, 감정은 이를 교란하는 방해요인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행위 합정성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성향과 능력에 대한 이론적 타진이 존재한다.

13.3.4. 프래그머티즘. 행위능력, 우연성, 미래성, 실험주의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전통에서 합리성은 애초부터 결코 감정과 선명하게 분리된 것으로 사고되지 않았다(웅거, 2012: 94~106) 윌리엄 제임스는 1879년의 에세이 <합리성의 정서>에서 신념과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바로 그러한 감정들이 진리를 구성하는 중요한 작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 제임스에 의하면 이런 경우 의사결정에 절대적 영향을 행사하는 것은 계산적 합리성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합리성의 정서'라고 부르는 감정의 힘이다. [...] 죤 듀이는 21년의 저서 <인간 본성과 행동>에서 인간 행동이 합리적 계산과 선택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편다. 지서으이 작용으로서의 숙력에 대해 논의하면서, 그는 지성의 운용에 감정이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감정은 숙려를 촉발하기도 하고, 상상력을 매개로 해서, 판단/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듀이, 1921: 199~200쪽.]

13.3.5. 프래그머티즘의 이런 관점과 매우 유사한 행위 합정성에 대한 통찰은 케인스에게서도 발견된다. [...] 특별하게 합리적인 경향을 갖는 것으로 여겨지는 경제 행위의 경우에도, 결국 행위의 순간과 그 결과가 나타나는 시간 사이의 간격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합리적으로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때 행위능력을 추동하는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는 것이 기분, 감정, 요행과 같은 요소들,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대한 믿음, 케인스가 '야성적 충동'이라고 부르는 어떤 자발적 열정의 힘이다(케인스, 2008: 189쪽.)

3. 규칙/규범 합정성

13.3.6. 20세기 후반 '감정적 전환' 속에서 혹실드의 감정작업으 개념을 통해서 감정의 제도성 또는 실정성, 즉 '규칙/규범 합정성'에 대한 깊은 이해가 마련된다. 그는 '감정작업'을 "감정 또는 느낌에 잇어 변화를 시도하는 행위"로 정의한다. 감정을 대상으로 작업한다는 것은 감정을 관리하는 것, 내면연기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특정 감정을 느끼고 불러일으키려는 시도까지를 포괄하는 확장된 개념이다(Hochscild, 1979: 565).

13.3.7. 그에 따르면 사회적 행위자는 특정 방식으로 정의된 상황 속에서 공식적 프레임이 규정하는 적절한 감정을 준수해야 할 의무에 구속되어 있다고 보는데, 그는 이를 '감정규칙'이라고 부른다. 이는 '내가 느껴야만 하는 것'을 규정하는 사회적 지침들을 가리킨다(같은 책, 565쪽.] 사회적 공간은 '합정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사회공간을 분할하는 선들은 사회적 경계, 문화적 경계인 것만이 아니라 감정적 경계이기도 하다. 계급, 종교, 젠더 등에 부합하는 감정규칙들의 존재와 운영에 의해 사회공간은 분할되어 있다. 행위자들은 '감정 하비투스'라고 부를 수 있는 성향의 체계를 실천원리로 육화한 채 행위하고 있다(칼훈, 2012: 97쪽.] 혹쉴드는 상호작용의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는 이와 같은 합정적 규칙들의 실행을 면밀하게 관찰해서 공적, 사적, 그리고 자아의 영역에서 발견되는 감정규칙의 규범적 성격을 인상적으로 부각시키는 데에 성공한다(혹실드, 2003b; 2001; 2012).

13.3.8. 규칙/규범 합정성의 다른 차원(사회적으로 합의되어 실행되는 행위규칙 또는 규범들)이 사회적 수준에서의 감정 체험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의 실례는 로티의 '인권'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권의식, 인권규범, 인권가치가 우리 시대에 더 중요해지는 것은, 칸트적 의미의 도덕적 정언명령들이 세계인들을 모두 '인간'이라는 보편 개념과 형상으로 통일해냈기 때문이 아니라, '감정의 조정과 감정 교육'을 통해서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서로를 인간으로 느끼고, 인간적 공감과 동정심을 갖게 되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로티, 1993: 158쪽.)

4. 상호작용 합정성

13.3.9. <사회적 삶의 에너지>에서서 콜린스는 행위자들의 상호작용의례를 통해서 발산되는 감정에너지가 상징으로 전환하여 사회적 결속력을 신장시키는 일련의 과정을 이론화하고 있다. 그는 뒤르켐이 수행하고 있는 의례분석을 면밀히 검토해서, 집합 열광, 공유된 감정, 신성한 상징의 발생 등을 '상호작용의례' 개념으로 재구성한다. 감정 에너지가 가장 핵심이다. 행위자자들 간의 상호작용이 감정적 토대를 갖고 있다는 명제, 즉 '상호작용 합정성'을 강하게 주장한다. 사회적인 것의 원초적 발생에는 감정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콜린스, 1995: 214쪽.) 그의 행위자는 합리적 선택 이론이 가정하는 목적합리적 행위자(더 많은 편익을 제공하는 행위 경로를 선택하는 존재)가 아니라 더 많은 감정에너지의 흐름을 제공하는 행위를 추구하는 합정적 행우자의 이미지를 띠고 있다. [...] 감정에너지는 끊임없이 재생되어야 한다. 상호작용 의례는 감정의 부단한 재생산을 수행하는 기제로 거시적 시스템들을 구성하는 것도 이런 미시적 상호작용의례들이라는 관점을 그는 견지한다. 또한 감정에너지를 풍부하게 소유한 '에너지 스타'들은 특정한 관계의 네트워크 속에서 높은 감정 에너지의 발휘를 통해서 낮은 감정에너지의 소유자들을 압도하고 지휘한다(콜린스, 2009: 190쪽.)

5. 시스템 합정성

13.3.10. 시스템 합정성은 특정 사회 시스템의 작동과정에 '감정적인 것'이 중요한 요소로 기능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베버의 자본주의에 대한 관점의 새로움은 자본주의가 기본적으로 '자본 축적의 경제논리'로만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상응하는 모종의 문화적 생활양식, 그리고 특수한 주체화의 양식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데 있다. 자본주의는 경제시스템과 그 시스템을 가동시키는 행위자들을 생산하는 상징시스템(자본주의 정신)의 결합을 통해서만 지속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법, 도덕, 윤리, 종교, 문화의 영향력은 자본주의의 경제과정에 끊임없이 간섭하고, 그것을 기능적으로 지원하고, 이념적으로 정당화한다. 자본주의에는 반드시 정신이 요청된다(볼탕스키/치아펠로, 1999: 58~9). [...]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은 그것의 작동을 전적으로 다양한 수준의 '합리성'을 동력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비합리성이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의 작동을 저해하는 것으로 인지되어 배제된다는 점에서, 시스템 합리성을 구현하고 있다(베버, 2010: 15~26쪽).

13.3.11. 베버자본주이론의 핵심인 이런 '시스템 합리성'이 20세기 새로운 자본주의적 진화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어갔다는 사실이다. 알루즈는 <감정자본주의>와 <근대적 영혼을 구원하기>에서 20세기 자본주의가 합리성과 금욕적 노동윤리 대신, 합정적 소통윤리를 새로운 정신으로 하는 '감정자본주의emotional capitalism'로 진화했다는 테제를 제출한다. 경제시스템이 제대로 작동, 운영, 재생산되기 위해서, 베버가 말한 것과 같은 합리성이 요청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간 감정의 내용과 형식들을 드러내고, 계발하고, 그것을 테마로 소통하는 다양한 이데올로기와 실천들, 문화적 표현물들이 요청되었다는 것이다. [...] 자본주의적 시스템 합정성은 20세기 자본주의의 새로운 '정신'으로 등극한다. 합정성을 구현하는 인간 유형이, 금욕적이고 강박적인 노동자/자본가를 대신하여, 새로운 자본주의적 인간의 이념형이 되었다.

13.3.12. 그런데, 친밀성의 영역에서는 이와 정반대의 경향이 진행되고 잇었다. "친밀성의 문화 모델에는 20세기에 여성적 자아를 구성한 두 가지 (심리학/자유주의 페미니즘이라는 문화설득담론)의 핵심동기들과 상징들이 포함되어 있다. 근대적 친밀성의 이상은 평등, 중립적 절차, 공정, 감정 소통, 섹슈얼리티, 감춰진 감정의 극복과 표현, 언어적 자기표현의 중시 등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일루즈, 2010: 65). 요컨대 '친밀한 관계의 합리화과정'으로 요약될 수 있다. [...] 요컨대 '경제시스템의 합정화'와 '친밀성의 합리화'라는 이중 방향의 운동이 감정자본주의를 지탱하는 두 가지 축이 되었다.


Ⅳ. 남은 과제들

13.4.1. 첫째, 합정성과 합리성의 관계에 대한 좀더 심도 있는 놀의가 요청된다. [...] 합정성은 단순한 비합리성이 아니다. 합정성에는 합리성에 함몰되지 않는, 다른 종류의 논리, 절차, 형식에 부합할 수 있는 일관된 작동 능력이 전제되어 있다.

13.4.2. 둘째, 합정성 개념은 동아시아의 '사회적인 것'의 구성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일상적 삶으로부터 법이나 정치, 경제, 문화나 의료와 같은 사회시스템의 논리에 깊숙히 스며들어와, 나름의 일관성을 가진 채 작동하고 있는 이와 같은 사회적 논리는 감정의 문법 또는 '마음'의 논리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이해되지도 설명되지도 않는 경우가 많다.


제14장 마음의 사회학을 이론화하기

Ⅰ. 파스칼적 명상

14.1.1.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절차들을 통해서 '마음'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학적 실천이론의 재구성을 기획한다. 첫째, 마음 개념을 조작적으로 정의하여 마음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의 기초를 설정하고자 한다. 둘째, 마음의 행위능력을 사고, 감정, 의지의 차원에서 조망하고, 이를 각각 합리성, 합정성, 그리고 합의성으로 개념화한다. 셋째, 마음의 제도적(실정적) 성격을 수행성과 외밀성으로 규정한다. 넷째, 마음의 사회적 구성을 담당하는 실정성들의 배치를 마음의 레짐이라고 부른다. 그 구성요소들을 설명하고, 마음의 레짐을 통한 사회학적 설명논리를 모색한다[508~9쪽.]


Ⅱ. 마음의 사회학적 개념화

1. 정의

14.2.1. 우선 마음을 하나의 '개념'으로 설정하고자 한다. 즉, 마음이라는 용어를 특수한 사회적 맥락에서 발생하여, 의미화의 독자적 과정을 겪으면서, 실재를 반영하는 동시에 그것을 조형해온 언어적 구축물로 간주하는 것이다[509쪽.] 

14.2.2. 두 번째로 마음을 조작적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 이런 맥락에서 이 연구는 '마음', '마음가짐', '마음의 레짐' 개념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조작적으로 제시한다. 

1) 마음은, 사회적 실천들을 발생시키며, 실천들을 통해 작동(생산, 표현, 사용, 소통)하며, 실천의 효과들을 통해 상상적으로 재구성되는, 인지적/정서적/의지적 행위능력agency의 원천이다. 

2) 마음가짐heartset은 그러한 마음의 작동을 규정하는, 공유된 규칙과 규범의 총체를 가리킨다. 

3) 마음의 레짐regime of the heart은, 마음의 작동과 마음가짐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고 조건짓는 사회적 실정성(이념들, 습관들, 장치들, 풍경들)의 특정 배치를 가리킨다. 

2. 이론적 함의

14.2.1. '마음은 행위능력의 원천이다.'라는 명제는 사회적 실천의 원리를 '뇌'나 '의식'이나 '무의식'이나 '신체'가 아닌 행위자의 '마음'에서 찾는다는 입장의 표명이다. 이는 뇌과학, 진화심리학, 현상학, 정신분석학적 관점으로부터 인간 행위를 설명하려는 시도, 그리고 좁은 의미의 합리성으로 사회적 행위에 접근하려는 사회학적 관점(합리적 선택이론)과 명백한 차이를 노정한다. [...] 사랑이라는 행위는 사랑 속에서 샘솟는 기쁨, 불안, 기대, 그리고 사랑의 대상과 펼쳐나갈 삶에 대한 희망, 사랑이 내포하는 무수한 욕망들, 즉 사랑의 마음과 그것의 생산, 표현, 소통, 사용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실정성의배치(낭만적 사랑을 구현하는 제도들과 담론들의 역사적 구성)에 대한 탐구를 요청한다[513쪽.]

14.2.2 우리는 마음을, 발현하는 행위능력이자 실천에 의해 생산/재생산되는 수행적 사건으로 이해한다. 이런 실천학적 접근에 의하면, 마음은 마음의 작동과 구분되지 않는다. 

14.2.3. 행위 원천으로서의 마음은 행위의 규칙/규범으로서의 마음가짐과 변증법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마음을 통한 실천은 반드시 마음가짐의 작용을 전제로 하며, 마음가짐은 마음의 작동에 불가결한 요소를 제공한다. 양자가 이처럼 융합되어 있는 상태를 이 논문에서는 '마음/가짐'으로 표현한다. 이는 행위 능력인 동시에 행위의 규칙으로서, 마음의 사회학의 주요한 탐구대상을 이룬다[514~5쪽.]

14.2.4. 마음은 마음의 레짐 속에서 작동한다는 명제는 마음의 레짐의 정의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마음의 레짐은 상이한 사회적 차원들(이념, 습관, 장치, 풍경)의 이질적 구성으로서, 그 복합작용 속에서 특정 마음/가짐이 생산되고, 표현되고, 소통되고, 사용된다[515쪽.]

Ⅲ. 마음의 행위능력

14.3.1. 마음은 "모든 것이 시작되는 곳"이다(파머, 2012: 43). 사회적 행위는 단순히 육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심화된 실천이기도 하다.

1. 합리성

14.3.2. 행위이건 상호작용(소통)이건 이처럼 기왕의 사회이론은, 행위자를 이해함에 있어서 합리성 모델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제의 일상적 삶에 대한 사회학적 관찰 속에서 행위를 구성하는 중요한 힘으로 부각되는 것은 그토록 중심적인 의미를 부여받아온 합리적 사고와 계산능력이라기보다는, 좀더 암묵적으로 작용하는 복합적 행위능력이다(Kaufmann, 1997: 308) 허버트 사이먼은 실천이론에서 합리성은 언제나 '제한된 합리성'으로 취급했다(simon, 1984). 이 제한은 바로 인간 행위능력의 정서적 성격과 욕망적 성격으로부터 나온다(516~7쪽.]

2. 합정성emotionality

14.3.3. 다수의 사회계약론자들은 소위 '정념의 산술'을 통해서 사회적인 것이 어떻게 감정적인 것에 기초하고 있는지, 환언하면 사람들이 계약을 통해 정치체를 창건하는 활동이 어떤 감정적 기초를 갖는지에 관심을 가져왔다(로장발롱, 1979: 11)

14.3.4. 행위이론의 맥락에서 말하자면 합정성은 사회적 행위가 창발되는 과정에서 관찰되는 감정연관성, 또는 행위자가 자신, 행위 파트너, 행위규칙의 감정적 차원에 부합하여 행위할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된다. 그것은 행위자를 움직이는 정념의 능력인 동시에, 상호작용에서 요청되는 타자들의 감정에 대한 감수성, 해석능력, 판단력, 타인의 위치에 자신을 놓을 수 있는 상상력 등을 포괄적으로 내포한다. 사회적 삶에서 이루어지는 다수의 상호작용과 소통은 합정성을 요청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고, 정치적 운동, 사회적 운동, 종교 행위, 경제 행위에서도 합정성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스미스, 1996; 케인스, 2008: 1991; 달, 2010: 46)

14.3.5. 사회이론의 전통에서 합정성에 대해서 가장 섬세한 고려를 보여준 것은 프래그머티즘이다. 프래그머티즘은 행위능력, 우연성, 미래성, 실험주의 등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다(웅거, 2012: 94~106).  [...] 가령 로티에 의하면 20세기에 접어들어 인권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고, 소위 인권문화가 확장된 것은 인권의 도덕률이 규범적으로 교육된 결과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감정적으로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는 '감정의 조정과 감정교육'을 통해 가능했던 것이다(로티, 1993: 158쪽.)

3. 합의성

14.3.6. 행위능력을 구성하는 의지와 욕망의 힘인 합의성. 행위자들의 삶을 파고들어가보면, 그들의 '생활양식'Lebensfuhrung을 규정하는 욕망의 힘, 소망의 힘, 의지의 힘을 발견할 수 있다(베버, 2010: 214). 베버의 이해사회학이 궁극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것은 자본주의 정신의 원형을 이룬 청교도 윤리가 형성시킨 '마음'의 행위능력들이었다. 영혼의 구원을 향한 열망의라는 합의성, 불안의 합정성, 그리고 '자각적이고 의식적이며 명철한 삶의 영위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합리성에 대한 포괄적인 동시에 심층적인 이해의 과정(베버, 같은 책, 207쪽.)

14.3.7. 행위능력으로서의 합의성은 사회적 행위의 창발과정에서 드러나는 의지 혹은 욕망과의 연관성, 혹은 행위자가 자신과 행위 파트너의 의지적 차원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행위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사회적인 것과 심적인 것을 가로지르면서 활동하는 생산적 역능인 합의성은 꿈의 능력이기도 하고, 희망의 능력이기도 하고, 욕망의 능력이기도 하다. 


Ⅳ. 마음의 실정성

14.4.1. 우리는 마음을 순수한 심적 실체나 기관, 즉 행위자의 내적 소유물로 파악하는 관점에 명확하고 엄격한 제한을 가한다. 사회학이 다루는 마음은 마음의 작동(생산, 표현, 사용, 소통)을 통해서만 현상하는 무엇이며, 사회적인 것과 심적인 것의 독특한 접합 속에서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무엇이다. 마음은 일종의 내면화된 제도로서의 견고한 실정성positivity을 갖는다.

1. 마음의 외밀성

14.4.2. 마음의 외밀성은 개인의 순수한 내면적 현상으로 '체험'되는 동시에, 외부로부터 가해진 힘에 의해 의해 '작동'하는 독특한 이중체로 등장하는 사태다. 마음은 사회를 비추고, 사회는 마음을 규정한다.  사회적인 것과 심적인 것 사이에 형성된 이러한 재귀적 순환의 고리가 바로 마음가짐이다. 뒤르케임이 말하는 '사회적 사실'은 언어, 화폐, 법과 같은 물적 현실에 기초한 제도들과 "고정된 형태를 지니지 않으면서도 똑같은 객관성과 개인에 대한 우월성을 갖는 다른 사회적 사실", 가령 퍠션, 트렌트, 군중의 운동과 같은 유동적인 현실도 포함한다(뒤르케임, 2005b: 4). 그리고 이후에 그는 '집합심리'psychologic collective를 주요한 사회학적 연구대상으로 설정하고 있다(뒤르켐, 2010: 47)

14.4.3. 뒤르켐에게 있어 사회적 사실의 두 가지 속성으로전제되었던 강제성과 외재성 중에서 특히 후자의 의미가 모호해진다. 마음이 사회적 사실이라면, 행위자의 마음은 그의 '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의 '밖'에 있는 것인가? '내부에 존재하는 외부'는, 심적인 것에 스며들어 심적인 것을 자신의 논리로 변형시킨 사회적인 것을 가리킨다[Keck/Plouviez, 2008: 39] 가령 그는 1926년 논문 <도덕적 사실의확정>에서 이렇게 쓴다. "사회는, 그것이 우리에게 외재적이고 우리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명령한다. [...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회는 우리의 내부에 존재한다. 그것은 마치 사회가 우리 안에 있는 것, 사회가 우리 자신인 것과 같다. 이 때문에 우리는 사회를 좋아하고 또 욕망한다."[뒤르켐, 2010: 82]  [...] 사회적인 것은 밖으로부터 안으로 연장되어 우리의 실존 속에서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안과 밖의 경계가 이론적으로 허물어지면, "사회는 개인의식 속에서 그리고 개인의식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안에 스며들고 그 안에서 조직화된다"는 언명이 가능해진다(뒤르켐, 1992: 300; 김홍중, 524~5쪽). 

14.4.4. 결국 가장 내적인 것의 기원이 사실은 외적인 것이며, 행위자에게 고유한 것(정체성)이 사실 외적 힘에 의해 구성되어, 내부와 외부가 뫼비우스의 디처럼 연결된 것일 때, '마음'은 외밀한 것으로 나타난다. 마음의 원리는 외밀성을 따르는 것이다(Miller, 1994). [...] 이러한 점에서 "사회적 사실로 사회적 사실을 설명한다"라는 뒤르켐의 방법적 원칙은 심리적 현상에 대한 설명을 포기하는 언명이 아니다. 도리어, 사회적 사실에 외밀한 방식으로 포섭된 인간의 집합 심리현상을 심리학의 도움 없이 사회학적 방법만으로도 충분히 탐구할 수 있다(마음을 내면이 아닌 사물로 다룰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명이다. 뒤르켐 이래 사회학은 심리 현상들에 대해 내성이 아닌 외성extrospection의 방법, 즉 마음/가짐의 양상들에 대한 다각적 관찰이라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 마음의 외밀성

14.4.5. 마음의 실정성의 두 번째 양상은, 마음이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능력의 원천인 동시에, 그 능력을 생산하는 다양한 사회적 제도와 실천들에 의해서 구성된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마음은 생산된 동시에 생산하는 행위능력, 수행된 동시에 수행하는, 이중의 행위능력이다. 마음은 구체적 실천들로부터 되먹임되어오는, 행위자들에게 부과된 '주체화', '권력작용', 또는 '통치'의 결과물이며, 동시에 이 결과물은 행위자들이 사회적 실천을 수행하게 하는 원동력으로 기능한다. '자기-준거적 이중구성'의 형식은 20세기 후반 사회과학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수행성'의 논리와 상통한다(버틀러, 1997; 알렉산더, 2011).

14.4.6.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이에 대해서 잘 보여주었다. 서구 근대가 '영혼'이라는 단어로 포착한 이 정신적 능력은 푸코에 의하면, 신학적 기원을 갖는 것이 아니라 계보학적 기원을 갖는다. 즉 그것은 특정 권력과 지식의 작용 속에서 영혼이라는 이름, 형식, 이미지, 내용으로 체워진 일종의 '내면적 제도'의 하나로 '영혼의 경제'나 '영혼의 레짐'으로 형성된 것이다[푸코, 같은 책, 195~7). [...] 푸코가 '영혼'이라고 부른 것은 이 논문에서 '마음'이라 개념화하는 심적 창치와 개념적 등가물을 이룬다. 영혼처럼 마음도 사회, 경제, 정치, 문화적으로 구축된다. 마음은 관리되고, 검사되고, 판단되고, 단련되고, 조절되는 통치의 대상이자, 몸/제도/의식/타자와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반복적으로 생성, 소멸, 재생산되는 통치의 결과물이다. 마음은, 마음을 마음으로 구성하는 사회적 실천들 속에서, 마음가짐의 작용을 통하여, 비로소 하나의 현실로서 나타난다. 

Ⅴ. 마음의 레짐

14.5.1. 마음은 구조화하는 동시에 구조화된 구조이다.  행위를 추동하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구조화하는' 심급이지만, 수행에 의해 하나의 일관된 경향(마음가짐)으로 구축된다는 점에서 '구조화된' 심급이다. [...] 마음/가짐을 생산하는 이 사회적 힘들의 배치를 마음의 레짐이라고 부른다.

1. 마음의 레짐의 구성

14.5.2. 마음의 레짐은 마음의  작동(생산, 표현, 수행, 소통)과 마음가짐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고 조건짓는 사회적 실정성들의 배치다. 그것은 이념, 습관, 장치, 풍경의 이질적 요소들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다. 이념, 습관, 장치, 풍경은 모두, 마음이 사회적인 것에 내리고 있는 경험적 닻들이며, 마음/가짐의 사회적 형성과 작동을 규정하는 제도적 앙상블로서, 그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우리가 흔히 '문화'라는 용어로 통칭하는 제반 상징적 도구들이 생성되고 운용되는 공간이 열린다.

14.5.3. 장치는 마음을 생산하는 다양한 테크닉들이 총체를 가리킨다. 사회적 진공상태에서 신비롭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물질적 테크닉들의 보조, 지원, 적용에 의해서 형성된다. [...] 베버 역시 행위와 특정 테크닉들이 결합하는 방식에 대해서 주목한 바 있다. 그에게 테크닉이란 "행위에 사용되는 수단을 총괄하는 개념"이다(베버, 1997: 197). [...] 마음의 레짐에 대한 사회학적 탐구의 첫번째 단계는 장치들의 발생에 대한 탐구이다. 마음의 생산은 장치의 생성과 직결되어 있다. 기왕에 존재하는 마음가짐을 파괴하거나 그것을 변형하거나 대체하는 '마음의 변화'는 구조적 변동이 야기한 '위급상황에 응답하기 위한 중대 기능'을 전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고안되는 장치들의출현을 통해 설명되어야 한다(푸코, 1994b: 299).

14.5.4. 둘째, 습관은 위에서 언급된 방식으로 생산된 마음이 행위자에게 체화되어 형성된 하비투스이 총체를 가리킨다. 부르디외는 행위자의 신체에 배어 있는 육체적 헥시스와 정신적 에토스를 하비투스로 개념화한다. 하비투스는 행위자의 존재에 체화된 지속적이면서도 전환가능한 성향들의 체계이자 실천들의 발생 도식들의 체계이다(부르디오, 1980: 88; 2005: 314쪽.) 장치가 생산해낸 마음/가짐이 사회적으로 효력 있는 힘으로 작용하기 위해서, 그것은 하비투스의 수준에서 습관화되어 행위자의 실존에 각인되어야 한다. 장치가 마음을 생산한다면, 습관은 마음의 사용을 관장한다.

14.5.5. 셋째, 마음은 장치에 의해 생산되고, 하비투스의 원리에 입각하여 운용되는 동시에, 이념에 의해 중요한 소통의 코드를 부여받고,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 이념의 기능은, 장치가 생산하고, 습관에 의해 체화되어 작용하는 마음/가짐에 도덕적 정당성을 제공해주며 이를 공유하는 자들을 통합하고 통합시키는 코드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념은 사상의 형태를 띨 수도 있고, 종교, 사회과학, 학설의 외양을 취할 수도 있고, 때로는 일상적 지식이나 상식의 양태를 빌릴 수도 있다. 

14.5.6. 넷째, 마음의 풍경은 특정한 마음/가짐을 가시적 형태로 드러내는 상상적 표현의 총체, 즉 상상계를 지칭한다. 상상계는 리얼리티의 원리를 넘어서 펼쳐지는 이미지들의 질서이며, 예술, 문학, 영화,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문화적 산물들에 의해 구현되는 집합환상의 차원이다. 마음의 레짐은 단지 마음을 생산하고(장치), 소통시키고(이념), 사용하게(하비투스) 할 뿐만 아니라, 마음이 꿈꾸는 과거와 미래의 소망 이미지를 빚어내는 풍경들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 꿈꾸던 사회나 인간에 대한 판타지, 그리고 다채로운 선망들이 펼쳐지는 문화적 스크린인 상상계에서, 마음은 자신의 풍경을 물질화한다. 

14.5.7. 요컨대 장치는 실천 테크닉들의 체계로서, 그 주된 기능은 마음/가짐의 생산이다. 기술적-제도적 양태를 띠고 있으며 행위자들의 일상적 실천과정에 물질적이고 형식적인 규정력을 행사한다. 

1) 장치에 대한 사회학적 탐구: 푸코의 계보학적 탐구를 활용할 수 있다. 

2) 습관: 성향들의 체계로서 행위자들의 심신에 체화되며, 일상적 실천의 도식으로 구현된다. 하비투스는 마음의 사용을 촉진시키며 적응에 기여하는 주된 기능을 수행. 참여관찰이 적합. 

3) 이념: 믿음의 체계로 정의된다. 행위의 정당화와 소통코드의 제공이 주된 기능이다. 담론의 형식으로 구성되는 경향이 있다. 다차원적 담론분석, 지식사회학적 방법이 원용된다. 

4) 풍경: 꿈과 기억의 푱상들의 체계로서 예술, 문학, 대중문화의 방대한 영역에서 마음/가짐을 표현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이미지의 형태로 주로 구현된다. 문학, 예술 사회학의 주된 방법인 징후해석학적 방법이 유효하다. 

2. 설명 논리

14.5.8. 마음의 레짐의 기능과 발생동학은? 마음의 레짐이 거시적이고 객관적인 사회구조의 압력이나 중대한 사건에 의해 야기된'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행위능력의 생산이라는 기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발생/지속/진화한다고 본다. [...] 문제의 주체는 개인이기도 하고, 가족이기도 하고, 한 조직의 구성원 전체, 특정 장의 행위자들, 민족이나 국가, 혹은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이기도 하다. 제기되는 각종 무넺들에 맞닥뜨려 이들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이는 행위자들의 실천적 삶을 구조적 영향과 강제의 논리를 맥락으로 해서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은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 표현될 수 있는, 논리적 설명모델을 가능하게 한다.

14.5.9. 그림의 상부에 표시된 S(1)에서 S(2)로 가는 화살표 e는 마음의 레짐의 형성, 전개, 진화를 품고 있는, 사회변동의 두 극점을 가리킨다. S(1)이 행사하는 구조적 힘의 작용은 '문제공간'을 매개로 특정 마음의 레짐을 형성시키고, 이 마음이 레짐으로부터 열리는 '행위공간'에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실천들이 펼쳐진다. 이 과정에서 마음의 레짐은 구조적 압력을 문제로 번역하는 문제틀로 기능하는 동시에, 실천을 생산하고 그 실천에 의해 다시 재구성되는 행위의 틀로도 기능한다.

14.5.10. 첫째, 위의 그림에서 S(1)은 사회적 행위자들의 실천을 포괄적으로 규정하는 거시적-객관적 차원, 사회적 파라미터들의 분포'의 형태이다. 즉 사회적 행위에 일정한 강압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조를 가리킨다(Blau, 1974; 김용학, 2003: 70~3쪽.) S(1)에서 s(2)로의 이동은 사회변동의 거시적 전개과정, 즉 산업화에서 민주화로의 이행, 민주화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의 이행으로 적시될 수 있는 구조 변동과정을 표시한다. 

14.5.11. 둘째, S(1)이 표상하는 거시적 차원과 미시적 행위의 차원을 소위 단속/단락short-circuit의 형식으로(무매개적으로) 연결시키지 않는다. 구조의 힘은 언제나 행위자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진행되다가 '사후적으로' 지각된다. 구조와 행위의 두 차원 사이에서 존재하는, 그리고 거기에서 '사건화'와 '문제화'라는 두 중요한 현상들이 발생하는 공간을 '문제공간'이라고 부른다. '사건화'는 구조의 힘이 여러 가지 사건들의 형식으로 행위자들의 삶의 세계에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 '문제화'는 추상적 압력이 야기한 잠재적 문제들이 기존의 문화적 인지구조에 의해 해석되면서, 해결되어야 하는 '과제들'로 지각, 인지, 상징화되는 과정을 가리킨다. 문제의 구성은 문제를 문제로서 걸러내는, 특정 인지구조인 문제틀ploblematics의 개입을 통해 이루어진다. 마음의 레짐이 생산하는 마음.가짐(에토스, 세계관, 집합의식)은 이런 문제틀로 기능하면서 문제공간의 형성에 기여한다. 

14.5.12. 셋째, 행위공간은 이처럼 제기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시도되는 상이한 전략 실천들과 행위들이 펼쳐지는 차원이다.  구조의 힘을 굴절시키는 문제공간과 행위공간은 마음의 레짐을 매개로 연결된다. 마음의 레짐은, 구조가 제기하는 문제를 구성하는 문제틀로 기능하는 동시에 행위를 촉발하는 행위능력의 원천인 마음/가짐을 생산함으로써, 문제와 행위를 접합시킨다. 이때 행위공간은 분화된 실천들이 전개되는 공간이다. [...] 이러한 설명논리는 구조와 행위의 관계설정이라는, 사회이론의 오랜 난제에 대하여 새로운 해답의 가능성을 제안한다. 구조는 오직 다음의 두 가지 유보조건을  전제로 해서만 행위에 결정력을 행사한다. 

1) 구조의 객관적 힘은 문화의 구성적 개입(문제공간)에 의해 불가피하게 제한되어 '굴절'된다. 즉 구조는 문화가 발휘하는 이 구성력의 제한 속에서만 행위에 영향을 준다. 

2) 구조의 압력하에서 생산된 문제에 대해 오직 하나의 주요한 행위패턴이 일의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지적-정서적-의지적 능력(마음)에 기초한 다양한 선택에 의거해서, 복수의 행위가능성이 각축하는 행위공간이 열릴 수 있다. 마음의 사회학은 S(1)에서 S(2)로 나아가는 구조변동과정에 이중의 굴절논리를 개입시킨다. 모든 객관적 문제들이 중요한 문제로 인지되는 것이 아니듯, 지배적 마음의 레짐이 유일한 행위패턴을 선험적으로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여러 문제유형이 존재하는 것만큼 마음의 레짐들은 복수로 존재하며, 또한 그런만큼 다양한 행위패턴들이 존재할 수 있다. 

13.4.14. 넷째, 위의 그림에서 S(2)는, S(1)이 변동을 겪어 새롭게 형성될 것으로 예상되는 새로운 구조를 지칭한다. 마음의 사회학은 문화(마음)의 힘에 기초한 실천들로부터 사회구조의 변화가 도래한다는 인과적 상호관계의 설정을 유보한다. 실선으로 남게 된 d는, 구조의 변동을 행위의 결과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마음의 사회학이 스스로에게 제한한다는 표식이다. d의 여부를 미리, 선험적으로 또는 규범적으로, 아니면 희망적으로 상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d의 여부에 대해서는 실선으로 그 가능성을 열어놓는 대신, 마음의 사회학적 탐구의 주된 관심을 다음의 두 질문에 대한 해답에 전략적으로 국한시키고자 한다. 

1) '구조의 힘이 어떻게 문제공간을 매개로 특수한 마음의 레짐을 형성시켰는가'라는 질문, 즉 <a->b>의 과정에 대한 질문 : 마음의 레짐은 종속변수. 

2) '어떤 마음의 레짐이 특수한 행위 공간을 열었는가'라는 질문, 즉 <b->c>의 과정에 대한 질문: 마음의 레짐은 독립변수

결국 마음의 사회학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1) 구조적 변동이 야기한 마음의 변화와, 2) 마음이 야기한 행위의 가능성이다. 그래서 행위 공간에서 새로운 구조의 형성으로 나아가는 소위 구조화(기든스)의 가능성(d)에 마음의 사회학은 매우 신중한 이론적 입장을 취한다. 불가능과 가능의 확정할 수 없는 미래가 실선에 의해 표상되고 있기 때문에 도리어 그 실선은 인간 행위의 미래에 대한 열린 희망을 상징할 수 있다.